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ll of the Spear RAW novel - Chapter (409)
낭선기환담-408화(409/600)
낭선기환담 – 2부 118화
“어때 보였습니까.”
“등잔의 불이 줄곧 같은 색이었습니다. 거짓을 말했다면 등잔의 불은 검게 타올랐겠지요. 적어도 그가 수계 사신이라는 건 사실입니다.”
거짓을 판별하는 법보를 은밀히 놔둔 덕에 알 수 있었다.
그는 진실로 수계의 사신이리라.
악곡종 장로 둘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의 일을 구상했다.
“차라리 잘됐다 생각하지요.”
“종주의 아들이 죽었느데 뭐가 잘됐다는 겁니까.”
“다 알고 계시면서 말하십니다. 종주의 아들은 품성 또한 고약하기로 이루 말할 데가 없었죠. 이렇게라도 본종에 도움이 되고 죽었다 생각한다면….”
탁.
거칠게 술잔을 내려놓은 장로 중 하나가 인상을 찌푸렸다.
“어허, 아무리 그래도 종주의 핏줄을 지닌 아들이요. 용 장로는 말씀을 조금 삼가심이 좋겠소.”
“허나 틀린 말은 아니지요.”
“아무리 그런 개망나니라 해도 제 조카였습니다. 어릴 적에는… 그리도 영특한 놈이었거늘… 쯧쯧.”
철 장로는 죽어버린 조카를 그리며 잔을 꺾었다.
“하지만 이번 일은 본종의 기회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수계의 사신단과 친분을 유지하고 잘 교류하기만 해도 절로 떨어질 떡고물이 제법이지요.”
이 일을 혼선의 중축인 선궁에 이야기하기라도 한다면 어찌 되겠는가.
“예, 이것을 빌미로 많은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지요. 절로 들어온 복을 차버린 걸로도 모자라, 적에게 넘겨진 주해성을 비난함과 동시에 악곡종의 이름을 널리 퍼트릴 수 있을 겁니다. 그리만 된다면 이 현무성의 주인이 현무종이 아닌 악곡종이 될 수도….”
절로 들어온 복을 차버린 주해성 놈들과는 행보를 달리해야 한다.
“안 그래도 현무종과 무결종이 저희 일에 사사건건 압력을 놓던 참 아니었습니까. 하늘이 돕는 것일지도 모르지요.”
허나 한 가지 걸리는 점이 있다.
“종주는 어찌….”
철남침의 아비 되는 악곡종 종주가 어찌 나올지 아직 모른다.
아무리 그래도 아들이 죽은 것이다.
물론 지금 당장 장로들과 이야기를 통해 어떻게든 그의 슬픔과 분노를 잠재우는 것이 급선무다.
“어떻게든 해야지 않겠습니까. 이런 사달도 언젠가는 벌어질 일이었습니다. 종주께서도 감내하셔야죠. 반드시 그리 하셔야만 할 겁니다.”
악곡종의 만년대계를 위해서라도.
* * *
“쌍결기고(雙結祈告)입니다.”
“쌍결기고….”
수서를 받아드는 손의 떨림이 천범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아직 몸이 회복되려면 적어도 백 년은 있어야 될 듯한 환망의 몸이다.
평생을 수행해 온 몸이 치료를 위해 수행을 할 수가 없다면 그게 더 고역이고 힘겨운 일이 될 터.
그렇기에 천범은 곧장 주었다.
다른 마음 먹지 말도록.
그리고 계속 살아가도록.
“분명 마기는 선기와는 조금 다른 기운이라 할 수 있지요. 그것의 진원이 어찌되는 것인지 모르나, 마기 또한 힘으로 부릴 수 있는 기운입니다. 쌍결기고는 마기에 침식되지 않도록, 그리고 선기와 함께 이롭게 사용하기 위한 공법이라는 것 같더군요.”
잘만 수행한다면 본래보다 한층 더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수행 도중에 마기와 선기의 충돌로 죽을 수도 있기도 하다.
하지만 지금 당장 자결하는 것보다는 뭐라도 해보고 죽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는가.
본래 수선이라는 건 항상 죽음을 염두에 두고 수행할 수밖에 없으니.
“…내가 정말 받아도 되겠소.”
“받아주시라 건네는 겁니다.”
“허나 이 빚을 내 어찌 갚아야 할지 도통 모르겠소.”
“언젠가 때가 있겠지요. 떼먹을 생각은 아니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빚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라.”
우스갯소리로 말하니 환망의 입가에 한줌 미소가 피어난다.
“그리고 이 자들이 맞을까 모르겠는데, 기억을 더듬어 데려왔습니다.”
공정강에서 노선 둘을 꺼내보였다.
장정과 사내 아이였다.
“맞습니까.”
“…맞소.”
“어찌 하실지는 환망께 맡기죠. 값을 제대로 치렀으니 죽이든 살리든 상관은 없을 겁니다.”
죽여도 좋고, 살려두어 평생 자신의 곁에서 시중을 들게 해도 좋을 터.
어찌되었건 그를 괴롭혔던 가문의 아이와 수선이니 말이다.
“천 수선께서는 꽤 얄궂으시군.”
달리 답하지 않았다.
악연이라 해도 좋을 노선을 데려온 것은 두 가지 이유가 있다.
그들을 죽여 지난날을 청산하고 새로운 수선을 이어가게 하기 위함.
만일 죽이지 않는다면 그들을 곁에 두며 두고두고 지난날의 과오를 생각하고 수행에 매진할 수 있도록.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그가 살아가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
“한동안 이곳 현무성에서 지낼 겁니다. 어쩌다보니 상황이 그렇게 되어 이곳에 정을 붙여야겠더군요.”
“천 수선, 그대는 수계의 사신으로써 이곳에 왔다 하였소.”
“그렇습니다.”
“이곳은 내가 알기로 혼계의 현무성이라 알고 있는데, 그렇다면 수계는 혼선과….”
“어찌될지는 모르죠. 허나, 모든 결정은 심사숙고하여 내리게 될 것이니 지금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천범의 의견이 수궁의 높으신 분들에게 그대로 들어갈지도 잘 모른다.
게다가 웬만하면 어느 한쪽을 고르고 싶지 않기도 했다.
선살전이 다가오는데 하나하나 이득을 따져가며 고르는 것도 우습다.
‘수계는 인선과 혼선이 아닌, 선계의 힘이 필요한 것이니.’
대의를 위해서라면 어느 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인선과 혼선의 가운데에 다리 역할을 하는 게 낫다.
“으음, 괜한 소리를 하였소. 잊어 주시오.”
“아닙니다. 나누자면 환망 또한 인선이시니 신경 쓰이겠죠.”
태생을 인간으로 살아오다가 도사가 되어 등선한 환망이다.
궁금하지 않으면 거짓말이겠지.
“얼마나 있게 된 것이오.”
“글쎄요. 우선 백 년 정도는 이곳에서 지내게 될 것 같습니다.”
상황을 봐서 더 오래 체류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생각해보면 현무성은 외부의 침입에 대한 방비가 괜찮다고도 하고, 인선과 혼선의 경계에 가까운 곳이다.
인계의 천궁에는 연아를 보내 교류하면 될 것이고, 혼계의 선궁에는 우명이나 가연을 보내도 나쁘지 않다.
호위로 탐랑을 붙인다면 위험한 일은 생기지 않겠지.
‘아니, 탐랑이 위험을 불러오려나.’
그건 또 어찌 될지 모르겠다.
“쉬시죠. 쌍결기고는 저도 매우 흥미로운 수서입니다. 환망의 내상이 다스려진다면 제가 도와드릴 터이니 안에 있는 마기를 다스려 보죠.”
마땅히 할 일이 있지도 않다.
물론, 현무성에 자리 잡게 되었으니 악곡종과 다른 종파들과의 교류 또한 거절하지 않을 것이다.
허나 그럼에도 본신으로 돌아갈 수도 없으니 이런저런 학문을 견식하여 때를 기다림이 낫다.
‘앞으로 팔백 년 정도던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세월.
천겁이 도래하기까지의 기간이다.
‘수궁의 겁정을 이용해 천겁의 위력을 낮추려면 적어도….’
육백 년 후에는 수궁에 돌아가야 함이 옳다.
세가의 가주들이 과연 겁정을 사용하도록 가만히 내버려둘지는 또 모를 일이다만, 선살전이 코앞이고 그들 또한 수선하는 자들이니 크게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리라.
“왜 그렇게까지 하시는 게요.”
“마음의 빚이 있다 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제 친우의 스승이신 분이니 돕는 거라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또 압니까. 후에 당신이 쌍결기고를 대성하여 훌륭한 수선이 된다면 저를 한 번 구명해줄지도 모르죠.”
천범은 그 말을 끝으로 환망의 방을 나섰다.
더 있어봤자 낯간지러운 기분만 들 거 같았기 때문이다.
“사부님.”
“어, 연아 왔느냐.”
“대강의 일을 들었습니다.”
“백가놈이 말했구나.”
“예, 한동안 이곳에서 지내게 되었다 들었습니다.”
“그래, 그렇게 되었다. 뭐 환망의 일도 있고 하니 나쁠 것도 없지.”
대수롭지 않게 말하고 있으나 제 한되었다는 것은 변하지 않다.
연아는 뭔가 불만족스러운 듯 아미를 좁혔다.
“뭐가 마음에 들지 않더냐.”
“아닙니다.”
“말해보거라. 너는 예부터 속에 있는 말을 잘 하지 않았지. 그리 담아놓고만 있어서는 될 일도 되지 않고 네 마음의 고름만 쌓일 뿐이다.”
그리 다독이자 잠시 고민하던 연아는 이내 입을 열었다.
“전 약하지 않습니다.”
“누가 너보고 약하다 하더냐.”
우스운 말을 한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고 자리에 앉자, 연아는 자연스레 찻주전자를 꺼내 찻잎을 넣고 두 손으로 주전자를 감싸 차를 끊였다.
쪼르르 차를 따라 내미니 범이 들어 잠시 맛보고는 내려 놓았다.
“그래, 무슨 말이냐.”
다짜고짜 약하지 않다니.
“의도치 않게 현무성에 발을 묶이게 되신 거라 알고 있습니다.”
“그건 그렇지. 허나 너도 알다시피 탐랑을 살리기 위함이었다.”
비록 사고를 쳤다지만 탐랑은 사신단에 하나뿐인 향선이다.
게다가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이곳에서 잠시 머물러 교류해주는 것만으로도 피바람이 불지 않는다면 응당 그리 하는 게 맞다.
“허나 저들과의 약조를 굳이 지킬 필요는 없습니다. 사부님. 계월선의 수리만 끝난다면 천궁으로가 궁병들의 호위를 받으며 안전하게 선계를 돌아볼 수도 있을 겁니다.”
“뭐 그럴 수도 있겠지. 허나….”
천궁은 가고 싶지 않다.
검노와 연관되어 있는 수선이 자리하고 있는 사실을 모르지 않다.
연아에게 들었으니 더더욱 그곳과는 멀리하고 싶은 게 당연하다.
혹시라도 검노가 자신이 선계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라도 된다면 지금으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자신이 없다.
“전 예전의 제가 아닙니다.”
연아는 사부의 손을 잡고 간곡히 청하듯 말했다.
“제 지닌 힘이 적지 않습니다. 더 이상 사부님에게 매번 지켜지는 어린 아이가 아닙니다. 하니, 제게 사부님을 모실 수 있게 해주세요.”
천범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순간 가슴이 뭉클하여 진한 감동이 몰려왔다.
누군가 자신을 걱정하는 일은 있었으나 이렇게까지 말한 적은 없다.
생소한 감정의 파문이 천범의 가슴속이 천천히 퍼졌다.
“고맙구나.”
진심으로 그리 말했다.
자식들한테도 받아보지 못한 마음이니 어찌 고맙지 아니할까.
천범은 진심을 담아 연아의 손을 꼬옥 잡아주었다.
“허나 괜찮다.”
“사부님.”
“네 마음이 무엇인지 잘 안다. 하지만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이 사부가 그리 늙지 않았다.”
“그,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닙니다. 다만 저는….”
“알고 있다.”
드르륵.
자리에서 일어나 손안에 금천지화를 피워 입김을 후 불어 넣으니.
불씨가 사방으로 날아가 진을 구축하여 세찬 바람을 만들어낸다.
이내 풍경이 휘날리니 주변의 모든 것이 지워지고 생겨난다.
천범의 환계였다.
“사부님 이곳은….”
“그리운 곳이지 않더냐. 아직도 가끔 꿈에 나타나 즐거운 한때를 보여주고는 한다.”
그러니 보여주고 싶었다.
높게 솟아오른 백산을.
“너와 만난 것도 이곳에서였지.”
생각해보면 길고 긴 인연이다.
그때는 이리 이어질지 몰랐다.
우연이 인연이 닿아 도움을 주고 죽지 말라 검을 쥐어주었거늘.
이제는 어엿한 신선이 되어 자신을 모시고 싶다 할 줄 누가 알았는가.
“그리운 풍경입니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풍경이기도 하다. 본래 추억이란 그렇다.
“손에 잡힐 듯하면서도 다시 돌아갈 수 없기에 더 아름다운 법이지.”
“백산에서의 저는 그저 제 수명이 다하는 날까지 저곳을 지키는 것이 제 사명이라 생각했었습니다.”
연아의 자질은 그리 뛰어난 편이 아니었다. 그녀 또한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많은 것을 꿈꾸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기에 천로등의 선택을 받아 등선하지 않았던가.
“허나 지금은 아닙니다.”
“많이 바뀌었지.”
사정이 많이 바뀌었다.
그녀는 신선이 되어 강한 힘을 얻었고 뒤를 받쳐줄 천궁 또한 있다.
“제가 지켜드릴 수 있습니다. 천궁으로 가신다면… 그곳에서 직책을 받으시는 것도 가능합니다.”
“난 수계의 수선이다.”
“사부님은 항상 뛰어나셨습니다. 하여 사부님을 시기 질투하는 자들 또한 많았고 그렇기에 항상 적이 많으신 분이셨지요.”
“….”
하고픈 말이 무엇인줄은 알겠다.
“문무선들에게 들었습니다. 수계에서도 사부님을 노리는 자들이 많아 달아나듯 오셨다지요.”
쓸데없는 말을 많이 한 모양이다.
“사부님. 그런 위험을 감수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차라리 저와 함께 천궁에서 안전하게 지내심이 어떻습니까. 저라면 그 누구의 손에도 사부님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습니다.”
마주잡는 제자의 손을 천범은 뿌리칠 수 없었다.
허나 긍정할 수도 없었다.
자신을 생각하는 제자의 마음을 알기에 더더욱 그랬다.
“벗이 있다.”
“벗…이요.”
“내 목숨을 구해준 벗이다. 나 또한 수계에 정이 없지만, 친우가 홀로 있는 꼴은 볼 수가 없구나.”
지금도 홀로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는 벗이다.
“미안하다. 네가 나에게 처음으로 하는 청이었거늘.”
뭔가를 부탁하지 않던 연아였다.
그런 제자였다.
처음으로 하는 청을 거절할 수밖에 없어 미안한 마음뿐이다.
‘많이 변했구나.’
성장했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네가 선계로 올라와 이룬 것들이 너 자신이 된 듯하여 기쁘구나.”
천범은 연아의 머리를 곱게 쓰다듬어 주었다.
“하지만 사부님….”
“그럼 물으마. 내가 선계를 버리고 수계로 따라오라면 따를 것이냐.”
그의 물음에 연아는 멈칫하여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야 물론….”
“네가 선계에서 많은 것을 이루고 여러 인연을 만든 것처럼 나 또한 수계에 그러하였다. 그러니 네 청을 들어줄 수 없는 내 마음도 헤아려주는 게 어떻겠느냐.”
연아는 아쉬움에 입을 벙긋거리다 이내 쓰게 웃음 지었다.
“제가 경솔했습니다.”
“되었다. 적어도 듣기는 좋았으니.”
범은 풀 죽어 있는 연아의 어깨를 두들기고는 미소 지으며 물었다.
“검은 아직도 무겁더냐.”
그의 물음에 연아는 답하였다.
“예, 아직도 전 무겁습니다.”
허나 마음만은 한결 가벼워진 듯 저리도 해맑게 웃어 보인다.
“다행이구나. 내가 아직 가르칠 것이 남아 있는 듯하니.”
범과 연아는 한참을 서로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