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ll of the Spear RAW novel - Chapter (476)
낭선기환담-475화(476/600)
낭선기환담 – 2부 185화
북쪽의 땅.
그곳의 안락한 땅에는 조용히 휴식을 취하고 있는 수사슴이 있었다.
사슴의 뿔과 털은 모두 회색으로 뒤덮여 있었고, 눈은 푸른색이라 묘하게 신성한 느낌을 주었다.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모습.
이 사슴이 바로 북쪽의 주인.
화담이었다.
스르륵.
화담이 눈을 떴다.
[내가 꿈을 꾸고 있던 게 아니었군. 오랜 세월을 지나 이제야 그분의 목소리가 내게 닿을 줄이야….]그리 중얼거린 화담은 자신의 머릿속으로 들려온 그리운 목소리를 곱씹으며 충수들을 불러 모았다.
[진정한 주인이 되기 위한 증표는 대흉목을 차지하는 것. 오랜 세월 북쪽의 주인으로서 너희들을 이끌었으나 이제는 그것을 내려놓으려 한다.]웅성웅성.
수천 마리가 모인 충수들을 내려다본 화담은 선언했다.
[나 화담은 북쪽의 주인을 내려놓고 이제, 대흉목의 주인이 되겠다. 지난 만 년간 아무도 차지하지 못했던 대흉목을 내 것으로 만들어 하늘의 뜻을 이루고 이곳의 평화를 이루겠노라!]우오오오오오오!!
[서쪽의 주인은 죽었다. 남쪽의 주인은 싸움을 피한다. 남은 것은 오로지 동쪽의 주인뿐!]쿵!
화담이 지면을 내려찍었다.
[나와 뜻을 함께할 자들은 동쪽으로 가도록 한다. 이의는 받지 않으리. 우리의 앞에 펼쳐진 길은 죽음 또는 오로지 승리이리라!]쿵! 쿵! 쿵!!
우오오오오오!!
북쪽의 땅이 들썩인다.
화담이 발을 박찬다.
풀쩍 뛰어올라 단숨에 동쪽으로 향하니 숲길이 좌우로 갈라지며 그에게 길을 내준다.
그 길을 따라 충수들이 뒤따르며 지진과도 같은 진동이 일어난다.
‘많이도 변했군.’
아무 힘도 없어 마수로 변할 수밖에 없었던 그 소년이 맞는지 지금은 의심스러울 따름이다.
물론 처음 한 백 년 정도는 싸움을 피하고 도망 다니기만 했다.
그러다 우연히 월야석수의 피와 살점을 취하고 몇 번의 전투를 거듭해 성장하더니 저렇게 변모했다.
화담이 변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작은 가능성과 경험.
그리고 마음가짐이었다.
이제는 누가 보아도 강력한 충수로 볼 것이며 늠름한 북쪽의 주인.
그렇게 바라볼 것이다.
만 년.
만 년이란 시간은 아무것도 모르던 소년을 저리 만들어버렸다.
천범은 다시금 시간이란 것에 위대함을 깨달으며 그를 지켜봤다.
“비룡은 어떻습니까.”
“이제는 하늘에 맡겨야지요. 저희가 할 수 있는 것은 조금의 조언뿐. 나머지는 저들이 하는 것이니.”
머릿수는 화담이 앞선다.
허나 힘은 비룡이 더 강하다.
천범도 어찌될지 궁금했다.
“저들 시간으로 삼천 년 전에 한 번 붙어보고는 처음이군요.”
삼천 년 전 화담이 우연히 비룡과 만나 싸우고 겨우 목숨만 건져 돌아갔던 일화가 있다.
그때는 일대일로 싸웠던 것이니 조금 다르겠지만 양상이 어찌 바뀔지는 속단할 수 없는 법.
“시작했군요.”
선두로 달리는 화담의 은색 털과 뿔이 동쪽의 땅에 진입했다.
북쪽과 달리, 동쪽의 땅은 화담에게 길을 열어주지 않았다.
[하늘의 계시를 받았다. 네놈을 죽여 피를 마시고 대흉목의 주인이 되라는 계시였지. 너 또한 그러한가.]동쪽의 땅에 발을 내딛자 불현듯 비룡의 목소리가 화담에게 꽂혔다.
긍정한 화담의 앞에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뱀의 몸에 박쥐의 날개를 한 거대한 충수의 모습. 동쪽의 주인.
비룡이었다.
[작은 몸뚱이와 왜소한 뿔로 날 찔러 죽일 수 있을 것 같지는 않군. 아니면 이곳과 저곳에서 꼬랑지를 내리고 달아난 이들을 모은 오합지졸의 군대로 나에게 맞설 생각인가? 어리석다. 힘의 차이는 분명할 터. 어찌하여 죽음을 향해 발을 내딛나.]신랄한 평가에도 화담은 묵묵히 발을 내디뎠다.
[지난 세월, 몇 번의 죽음을 겪었다. 허나 그럼에도 나는 살기를 원했고 아직까지 살아남았다. 그러니 한 번 더 나는 살기를 바란다.] [헛소리.] [난 살기 위해 싸우는 것이다.]쿠구구구궁.
비룡의 움직임에 나무가 쓰러진다.
그의 쭉 찢어진 커다란 안구가 화담을 눈에 담는다.
[북쪽에 모인 도망자들처럼 도망다니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 터. 한데 살기 위해 싸운다? 나로서는 이해하지 못할 일이군. 상대를 끌어들여 유리한 고지에서 싸우는 것도 아니고 아무런 전략도 없이 들이닥치는 것이 살기 위한 방법인가?] [동쪽의 주인이여. 아직도 나를 얕보고 있으면 아니 될 것이야.] [헛소리를.]쿵!
전쟁은 그렇게 시작됐다.
지면을 박차고 달려 나간 화담의 눈이 은빛으로 물들더니 하늘이 곧장 어두워져 달빛이 만연했다.
달빛 아래 어두운 그림자가 꿀렁거리며 묘하게 움직였다.
[가소롭다!]그림자 속에서 검은 촉수가 튀어나와 비룡의 몸체를 휘감았다.
허나 비룡이 비늘을 바짝 세워 몸을 털어내니 촉수는 단번에 찢겨나갔고, 날개를 활짝 펼쳐 하늘로 날아오르니 달려들던 충수들은 닭 쫓던 개마냥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쿠르르릉!!
동시에 하늘에 먹구름이 가득하고 천둥번개가 요란하게 울려댔다.
비룡이 하늘을 향해 입을 쩌억 벌리자 그곳으로 번개가 내려쳤다.
푸른 번개를 머금은 비룡의 입 안이 번쩍번쩍 거리더니 순식간에 화담을 향해 토해냈다.
콰광!!
콰아아아아앙!!
비룡의 입에서 발사된 번개가 채찍처럼 내려쳐 지면을 폭발시키고 일대의 숲을 모조리 터트렸다.
생각 외로 강력한 번개의 힘에 북쪽의 충수들은 화들짝 놀라 몸을 주춤거렸다. 자신들과 차원이 다른 강함에 겁먹은 것이다.
화담은 삼천 년 전보다 더 강해진 비룡의 모습에 마른침을 삼켰다.
허나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이미 전투는 시작됐고 자신이 물러서면 북쪽의 모든 충수가 겁을 집어먹고 싸우지 않을 것이다.
쿠웅!
그가 발굽으로 지면을 찍자, 일대 숲의 초목이 일시에 시들어버렸다.
마치 생기를 빼앗긴 듯 시들어버린 초목과 달리 화담은 힘이 가득했다.
은색의 입자가 화담의 곁에 만연 하여 힘이 들끓었다.
화담은 곧장 지면을 박찼다.
콰앙!!
뿔로 들이박자 비룡이 휘청거렸다.
[크윽! 건방진!]휘청거린 비룡은 꼬리로 화담을 쳐내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이내 천둥이 요란하게 울려 퍼지며 비룡의 몸으로 천둥이 스며들었다.
전신의 몸에 푸른 번개가 타고 올라 사방으로 낙뢰를 쏘아댄다.
쾅, 콰아아앙!!
강력한 낙뢰에 충수들은 모두 도망가기 바쁘고 그 틈에 하늘에서는 폭우가 쏟아져 내린다.
일대가 모조리 폭우에 흠뻑 젖어 버리자 한줄기 떨어진 낙뢰에 대다수의 충수들이 감전되어 몸을 떨었다.
화담은 절망했다.
힘의 차이가 너무도 컸다.
수많은 충수들이 놈의 번개 몇 방에 죽어나갔고, 빗물을 불러내 자신의 신통을 극대화시켰다.
숫자의 우위는 의미가 없어진 지 오래요, 힘의 차이는 극명하니 화담은 허망함에 이를 갈았다.
쿠구구구궁.
어두운 하늘.
푸른 천둥이 요동칠 때마다 비룡의 거대한 몸체가 선명하게 보였다.
충수들을 집어 삼키고 번개를 내리쳐 사지를 찢어버린다.
이미 승기는 기울어진 지 오래였다.
비룡은 호기롭게 말하며 번개를 흩뿌렸다.
화담은 힘없는 다리를 덜덜 떨며 일어서 은색의 기운을 방출했다.
기운은 다시금 초목의 생기를 흡수해 화담에게 온기를 가져다주었다.
싱그러운 초목의 생기만 있다면 언제든 흡수하여 자신의 몸을 치료하고 활기를 북돋을 수 있다.
화담의 능력은 그러한 것이다.
이 능력으로 북쪽의 땅을 삭막하게 만들었으나 그는 점점 힘을 키웠고 그렇게 지금의 화담이 되었다.
‘힘이 부족하다.’
허나 지금은 가능할 법 하지 않다.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싸우고 치료하고를 반복하면 이길 수 있을 거라 믿었다.
허나 힘의 차이가 극명한 지금.
화담에게 더 이상의 희망은 남아 있지 않았다.
화담은 주변을 보았다.
자신의 능력으로 푸석해진 초목은 슬쩍 건드리는 것만으로 바스라지고 사라져갔다.
자신의 앞날을 보는 듯 했다.
희망이 사라졌다.
“승패가 대충 난 것 같군요.”
예자는 환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돈랑의 우랑은 패했다.
허나 비룡은 아니었다.
동쪽의 비룡은 지난 세월동안 줄곧 동쪽에 자리 잡아 힘을 비축하고 기르며 사색을 즐겼다.
힘의 낭비를 즐기지 않았고 자신의 수행을 이루며 저렇게 강력한 충수로 거듭나 있었던 것이다.
예자는 자신의 분신이라도 되는 듯 애틋한 눈으로 비룡을 바라봤다.
“힘의 쓰임새는 저리 해야지요. 함부로 낭비하지 않고 때가 되었을 때 온전히 내보여야 하는 법.”
틀린 소리는 아니다.
“아직 승부는 나지 않았습니다.”
허나 맞는 소리도 아니다.
아직 승부는 나지 않았다.
화담은 아직 멀쩡했다.
“이미 끝난 일 아니겠습니까. 북쪽의 수천 충수들을 모두 데려왔지만 지금 누가 우위에 있습니까.”
비룡이었다.
“천 수선은 아직 화담이란 수사슴에게 승기가 남아있다 보십니까.”
범은 말을 아꼈다.
그가 보기에도 승기는 이미 비룡에게 기울어져 있다 봐도 무방하다.
허나.
“제게는 보입니다만, 화담 또한 그러할지는 모르겠군요.”
“그게 무슨 소리신지.”
“본래 죽었어야 할 놈이 아직까지 살아 있으니 저는 그래도 끈을 놓지 않아 보렵니다.”
천범의 입이 달싹였다.
화담에게 조언을 내려주는 중일 터.
예자는 그를 마지막 발악으로 치부하고는 그 또한 비룡에게 조언을 내렸다.
-놈의 피와 살을 취하고 대흉목의 주인이 되어라. 그리하면 널 새로운 하늘 아래로 불러줄 터이니.
예자의 말을 들은 비룡의 기운이 더욱 거세졌다.
콰과광! 콰릉!
몇 번의 번개를 더 내려쳤다.
화담은 가까스로 그것을 피했으나 전신이 상처투성이였다.
은색의 털은 검게 그을렸으며 한쪽 뿔은 부러져 붉은 피가 새어나왔다.
승패는 정해져 있었다.
콰아아앙!!
쿵! 쿠웅!
다시 한번 번개가 내려 떨어지고 그 여파에 화담이 땅바닥을 굴렀다.
스르륵.
주변의 초목이 바스라졌다.
다시 한번 초목의 생기를 흡수한 화담이 가까스로 몸을 일으켰다.
갓 태어난 새끼 짐승마냥 네 다리를 덜덜 떨었다.
비룡은 참으로 끈질긴 놈의 모습에 눈살을 찌푸렸다.
허나 이내 눈을 번쩍 떴는데 화담을 쫓다보니 어느새 대흉목 바로 앞까지 와버렸기 때문이었다.
[이곳인가.]이곳의 충수 모두가 원했던 곳.
대흉목이 자리한 곳.
동쪽의 비룡은 가슴이 벅차올랐다.
이제 곧 대흉목은 자신의 것이 되고 그리되면 자신에게 새로운 하늘을 약속한 자를 따라갈 수 있게 될 터.
새로운 하늘.
새로운 세상이 그를 기다렸다.
[그러니 죽어라.]콰아앙!!
다시 한번 번개가 내려쳤다.
이제는 비룡도 힘이 다하고 있었다.
어서 빨리 놈의 숨통을 끊고 이 전쟁을 끝내야 했다.
쉬이익.
번개가 내려친 자리에는 은색 사슴이 검게 그을려 쓰러져 있었다.
비룡은 드디어 이 오랜 싸움의 종지부가 찍혔음에 감격했다.
그때였다.
후우웅.
푸른 잔디의 색이 바랜다.
대흉목의 중심이 쩌적!! 갈라지며 반으로 쪼개졌다.
일대가 잿빛으로 변해 생기를 잃어버리고 은색의 기운이 창궐했다.
[대흉목이!!]거대한 대흉목이 갈라져 바스라지고 그 위로 은색의 사슴이 떠올라 주변의 모든 생기를 갈구한다.
눈부신 은빛이 세상을 점거하고 하늘 아래의 모든 생기를 빨아들인다.
“이럴 수가!”
당황한 예자의 목소리와 동시에 천범의 손이 다급히 움직였다.
쉬익, 쿠우우웅!!
공정강에서 꺼내진 일대의 숲과 화담 그리고 비룡이 모습을 드러냈다.
쿠르르릉! 쿠르릉!!
삽시에 하늘이 어두워진다.
“이건….”
눈부시게 빛나는 사슴의 모습과 비명을 내지르는 비룡.
난리가 난 상황에서 천범은 먹구름 가득한 하늘의 구멍에서 내려치는 천뢰를 보았다.
그것은 천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