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ll of the Spear RAW novel - Chapter (455)
낭선기환담-454화(455/600)
낭선기환담 – 2부 164화
자신이 되기 전의 미련.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범은 정확히 판단할 수 없었다. 때문에 질문해야 했다.
“그대가 금은자매라는 겁니까.”
“예.”
범은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허나 그리운 얼굴은 그녀에게서 찾을 수 없었다.
그녀는 금매와 은매가 합일되어 탄생한 존재.
완전히 새로운 존재였다.
하여 범의 표정은 식어갔다.
“처음부터 날 알고 있었군.”
처음부터였다.
그녀는 처음부터 범이 누구인지 알면서도 모르는 척 했다.
“예. 강렬한 기억 몇 개는 저도 가지고 있었으니까요.”
강렬한 기억 몇 개.
모든 걸 기억하고 있는 건 아니라는 뜻이었다.
애초에 그녀가 고름이란 것을 알려주고, 자신의 미련이라고 했다.
“고름은 금은자매의 것이군.”
“맞습니다.”
미련.
상계에 올라 새롭게 태어난 그녀가 지니고 있을 미련이 무엇일까.
그녀에게 있어 전생이나 다름 없는 금은 자매의 기억과 마음일 터.
“이루지 못할 마음이라 여겨 버리고 버렸습니다. 덜어내고 덜어내야만 하는 것이었기에 고름을 그리 내던져버렸지요.”
허나 두려웠을 것이다.
이대로 쉬이 없애버렸다 가슴 깊이 남아버린다면 지워낼 수도 없으니.
“심마가 생길까 봐 그러했군.”
“예.”
이전의 삶에 대한 미련이 남아 그녀를 괴롭히면 그것은 심마가 되어 수행을 가로막는 벽이 된다.
그녀는 그것을 두려워했다.
모든 수선들이 두려워하는 것이 바로 수행이 막히는 것이니 당연했다.
“그래서 내게 접근했군.”
“맞아요. 시기도 잘 맞았죠.”
화양은 처음 범을 보았을 때,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가 자신의 미련을 지워버리고 오랜 가슴앓이를 풀어줄 것이라고.
마침 옥별천왕과의 혼사도 부질없게 만들 수 있겠다 싶어 강행한 것이다.
‘그랬군.’
쿠르르릉.
옅은 먹구름이 하늘을 가리니 단 번에 마른 하늘이 어둑어둑해졌다.
그의 심정을 대변하듯.
화양이 밝힌 고백에 범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몰랐다.
이제는 사라진 그녀들을 그리워해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슬퍼해야 하는지도 애매했다.
금은자매는 사라졌지만 그들이 합일되어 화양이라는 존재가 나타났다.
그렇다면 화양은 금은자매나 다름이 없지 않겠는가.
‘허나 아니지.’
그녀들로 이루어졌다고는 해도 화양은 금은자매가 아니다.
그러니 참으로 애매했다.
“그녀들의 선택이었나.”
“네, 그녀들은 벽에 가로막혀 수명이 다해가고 있었습니다. 그 시기에 때마침 아버님이 찾아와 제안하셨고 그녀들은 그 제안에 따랐어요.”
“그랬나….”
천범은 뒷짐을 지고 먼산을 보며 크게 숨을 내쉬었다.
‘어쩐지 보이지 않더라니.’
그런 일이 있었던 것이다.
범은 운과 실력을 겸비하여 어렵지 않게 등선에 성공했다.
수행을 가로막는 벽은 거침없이 헤쳐나와 지금의 경지에 이르렀다.
허나.
모두가 그와 같지는 않다.
어느 범인은 검선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도 어려워 포기하기도 한다.
수선이라는 것이 그러하다.
아무리 노력해도 올라설 수 없는 때가 생기기 마련이다.
상계에 수선보다 소선이 더 많은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수선한다면 영원에 가까운 수명을 얻을 수 있음에도 상계의 여러 소선이 그러지 않는다.
아니 못한다. 그 이유가 무얼까.
‘드높기 때문이지.’
우리의 도는 하늘을 향해 나아가며 그것을 저항함에 있다.
법칙을 무시하는 존재가 바로 수선이니 누구나 할 수 있을리 없다.
그런 이유로 금은 자매가 수행의 벽에 가로막혀 그러한 선택을 하게 된 것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늙어 죽기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데 반해, 인간의 살점을 벗어던지고 하나로 합일되어 귀선이 되면 신선이 되는 것이다.
등선할 수 있는 거다.
더 넓은 세상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니 마다할 수 없었을 터.
가슴에 품은 대도를 펼칠 수 있다는데 어찌 사양할 수 있을까.
그녀들에게는 좋은 제안이었다.
비록 다른 존재가 되어버린다 해도 감히 누구도 그녀들의 선택을 옳다 그르다 판단할 수 없으리라.
게다가 그들은 자매로서 의가 좋았으니 결과적으로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을 것이다.
“왜 처음부터 말하지 않았나.”
“세월이 흘렀으니까요. 그녀들이 아는 당신과 지금의 당신이 같은지 저도 시험해봐야 했어요.”
그래야 신뢰할 수 있었을 테니.
그녀의 답변에 범은 조금 쓸쓸한 눈빛을 하다 고개를 돌렸다.
“…해서, 여기까지 날 데려온 이유는 뭡니까.”
범의 말투가 변했다.
그녀는 그 사실을 눈치챘으나 따로 별말 하지는 아니했다.
“그녀들의 미련을 당신의 손으로 이제 떠나보내 주세요.”
쿠르르릉…!
휘이이잉!
폭풍우가 몰아친다.
건원해의 바다가 격하게 출렁인다.
짙은 안개가 일렁이며 파도가 바위 위에 부서져 부산스러웠다.
“고름을 죽이라는 말입니까.”
“…예.”
그는 고뇌했다.
죽음이란 무엇일까.
육신의 생명활동이 정지하면 그것이 과연 죽음일까. 금매와 은매의 혼이 뒤섞여 인간의 살점을 버렸다면 그녀들은 과연 죽음으로 이른 것일까.
이제 이 세상에 남아 자의식을 지니고 움직일 수 없으니 죽은 것일까?
‘죽음이 이리 복잡했나.’
숨이 끊어지면 죽는다.
그리 간단했던 게 죽음이다.
한데 지금은 그리 간단치 않아졌다.
자신을 따르던 문무선이 죽었을 때, 범은 슬퍼했다.
자신이 낳은 딸아이의 죽음을 들었을 때 범은 가슴이 찢어졌다.
더 없는 슬픔을 맛보았다.
죽음이란 그러하다.
슬픈 것이다.
‘지금 내가 슬퍼하는가….’
애석하지만 그렇지 않다.
다시 만나지 못할 것을 알지만 그렇게까지 슬프지 않다.
그것이 오랜 세월 속에 흐려진 그녀들에 대한 마음 때문인지, 아니면 무뎌진 가슴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
폭풍우 속에서 아름다운 선율이 들려오기 시작한다.
귀를 정화시키듯 아름답고도 서글픈 음색. 범은 홀리듯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천천히 하늘에서 내려섰다.
“모르겠군.”
거친 바람과 파도가 그를 덮쳤으나 막아내지 못했다.
범의 곁에는 녹색의 투명한 보호막이 생겨나 모든 것을 막아냈다.
쿠구구구구구궁….
범의 손짓에 바다가 갈라져 길이 열렸다. 안에는 뿔을 하나씩 지닌 금색과 은색의 고래가 헤엄치고 있었다.
고래는 입을 열어 예의 아름다운 선율을 뱉어내며 하늘로 헤엄쳤다.
아름다운 고래다.
금색과 은색의 기류를 타고 노니는 모습을 보노라면 절로 가슴이 웅장해지기도 했다. 실로 거대한 크기요, 기묘한 기운을 지니고 있었다.
사하가 당할 만했다.
어느새 화양은 범의 곁에 다가왔다.
아련한 눈빛으로 고래들을 바라보며 읊조렸다.
“미련이란 게 그렇지요. 아니 되는 줄 알면서 놓을 수가 없어요.”
자신의 고름에서 나온 저것을 그녀는 미련이라 칭했다.
범은 화양을 보았다.
고래들과는 달리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서린 눈이었다.
미련을 끊어내는 것.
그리하여 과거가 아닌 미래를 향하여 내달릴 수 있도록.
그녀가 바라는 건 그것이었다.
하지만 화양 스스로가 행하지 않고 범에게 부탁하는 까닭은….
“그런가.”
나약한 과거의 미련과 동정.
자매들의 마음이 서린 헛된 미련.
그것이라도 범과 마주치게 한 것은 그녀의 작은 동정이었을 것이다.
지금의 자신을 있게 한 고름에 대한 일말의 동정이자 미련.
“과거를 향한 동정인가.”
손아귀를 펼쳤다.
그의 손바닥에 금색의 빛이 일렁이며 작은 불씨가 떠올랐다.
그것을 후- 하고 불자 불씨는 위태위태하게 민들레 홀씨처럼 날아갔다.
금색의 불씨는 이내 금색과 은색의 고래 꼬리에 붙어 불타올랐다.
천천히 불타오르는 고래들은 자신의 몸이 불타는 것도 모르는 채 하늘을 유영하며 헤엄쳤다.
헤엄치며 나아가는 고래들의 곁에 금색의 불씨가 사방에 떨어졌다.
그 어느때보다 밝게 빛나는 금빛이 사방 천지에 만연했다.
이내 온몸이 전부 불타 사라질 때까지 그들은 하늘을 향해 줄곧 헤엄치며 날아오르다 그렇게 사라졌다.
먹구름 가득했던 하늘은 어느새 푸르게 변해 화창했다.
효구가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고요하기만 했다.
허나 잠시 뒤. 무슨 일인가 싶어 나와본 귀선들과 붕계의 마선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제 가셔도 됩니다.”
범은 화양을 힐긋 바라보고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과거의 미련은 사라졌다.
그녀의 고름을 지워낸 이상, 화양도 범도 미련을 버렸다.
“우리의 인연은 이제 끊어졌습니다. 애초에 과거로 이어진 인연이니 끝맺음을 확실히 하고 싶었어요.”
“그렇군.”
무슨 말인지 확실히 이해했다.
어차피 오래 있어봤자 좋을 게 하나 없었다. 옥별천왕이 언제 나타날지도 모르니 여기서 이제 헤어지는 게 맞는 수순이었다.
지금은 전쟁중이니.
“허나 다음에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때는 과거가 아닌, 그녀들과의 인연이 아닌, 저와 닿은 인연이겠죠.”
범은 답하지 않았다.
“…그때가 올까요.”
“글쎄. 전쟁이 한창이라, 여기서 그대로 끊어질지 모르죠.”
전쟁이 아니라도 인생이라는 것이 그렇지 않던가.
언제 어디서 누군가 비명횡사해도 이상할 것 없는 세상이다.
신비로 가득찬 세상이니 어떠한 죽음으로 사라져도 이상치 않다.
이제는 사라진 금매와 은매처럼.
“그렇죠. 그렇겠죠.”
화양은 조금 실망스러운 기색이다.
허나 범은 알면서도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그럼 여기서 인사 드리죠. 잠시나마 저는 꽤, 즐거웠어요.”
화양은 등을 돌렸다.
“혹시라도. 다음에 우리가 만나게 된다면 상황에 따라 적으로서 마주칠지도 모르겠죠.”
“그럴지도.”
“그럼 지금처럼 편히 대화하는 것도 마지막일지 모르겠네요.”
“….”
“당신은 수계의 영웅이 될 사내이니 선살전에서도 큰 활약을 하겠죠. 그리고 전 사계의 공주로서 당신과 부딪칠 수밖에 없을지도 모르고요.”
“그렇겠지.”
“그럼 다음에 저희가 만날 곳은 전장이겠어요.”
그럴지도 모른다.
각자의 역할이 있고 배경이 있다.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다.
“괜찮겠어요? 절 적으로 만나도.”
많은 뜻이 들어있는 물음이다.
그녀가 어떠한 답을 원하는지 범은 알 것 같았다.
“내게는 나의 역할과 책임이 있고, 그대는 그대의 역할과 책임이 존재할 것이니… 그때가 온다면 서로의 역할과 책임을 다해야겠지.”
“…그렇죠. 그렇겠죠.”
화양은 차분히 가라앉은 눈으로 자신의 품에서 철가면을 꺼내 얼굴에 쓰고는 말했다.
“그럼 안녕히.”
그녀의 작별인사에 범은 전음으로 일행을 불러들였다.
영문을 모르는 사하와 후해, 그리고 사비는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범은 금빛 기운으로 일행을 감싸 하늘 저편으로 꼬리를 이으며 사라졌다.
홀로 남겨진 화양은 한참을 그가 사라진 하늘을 올려다보다 맥이 풀린 것처럼 숨을 토해냈다.
허탈감에 헛웃음 짓다 이내 등을 돌렸다.
* * *
수일 뒤.
하늘을 나아가는 거대한 검은 오룡의 위에는 사내 하나가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바로 천범이었다.
“갑작스럽습니다. 그래도 혼인하셨는데 괜찮은 겁니까?”
천범의 뒤에는 사하와 후해, 그리고 사비가 있었는데 갑작스럽게 떠나게 되어 어리둥절한 듯했다.
“괜찮고 말고가 어디 있어, 어차피 진심으로 혼인한 것도 아닌데. 그리고 사계의 귀선과 혼례를 치렀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지.”
사비가 후해를 탓하듯 말했으나 범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곁의 사하가 은근히 바라봤으나 홀로 생각할 게 있는 듯 시선을 마주쳐주지 않았다.
사하는 둘 사이에 뭔가가 있었는지 궁금했지만 구태여 묻지 않았다.
묻는 게 두렵기도 했고, 저 상태라면 말해주지 않을 것 같았다.
“근데 저희 어디로 가는 겁니까?”
“수계의 진영으로 복귀해야지. 생각보다 많은 수의 마선들이 이곳에 있으나 어려움은 없을 게야.”
중간중간 살선이나 마선들을 만나기는 했지만 대부분은 그들이 나서기도 전에 범이 순식간에 처리해버렸다.
화풀이를 하듯 순식간에 모두 죽여버리니 더 말 걸기 어려웠다.
벌써 며칠째 탐화의 머리 위에서 꼼짝도 않고 저리 있으니 말이다.
“음?”
그때였다.
탐화의 몸체에 앉아 있던 일행들은 순간 저 멀리서 느껴지는 기의 충돌에 모두 흠칫 몸을 떨었다.
“범!”
엄청난 크기의 기운이다.
사하는 물론 다른 이들도 긴장할 정도로 거대했다.
최소 향선 급의 전투가 벌어지고 있으리라.
“호들갑 떨지 마라.”
범은 낮게 일갈하고 천천히 전방에 신식을 퍼트렸다.
그리고 이내 눈썹을 꿈틀거리더니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
“붕계의 살선과 수계의 수선 여럿이 싸우고 있는 듯하다.”
“그럼 저희가 가서 도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후해가 외쳤으나 범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필요없다. 조금 더 상황을 두고 봐도 나쁘지 않겠어.”
“예? 어째섭니까?”
“수계의 군대를 이끌고 있는 놈을 내가 알거든.”
치열하게 맞붙는 공방에서도 유일하게 익숙한 기운이 느껴졌다.
“미씨 세가의 미세파…”
팔열도를 관장하던 그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