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ll of the Spear RAW novel - Chapter (408)
낭선기환담-407화(408/600)
낭선기환담 – 2부 117화
여지껏 범이 지켜본 혼선들은 안하무인인 자들이 많았다.
그것도 혼선 나름이겠으나, 그들의 특징적인 부분이 있다면 바로 대부분 피부가 쉽게 붉어진다는 것.
그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법혈.’
그것의 반증이다.
때문에 쉽게 흥분하는 단순한 사고방식이 크게 두드러진다.
말이 통하지 않는 작자들이라 볼 수도 있으나, 천범은 그것을 십분 이용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아무리 법혈로 머리에 피가 솟았다 할지라도 기본적으로 수천 년은 살아온 경험이 있는 자들이다.
지금만 해도 수계를 대표하여 왔다 하니 잠시나마 멈칫하지 않았는가.
적어도 희망이 있는 소리다.
“우리가 그 말을 어찌 믿지?”
“믿으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감당하실 수 있겠느냐 물었지요.”
“감히 악곡종 장로를 협박하는 건가! 수계의 사신이라도 이런 무례함을 우리가 참을 성 싶은가!!”
“그럼 제가 어찌하면 믿겠습니까. 저희는 방금 처음 보았고, 어떠한 증거를 내밀어도 장로님들은 저의 신분과 그리고 수계와의 관계까지 의심하게 될 것입니다. 의심이란 게 그렇지 않습니까. 한 번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이 번지는 역병과도 같으니까요.”
역병.
그래 역병이다.
저들은 역병에 걸려 있다.
하면 그것을 잠재우기 위해서는 극약을 처방함이 옳다.
저들에게 극약이란 무엇일까.
“역병이라, 재밌는 표현이군. 하면 우리의 역병을 잠재우기 위해 수계의 사신이라 칭하는 자네는 우리에게 어떤 처방을 내릴 것인가?”
“철 장로! 고작 상선이 하는 말에 귀 기울일 것 없습니다! 저놈이 진정 수계의 사신인지 아닌지도 모를 뿐더러 놈의 곁에 있는 향선은 충선으로 수계와 연관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악연뿐일 겁니다!”
그러자 곁에 선 탐랑이 은근슬쩍 범에게 눈짓한다.
-난 작은 먹이를 믿고 있다.
-그 입 다물어 주십시오.
-그래서 입 다물고 전음중이다.
천범의 미간이 확 찌푸려졌다.
짜증나게 틀린 말은 아니다.
그래서 울컥 화가 치솟는다.
‘참자.’
참는 자에게 복이 오나니.
“이자의 태생이 충선이기는 하나, 지금은 수계에 몸을 담은 수선입니다. 저를 보좌하기 위해 저와 함께 수계에서 이곳 현무성까지 당도한 사신의 일원이죠.”
“그걸 우리가 어찌 믿….”
믿느냐라 하려던 악곡종 장로는 이내 천범이 앞서 말한 역병과도 같다는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역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의외로 약보다는 환경이 중요할 때가 많죠. 우선은 자리를 옮기지 않겠습니까. 제가 알기로 이곳은 악곡종에서 운영하는 암장이라던데, 이렇게 잘 만들어진 암장을 망가뜨리고 싶으신 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리 말하며 천범은 자신의 손에 들려 있던 공정강을 그들에게 전했다.
“이건 뭔가.”
“악곡장의 경매품들입니다. 때를 틈타 누군가 훔쳐가려하기에 제가 저지하고 빼앗은 것이죠.”
흠칫 놀란 장로들이 공정강을 들여다보자 범의 말대로였다.
악곡장은 악곡종의 수입에 대부분의 비율을 차지하는 상업이다.
그것 때문에 암장이 피해를 입어 화가 잔뜩 나 있었는데, 경매품들이 모조리 담긴 공정강을 건네주니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뿐이다.
장로들이 내심 안도하는 모습을 보이자 천범의 입가가 올라간다.
“저희는 악곡종과 척을 지고 싶지 않습니다. 저희 사신단은 현재 인선과 혼선의 파벌 중 한곳을 택해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띠고 있습니다. 비록, 저희 보좌관이 실수를 범했으나 저는 이 참사가 오히려 서로의 관계를 굳건히 할 수 있는 연결고리가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범의 말에 악곡종 장로들은 입을 꾹 닫으며 고민했다.
“저자가 죽인 수선은 악곡종 종주의 막내아들이요. 수계에서 온 그대는 잘 모를지 모르나, 혼선에게 자식이 갖는 의미는 사뭇 다르지.”
그러고 보니 언뜻 들은 말로 혼선들은 아이를 가지기 힘들다 들었다.
아무리 지극한 애정이 피어나도 혼아혈인 특성이 지워지지 않아, 상충되는 피를 지니면 아이를 갖기가 힘들어 혼인 전에 서로의 피가 잘 섞이는 편인지 알아본다고 들었다.
그리고 나서도 꽤 많은 노고와 시간을 들여 아이를 가질 수 있기에 모성애와 부성애가 남다르다 한다.
“그러니 더욱 그 은혜를 잊지 않고 제 가슴에 악곡종의 이름이 남지 않겠습니까.”
악곡종의 이름.
천범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그렇다.
수계의 사신단인 자신이 악곡종의 이름에 은혜를 느낀다면, 그것으로 얻을 이득은 아득하다.
“이곳에 오기 전, 주해성이라는 곳에 머물었습니다. 허나 약간의 오해로 인해 그들은 저희를 공격했고, 저희는 많은 희생을 감수하며 이곳 현무성으로 도망쳤습니다.”
천녀 때문이었으나 지금 와서 그런 건 중요치 않다.
이 상황이 어찌 무마하려면 어쩔 수 없다. 지금은 단순히 탐랑과의 은원으로 엮이게 되지만 그 불똥이 사신단으로 튀게 되는 건 시간 문제.
그러니 지금 마무리를 지어야 한다.
“그런 일이….”
“저희 사신단은 혼선과의 연을 끊고 인선으로 향하기 전이었습니다. 호의를 베풀었으나 그것이 비수로 다가왔으니 응당 해야 할 일이죠.”
허나.
“이번 일로 아량을 베풀어주신다면 저희는 작게는 악곡종에, 크게는 혼선 전체에 대한 생각의 틀이 바뀔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천범은 그들에게 선택지를 줬다.
주해성과 같은 길을 걸을 것이냐, 아니면 그들과는 달리하여 우호관계를 맺어 큰 그림을 그릴 것이냐.
아무리 법혈로 성정이 과격하다고는 해도 머리가 있다면 알 것이다.
수계와의 관계 개선.
그것을 빌미로 혼선의 중축이 되는 선궁과 연결 지어 더 큰 부와 재물을 축적시키고 명예까지 드높일 수 있는 더 없는 기회가 될 것임을!
“크흠….”
고민할 것이다.
고민할 수밖에 없게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선택할 것이다.
“우선… 자리를 옮기는 게 어떻소.”
사신 대표.
수그러든 악곡종 장로의 음성에 천범의 입꼬리가 움찔거렸다.
“예, 그러지요.”
* * *
밤이 깊어진 새벽.
풀벌레 우는 소리가 기꺼이 들려오고 밤이슬 맺히는 새벽이 드리운 하늘.
객잔을 향해 나아가며 투덜거리는 사내의 음성이 들려왔다.
“작은 먹이. 난 너를 믿었다.”
“탐랑, 당신이 일구어 온 수행이 아니었다면 전 당신을 진즉 금구시켜 어느 동굴에 봉인했을 겁니다.”
손에 접선을 든 채로 깔끔한 선비의 모습을 한 천범과 우락부락한 산적 같은 외모의 탐랑이었다.
“작은 먹이, 너와 함께한 세월도 꽤 오래되었다. 난 그동안 벗이라는 단어와 의미를 깨우쳤다. 넌 내 먹이나 다름없지만 벗이기도 하다.”
탐랑은 진심으로 감동했다는 듯 그리 말했다.
허나 범의 표정은 똥 씹은 듯 얼굴을 구기고 있었다.
씨알도 먹히지 않은 듯하다.
“당신 때문에 얼마나 막대한 손해를 입었는지 알고 계십니까?”
“한동안 이곳에서 지내게 된 약조를 말하는 건가? 그거라면 상관없다. 내 오감이 말해주길, 현무성은 아주 좋은 곳이다. 이곳에서 지내면 얻는 것이 아주 많겠지.”
탐랑은 은근슬쩍 천범의 눈을 피했다. 본래 계월선을 수리하고 곧장 인계로 넘어가려 했으나 그 계획이 탐랑 덕에 수포로 돌아갔다.
악곡종은 이번 일을 눈감아주기로 했다. 그 대신 천범 일행은 현무성에 발을 묶여 강제적으로 이곳에서 지내며 교류하게 되었다.
당연한 일이다.
기껏 죄를 덮었는데 도망가기라도 한다면 악곡종 입장에서는 낭패나 다름없지 않은가.
“딱히… 상관없잖아? 작은 먹이. 난 널 믿는다. 너라면 생쥐처럼 잔꾀를 부려 이득을 취할 것이다.”
왜 하필 생쥐인지 원.
비꼬는 건지 칭찬하는 건지 모르겠다.
“탐랑, 여우를 말하는 겁니까?”
“아, 여우였나? 그럼 생쥐는 뭐지?”
“됐습니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죠.”
“그래,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내가 살았다는 게 중요하지.”
천범의 눈이 탐랑을 노려본다.
탐랑은 슬쩍 고개 돌려 하늘을 멀거니 응시한다.
“별이 참 많군.”
하늘이 참 맑았다.
쿠르르릉.
허나 단숨에 먹구름이 몰려들어 별을 다 가리었다.
천범의 짓이었다.
“하늘에 먹구름이 가득하니, 꼭 제 마음과 같아 애잔하군요.”
“하하, 이리 하면 그 애잔한 마음 조금 가시겠군!”
탐랑이 팔을 흔들어 하늘을 향해 휘두르니 풍압이 날아가 먹구름을 흩어놓았다.
“이제 어때?”
“먹구름이 헤집어 놓아진 걸 보니, 꼭 갈가리 찢긴 제 마음과 같아 보여 기분이 좋지 않군요.”
“…뭐 어쩌란 거야?”
“접시 물에 코 박아 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운이 좋다면 죽을지도 모른다.
“접시 물에 코를 왜 박지? 수계의 수선들이 그런 취미가 있나?”
탐랑은 이해하지 못한 모양이다.
범은 한숨을 내쉬고 그것으로 되었다 내버려뒀다.
“아, 관장 어른! 오, 탐랑! 돌아오셨군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객잔에 들어가니 홀로 술을 한 잔 걸치고 있던 백건분이 둘을 반겼다.
탐랑은 백건분을 차게 식은 눈으로 보며 범에게 은근히 말했다.
“난 널 믿었다. 그리고 넌 내 믿음에 대한 보답을 했지. 그러니 나는 언젠가 이 보답에 대한 보답으로 널 도울 것이다. 허나 저놈은 아니다.”
탐랑은 백건분을 보며 혀를 찼다.
“무슨 일 있었습니까.”
“악곡종 장로들이 들이닥치니 냅다 저 혼자 살겠다고 도망치더군. 나 탐랑군은 백먹이에게 크게 실망했다!”
그럼 먹이한테 대체 뭘 바란 건지.
“저는 관장 어른이 아닙니다. 탐랑. 거기 끼어들었다가는 금세 죽었겠죠. 그리고 저는 믿고 있었습니다.”
“…내가 이길 거라고?”
“아뇨, 관장 어른이 어떻게든 해 주실 거라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해맑게 웃으며 말하는 백건분의 낯에 탐랑이 주먹을 꽂아 넣었다.
퍽!
“꽥!”
“이 감정은 뭐지. 아주… 열 받는군.”
“재수 없다라는 감정일 겁니다.”
“재수 없다? 내 재수는 없지 않아.”
뭐라 설명하면 확실히 이해할까.
“흠… 백건분을 보고 있으면 재수가 없어질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러자 깨달았다는 듯 가벼운 탄성을 자아낸다.
“그렇군. 날 향해 하는 말이 아니라 놈을 욕하는 말이군. 하하, 이해했다. 재수 없다. 네놈은 재수 없다 덜떨어진 먹이!!”
“백건분입니다….”
“닥쳐라 재수 없는 먹이!”
천범은 둘이 투닥투닥거리는 꼴을 보아하니 그만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리고 비어있는 객잔 한 곳에 자리하고 앉았다.
“관장 어른, 술 한 잔 하시겠습니까.”
“준비해준다면 고맙게 받지.”
“재수 없는 먹이. 내 것도 차려 와라.”
백건분은 탐랑을 아니꼽다는 듯 흘기고는 품에서 술병 여럿을 꺼내 늘여 놓았다.
“솔직히 제 탓이 아니지 않습니까? 탐랑이 갑자기 자기 술이라며 빼앗아 먹으니까 놈이 성내다가 이 사달이 벌어진 것이죠.”
술잔에 술을 따라 넣으며 궁시렁거리자 탐랑이 맞받아친다.
“작은 먹이. 주도에는 담금주라는 것이 있다고 들었다.”
“그렇죠.”
“재수 없는 먹이를 담가 술을 먹는다면 맛이 어떨지 알고 있나?”
“글쎄요. 못 먹을 만한 건 아닐 겁니다. 옛 고서를 살펴보면 신선으로 술을 만들어 먹으면 원기 회복에 좋다고도 쓰여 있을 정도니까요.”
“호오, 그렇군.”
이내 탐랑이 백건분을 그윽하게 바라보았다.
“겁주지 마십시오….”
“널 술로 담가 두고두고 먹는다면 우린 한평생을 함께할 테지.”
백건분의 전신에 소름이 돋아났다.
“관장 어른. 어떻게든 해주십쇼!”
“탐랑.”
천범이 술잔을 내려놓고 탐랑을 보았다.
그러자 탐랑이 흠칫하며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백건분의 기세가 등등해졌다.
“담금주에 관해서는 저도 나름대로의 견해를 갖고 있습니다. 만일 만들게 된다면 의논해주세요.”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화들짝 놀란 백건분이 관장 어른까지 자기를 놀리는 거냐며 화를 내는 건지 겁을 주는 건지 모르다 객잔의 계단 위로 올라가버렸다.
탐랑과 천범은 껄껄 웃다가 술잔을 부딪치며 목을 축였다.
“재밌는 친굽니다.”
“심심하지는 않다고 하지. 평소에는 쓸모없지만 그래도 저 먹이 놈에게 많은 걸 배우고 있다.”
얼굴이 많이 변했다.
천범은 그리 생각했다.
처음 보았을 때 그에게 감정의 결핍이 엿보였으나, 지금은 아니다.
여러 감정이 얼굴에 내비친다.
그것이 결과적으로 그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지 모른다.
허나 범은 나쁘지 않다 생각했다.
드르륵.
범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환망에게 가기 위해서다.
일정도 틀어지게 됐으니 연아와 상의도 해야 했고, 환망에 상태도 보아야 했다.
술 한 잔으로 잠깐의 숨을 돌렸으니 다시 바삐 움직여야 한다.
“벌써 일어나는가.”
“할 일이 많습니다.”
누구 때문에 더욱 그렇다.
모르지는 않는지 헛기침을 내뱉던 탐랑은 술잔을 마저 비우며 계단 위로 향하는 천범의 등에 넌지시 감정을 내뱉었다.
“고맙다.”
이전과는 달리 장난기 하나 없는 담백하면서도 짙은 말이었다.
계단을 밟는 천범의 발이 잠시 멈추었다가 이내 피식 웃고는 다시 계단을 한칸한칸 올라섰다.
끼익끼익, 계단이 신음하는 소리였으나 왠지 모르게 천범은 그것이 나름대로 듣기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