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ll of the Spear RAW novel - Chapter (427)
낭선기환담-426화(427/600)
낭선기환담 – 2부 136화
한참 전에 지하 동굴로 들어간 가연과 연아는 생각 외로 방대한 크기에 놀랐다.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통로는 용이 지나가도 될 정도로 넓어지고, 천장은 한참을 위로 날아도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드높았다.
그뿐이랴.
통로가 하나가 아닌, 갈랫길이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나 마치 미궁을 연상케 했다.
이곳으로 가면 사막이었고, 이곳으로 가면 바다였으며, 저곳으로 가면 초목이 우거진 숲이었다.
독기로 가득 찬 호수가 있는 장소도 있었으며 기괴한 석탑으로 가득 차 온갖 선충이 모여 있는 곳도 있었다.
“좌 부관. 아까 전에 저희가 지나 온 곳이 어디였죠.”
“어느 구덩이 속에 천 마리 정도 되는 환수들이 싸우고 있는 곳이었죠.”
거대한 구덩이 속에서 각자의 영 역을 구분 짓고 쉼 없이 싸우기를 반복하는 기이한 곳이었다.
이상하게 환수들이 다쳐도 금세 상처를 회복했는데, 근처에 자라나 있는 선초가 원기 회복에 좋은 약초였던지라 그런 일이 가능했다.
환수들도 그것을 아는지, 선초가 자라나는 땅을 지키거나 뺏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던 것이다.
그들이 지키는 선초는 복수초라는 것으로 선계에서도 쉬이 구하기 어려운 선초 중 하나였다.
환수 무리들 근처에 인간의 뼈로 보이는 것이 많았던 걸로 보아, 욕심을 부렸던 많은 이들이 화를 자초했으리라 사료 됐다.
“그 삭막한 곳을 지나니 이런 풍경을 볼 수 있기도 하네요.”
연아와 가연은 숨을 돌릴 겸, 나무 그늘에 앉아 풍경을 바라봤다.
삭막하고 기괴하던 다른 곳과는 달리, 이곳은 꽃과 나무가 즐비하고 햇살이 따사로운 곳이었다.
꽃밭의 꽃이 바람에 살랑거리고, 향긋한 나무 향이 지배적이었다.
위험한 선충도, 잔인한 환수도 없어 마음을 편안케 했다.
“어째서 흑천미궁이라 불리는가 했는데, 정말 이유가 있었습니다.”
미궁에 들어서며 몇몇 수선들을 만나 싸우기도 하고 정보를 교류하기도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흑풍지대에 이런 미궁이 나타났다고 한다.
미궁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이곳의 이름을 흑천미궁이라 말했고, 소문은 점점 퍼져 여러 수선들이 찾아오고 있다고 했다.
“흑천미궁(黑天迷宮)이라….”
“좌 부관, 한데 정말로 이곳에 사부님의 냄새가 난 게 확실합니까?”
“확실합니다.”
확실하다.
지금도 미세하지만 나고 있다.
“그럼 이곳에 들어온 지 십년이 넘었는데도 아직 못 찾는 겁니까.”
“답을 알면서 물으시는군요. 이처럼 방대한 흑천미궁입니다. 괜히 흑천이 아니고 괜히 미궁이라 이름 붙은 게 아님을 모르지 않으실 텐데요.”
“답답해서 그랬네요. 답답해서.”
미궁에 들어오고 십 년.
벌써 십 년이 지났다.
제아무리 시간에 구속받지 않는 수선이라도 십 년은 짧지 않은 세월.
그러니 충분히 답답할 만하다.
가연의 코만 믿고 여기까지 왔으니 연아의 마음이 오죽할까.
격앙된 마음 추스르며 흔들리는 꽃밭 바라보니, 가연이 입을 연다.
“얼마 전에 만났던 남녀 한 쌍을 기억하고 계십니까.”
며칠 전에 미궁을 배회하다 만났던 수선들을 이야기하는 듯했다.
잘 어울리는 남녀였는데, 사내는 시원시원하게 인상을 풍겼고 여인 또한 올망졸망하여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본래는 한 종파의 수선들이 단체로 들어왔지만 불의의 사고로 둘만 남아 미궁을 떠돌고 있다지요.”
상황이 어찌됐든, 이런 곳에서도 사랑은 피워나는지라 둘은 부부의 연을 맺기로 했다고 들은 바 있다.
한데 난데없이 그 부부 이야기는 왜 꺼내는지 궁금했다.
“그때는 미처 말하지 못했으나, 여인의 뱃속에 다른 냄새가 나더군요.”
“다른 냄새라뇨?”
“회임을 말하는 겁니다.”
“아… 축하할 일이네요.”
흑천미궁에서 아이를 가졌다니, 축하해야 할지 그 아이의 운명이 딱하다 해야 할지 애매했다.
그래도 새로운 생명이 잉태되는 것이니 상황이 어떠하듯, 분명 축하해야 할 일이리라.
“저는 주인님이 하계에 있을 적의 일을 잘 모릅니다. 부인이 있으셨는지 또는 아이가 있으셨는지요.”
그늘에 앉아 무릎을 끌어안고 말하는 가연은 평소와는 달리 무언가 쓸쓸해 보이기만 했다.
“갑자기 무슨 소릴 하나 했더니… 그냥 물으시면 답해드릴 것을.”
연아가 보기에 가연은 겉으로는 당찬 여인의 모습을 하고 있으나, 속내는 좀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사모님이 있으셨지요. 제가 있었을 때에 아이는 없으셨습니다. 도사의 몸은 불임이니 제가 등선한 후에도 아이는 갖지 못하셨겠지요. 다른 부인이나 첩을 들이셨다면 모르겠지만, 사부님 성격상 그러지 않으셨을….”
순간 연아는 백산에 거주했던 궁비호 일족의 여인 하나를 떠올렸으나 이내 생각을 걷어냈다.
“부인이 있으셨군요.”
“예, 참으로 잘 어울리는 한 쌍이셨습니다. 사모님이야말로 사부님의 배필이라 부르기에 마땅하셨죠.”
지금도 생각하노라면 떠오른다.
“사부님께서는 사모님을 떠올리면 눈송이가 생각난다 하였었죠.”
눈송이 같은 여인이라며 천범이 항상 입버릇처럼 말했다.
연아 또한 그러했다.
그녀를 생각하면 자연스레 떠오르는 풍경이 있다.
소복소복 쌓아진 눈밭.
떨어져 내리는 눈송이.
그 가운데 자리한 여인.
눈을 닮은 머리칼과 푸른 호수와도 같은 눈동자.
언뜻 차가운 인상이지만, 옅은 미소가 더 없이 아름답고 귀여운 여인.
“자상하신 분이었죠. 제가 지금의 자리에 있을 수 있던 건 사모님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했습니다.”
오랜 기억을 상기하듯 그늘에 앉아 차분히 눈 감고 말하는 연아는 저도 모르게 입가를 둥글게 했다.
“사모님이 등선하신다면, 비록 혼선이시겠으나 그분의 성정이라면 혼자서라도 수계로 떠나실 분입니다. 하계에서도 항상 사부님을 그리워하시며 오래토록 연락되지 않으면 직접 찾아가셨던 분이었으니까요.”
“사모님도 인간이란 말입니까?”
“예. 사부님께서는 종족에 구애받지 않는 분이시니까요.”
애초에 백산에서 시작된 둘의 이야기 자체가 산군과 산제물에 대한 것이었으니 당연하다.
연아는 본래 산제물이었던 초아와 백산을 주름잡던 산군을 말해주며 이야기에 열을 올렸다.
“낭만적이죠?”
“그렇네요. 주인님께서는 여인을 돌보듯 하시기에 혹 다른 취향을 가지고 계시나 염려했었습니다.”
“큰 뜻을 품고 계시니 일부러 멀리하시는 거죠. 허나 사부님도 사내셔서 한창 때는 사모님과 몇 달은 운우지락을 즐기실 때도 있으셨답니다?”
볼을 붉히며 말하는 연아는 이전과는 달리 호기심 가득한 소녀나 다름없는 얼굴이었다.
가연은 그런 연아의 모습에 의외라는 듯 놀라워하기도 했다.
한참을 아이들처럼 떠들던 연아는 이내 정신을 차린 듯 아차하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쉴 만큼 쉬었으니 다시 가보죠.”
가연은 연아를 흘기다 피식 웃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도 이전보다는 주인님의 냄새가 강해졌어요. 슬슬 가까워지고 있는 듯하니 부지런히 가 보죠.”
이내 두 여인은 다시금 발길을 재촉하며 꽃밭을 헤쳐 나갔다.
그리고 그때였다.
꽃 한 송이를 실수로 밟자 돌연 그곳에서 아기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화들짝 놀라 발을 뗐으나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윽!”
귀를 찌르듯 쩌렁쩌렁 울려 퍼지는 울음소리에 귀를 막으니 발밑이 꿈틀거리며 꿀렁거렸다.
“천녀!”
“하늘로!”
금세라도 땅이 터져나갈 듯 땅이 솟아오르고, 푹푹 꺼지길 반복한다.
십년 간 흑천미궁을 돌아다녔기에 이런 일에는 이골이 생길 정도로 익숙해진 지 오래였다.
연아와 가연은 순간 하늘로 튀어 올랐다.
한데 그 순간.
아직 남아 있는 꽃들이 활짝 펴지며 연분홍 기운을 흩뿌렸다.
쩌적! 쾅!
소리와 함께 둔술을 부리며 하늘로 날아오르던 그녀들의 몸이 땅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금제!”
이곳에 피어있는 꽃들이 비행 금제를 걸어버린 것이다.
어찌할 방도도 없이 갈라진 땅은 마치 살아있는 짐승처럼 그녀들을 삼키고 어둠 속으로 이끌었다.
“이럴 수가!”
가연이 채찍을 휘둘러 올라가려 했으나, 땅 밑은 무저갱처럼 공허하기만 한 곳이었다.
하염없이 떨어지기를 반복한다.
그동안 무저갱인 줄 알았던 공간은 수없이 풍경이 바뀌고 바뀌었다.
이전에 보았던 사막도 있고, 숲도 있었으며 여러가지 공간들이 줄지어져 마치 만화경처럼 비추었다.
허나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바닥은 보이지 아니한다.
그러자 두려움보다는 호기심과 탐구심이 솟구친다.
이곳은 대체 무엇이고, 어찌 만들어졌기에 이런 공간을 창출하는가.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금제가 사라졌습니다!”
그때 무언가를 느낀 연아가 소리치며 가연의 손목을 잡았다.
이내 천천히 떠올라 둔술을 부리며 비행하니, 순간 풍경이 고정된다.
어둡지만 아늑하고, 숨 막히지만 안도할 수 있는 곳이었다.
“사부님!”
“주인님!”
가연과 연아가 동시에 외쳤다.
그녀들의 눈에 처음 보인 것은 검은 쇠사슬로 묶여 있는 천범.
온몸을 칭칭 감고, 온갖 금구와 부적들이 붙여져 봉해진 그였다.
자기 자신을 봉한 것이리라.
가연은 사슬에 묶여 있는 천범을 보며 눈가를 가늘게 떴다.
제단처럼 만들어진 곳 위에 천범이 사슬에 묶여 있었으나 이전과 다른 것이 하나 있었다.
‘갑주를 입지 않으셨다.’
탐화가 없다.
그리고 묶여있는 천범 옆에는 턱을 괴고 앉아 있는 아리따운 여인이 있었는데, 이전에 가연도 한 번 본 적이 있던 화란이라는 여인이었다.
천범이 봉인된 공간에는 그녀들 말고도 선객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 부관!!”
그리고 탐랑과 문무선들까지!
허나 기이하게 미동도 없다.
얼어붙기라도 한 것처럼 얼굴이 새하얗고 전신에 서리가 맺혀있다.
무슨 상황인지 몰라도 좋은 상황은 아닌 듯 보였다.
문무선들 모두가 법기를 꺼내든 자세로 굳어진 듯 미동도 하지 않는다.
“한기에 당했군요. 전신이 얼어붙은 걸 보니 순식간에 당했어요.”
법기를 꺼낸 채로 당한 것을 보면 그야말로 순식간에 당했으리라.
‘탐랑마저….’
향선이라 할 수 있는 탐랑마저 눈 뜬 채로 얼어붙은 것을 보면 그 상대를 가히 가볍게 볼 수 없으리라.
“대체 누가… 누굽니까!”
가연이 화란을 보며 물었으나 대답한 이는 그녀가 아니었다.
“접니다.”
이내 담담한 여인의 목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오고, 새하얀 한기가 바닥을 가득 깔았다.
터벅터벅.
걸어오는 이는 새하얀 머리칼을 단아하게 올려 비녀로 고정한 여인.
백요족의 혈통을 이었으며, 백요종 장로의 백무.
백절사무로 더 유명한 여인이였다.
그녀의 뒤로 엇비슷한 외모의 백요족 혼선들이 나타나니, 가연과 연아는 엇갈린 반응을 보였다.
가연은 긴장감에 마른침을 삼켰으나 연아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랐다.
“사모님…?”
사모라니! 연아가 사모라 부를 여인은 한 명뿐이지 않던가.
“사모님이요? 정말입니까!?”
“아….”
허나 되물으니 이내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