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ll of the Spear RAW novel - Chapter (407)
낭선기환담-406화(407/600)
낭선기환담 – 2부 116화
“나는….”
길 잃은 아이 같은 모습이었다.
환망선사 또한 본래는 범인이다.
고되고 모진 세월을 견뎌 신의 반열에 오른 자가 아니던가.
그러니 천범은 이해했다.
누구보다 십분 이해했다.
완전무결한 존재는 없다.
제 아무리 위명을 떨쳤던 자라도 저리 방황하는 모습을 보일 수 있다.
‘다른 수선이라면 어땠을까.’
불멸에 가까워지기 위해 수행하는 것이 바로 수도이다.
비록 마겁을 받아 마기가 몸 안에서 날뛴다 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이고 마선이 된다면 목숨을 부지하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다.
허나 그럼에도 자결을 택한 것은 뚜렷한 신념이 자리 잡았기 때문이리라.
“여지껏 버티며 살아온 것이 자결하기 위함이 아니지 않습니까.”
환망의 눈동자는 파도가 지나간 자리처럼 휘청거렸다.
언젠가 모든 것은 죽어 없어진 다지만 죽기 위해 사는 존재란 없을 터.
환망 또한 선조들을 기리고 후인들을 위해 여태껏 버티고 인내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응당 사내라면 자신의 대도를 펼치고 싶은 게 마땅하다.
“장천은 당신이 떠난 뒤에 자주 입버릇처럼 말했습니다. 자신이 걷는 길이 그분의 걸음걸이에 누가 되지는 않을까 기대에 못 미치지는 않을까를 생각하며 한걸음 한 걸음을 소중히 하고 조심히 한다고요.”
천범은 그리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 문 앞으로 걸어갔다.
“당신은 많은 이들이 마음에 품었던 동경의 대상이었습니다. 저 또한….”
끼이익, 탁.
범은 그대로 방문을 닫고 나왔다.
“어디로 향하십니까.”
문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연아다.
“암곡장에 다시 한번 가 보려 한다.”
“거길 다시요?”
“아무래도 가 봐야 할 것 같구나. 연아 넌 그를 좀 지켜다오.”
밖에 있었다지만 딱히 금제를 걸어둔 것도 아니고 결계를 친 것도 아니라 이야기를 대강 들었을 것이다.
“잘 지키거라.”
“알겠습니다. 염려마시고 사부님은 편히 일 보시고 돌아오세요.”
언제 이리 듬직해졌을까.
그나마 연아가 있어서 한결 마음이 놓인다.
한숨을 푹 내쉬고 객잔을 나온 천범은 곧장 암곡장으로 날아갔다.
‘수서부터 찾아야 해.’
환망이 여태껏 자결하지 못한 이유는 자신의 뒤를 이어 올라올 후인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믿을 만한 놈이 근처에 없었기에 탈의 선조들이 남긴 보물을 숨겨 두고 손에 쥐고 있어야만 했다.
허나 천범이 나타나 길이 달라졌고 그에게 맡기고 자결하려 했으나 범은 그것을 원치 않았다.
“암곡장에 간게 신의 한수였군.”
환망을 구하기 전에 암곡장의 접목 경매에서 공법서들을 훑어보던 중 마기를 이용하여 수행할 수 있는 공법을 보았다.
대충보고 지나간 터라 일단 꼼꼼히 살펴봐야 할 일이지만 그래도 희망이 남아 있음은 변하지 않다.
‘그가 죽는 것보다는 낫다.’
마겁을 받아 전신에 마기가 침식했다면 그것을 이용하는 공법을 주공법으로 하여 수행하면 될 일이다.
물론, 환망은 바보가 아니니 그런 공법이 있었다면 진즉 찾아내 수행하고 있었을 것이다.
불노장생을 꿈꾸는 것이 대다수인 수도자들에게 자결이 웬 말이던가.
몰랐으니 그랬을 것이다.
대다수의 일은 무지에서 비롯된다.
천범도 그런 공법이 있다는 것을 보기 전에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금색의 둔광을 뿌리며 단숨에 암곡장으로 날아가는 천범은 하늘의 낌새가 이상하다 느꼈다.
뭔가 싶어보니 하늘 한켠에 이질적으로 생겨난 운무와 먹구름이 사방 천지에 요동치고 있었다.
“누가 싸우기라도 하는 건가.”
환계가 펼쳐져 있어 그런지 큰 소리는 나지 않았으나 강력한 기류들이 부딪치고 있음은 알 수 있었다.
잠시 하늘을 바라보던 천범은 이내 고개를 내젓고 둔광을 뿌렸다.
“저런 것에 한눈팔고 있을 때가 아니지.”
환망의 마음이 바뀌어 목숨을 끊기라도 하면 낭패다.
어서 빨리 공법서를 찾아주고, 여유가 된다면 환망과 함께 팔아넘겨진 노선을 사들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에게는 살아가야 할 목적을 눈앞에 보여주는 게 급선무이니.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죽으려고 마음먹은 자가 흔들렸다 한들 그게 언제까지 유효하겠는가.
급한 마음처럼 범은 둔술을 극성으로 운용해 암곡장으로 향했다.
암곡장은 여전히 얼굴을 모호하게 가린 수선들로 붐볐다.
틈바구니에 끼어 묘운기에 손을 가져다 대니 단번에 경매 품목들이 주르륵 눈앞에 드리웠다.
천범은 속으로 마기를 거듭 되뇌며 수많은 수서들을 탐독했다.
너무 많은 정보가 머릿속으로 쏟아져 두통이 일었으나 이전의 기억을 더듬으니 찾아낼 수 있었다.
“찾았다.”
얼핏 봤던 거라 긴가민가했는데 아직 남아 있어서 다행이다.
역시 마기에 관한 수서라 그런지 장부를 살펴봐도 경매에 입찰한 사람이 없었다.
천범은 웃돈을 얹어서 즉시 수서를 구매했고, 혹시나 싶어 노선들을 살피니 어렴풋이 남아 있는 그의 기억 속에서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다.
‘이 자들이군.’
수백 년간 환망을 괴롭힌 자들이다.
기억하기로는 넷 정도였던 것 같은데 확실히 기억나는 건 둘이다.
가격도 얼마 하지 않는다.
“원근 한 냥이면 그렇게 부담스럽지도 않아.”
환망이 그럴 성격은 아닐지 모르나 막상 자신을 노예처럼 부리던 수선과 입장이 뒤바뀐다면 기껍지 않을 리 없다.
지금은 그리 여린 면모를 보이고 있으나, 사실 그는 누구보다 굳건한 신념과 대도를 나아가는 자이니.
천범은 기분 좋게 값을 치렀다.
증서를 받아들고 물건을 받으러 기다리고 있으니 갑자기 주변이 웅성웅성 소란스러워졌다.
“무슨 일이냐!”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바깥에서….”
바깥?
바깥이 뭐 어쨌다는 것일까.
기다림이 길어지자 자연스레 짜증이 치솟는다.
수선들의 웅성거림으로 귀는 시끄럽고, 기다림이 길어지니 인내심과 차분함을 잃어만 간다.
그리고 바로 그때였다.
“아.”
콰아아앙!!
어느 수선이 뱉어낸 외마디 탄성과 함께, 특수한 구름으로 만들어진 외벽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폭음이 발생하고 연쇄적으로 운벽이 무너져 내리니 수선들은 혼비백산하여 사방으로 흩어졌다.
“비, 비켜!!”
“향선의 기운입니다! 모두 피해!”
“아, 악곡종은 뭘 하는 겁니까!”
“꺄아악!!”
예기치 못한 상황에 악곡장을 운영하는 악곡종 수선들은 어쩔 줄을 몰라 했고 덕분에 이곳을 이용하는 손님들만 애꿎은 사고를 당하게 생겼다.
‘좋지 않은데….’
본래는 이곳에 쳐져 있던 결계 때문에 알지 못했으나, 그것이 충격으로 지워지자 확실하게 느껴졌다.
악곡장에 자리한 수선들은 산전수전 다 겪은 수천, 수만 년을 살아온 자들이니 웬만한 일로는 놀라지 않는다.
한데 저리 혼비백산하며 달아나려 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당연히 피부를 찌르듯 뿜어내는 향선의 살기 때문이었다.
‘잘못 말려들면 죽는다.’
모두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리라.
본래라면 자신 또한 황급히 줄행랑을 치는 게 맞다.
본신도 아니고 더군다나 나약한 화신이니 당연하지 않은가.
그렇다고 화신이 망가진다고 해서 아무렇지 않은 것도 아니다.
본신의 화정으로 구축한 화신이다.
이 몸이 망가진다면 본신에도 적잖은 피해가 가게 되니 평소보다 더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문무선들이나 부관들이 물가에 내놓은 어린아이 보듯 자신을 그리 보지 않았던가.
허나 천범은 그런 생각과 다르게 한숨을 내쉬며 손가락으로 이마를 툭툭 두들겼다.
그도 그럴 게, 암곡장의 벽을 부수고 처박힌 사내가 익히 알고 있는 자였기 때문이었다.
“탐랑.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천범의 발아래에 처박혀, 머리가 보이지 않는 사내는 충계에서부터 함께한 탐랑이었다.
탐랑은 무너진 운벽 파편 속에서 머리를 털어내고 천범을 쳐다봤다.
그의 표정에서 언뜻 반가움이 내비쳤으나 그것은 이내 불편한 감정으로 순식간에 뒤바뀌었다.
“난 충계를 벗어나 수계에 당도하여 꽤 많은 것을 배웠지. 이전에는 뭐든지 혼자서 했다. 혼자 살아가며 혼자 사냥하고 혼자 수선의 길을 걸었지.”
갑자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릴 하는지 모르겠다.
천범은 갑자기 저런 얘기는 왜 꺼내는지 의아해 잠자코 있었다.
분명 저러고 있을 때가 아님을 알고 있음에도 서두를 던진 이유가 있으리라.
“허나 너와, 그리고 네 먹이들과 함께 지내며 깨달았다. 살아있는 것은 홀로 살아갈 수 없다. 홀로 살아간다 착각하는 것뿐이지.”
탐랑은 단번에 일어나 의복을 털고 천범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난 혼자가 아니다. 내게는 작은 먹이. 네가 있다. 그게 참 반갑다.”
“무슨 개소립니까 그게.”
“우린 일심동체라는 뜻이지.”
“그건 그렇게 쓰는 말이 아닙니다.”
“아니, 맞다. 우린 하나다!”
상황을 보아하니 왜 이러는지 대강 알 것 같다.
“상대는 누구며, 몇입니까.”
“둘, 누군지는 모른다. 건방진 놈을 한 놈 죽였더니 다짜고짜 공격하더군! 억울하다! 악은 저놈들이다! 난 선하다!”
그동안 문무선들과 함께 지내며 탐랑도 충선의 티가 많이 벗겨졌다.
충계에서 선과 악은 없다.
약자와 강자만 있을 뿐이다.
그것을 당연시 하던 탐랑이 악을 논하니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다.
“둘이라….”
향선이 둘.
그러니 탐랑이 밀리고 있는 거겠지.
언뜻 보기에 생채기가 조금 많은 상황이었으나, 나름대로 잘 싸우고 있었는지 큰 상처는 없다.
“탐랑, 잊어버리신 것 같은데 저는 화신입니다.”
“무얼, 난 알고 있다. 너의 그 더러운 세치 혀라면 힘을 쓰지 않고도 놈들을 농락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아. 네놈의 힘은 주먹이 아닌 혀다! 그 혓바닥이란 말이다!”
욕인지 칭찬인지 모르겠다.
허나 슬슬 장난기는 빼야 할 것 같다. 싸우기를 좋아하는 탐랑도 제 목숨 중요한 줄은 안다.
그렇기에 이리 비굴한 듯 아닌 듯하며 도와 달라 하는 것 아닌가.
‘난감하군.’
화가 잔뜩 난 향선 둘을 어찌 화술로 구워삶을 수 있을까.
대체 어떤 언변을 구사해야할까.
천범은 자신이 없었다.
괜시리 이럴 때 화술에 능통했던 한 놈이 생각났다.
‘유정이라면 어찌했을까.’
잠시 생각해봤으나 답이 나오지는 않았다.
어떻게든 했겠지라는 의미 없는 답변만이 머릿속에서 메아리쳤다.
잠시 눈을 감고 생각을 정리한 천범은 이내 주변을 돌아보았다.
충격으로 무너져 내리는 암곡장.
그리고 탐랑이 그것을 막아내며 끼친 주변의 여파로 매물을 건네 주는 장소가 박살났다.
탐랑은 자신이 깔아뭉개고 있던 어느 수선을 몇 번 밟고는 걷어찼다.
암곡장에서 경매품을 정리하여 나누어주던 수선이다.
천범의 눈이 그 수선이 지닌 여러 개의 공정강으로 닿았다.
그는 순식간에 공정강 수십 개를 소매 속에 넣고는 점점 가까워지는 향선들의 기운을 향해 포권했다.
“수계에서 오랜 세월을 거닐어 당도한 통천수궁의 문무관장 천범입니다! 날 해하는 것은 수계와 척을 지는 것이고 수계와 척을 진다는 것은 앞으로 다가올 선살전에서 마선과 손을 잡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쩌렁쩌렁 울려 퍼지는 천범의 목소리에 회장에 적막함이 감돌았다.
그리고 이내, 운무 사이로 표정이 좋지 않은 사내 둘이 나타났다.
“통천 수궁?”
“수계?”
인상이 험상궂고 얼굴에 흉터가 많음은 물론, 차림새가 산적과도 같은 모습을 한 향선 둘이다.
현무성에서 저런 거지꼴을 하며 왈패처럼 다니는 자들을 천범은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을 향해 힘껏 포권한 범은 다시 한번 자신을 소개했다.
“수계를 대표하여 선계로 찾아온 사신 천범입니다. 강건한 기운으로 보건데 현무성에 자리한 삼 대 종파들 중 가장 대범하다는 악곡종 장로님이 아니실런지요.”
범의 말이 끝나자 악곡종의 장로 둘이 피식 입꼬리를 올리고 답했다.
“수계를 대표하여 왔다 하였소.”
“그렇습니다.”
“그걸 어찌 믿지?”
“믿지 않으시면 지금 당장 제 목을 쳐보시는 것은 어떻습니까.”
당돌하기 짝이 없는 말투다.
“하라면 못 할 것 같은가. 감히 향선들의 일에 상선이 나서다니!”
“네놈이 진정 수계 사신단의 대표라 할지라도 우리 악곡종의 앞을 막는 자는 그 누구라도 처단할 뿐이다!”
버럭 내지르는 목소리엔 향선의 기운이 짙게 깔려 무릎이 털썩 꺾일 것만 같았다.
허나 천범은 지지 않고 말했다.
“그리하시면 악곡종은 마선뿐만 아니라 수계까지 적으로 돌리게 될 겁니다.”
그의 말 한마디에 향선들의 인상이 와락 찌푸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