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ll of the Spear RAW novel - Chapter (422)
낭선기환담-421화(422/600)
낭선기환담 – 2부 131화
고요한 악곡산의 공동.
그곳에 있는 것이라고는 금천지화로 불타고 있는 신목의 잔해와 그 주변에 널브러져 있는 시산혈해.
꿀꺽.
그리고 고고하게, 또는 무감정하게 그 중심에 서 있는 사내.
천범이 자리하고 있었다.
‘내가 지금 꿈이라도 꾸는 것인가.’
묵계례는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갑자기 신목 안에서 수계 사신인 천범이 나오더니 함께 온 수선들 모두를 죽여 버렸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였다.
그의 손이 순간 흐릿하게 보이 더니 철 종주가 창에 맞아 절명했다.
그리고 그 창에서 흘러나온 자색의 뇌전으로 철 종주의 아들이 죽었고, 폭연이 피어오르며 삽시에 비명이 터져 나오더니 죄다 죽어 있었다.
살아남은 것은 현각불괴로 전방위를 감싼 묵계례와 함께 있던 무멸뿐.
숨조차 멈추고 있는 묵계례와 무멸은 현각불괴 안에서 생각이 멈춘 듯 그저 핏물을 뒤집어 쓴 천범을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살겁… 승선….’
당최 이해되지 않는 상황에 머리가 터져버릴 것 같다.
하지만 알 수 있는 것도 있다.
‘완전한 향선의 기운. 이전에 얼핏 보았을 때는 애매했는데… 지금은 몸을 완전히 회복한 듯하다.’
아마도 모종의 방법으로 절명신목에 담긴 거대한 원기 자체를 빼앗아 몸을 치료한 게 아닐까 싶다.
‘허나 살겁을 받게 될 것까지는 예상하지 못했겠지.’
어떠한 도겁을 받게 될지 아는 자는 세상 어디에도 없으니.
이것을 쌤통이라 해야 할지 어째야 할지 묵계례는 종잡을 수 없었다.
화신체로도 그리 강력한 신통을 부리던 자이다.
이제는 본신의 몸을 되찾고 살선이 되었으니 저리 강력한 것도 당연하다면 당연하다.
힘의 정도가 그녀의 생각을 아득히 뛰어 넘었을 뿐.
최악.
창에 묻은 피를 털어낸 천범은 이내 고개를 돌려 묵계례와 무멸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현각불괴는 연녹색의 반투명한 조각들이 모여 원을 만들고 있었다.
육각형의 조각 하나하나가 모여 결집하니 틈 따위는 존재치 않았다.
그러니 제아무리 강력한 천범의 신통이라도 막아내리라.
묵계례와 무멸은 그리 생각하며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묵 종주. 현각불괴를 계속 유지해주시오. 다행히 내 멸도가 바깥에 있으니 해볼 만하겠소. 어차피 놈은 살겁을 받아 제정신이 아닌 몸. 살육밖에 모르는 짐승이나 다를 바가 없게 되었으니 상대할 수 있을 거요.”
현각불괴 바깥에는 무멸이 지니고 있던 대도가 바닥에 박혀 있었다.
사람 몸통만큼 넓적한 크기의 대도였으나, 무멸이 합장하여 입을 달싹이니 형태가 흐물흐물하게 변하고 이내 푸른 용마로 변했다.
대도가 용마로 변하자 삽시에 바닥이 바닷물로 변하고 거친 파도가 일어나 공동을 가득 메웠다.
시체와 피웅덩이는 파도에 휩쓸려 자취를 감추고, 현각불괴 안의 종주들의 모습 또한 사라진다.
[크하하! 네놈이 아무리 강인하다 한들! 제정신도 차리지 못하는 살선인 이상 노부의 수마룡진을 파훼하지는 못할 터! 어디 한 번 바닷물에 매장되어 용마들과 영원토록 싸워보도록 해라!]공동을 가득 메운 바닷물 속에는 반투명한 용마들이 모여들어 천범을 향해 콧김을 내뱉으며 으르렁거렸다.
점차 해류가 거세지고 소용돌이가 사방에 만들어져 균형을 잃게 만들고 용마가 헤엄쳐 다니며 틈을 노린다.
무멸의 수마룡진의 무서움은 강력하지는 않으나 상대를 쉬게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누구든 수마룡진에 갇힌다면 시간이 지남에 따라 힘이 빠질 것이고, 그때가 되면 용마들이 갈기갈기 물어 뜯을 것이니 말이다.
“급하게 만든 것이니 오래 가두지는 못할 겁니다. 그래도 하루 이틀 정도는 빠져나오지 못할 테니….”
그동안 놈을 봉인할 방도를 강구하는 게 좋다.
절명신목을 잃어버려 수천 년의 고생이 허망하게 되었으나 일단은 목숨이 붙어있어야 후회라도 하지 않겠는가.
“그럽시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요, 주워 담을 수 없는 물이니….”
“우선 벗어나시죠.”
“예.”
현각불괴를 유지한 채로 수마룡진의 환진에서 벗어나려는 찰나.
지이이잉.
주변을 감싼 기운이 급변했다.
돌연 바닷물 속이었던 풍경이 뒤집어져 칠흑 같은 어둠으로 뒤바뀌고, 거대한 붉은 눈이 묵계례와 무멸을 꿰뚫어 보듯 내려다보고 있었다.
“말도 안돼! 놈이 내 수마룡진을 벌써 파훼됐다는 말인가!!”
거대한 붉은 눈은 순식간에 동공이 확장되어 육문이 열렸다.
그러자 무멸이 돌연 머리를 부여잡고 고통스러워했고, 이내 묵계례 또한 헛것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아니야, 내가 아니야… 난 당신을 죽이지 않았어! 내가 한 게 아니야!! 내가, 난 나쁘지 않아! 당신은… 당신은 날 무시하고 내 딸마저 무시했잖아! 내가… 내가 그리 헌신했는데!!”
묵계례가 헛소리를 내뱉자 무멸은 안간힘을 써내며 자신의 머리를 때리고 때려 피가 터질 정도로 때렸다.
“정신…차리시오! 놈의 환술에 걸리면 끝장이란 말입니다!!”
허나 그때.
그들을 바라보는 여섯 개의 붉은 눈동자에서 붉은 피가 흘러내려 칠흑의 공간을 적시니, 무멸의 눈동자가 제멋대로 움직이고 입가에서는 거품을 뱉어내며 전신을 부들부들 떨었다.
“컥, 커억 카아아억!!”
무멸의 눈에서 피눈물이 연신 흘러나오고 온몸이 고통스러운 듯 비틀었으며 숨을 쉬지 못하는 것처럼 컥컥거렸다.
그러다 저도 모르게 쓰러져 현각불괴로 나오게 된 순간.
‘아.’
촤악!
마지막으로 본 것은 살선의 손톱에 전신이 찢겨나가는 자신의 모습.
후드득.
살덩어리가 되어 떨어져 내린 무멸을 무미건조하게 바라본 천범은 현각불괴 속에서 제정신이 아닌 채 중얼거리는 묵계례를 향해 창을 내질렀다.
콰아아앙!!
쩌저저적!!
쌍멸을 내질렀으나 현각불괴에는 커다란 균열이 생겼을 뿐 구멍 하나 뚫리지 아니했다.
곧장 다시 한번 쌍멸로 내려치니.
콰자자자창!!
현각불괴의 조각들이 깨져나가며 그 안에 숨어있던 묵계례가 충혈된 눈동자로 그를 보며 말했다.
“여, 여보…?”
그리고 그 순간.
촤악.
천범의 창이 그녀를 베었다.
툭.
허무한 최후를 맞이한 묵계례의 떨구어진 머리만이 황망한 듯 눈감지 못했다.
죽음을 확인한 것인지, 살기의 유무를 확인한 것인지, 천범은 아무런 감정 없이 등을 돌려 출구를 향했다.
살아남은 이 없는 공간에 용무는 없는 듯, 그는 새로운 살기를 찾아 바깥으로 향했다.
* * *
“어찌 된 일입니까. 살겁은 무엇이요 살선은 또 무슨 소리랍니까!”
현무성의 삼대 종주들과 선궁 향선들이 사라지자, 영문도 모른 채 대치하게 된 상선들만 덩그러니 놓였다.
살겁을 받은 자가 있고, 그 자가 선살전의 마선처럼 살선이 될 테니 봉인해야 된다는 소리는 잘 알았다.
모를 수가 없다.
붕계나 사계가 아니더라도 살겁을 받는 사례가 없었던 것도 아니었으니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허나.
‘그게 왜….’
천범이 향한 곳이란 말인가!
가연은 혼란스러웠다.
혹 무슨 일이 생기는 건 아닐까 손발을 가만히 둘 수 없었다.
“좌 부관. 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 합니다. 관장 어른이 저희에게 명하신 게 무엇입니까.”
“선궁의 수선들과 함께 저들의 발목을 붙잡아야 한다 하셨지요… 허나!”
선궁의 향선들은 물론, 삼대 종주와 장로들도 모두 악곡산으로 향했다.
가연은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
어차피 선궁의 병사들은 문무선들과 섞여 있다.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그녀는 알아야 한다.
알아야만!
주인에게 이로운 방향으로 행보를 정할 수가 있을 테니!
“다녀오시오. 이곳은 저희만으로도 충분하니.”
“감사합니다, 우 부관!”
가연은 순식간에 전열에서 빠져나가 악곡산으로 향했다.
“당신도 많이 바뀌었구려.”
저리 전전긍긍할 줄도 아는 수선이었던가. 팽가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며 항상 가식적인 표정을 보이던 때보다는 차라리 지금이 더 나았다.
한편.
붉은 빛줄기로 변해 날아가는 가연의 눈에 무언가가 보였다.
악곡산 주변에 악곡종의 제자들로 보이는 자들 수백 명이 모여 방진을 짜고 있었다.
굉장히 다급해 보이는 표정이었는데, 그들의 얼굴을 보는 순간 둔술을 부리며 날아가던 가연의 몸이 우뚝 멈춰 섰다.
이내 온몸이 바들바들 떨리고 팔 다리가 찢어지는 환상을 보았다.
‘살기다.’
어마어마한 살기였다.
자신에게 죽음의 공포를 보여줄 정도로 강렬한 살기!
살선이 나타났다 어쨌다 하더니 그 말이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순식간에 가연의 안색이 창백해지고 손발을 오들오들 떨었다.
그때였다.
“크아악!!”
“막아! 저놈이 바로 살선이다!”
제자들의 얼굴이 핏기가 가신다.
저곳으로 들어간 장로들과 종주들 모두가 살선을 봉인하지 못했다.
그리고 모두 죽었다는 소리였다.
삼대 종주 모두와 선궁의 향선들까지 살겁과 살선이 나타났다는 소리에 한달음에 달려갔다.
허나 그들 모두가 죽었다.
믿기지 않는 소리다.
허나 보이는 것이 그것이니 예상할 수 있는 상황은 하나.
가연은 허공에 우뚝 멈춰 섰다.
어느새 악곡종 수선들이 자리해 있던 곳은 검은 독무로 만연했다.
새까만 독무 사이에서는 수선들의 비명이 메아리쳤다.
기백에 이르는 상선들은 향선의 기운을 풍기는 단 한 명에게 처참하게 도륙되고 있었다.
한 손에는 쌍멸을 들어 불천불벽의 자색 번개를 다루고, 다른 손에는 금색의 화신통을 부리는 사내.
천범에 의해서 말이다.
“아….”
가연은 말을 잇지 못했다.
억장이 무너지는 듯했다.
‘살겁을 받은 자는 살을 쫓는다.’
전장을 떠돈다.
전장이 없다면 전장을 만든다.
피로 얼룩진 손은 쉬이 씻기지 않고 또다시 피를 부른다.
살겁은 받은 자들의 말로는 죽음.
구천을 떠도는 귀신처럼 전장을 떠돌아다니니 죽기밖에 더할까.
지금 보이는 것처럼 수선들을 닥치는 대로 죽일 것이다.
죽이고 죽이다가 자신까지 죽이는 겁이 바로 살겁이다.
그런 겁을 천범이 받은 것이다.
어찌 갑자기 천겁을 받게 되었는지는 몰라도 가연의 눈이 쫓는 사내는 분명 수계의 종4품 문무 관장.
천범이다.
촤악!
쌍멸을 쥔 손을 늘어뜨린다.
창날에서 붉은 피가 뚝뚝 떨어졌다.
그의 머리칼에서도 갑주에서도 핏방울이 방울져 떨어져 내린다.
허나 자신의 피는 없다.
죽은 이의 피였다.
기백에 달하였던 악곡종 제자들이 모조리 죽음을 맞이했다.
악곡산 한켠에는 그들의 피가 흘러 계곡물처럼 흘러내렸다.
가연의 낯이 파리해졌다.
갈 곳 잃은 천범의 살기가 형상을 이루어 등 뒤로 자리 잡는다.
이내 붉은 눈이 한곳을 바란다.
그가 가연을 보았다.
가연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달아나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움직일 수 없었다.
많은 생각이 들었다.
주마등을 보는 듯 했다.
허나 가연은 아무래도 좋아졌다.
다른 별 것도 아닌 것들로.
다른 별 볼일 없는 놈들에게 죽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게 낫다.
자신이 인정한 주인의 손에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 생각했다.
태어남을 정할 수는 없으니, 자신의 죽음이라도 정하는 게 수선하는 자들의 오랜 바람이지 않던가.
“괜찮습니다.”
달아날 재주도 없다.
싸워 시간을 끌 수도 없다.
이겨낼 수도 없다.
향선이 되신 주인이다.
그 손에 죽는다 하여 무엇이 부끄러울 수 있을까.
“어쩔 수 없지요.”
바람이 있다면.
이 사내가 가는 길을 끝까지 따라가고 싶었던 미련뿐.
눈을 감았다.
쌍멸을 잡은 그의 손이 올라간다.
그리고 단숨에 내려쳤다.
쩌저저저저저저적!!
내려친 쌍멸에서 자색의 벼락이 나타나 현무성을 쑥대밭으로 만든다.
콰아아앙!!
건물이 부서지고, 자리하던 수선들이 죽었다.
많은 자들이 단숨에 죽어나갔다.
그러나 가연은 죽지 않았다.
슬며시 눈을 뜨니.
그는 종적을 감춘 지 오래였다.
그 없는 공간에 가연만이 홀로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