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ll of the Spear RAW novel - Chapter (505)
낭선기환담-504화(505/600)
낭선기환담 – 2부 214화
건원해가 열린다라.
천범은 이전, 상계에 처음 등선했을 때 사하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건원해는 태초부터 존재한 구름의 바다입니다. 상계의 그 어떤 곳도 건원해를 초석으로 삼아 쌓아올려진 것이나 다를 바 없지요.’
‘그런가.’
‘건원해는 상계에 존재한 신선들이 마지막으로 향해야 하는 곳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 무서울 것 없는 원선들조차 건원해로 들어가 대부분 죽어버렸으니 경원시하게 될 수밖에 없지요.’
사하는 분명 그리 말했었다.
산의 기억을 안고 있는 천범이 보아도 건원해는 미지의 바다이다.
산이 스승이라 부르는 존재들이 땅을 가르고 건원해를 샘솟게 하였으나 지금에 와서는 원선이 마지막으로 향해야 하는 곳이라 암암리에 전해지는 곳이라고 한다.
어찌하여 그런 전설이 전해지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상계의 수선들은 대부분 그렇게 알고 있었다.
혹시 몰라 만각변왕에게 묻자.
“건원해가 열리는 이유? 그것이야 나도 모르오. 원선태사들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역사를 지닌 이들이라면 알지 모르겠으나… 난 모르겠군.”
만각변왕 또한 자세한 내용은 알지 못한다 한다.
그저, 원선이 죽어 천지원기가 사방으로 뿜어지면 천지가 뒤엎어지는데 그 영향으로 건원해 또한 뒤집어지니 그런 게 아닐까 예상해볼 뿐이었다.
“건원해란 참 신비하지. 제아무리 고명한 신선이 천지를 다 꿰뚫는다 하여도 건원해까지 통찰하지는 못하는 법이지 않소. 위험하고도 신비로운 곳이 바로 건원해이니… 나도 소싯적 건원해의 신비에 빠져 여러 방향으로 탐구하던 때가 있었소.”
“그러셨습니까.”
“건원해의 바닷물이나 짙은 구름을 가져와 살펴보기도 하였지.”
허나.
“알아낼 수 있는 건 없었소.”
건원해에서 떠낸 바닷물과 구름은 아무리 살펴도 그저그런 물과 구름이라 딱히 뭔가가 있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건원해에 빠지면 기묘한 감각과 함께 옮아매려 하니 대부분은 그저 기분 나빠하고 일부의 신선들은 구심점이 되는 곳이 있을 것이라 추측만 할 뿐이었다.
천범은 건원해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다 고개를 내저었다.
‘지금 생각해봤자 답이 나올 거 같지는 않군. 산의 기억으로는 건원해 자체가 하나의 관문과도 같은 느낌이었으나… 모든 게 확실치 않다.’
아무튼.
원선태사들이 건원해로 모인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성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상천에서 무엇 하나 두려울 것 없는 자들이라지만 그들 또한 천겁에 의해 목숨이 좌지우지되는 한낱 피조물일 뿐이니….’
대라신선이 되어 영원불멸을 누리고 싶지 않은 자가 없을 터.
반드시 모여들 것이다.
‘굳이 판을 짤 필요는 없겠어.’
알아서 시작을 할 테니.
“그런데 화양 공주는 어디….”
“불가피하게 옥별이 만각정에 찾아오지 않았소. 그러하여 급히 다른 곳으로 보낼 수밖에 없었지.”
“그럴 필요가….”
그럴 필요까지 있었느냐 물으려던 범은 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다.
만각변왕이 입을 달싹여 전음으로 은밀히 말했기 때문이었다.
-내 이런 말까지는 전하지 않으려 했소만… 옥별은 임자 있는 자의 것을 더욱 탐내는 자이오. 하니, 사위님 또한 제 것을 지키려거든 더욱 신중해야 하지 않겠소.
오랜 세월을 살아온 자들을 왜 노괴라 부르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범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면 화양 공주는 어디에….”
만각은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벽 한켠에 걸려 있는 상계의 지도 중 한 곳을 가리켰다.
그가 가리킨 곳은 상계의 중심에서도 동쪽.
바로.
“수계군요.”
수계에 있었다.
“지금쯤이면 한창 수계의 군대와 실랑이를 하고 있겠군. 본래라면 겸사겸사 반려를 만나겠거니 했겠소만….”
천범이 이곳에 있으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군요.”
이왕 만각정까지 왔으니 얼굴이라도 한 번 보려 했건만.
엇갈리게 되었다.
‘사계의 군대를 이끌고 전장에 서 있는 것인가.’
위험하지 않은가 했으나, 생각해보니 딱히 그렇지도 않다.
그녀라면 가장 안전한 후방에 있을 것이고, 만약 전쟁에서 패한다 하더라도 만각변왕의 자식이라면 죽이지는 못할 것이다.
볼모로 잡혀 인도 되겠지.
‘화양의 실력이라면, 순순히 패하지도 않을 것이니….’
굳이 걱정할 필요는 없을 터.
“어차피 수계로 향할 것 아니신가?”
“예. 그래야지요.”
천외양군과 호리.
아니, 이제는 주린이라 불러야 할까.
그들이 수계에서 기다리고 있을 터니 슬슬 돌아가 봐야 함이 옳다.
‘부인이 있는 천락경곤이야 언제든 문을 열 수 있으니… 수계로 향하여 얼굴 한 번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화양과 어색하게 헤어졌던 것이 내심 마음에 남아 있었다.
괜시리 마음이 찜찜하게 남았으니, 기회가 된다면 한 번쯤 다시 만나 보고픈 마음도 있다.
“언제 떠나시겠소.”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빠르면 빠를수록 좋겠지요.”
“그렇구만…. 우선 쉬시오. 이거 또 사람을 잡아 두었구먼.”
“아닙니다. 장인어른.”
“그럼 푹 쉬시게.”
만각변왕이 처소에서 나가고 나서야 천범은 자리에 앉았다.
본래 화양 공주가 쓰던 방이다.
천범도 이곳에서 하룻밤 묵은 기억이 있는 방이었는데, 이전과 달라진 게 하나 없어 괜시리 편히 있을 수 있는 곳이었다.
“주인은 온데간데없고, 쓰던 방만 남아 있구나.”
처소 주인의 대한 생각을 잠시 골몰하고 있자, 바깥에서 인기척이 들려온다.
“누구냐.”
물으니.
“만각정에서 화양 공주님을 모시던 아랫것입니다….”
라며 들어온 여인은 품에 자그마한 술병 하나를 들고 있었다.
짐짓 감정을 숨기고 있으나, 은연 중 떨고 있는 그녀의 몸과 손이 천범을 두려워하고 있음을 모르지 않았다.
하기사, 만각정의 시녀 노릇을 하고 있는 자라면 위치로 보나 경지로 보나 원선태사인 천범을 두려워하는 것이 지당하다.
“장인께서 널 보내신 게로구나.”
시녀의 옷가지가 퍽 얇아, 술과 잠자리 시중을 들게 하기 위함일 터.
“쓸데없는 짓을 하셨구나. 술을 놓고 넌 물러가도 좋다.”
마침 술이 고프기야 했으니, 술은 좋으나 시녀까지는 필요치 않다.
“아, 아닙니다.”
허나 시녀의 말이 심기를 거스른다.
“아니라니, 뭐가 아니란 게냐.”
“만각정의 주인어른께서 보내신 것이 아닙니다.”
“장인께서 보내신 게 아니다? 그럼 누가 보냈더냐.”
옥별천왕?
“화, 화양 공주님께서….”
천범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화양은 수계의 전선에 나가 있음을 모르지 않는데, 어찌 네게 나의 시중을 들라 명하였단 말이냐. 감히 내게 거짓을 고하는 것이냐.”
기분이 언짢아지자 처소에 천범의 기운이 가득 메워진다.
시녀는 순간 숨이 턱 막힌 듯 전신을 사시나무 떨듯 벌벌 떨다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참이옵니다! 오래 전! 화양 공주께서는 자신이 이곳에 없을 때 천가 성과 범어 범자를 쓰시는 분이 나타나시면 이것을 전하라 하셨습니다!”
“…화양 공주가?”
이윽고 시녀가 건네는 술병을 받아 드니, 익숙한 향기가 천범의 코끝을 스치었다.
“이건….”
딸깍.
술병의 마개를 열어보니 안에는 영롱한 벌꿀주가 들어 있다.
“애노벌주로군.”
오래 전, 만각정에 왔을 때 화양이 건네준 술이었다.
그때 이 술을 진탕 마시고 취해버렸던 기억이 떠올랐다. 한결 누그러진 천범의 표정에 시녀는 한시름 놓으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애노벌주는 화양 공주님께서 혼례를 치르신 이후에… 만드신 것입니다. 딱 한 병만 만들었는데, 오직 한 분에게만 전하라 하셨습니다….”
“그게 나인가?”
“예.”
시녀가 가져온 술병을 자세히 보니, 하늘 천이 쓰여져 있었다.
“그게 다인가?”
“예?”
“다른 전언은 없었는가.”
“소, 송구스럽게도….”
“그렇군.”
따로 전언을 남겨 두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범은 시녀에게 축객령을 내리고 애노벌주를 술잔에 따랐다.
향은 이전보다 더욱 깊고 농익은 듯 보였다.
이내 술잔을 털어 넣으니.
“쓰군.”
쌉싸름한 쓴맛이 느껴졌다.
애노벌주 특유의 달달한 벌꿀주가 아닌, 그저 독주처럼 쓰기만 했다.
일부러 쓰게 만든 것처럼 쓴맛이 전신에 짜릿하게 퍼지고 독하기는 어찌 독한지 벌써부터 후끈 달아올랐다.
“웬 술을 남겼다 했더니….”
왜 남겼는지 알 것 같았다.
그녀와의 추억이 새겨져 있는 애노벌주는 본래, 처녀의 목욕물을 받아 만드는 것.
허나 이 술은 화양이 혼례를 치른 이후에 만든 것이라 했다.
그러니 당연히 쓰디 쓴 것.
“내게 불만이 많으신 것 같군.”
이 술은 화양이 천범에게 향한 불만은 내포한 것이다.
술의 맛이 쓰게 된 것은 자신이 더 이상 처녀가 아님을 말하는 것이고, 그럼에도 향은 더욱 깊어져 잡다한 것들을 끌어들이니….
“책임을 지라는 소린가.”
피식.
헛웃음을 흘린 천범은 화양이 남긴 술 한 잔에 담긴 무언의 압박이 느껴져 한참을 씁쓸하게 웃으며 술잔을 입에 머금었다.
한 잔, 두 잔 먹다 보니 꽤나 독한 술이라 벌써 정신이 알딸딸했다.
깊고 깊은 밤.
호롱불 하나에 의지하여 화양의 방 한켠에서 술잔을 꺾는 천범은 묘한 미소를 그리며 동이 틀 때까지 의자에 앉아 그녀의 술을 음미했다.
얼마 있지도 않은 그녀와의 추억을 여러 번 곱씹으며.
* * *
같은 시각.
수계 인근.
수계의 군대와 사계의 군대가 맞물려 있는 곳.
언제 전투가 발발할지 모르는 곳에서, 사계의 군대를 이끄는 여인이 하나 있었다.
금과 은으로 된 머리칼을 지니고, 철로 된 가면을 쓰고 있는 여인은 냉철한 판단력과 현묘한 환술로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데 일조했다.
그녀는 사계의 왕.
만각변왕의 여식인 화양 공주였다.
철가면으로 얼굴을 가렸으나, 그녀의 미색을 감추는 것은 불가능이었기에 많은 이들이 천장을 통솔하는 그녀에게 구애했다. 그러나 화양은 단 한 번도 그들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자신은 이미 짝이 있기 때문이었다.
혼례도 치른 아녀자였기에 함께 수계를 공략하는 사선들의 구애에 응할 이유조차 없었다.
허나 그럼에도 그들은 그녀를 귀찮게 했고, 전장이라는 특수성 때문인지 뭐 모르고 강압적으로 나오는 사내들도 여럿 있었다.
허나 그럴 때마다 화양 공주는 그들을 구워삶아 전장으로 내보냈고, 혈기 넘치는 사내들은 모두 훌륭한 위업을 이루고 전사했다.
그렇게 차근차근.
수계의 전선을 짓밟은 화양은 남서쪽에 위치한 섬 몇 개를 장악해 그곳에 자리 잡으며 전장을 이어나갔다.
허나 그녀의 저돌적인 인해전술과 만각변왕의 여식다운 현묘한 환술에 맞서는 자들이 있었으니.
바로 수계에서도 쌍선대라 불리우며 으뜸이라 칭해지는 군대였다.
쌍선대 때문에 그녀의 진격은 삼백 년 정도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었고, 오늘도 평온을 가장한 기습을 꾀해 쌍선대의 방벽을 무너뜨리려하고 있던 중이었다.
“음?”
화양의 거처 안에 전음부가 날아와 읽어 내려가자 재밌는 내용이 적혀져 있었다.
“무슨 내용입니까.”
“우리가 장악한 여섯 개의 섬들 중 다섯 개가 동시다발적으로 기습을 당했고, 셋은 막았으나 둘을 빼앗겼다고 하는군요.”
그 중에서 사로잡은 인질이 있는데 쌍선대의 중임으로 보이는 강력한 술법을 구사하는 놈을 잡았으니 진상하고 싶다는 이야기였다.
화양은 곧장 한걸음에 날아가 삼백 년간 자신을 괴롭힌 상선대의 중임을 맡은 놈을 만나보러 갔다.
“여인이군요.”
전신이 봉인구로 꽁꽁 묶여있는 여인을 보았다.
붉은 머리칼이 인상 깊은 여인이었고, 눈매가 꽤 날카로웠다.
삼백년간 화양을 애먹인 쌍선대의 중임다운 기세가 느껴졌고, 전신이 구금당했음에도 금세 뛰어들 듯 눈빛이 아직까지 살아 있었다.
“당신이 화양이십니까.”
“그렇습니다. 당신이 쌍선대를 지휘하는 자로군요. 이름이….”
화양은 건네받은 문서를 뒤적거리다 말했다.
“팽가연. 쌍선대의 좌선부관 팽가연이로군요.”
문서에는 그녀의 출신과 가문.
수계의 위치와 내력 등이 적혀 있었는데 읽어 내려가면 읽어갈수록 참으로 재미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랜 전쟁으로 지친 화양의 얼굴에 웃음꽃이 만연할 정도로 말이다.
“본래 통천수궁의 문무부대에 속해 있었으며 문무부대의 장인, 문무관장 천범의 부관으로 있었다….”
철가면 속 화양의 눈가가 초승달처럼 휘었다.
꽤 흥미로운 내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