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ll of the Spear RAW novel - Chapter (463)
낭선기환담-462화(463/600)
낭선기환담 – 2부 172화
만각정.
“내게 인사도 없이 보냈더냐.”
만각변왕은 조금 불만이라는 듯 화양에게 눈치를 주고 있었다.
허나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차를 타고 있었는데, 제 아비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그래도 내 사위인데 고놈 참. 인사도 없이 떠나? 시건방진 게 아주 마음에 드는군. 응당 사내라면 그 정도 배포는 있어야지. 암.”
역정을 낼 줄 알았으나 그렇지도 않았다. 오히려 건방져서 좋다고 껄껄 웃으니 화양은 실소를 머금었다.
“한데 나야 그렇다 쳐도 그래도 네 서방인데 그리 떠나보내도 괜찮겠더냐. 밤이 외로울 터인데.”
“괜찮습니다. 잠시 즐거운 때를 추억삼아 평생을 살아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 정도면 저는 충분히 만족했고 심마 또한 없어졌으니 더할 나위 없지요. 이제는 그저 수행에만 매진해야 할 때가 왔을 뿐입니다.”
“하긴, 사위도 그렇지만 너도 이제는 슬슬 수행에 전념할 때지. 거슬리던 심마가 사라졌다니 다행이구나. 어서 네가 원형의 경지에 들어서야 나 또한 수행에 진전이 있을 테니.”
화양은 묵묵히 고개를 주억였다.
“한데 말이다.”
“말씀하시지요.”
“사내는 몸이 떨어져 있으면 마음도 떨어지는 법이다. 후에 부인 여럿을 줄줄이 달고 와도 괜찮겠느냐? 젊은 나이에 그 정도 수행에 힘까지 갖췄다면 들이대는 여인들이 한둘이 아닐 터. 너무 못난 놈을 반려로 붙 이는 것도 흠이지만, 너무 잘난 놈도 문제는 문제이니 이 아비는 그것이 조금 걱정이구나.”
허나 화양은 걱정 없다는 듯 옅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찻잔을 만각변왕에게 밀어주었다.
“걱정 없습니다. 생각보다 여인에게 큰 관심이 없는 분이니까요.”
* * *
같은 시각.
“기둥서방이 맞다고…?”
“…예. 그렇습니다.”
사내는 얼빠진 낯으로 한참을 멍하니 천범을 바라봤다.
기둥서방이 무엇이던가.
기생이나 몸 파는 여인을 돌보아주면서 얻어먹고 지내는 사내.
기생충 같은 놈을 뜻한다.
사내가 언급한 자는 개계오경의 주인인 오경계주 신위를 욕보이며 기생이나 다름없다 말한 것인데, 천범이 그걸 인정하며 자신 또한 기둥서방이 맞다 말해버리니 어안이 벙벙했다.
벙어리라도 된 듯 멍하니 입을 벌리고 눈만 끔뻑거렸다.
사내는 본래 오경계주인 신위와 원수지간이었는데, 그녀의 연초 냄새를 풍기는 천범을 보고 제자거나 관련 있는 자라 생각해 시비를 건 것이다.
신위와 자신을 싸잡아 욕하면 발끈하여 살기라도 드러낸다면 그것을 빌미삼아 손을 봐주려 한 것이었다.
한데 저리 인정해버리니 정말 사실인가 아니면 살아남고자 꾀를 부린 것인가 의아하여 말문이 턱 막혔다.
‘뭐하는 놈이지.’
오경계주가 정말 남자가 고파 기둥서방을 들인 건가 싶어 고개가 절로 갸웃하게 되었다.
“선배님. 이 후배가 아둔하여 세상 이치를 모릅니다. 가능하시다면 제게 선배님의 함자를 알려주시겠습니까.”
“아, 어어… 본인은 상천해월의 한 석을 맡고 있는 일신홍성(一信弘聖), 예동이다.”
일신홍성, 예동.
천범은 그 이름을 들어본 적 있다.
‘선계의 원선이 어째서 여기에….’
선계에서도 혼계에 속하는 원선이다. 혼계의 대표 격 인물이라고도 잘 알려져 있는데, 그의 화살 한 발은 아무리 먼 거리에서 쏘아도 백발백중이라 일신홍성을 적으로 돌리면 절대로 도망칠 수 없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보통 인물은 아니라 생각했으나 상천해월에 속하는 일신홍성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상천해월이 애초에 원선 중에서도 가장 오랜 세월 겁을 견뎌왔기에 명성이 드높은 자들이 아니던가.
지금의 천범으로서는 가히 대적할 수 없는 사내였다.
‘그래서….’
이제야 제 스승의 뜻을 헤아릴 수 있었다.
어째서 오경계주 신위와 일신홍성이 원수지간처럼 보이는지 몰라도 그의 물음에 범이 그렇지 않다고 했다면 어찌되었을지는 자명한 바.
스승을 욕보이고, 자신의 처지가 꽤 굴욕적이었으나 그래도 일단은 살고 봐야 하니 어쩔 수 없었다.
“신기한 놈이군. 내 오랜 세월 신위와 원한을 쌓고 지냈으나, 네놈 같은 녀석은 처음이다. 하! 아주 한 방 먹었어. 설마 기둥서방이라 시원하게 말할 줄이야. 정말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일신홍성도 천범의 말이 사실이라 생각하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세상에는 보잘 것 없는 자존심 하나로 목숨을 잃는 멍청이들이 모래알처럼 많지. 너의 경지에 들어선 이들은 슬슬 목소리에 무게가 깔리기 시작하고, 목이 뻣뻣해지기 마련이니 너와 같은 자는 드물지….”
일신홍성은 재밌는 물건을 발견한 아이처럼 흡족하게 웃었다.
“과찬이십니다.”
“본래 네놈을 죽이면 신위 그년이 화가 나 내 앞에 나타나지 않을까 했으나 흥이 식었다. 때마침 금제가 사라져 오랜 세월 묵힌 원한을 풀어낼 수 있지 않을까 했는데… 아쉽군.”
“절 죽인다 하여도 그분은 나타나지 않으시겠죠.”
“머리 굴릴 필요 없다. 난 한 번 아니라 했으면 행하지 않는 사람이다. 상천해월의 한 석에 앉은 사내가 한 입으로 두 말한다면 그 또한 망신이지.”
일신홍성은 품에서 호리병 하나를 꺼내고는 근처 바위에 앉아 꿀꺽꿀꺽 술을 마셨다.
“그런데 자네는 뭐하는 자인데 오경계주를 만난 건가?”
은근히 떠보는 듯 말을 건넨다.
범은 의심을 풀지 않은 채 답했다.
“수계의 수궁에 속한 자입니다. 아마 봉황의 깃 조각을 들고 있기에 만나주신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귀한 것을 지녔군. 봉황의 깃이라면 분명 탐이 날 물건이지. 대라천의 신수이니 그것을 이용해 법보의 위력을 올리거나 자신만의 원칙을 만들 수도 있을 테니… 한 잔 하겠나?”
“감사히 받겠습니다.”
“빼지 않아서 좋군.”
휙.
던져지는 호리병을 받아 한 입 마시고는 다시 돌려줬다.
“자네 이름이 뭔가.”
“유정이라 합니다.”
“좋은 이름이군. 내 몇 걸음 더 걸어본 선배로서 충고 하나 할까.”
“달게 듣겠습니다.”
“오경계주와는 너무 가까이 지내지 않도록 하게나.”
“이유를 알 수 있겠습니까.”
“오경계주는 적이 많다. 덕분에 그 년을 죽이고 싶어 하는 이도 많지.”
허나 개계오경에 처박혀서 나오지 않는 오경계주는 죽이고 싶어도 죽일 수 없는 존재.
그녀가 펼친 금제는 너무나 현묘하여 같은 원선들도 쉬이 깨트릴 수 없었고, 깨트린다 하여도 개계오경의 공간과 공간 사이에 숨어든 그녀를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니 그년의 제자를 죽여 없애고 싶어하는 노괴들도 많지. 오래 살고 싶거든 연관되지 않음이 좋을 게야. 나는 물론이요, 상천해월의 노괴들 대부분이 개계오경의 금제 때문에 수만 년간 이를 갈고 있으니까.”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알지 못했던 사실이다.
또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그녀의 제자가 되겠다 마음 먹은 지 하루도 채 되지 않아 저런 이야기를 들으니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만일 그녀의 공법을 익혀 대성한다면 필히 많은 적을 만들게 되는 것이 아니던가.
벌써부터 앞날이 캄캄했다.
“정말 제자가 아닌가?”
넌지시 묻는 일신홍성의 물음에 천범은 애써 웃으며 아니라 말했다.
“흠….”
일신홍성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더니 무릎을 탁 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긴, 검도 놈의 검술을 익히고 있는 듯하니 아니겠지. 괜한 소리를 했나 보군.”
“…그분을 아십니까.”
“당연히 알지. 자꾸 충고만 하게 되는데 그놈과도 별로 엮이지 않는 게 좋을 걸세. 그놈과 연관된 자들은 그 끝이 별로 좋지 않아. 오래된 내 친우 또한 놈에게 뒤통수를 당하고….”
일신홍성은 별말을 다 한다는 듯 너털웃음을 지었다.
“다음에 또 봤으면 좋겠군.”
“저 또한 그렇습니다.”
일신홍선은 뒤 돌려다 말고 다시 한번 천범을 바라봤다.
“내가 이런 사람이 아닌데 이상하군. 나이를 먹어서 그런가? 자꾸 창창한 젊은이를 보면 이런저런 충고를 하고 싶어진단 말이지.”
“괜찮습니다.”
“그리고 그 복충. 아마 탐의 핏줄을 이은 것 같은데 그리 가만히 내버려두면 큰 화를 입게 될 것이야.”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여태껏 차분함을 유지하던 천범의 가면이 깨졌다.
다른 건 몰라도 탐화에 대한 이야기였으니 동요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역시 모르고 있었나? 그 오룡, 승선의 준비를 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대로 뒀다가는 기운이 부족해 이성을 잃고 주인까지 잡아먹으려 들 게야, 잡아먹을 게 많은 곳에 재워 둬야 큰 탈이 없을 테니 적당한 곳에 던져두게.”
승선의 준비!!
범의 동공이 격하게 흔들렸다.
‘만각변왕의 일격을 막아낸 이후로 조용하다 싶었더니….’
그것으로 뭔가 깨달음이라도 얻었던 걸까? 탈형도 하지 않고 얌전히 있기에 그저 쉬면서 몸을 회복하고 있는 줄로만 알았다.
한데 승선이라니!
천범이 정말 몰랐다는 얼굴을 하자 일신홍성은 턱에 난 덥수룩한 수염을 매만지다 말했다.
“내 보기엔 십 년 안으로 준비를 해야 할 것 같군. 탐의 핏줄을 지녔다면 천겁을 치르지 않는 대신 많은 원기를 흡수해야 할 테니….”
“천겁을 치르지 않는다고요?”
“자기 복충에 대해 모르는 게 많군. 탐의 핏줄을 이었다면 천수의 후손이라는 것인데 하늘에게 잉태되어 태어난 핏줄을 지녔으니 당연히 천겁 또한 놈을 빗겨가지 않겠느냐.”
처음 듣는 소리였다.
천겁을 치르지 않는다니.
“하지만….”
탐화는 탐의 핏줄을 이었을 뿐, 엄밀히 따지자면 혼혈이다.
다른 피가 섞여 있는 지네인데 천겁을 받지 않는단 말인가?
‘생각해보면….’
금환선향에서 원천강을 집어 삼키고 상허의 경지에 올랐을 때도 천겁을 받지 않았다.
그때는 그저 금환선향의 특이점 때문에 그러한가 했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얼토당토 않는 생각이다.
“개계오경에서 북서쪽으로 향하다 보면 공각춘이라는 곳이 있다. 다양한 환수와 선충이 있는 곳이니 그곳으로 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게야.”
“공각춘….”
“그럼 다음에 또 보지.”
스르륵.
허공에 스며들듯 일신홍성이 모습을 감췄다.
천범은 즉시 신식을 뿜어 사방을 살폈으나 그의 흔적을 쫓을 수 없었다.
“공각춘(空殼春)이라…”
십 년.
일신홍성은 십 년이라 말했다.
십 년 안에 탐화의 승선이 시작될 것이니 공각춘에 던져 놓으라고.
십 년.
‘빠듯한 시간이다.’
이곳은 붕계와 인접한 곳.
공각춘이 어디인지 몰라도 상계는 그 크기가 어마어마한 하늘이다.
개계오경에 오는 것으로만 오십 년이 걸렸으니 두말해서 무엇할까.
“공각춘이 십 년 안에 도달할 수 있는 곳이기를 빌어야겠군.”
“그곳으로 가려고?”
“갈 수밖에 없지.”
탐화를 딸이라 생각한 지 오래다.
딸아이가 승선할지도 모른다는데 가만히 있을 아비가 어디 있을까.
“공각춘에 대해 알아?”
“나는 잘… 미세파 금부나장이라면 알고 있지 않을까? 현천무장을 역임하셨을 때 많은 곳을 돌아다니며 활약하신 전적은 익히 들었으니 아마 알고 있을지도 몰라.”
“흠… 그래야겠어. 가자.”
“응!”
금색 빛줄기로 화해 순식간에 사라지자 기다렸다는 듯 허공에서 스르륵 일신홍성이 나타났다.
일신홍성은 천범이 사라진 방향을 보며 눈가를 가늘게 떴다.
그리고는 품에서 화살 하나를 꺼내 바닥에 내던졌다.
푹.
화살 쪽이 지면을 향해 박혔다.
이내 천천히 연기가 새어나오더니 화살이 사람의 인형으로 변했다.
“쫓아라. 그럴 리 없다 생각하다만 신위의 제자일지도 모른다.”
“제자라 확신이 들면….”
“죽여라.”
“존명!”
스르륵.
화살이 변한 존재는 다시금 화살로 변해 모습이 흐릿해져 사라졌다.
“너무 억울해 하지는 마시게. 손대지 않는다 했으나 평생 그러하지 않는다고는 하지 않았으니.”
그리 말한 일신홍성은 뭔가 석연찮은지 쯧 혀를 찼다.
“괜히 그년 냄새를 풍겨서는.”
일신홍성은 한참이나 아쉬운 듯 한숨을 내쉬다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