Call of the Spear RAW novel - Chapter (354)
낭선기환담-353화(354/600)
낭선기환담 – 2부 63화
“흠….”
문무궁에 출근한 천범은 상석에 자리해 생각에 잠겼다.
문무관장으로서의 소임은 대강 감이 오기 시작했기에 딱히 어려운 일이 없다.
문무선들에게 가르침을 내리고 이따금 그들을 위한 시험을 내주는 것으로도 충분할거다.
지금만 해도….
“정말이십니까? 이게 정답이 아니라고요?”
어제 낸 시험 문제의 정답을 알아내 기세등등했던 문무궁 하관들도 범이 절반만 맞았다 하니 다시금 머리를 싸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정형파각은 보았어도 신검합일을 못 보았다면 절반만 맞은 거지.’
그들은 다시 여러 형태로 시험지를 찢어보고 다시 맞춰보고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아무튼.
‘큰 어려움은 없다.’
몇몇 고참 천무선들이나 천문선들이 텃세를 부린답시고 자존심을 내세우기는 하나 신경 쓸 정도도 아니다.
그 윗대가리인 사천장에 속하는 이들 또한 마찬가지.
양천들처럼 개망신 당할까 두려워 툴툴거리는 것이 다다.
그렇기에 문무관장으로서의 맡은 바 소임을 다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이제 남은 건….’
틈틈이 자기 자신을 위한 수행을 이어나가는 것.
그리고 사씨 가문을 오대세가의 반열에 앉혀 놓는 것.
‘주약과의 내기도 있고, 곤가와 후가의 약조도 있구나.’
할 일이 태산과도 같다.
그 외에도 몇 가지 걸리는 것들도 많은 편이니….
“우 무선. 자네에게 몇 가지 물어 볼 것이 있는데 괜찮나.”
“말씀하십시오.”
“대천무장께선 어느 성씨를 쓰고 있는지 알고 있나?”
“주씨 성을 쓴다고 알고 있습니다.”
주씨.
‘원신의 이름도 주약이었고….’
그녀가 내준 시녀도 주결경이다.
허나 주씨 세가라는 이름은 언뜻 들어본 적도 없다.
“주씨 세가는 어떤 곳인가.”
“흠, 주씨 세가는 옛부터 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가문입니다. 저도 아는 것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런가.”
“한데 그건 왜 물으시는지요. 필요하시다면 알아봐 올 수도 있습니다.”
“아니, 됐네. 그냥 신경 쓰이는 일이 있어서… 생각해 줘서 고맙네.”
대천의 자리에 앉아 있음에도 그 녀의 힘은 절대적이지 않다.
가문들의 뒷배에는 원선태사가 존재하고 그녀는 그들을 대신해 수궁을 돌보는 자일 뿐이다.
하니, 여러 가문들의 암중 공작을 알고도 눈감고 있을 수밖에 없다.
천범에게 곤사비를 보낸 것 또한, 그러한 사정 때문이리라.
‘가문이 권세가 너무도 드높군.’
수계는 넓고 가문은 많다.
허나 그들 중에서도 원선태사를 보유한 셋의 가문의 힘은 막강하기 그지없다.
우씨 세가.
미씨 세가.
지씨 세가.
수계의 실세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이니… 이 셋 중 하나가 곤가를 공격한 가문이리리라.
‘팽가도 빠뜨릴 수는 없지.’
원선을 보유하고 있지 않다고는 하나… 거사에 가담했던 가문이다.
용의선상에서 배제할 수는 없는 법.
“관장 어른.”
“…뭔가.”
“이 서류를 봐주시겠습니까.”
돌연 팽가연이 큼직한 서류뭉치를 들고 와 범의 탁상에 내려놓았다.
“이게 뭔가.”
“문무궁에 입적하고 싶다하는 자들입니다. 이전에 관장께서 돌려보낸 자들인데 제대로 된 서류를 작성하여 보낸 것이지요.”
“….”
슬쩍 들춰보니 정말이다.
인적사항이나 자신의 호적, 포부 등등을 써놓아 올린 자기소개서였다.
“본래 두 배는 더 많았으나, 제 선에서 절반은 걸러 두었습니다.”
“무슨 기준으로 그러했는가?”
“품성과 자질, 그리고 문무궁에 대한 이해도를 가려 추렸습니다.”
가문을 보고 그러했으면 따끔하게 혼을 내려 했으나 그렇지 않았다.
‘의외로 일을 잘한단 말이지.’
마음에 안 들기는 해도.
“근데 문무궁에 일손이 필요한가?”
굳이 더 뽑아야 할 일유가 없기도 하다. 지금만 해도 할 일없이 놀고 있는 자들이 태반인데, 여기서 일손을 더 뽑는다 하여 무슨 이득이 있나.
“본래 이들은 문선과 무선 가릴 것 없이 사천장의 아래에 있는 부대원들입니다. 이들을 받아 문무궁의 이름을 딴 문무부대를 만들어 실적을 내게 된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요.”
“허나, 문무관장의 직책 자체가 문선과 무선을 가릴 것 없이 더 원활한 수행을 위하고 수선의 질을 높이는 것에 있다. 그런 내가 문무궁에 부대를 만들게 된다면 다른 문무선들의 수행을 봐주는 것이 그만큼 어려워.”
그리고 그것을 대천장들이 허락을 해줄지도 잘 모르겠다.
“상소문을 올려볼까요.”
“상소문?”
잠시 고민하던 천범은 이내 고개를 젓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침 잘됐다.”
대천무장에게 묻고픈 것이 여럿 있으니 그냥 만나러 가면 되는 것 아니던가. 왜 이런 간단한 문제를 고민했는지 모르겠다.
“좋은 생각이라도….”
“대천무장을 만나러 가야겠다.”
“따르겠습니다.”
팽가연과 우명이 뒤따르고 문무궁의 하관과 궁녀들이 배웅한다.
곧장 길을 거니니 힐긋 힐긋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진다.
“대천궁은 어딘가.”
수궁이 워낙 넓고 크다 보니 아직도 길을 다 외우지 못했다.
이내 부관들의 안내를 받아 길을 거니니 경비병들이 지키고 있는 전송진에 도착했다.
“신분을.”
“종 4품 문무관장 어른이십니다.”
“확인했습니다.”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있던 경비병도 품계와 직책을 듣더니 미소를 머금으며 답한다.
“저도 항간에 퍼지는 관장 어른의 문제를 풀어보고 있습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하하, 그런가. 열심히 하게.”
어깨를 두들겨주고 전송진을 이용하니 단번에 거대한 궁궐이 모습을 드러냈다. 대천궁이었다.
“저 경비병이 웃는 건 처음 봤습니다. 문무관장의 유명세가 궁내에 파다하다더니… 거짓은 아니었어요.”
팽가연이 신기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건 범도 그렇긴 했다.
갑자기 친한척하니 조금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나쁜 기분은 아니다.
점점 수궁에 일원이 되어가고 있다는 뜻이겠지.
“여기가 대천궁인가.”
“예. 그렇습니다.”
허나 대천궁에는 그들 말고도 많은 수선들이 모여 있었는데 그 줄이 말도 안 되게 길게 이어져 있었다.
최소 삼백 명은 되어 보이는 줄이다.
“이 자들은 뭐지?”
“모두 대천의 문장과 무장을 만나고자 하는 자들일 겁니다. 통천수궁의 대소사는 모두 대천궁에서 결제가 이루어지고 있으니까요.”
“나도 기다려야 하는 거지?”
“당연히 그렇습니다.”
이건 생각 못 했다.
“보통 얼마나 기다려야 하지?”
“짧으면 하루, 길면 한 달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미친.’
욕지거리가 자동으로 튀어나온다.
보통 방법으로는 대천무장을 만나기란 쉽지 않을 듯하다.
그녀의 말은 사실인 듯, 기다리던 수선들 중 몇몇이 교대하는 모습이 보였다.
아마 저렇게 며칠을 기다려 대천장과 대면하는 듯 했다.
‘내가 저렇게까지 만나야 할 이유가 있는 건 아니지.’
헛걸음했다.
미리 알았다면 오지 않았을 것을.
아쉽지만 상소문만 올리는 걸로 하고 나머지는 다음 기회다.
“돌아가자.”
“그냥 가십니까?”
“그리 급한 일도 아니고, 급하다 해도 바로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니니 다음으로 미룰 수밖에 없지. 그렇다고 저 긴 줄을 서며 한 달을 내지 기다리기만 할 수도 없지 않은가.”
그러자 팽가연과 우명이 시선을 맞추더니 의아함을 감추지 못한다.
“허나 관장 어른은 종 4품의 품계를 지닌 궁내 수선이십니다. 저들과는 다르니 오래 기다리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그런 건가?”
“예, 저들은 궁외 수선들이니 당연히 순번이 오래 있는 것이고, 저희는 궁내 수선이니 다른 순번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그랬으면 진작 그렇다고 말을 할 것이지….
잠시 후.
대천궁에 들어갔던 팽가연이 나오고 천범에게 안내했다.
“들어가시면 됩니다.”
궁외 수선들의 여러 시선들이 천범의 등을 찔렀다.
가볍게 무시하고 궁녀들의 안내를 받아 대천궁으로 들어가니.
“대천무장을 뵈옵니다.”
상석에 앉은 대천무장과 다른 수선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요새 한창 유명세를 타고 있는 문무관장이로군요. 그대가 문무선들에게 보낸 문제는 저도 보았습니다. 즉석에서 그려낸 것 치고는 담긴 것이 많아 꽤 놀랐답니다.”
“보잘 것 없는 재주일 뿐입니다.”
“그게 보잘 것 없는 것이라면 아직도 풀어내지 못하는 궁내의 문무선들 모두가 그보다 못한 게 되니 그 말은 거두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리 말하니 주변 수선들의 입가에도 웃음꽃이 피어난다.
그들은 범도 잘 알고 있는 자들이 섞여 있었는데.
‘교청….’
그와 안면이 있는 교씨 세가 교청과 무도전에서 보았던 후씨 세가의 수선들이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제 동생 녀석이 신세를 졌다 들었는데… 지금 보면 고배를 먹을 수밖에 없었더군요. 상대가 자그마치 문무관장이었으니.”
그는 후씨 세가의 장남.
현 후씨 가주인 후마였다.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범과 겨루었던 막내아들인 후해는 볼록해진 얼굴로 말없이 고개만 꾸벅 숙였다.
‘막내 놈은 몰라도 그나마 장남이 걸출하니 걱정 안 해도 되겠네.’
천범에게 한대 맞고 나가떨어진 막내와는 달리 장남인 후마는 얼굴이 헌앙하여 후씨 세가는 곤가와는 달리 큰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겠다.
“그러고 보니 문무관장의 본신도 범이지 않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그럼 그 핏줄 또한 후씨 세가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예?”
“모르셨습니까. 후씨 세가는 문무관장과 같은 궁호의 피를 이은 가문입니다. 본신도 그대와 같은 뿔과 날개를 지닌 범이지요.”
범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미처 생각지 못했다는 얼굴이다.
‘하긴, 궁비호의 시조 또한 등선에 성공했다 들었으니….’
수계에 그 가문도 당연히 남아 있을 수 있었다.
“후씨의 핏줄인 수선들은 그럼….”
“뿔과 두 쌍의 날개를 지녔습니다. 하하, 문무관장과 저희는 아마 먼 친척뻘 되는 사이일지도 모르겠군요.”
후마가 이런 인연이 다 있나 하며 기분 좋게 웃었고, 후해는 질색하는 듯 얼굴을 구겼다.
“한데 문무관장은 무슨 일로 찾아오셨을까요.”
대천무장이 그리 묻자 천범이 호흡을 가다듬고 주변을 보았다.
그러자 눈치 좋게 교가와 후가의 수선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무관장, 다음에 후가에 한 번 찾아와 주십시오. 옅다고는 하나, 같은 선조의 피를 이어받았으니 남이라 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아버님에 대해 묻고픈 것도 몇 가지 있으니 말입니다.
후마는 은밀히 전음하고는 후해와 함께 사라졌다.
교청 또한 은근한 눈빛을 보내고는 물러났다.
“하여, 무슨 일입니까.”
“대천께서 선물한 것이 제게는 너무 부담스러워 이렇게 찾아뵈었습니다.”
“많이 부담스럽던가요? 결경이 그 아이가 그렇게 손이 많이 가지는 않을 텐데요.”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기에 말없이 바라만 봤더니 피식 웃는다.
“알고 있습니다. 곤가의 여식 때문이라는 걸.”
“그 아이의 사정이 딱하기는 하나, 전 제 한 몸 건사하기도 벅찹니다.”
“그런가요, 제가 보기엔 그 정도 짐은 이게 해도 괜찮을 것 같던데….”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이유?”
“어째서 저입니까.”
“그건 본인이 더 잘 알고 있을 거 같아요. 곤 가주에게서 받은 게 있다면 그 정도는 해주어야죠.”
이내 범의 낯이 딱딱하게 굳었다.
“저만 알고 있으니 걱정할 것 없답니다. 곤사춘. 아니, 곤 가주는 영민한 자였죠. 하나뿐인 딸을 끔찍이 아끼는 자였고, 혹시나 자신이 죽었을 때를 항상 대비하던 자였습니다. 하여 영화비의 위치를 알 수 있는 비술을 창안해 제게 알려주었죠.”
거기까지 알고 있다면 할 말이 없다.
“아마 사비를 노리는 자들은 영화 비의 행방을 찾고 있을 겁니다. 문무관장이라면 잘 해낼 수 있겠죠. 영화비를 받았다면 곤 가문만의 비전과 비술도 넘겨받았을 테니.”
“거기까지 아시면서도 어려우신 겁니까.”
그녀는 대천무장이다.
원선태사를 제외하면 수계의, 수궁에서 제일 높은 위치에 있는 직책.
그런 그녀가 나서서 응징은 무리라도 보호 정도라면 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천의 자리는 어디까지나 수계를 위한 자리입니다. 게다가… 얼마 전 줄곧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원선태사 중 하나인 지란위께서 나타나셨으니 지씨의 위세는 하늘을 찌르고 있는 중이지요. 괜한 분란을 일으키면 수계는 그야말로 난장판이 될 것이고 선살전을 치르기도 전에 내분으로 엉망진창이 될 겁니다.”
“그렇다 해도….”
“사사건건 오대세가의 방해를 하면 저 또한 어떻게 죽게 될지 모르죠. 제가 죽으면 혼란은 가속화되어 수 계의 질서는 엉망이 될 것입니다.”
대천무장은 상석에서 일어나 천범의 손을 꼬옥 잡았다.
“하니 문무관장이 절 도와주세요.”
애절한 그녀의 눈빛에 천범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답했다.
“그럼 제게 뭘 주실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