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ll of the Spear RAW novel - Chapter (435)
낭선기환담-434화(435/600)
낭선기환담 – 2부 144화
털썩.
혼이 빨려나간 듯한 모습으로 변해버린 전 야천귀문의 귀실귀주는 허무하게 쓰러졌다.
그가 아무리 하계의 끝자락에 있는 지선이 되었다 한들, 천범은 상계에서도 강자라 불리우는 향선이다.
그저 은연 중 풍기는 기운으로 압박한 것만으로 귀실은 꼼짝도 하지 못했고 자신이 만든 보패에 의해 죽음을 맞이했다.
“너희들도 그냥 보낼 수는 없지.”
귀실과 함께 있던 도사 둘은 귀실이 맥없이 쓰러지는 것을 보며 삼십육계 줄행랑을 쳤으나 얼마 가지 못했다.
“끄아아아악!”
백산파 제자들을 억압하고 무력으로 제압하려 했던 무뢰배들과 함께 화신통으로 불살라 태워버렸다.
사슬에 묶여 있던 제자들이 모두 무릎 꿇으며 천범에게 감사 인사를 하자 소청이 다가왔다.
“저자들은 백산파 장로로 위장해 있던 거였어요. 할아버지가 아니었으면 전 꼼짝 없이 당했을 거예요….”
“아직 네가 죽을 때가 아니라는 거겠지. 이리 날 만났으니 말이다.”
천범은 소청을 안심시키고는 돌연 허공을 향해 소리쳤다.
“이제 그만 네놈도 나오거라.”
불편한 심기가 담긴 그의 음성에 소청은 저도 모르게 움츠려들었다.
그리고 잠시 후.
은술로 몸을 숨기고 있던 사내들이 나타났는데, 소청은 그들을 보며 깜짝 놀랐다.
“아버지!”
이곳에 잠복하고 있던 것은 귀실만이 아니었다.
소청의 아비인, 천우 또한 이곳에 숨어 있었던 것.
소청은 반가운 마음에 천우에게 달려가려 했으나, 이내 우뚝 멈춰 서서 범과 아비를 번갈아 바라봤다.
“아버님….”
천우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감격스러워했으나 천범은 그렇지 않았다.
“네가 여기 있다는 건 소청을 노리는 자들이 있음을 알고 있었다는 소리구나. 그래, 네 딸을 미끼로 쓰고 무슨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느냐.”
반가운 인사도 해볼 만한데, 천범은 그를 나무라는 듯 몰아붙였다.
소년 티를 벗은 천우는 어느새 영겁의 경지였고 나이를 먹은 티가 여기저기 조금 나타났다.
수염도 자라 있어 겉으로만 보자면 중년 사내의 모습.
오히려 천범이 더 어려 보였다.
“우야. 네 누이의 일은 익히 들었다.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넌 네 친딸을 위험에 빠뜨렸구나.”
가족을 잃은 슬픔을 겪었으면서도 제 딸을 미끼로 쓰다니.
천범은 그것을 나무라는 중이었다.
천우는 아버지와의 해후를 만끽하지도 못한 채 변명해야 했다.
“어쩔 수 없었습니다. 백산파를 노리는 자들이 많았고 첩자로 스며든 이들을 골라내는 것도 어려웠죠. 그때 뻔히 보이는 수작으로 청이를 노리는 자들이 있어 일망타진할 수 있는 기회라 여겼습니다….”
“허나 그들의 실력은 네가 어찌할 수 있는 자들이 아니었다. 이곳에 만약 내가 없었다면 너와 네 딸아이가 어찌 되었을지 알고 있느냐.”
“그건….”
죽었을 것이다.
그리고 백산파는 놈들의 손에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고서는 장로로 위장해 잠입해 있었을 리가 없지 않는가.
조금씩 스며들어 천씨 일가를 하나하나 사고로 위장하여 죽였을 것이다. 그렇게 됐다면 백산파는 점점 와해되고 결국엔 세월 속에 사라져 후에는 이름조차 거론되지 않게 됐겠지.
“통감하느냐.”
천우는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예… 깊이 통감합니다. 모두 제 모자람 때문입니다.”
장성하여 딸까지 둔 백산파의 삼대 장문인 천우이지만 범의 눈에는 아직도 어리게만 보인다.
천범은 소청을 보았다.
“네 딸이기도 하지만, 내 어여쁜 손녀이기도 하다. 나는… 더 이상 내 피붙이들이 허망하게 죽는 꼴을 보고 싶지가 않구나.”
씁쓸히 말하는 천범의 말에 천우는 울컥 눈시울이 붉어졌다.
절로 누이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천우는 자리에 털썩 무릎 꿇고 이마를 땅바닥에 박았다.
“절대! 절대로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것입니다. 저는 물론이요, 아버님의 손주인 청이 또한 절대 허망하게 목숨을 잃지 않은 것입니다!”
“아, 아버지!”
백산파 장문이자 제 아버지가 무릎 꿇고 머리를 숙이니, 소청은 물론 제자들 또한 화들짝 놀라 무릎을 꿇고 용서를 청했다.
“부디 장문에게 용서를…!”
“용서를…!”
“요, 용서해주세요, 할아버지… 아버지도 나쁜 마음으로 그런 건 아닐 거예요.”
소청까지 저리하자 자신이 몹쓸 짓이라도 한 것 같았다.
“용서하고 말 것이 있더냐. 난 그저 하나 남은 아들에게 부탁한 것뿐이니 호들갑 떨 것 없다.”
천범이라고 어디 마음이 좋겠는가.
애써 키운 제자이며 사위였던 운모를 잃었고, 사고뭉치였지만 그래도 미워할 수 없었던 딸아이를 잃었다.
거기다 이런 우연이 겹치지 않았다면 하나 남은 아들과 손녀까지 잃을 뻔 했으니 그런 것이다.
답답함에.
복장이 터질 듯한 답답함에 그러한 것이다.
잃고 싶지 않아서.
죽지 않고 잘 살았으면 싶어서.
염려와 애정을 담아 말한 것이다.
“일어나거라.”
쿵쿵 머리를 박던 천우는 아비의 말에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누이를 잃은 슬픔은 나보다는 네가 더 하겠지. 태어날 때부터 함께였던 너희 남매였으니….”
범은 우에게 다가가 이마를 매만져 주었다. 바닥에 머리를 박더니 이마가 찢어진 줄도 몰랐나 보다.
범이 금빛 기운을 담아 이마를 매만지자 찢어진 상처가 도로 아물어 회복되었다.
“누가 네 몸을 함부로 하라했느냐. 그 또한 불효이거늘….”
“죄송합니다. 저 같은 거 말고 차라리 누님이 살아계셨다면….”
“지금 네 아비 앞에서 죽어야겠다고 말하는 게냐.”
“그, 그런 게 아닙니다….”
천범은 고개 숙인 천우를 보았다.
천유가 죽어서 그런지 얼굴도 조금 울상으로 변한 듯하다.
근심이 가득 끼어 있었다.
“아들아.”
“예, 아버님.”
“사는 게 힘들더냐.”
뒷짐을 지며 먼 산을 보며 말하자 천우는 입술을 가득 베어 물었다.
무슨 사내놈이 이렇게 눈물이 많은 건지. 딸아이가 있어서 그런지 잔뜩 힘을 주고 필사적으로 눈물을 참는 모습이 참 애통하다.
“내 갈 길이 바쁘지만, 그렇다 해도 아들과 술 한 잔 나눌 시간이 없는 것은 아니지.”
천범은 모르는 척 공정강에서 정자 하나를 꺼내 올라섰다.
그가 올라서자 정자에서는 안개가 만들어져 보이지 않았는데, 천우는 익숙한 듯 범을 따라 올라섰다.
정자 안에서 천우와 술잔을 나누며 그동안 못 다한 말을 나누었다.
천우는 실의에 빠져 있었다.
매형과 누이가 죽어 갑자기 백산파 장문이 되었다. 무거워진 어깨가 늘 자신을 짓눌렀다 한다.
“아버님은 어찌 이 모진 자리를… 아무것도 없던 백산을 어떻게 천하제일로 만드신 건지 모르겠습니다. 전, 자신이 없습니다.”
“내가 한 것은 없다. 모두 내 제자들과 곁에 있던 이들이 이룩한 것일 뿐이다. 네 아비를 너무 대단한 놈으로 보는구나.”
천우를 격려해주기도 했다.
자식을 둔 공감대가 형성되어 웃음이 나오는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가족보다는 수선에 힘썼던 자신을 책망하기도 하고, 아무것도 해주지 못해 미안하기도 했다.
‘생각해보니 처음이구나.’
하계에 있었을 적에는 등선을 목전에 두고 있어 아들딸들에게 신경 쓰지 못했다.
이렇게 술잔을 나누며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처음이었다.
그 점이 참, 후회로 남았다.
좋은 아비는 아니었다.
천범은 날 때부터 고아였다.
아버지가 무엇인지 모른다.
그렇다 보니 무엇을 해주어야 할지 몰랐다. 그도 아버지가 된 것은 처음이었으니까.
그러다 보니 아이들을 맡기다시피 하며 수행에만 힘썼다.
비록, 그 모든 시간이 의미없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가슴 한켠에 많은 추억을 쌓아주지 못한 후회가 남아 있었다.
천범은 꼬박 하루를 천우와 술을 마시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시는 겁니까.”
아쉽다는 듯 본다.
범도 떠나고 싶지 않았으나, 자신 때문에 이미 많이 지체되었다.
이제는 가 봐야 했다.
“네 어머니께 안부 전해주거라. 그리고 저건 네가 갖거라.”
천범은 정자를 흘겼다.
“사는 게 힘들거든, 저 정자에 앉아 나와 나누었던 술잔을 추억해라. 그리하면 대부분의 일은 술 한 잔을 달게 삼키듯 넘겨버릴 수 있겠지.”
아비와의 술자리가 마음에 들었다면 말이다.
“소청이 아버님을 많이 따르더군요. 적잖이 쓸쓸해 할 겁니다.”
“수도계의 때가 묻지 않은 아이더구나. 그 순박함은 널 닮은 거겠지.”
“부끄러울 뿐입니다.”
“할애비로써 그 아이에게도 해줄 수 있는 건 해주었다. 구륭절맥인지 뭔지는 더 걱정 안 해도 될 거다.”
천우는 화들짝 놀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버님이 고쳐주신 겁니까?”
“서서히 고쳐질 게다. 내가 품고 있던 장충지태를 넘겼으니 체질뿐만 아니라 뼈와 살도 단단해지겠지.”
그것만으로도 어디가서 맞고 다니지는 않을 것이다.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지….”
“내 손녀가 아프다는데 당연히 내가 고쳐줘야지 누가 고쳐주겠어.”
“감사합니다 아버님.”
“죄송합니다. 아니면 감사하다는 말뿐이구나. 어디 가서 맞고 다니지 말고 백산파에서 얌전히 수행이나 해라.”
그리 툴툴거렸지만 뭐가 좋은지 입꼬리가 귀에 걸린다.
“그럼 난 간다.”
“하, 할아버지!”
밖으로 나오니 기다렸다는 듯 소청이 범을 불러 세운다.
“불렀느냐.”
“저 열심히 수행해서 꼭 신선이 될 거예요. 그러면 할아버지랑 더 오래 볼 수 있겠죠?”
그렇겠지. 가능하다면 그럴 거다.
허나 그게 그리 쉽다면 초아도 진즉 곁에 있었을 것이고, 운모나 천유도 그리 허망하게 가지는 않았겠지.
하계에서 그 많은 수도자들 중, 지선과 영원이 되는 자들은 손가락에 꼽을 정도이고 그들 중에서도 등선에 성공하는 이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 등선이니, 어쩌면 아들과 손녀를 볼 수 있는 것도 이게 마지막일지 모른다.
멀쩡한 척 하지만 딸의 죽음은 가슴에 깊게 새겨져 응어리지고 있었고, 덕분에 초아에 대한 행방도 머릿속에서 연신 떠나질 않는다.
그리 매정한 것이 바로 수선이며 하늘이다. 등선이라는 게 얼마나 많은 이들이 바라는 것이며 무거운 것임을 소청은 아직 모른다.
모르니 저리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언제가 되서야 그 뜻에 담긴 무게를 알 수 있는 날이 오게 될까.’
그 무게에 짓눌려 손녀 또한 딸아이처럼 그리 되는 게 아닐까.
생각해봤으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할아버지와 더 함께 있고픈 손녀의 마음을 저버릴 필요 있겠는가.
“그래, 꼭 그리 될 거다. 청이 넌 나 천범의 손녀다. 못할 것 없지. 열심히 한다면 이 할애비보다 더 대단한 신선이 될 수 있을 게다.”
애정을 담아 어린 손녀를 꼬옥 안아준 천범은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는 다시금 계월선으로 향했다.
“제 부인과 자식들도 제대로 돌보지 못했던 나 같은 것보다는 천우, 오히려 네가 더 잘하고 있겠지….”
행복이란 것은 무엇을 추구하느냐에 따라 다르다.
범은 그 행복이 가족보다는 더 높은 경지로의 발돋움이었을 뿐이다.
허나.
오늘따라 범은 많이도 후회했다.
대도를 펼치기 위해서라고는 하나, 자식과의 추억 하나 만들지 않았던 이전의 자신이 참 원망스러웠다.
“살아가는 하늘이 달라져 후회를 되돌릴 수도 없게 되었구나. 나는 여기서 얼마만큼 더 나아가야 광명을 찾을 수 있단 말인가.”
힘을 원한 것은 소중한 이를 지키고 나의 뿌리를 찾기 위함이었거늘.
오랜 시일이 지나니 그마저도 흐릿해져 갈피를 잃게 되는구나.
“오늘따라 하늘이 참… 아득하군.”
쓸데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