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ll of the Spear RAW novel - Chapter (506)
낭선기환담-505화(506/600)
낭선기환담 – 2부 215화
다음날.
밤을 꼬박 지새운 천범의 앞에 만각변왕과 옥별천왕이 찾아왔다.
“어쩐 일이십니까.”
“편히 쉬라 했더니 홀로 술독에 빠지셨길래 찾아와봤소. 말만 했다면 흔쾌히 술벗이 되어줬을 것을 왜 홀로 드셨소이까.”
만각이 묻자 범은 쓰게 웃었다.
“생각을 조금 정리할 게 있었습니다. 마음은 감사히 받지요.”
한데.
“그것만으로 두 분이 함께 절 찾으신 것은 아닌 듯합니다. 다른 용무가 있으시지 않으신지요.”
“바로 맞추셨소. 사위님은 내가 알기로 수계로 향한다 했는데 맞소?”
“예, 일단은 그렇지요. 한데 그건 왜….”
“그런 거라면 도중까지는 함께하자 물으려 와 보았소.”
만골의 죽음으로 건원해가 열렸다 하더니 그곳까지 도중에 함께 가기 위해 찾아온 모양이었다.
천범은 본래, 오경계주를 찾아갔던 것처럼 공간을 뚫어 이동하는 화정용혈을 이용하려 했다.
많은 기운을 소진하지만, 상계의 거리가 거리이다 보니, 이것만 한 대단위 공간이동 법이 없다.
천범의 불꽃으로 진을 만들고, 드넓은 신식으로 상대를 지정하여 근처에 공간을 뚫어 이동하는 술법이다.
산이 전쟁 중에 익혀냈던 술법을 천범이 조금 개선시킨 것이었다.
‘나쁠 것 없겠지.’
급하지도 않으니.
“그러지요.”
어차피 묻고픈 게 조금 있었으니 차라리 잘 되었다 볼 수 있다.
계속 만골의 대한 죽음과 건원해가 열린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알고 싶었던 범이었다.
만골은 자신, 그리고 산과도 인연이 있던 수선이니 그의 죽음이 어찌 된 영문인지 궁금하기도 했다.
잠시 후.
만골대사의 못자리로 향하자던 만각과 옥별은 웬 기묘한 문 앞에 서서 각자 병 하나를 꺼냈다.
“그게 무엇입니까.”
“이거 말이오? 별 거 아니네. 성운(星鳴)과 오르시라는 환수의 피를 섞은 것이네. 꽤 귀한 물건이지만 그렇다고 그 먼 거리를 그저 날아갈 수는 없지 않겠소.”
“만각의 말이 맞소. 본좌가 만각정에 온 것 또한 이 때문이지.”
둘은 각각의 병에서 반짝이는 피를 석문 앞에 흘려보냈다.
그러자 핏물은 살아 움직이듯 석문으로 스며들었고, 이내 오묘한 빛을 발하며 반짝이기 시작했다.
“가지.”
만각변왕이 선두에서 석문을 밀자, 끼기긱 거친 소음을 자아내며 열려졌고 이내 공간을 걷게 되었다.
그리고 잠시 후.
어느 지하로 보이는 동굴로 통한 범과 일행은 계단을 지나 바깥으로 나가게 되었는데, 이내 펼쳐진 광경은 범 또한 익숙한 풍경이었다.
“건원해군요.”
구름이 잔뜩 낀 바다.
바로 건원해였다.
“느껴지는군… 만골 놈의 흔적이 아직 씻겨 내려가지 않았어. 건원해도 미처 다 집어삼키지 못한 게지.”
범 또한 느낄 수 있었다.
은연중 느껴지는 거대한 기가 널리도 퍼져 있다.
“그는 누구에게 죽었을까요. 이리 대단한 기운을 품은 사내였는데….”
“그거야 모르지 않겠소. 원선들의 생각은 하늘도 모르는 법이니.”
만각과 옥별은 별로 궁금하지도 않은 듯했다.
오로지 관심 있는 것은 만골이 죽고 나타난 그의 기운과 건원해의 반응인 듯했다.
“정말 건원해가 열리고 있군요.”
건원해가 열린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힘들었으나, 직접 와보니 대강 알 듯했다.
건원해는 정말 거대한 소용돌이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동쪽의 능선에서부터, 서쪽의 능선에까지 끝이 없을 정도로 펼쳐진 거대한 소용돌이였다.
그 중심은 깊고 깊은 어둠으로 이루어져 끝이 보이지 않은 나락이었다.
무심코 들어가 보고 싶어질 나락.
툭.
누군가 천범의 어깨를 건들였다.
흠칫 놀랐으나 그를 잡은 것은 만각변왕이었다.
“아직은 때가 아니오, 사위님.”
“…때가 아니라니 무슨 말입니까.”
“아직은 건원해목으로 들어갈 때가 아니라는 뜻이지.”
건원해목(乾元海目).
건원해의 눈이란 뜻이었다.
“누가 매복하고 있을지 모르는 법이니 섣불리 움직여서 좋을 게 없지. 게다가 건원해목은 아직 완전히 열린 것이 아니오.”
아직은 움직일 때가 아니라는 말이었다.
그들은 꼭 건원해목 안으로 들어가 본 적이 있는 듯 말했다.
“들어가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있지. 젊은 혈기로 아주 오래전… 한번 들어가 본 적이 있소.”
옥별천왕이었다.
만각 또한 그때를 추억하듯 턱수염을 쓸어내렸다.
“무엇이 있는 겁니까.”
묻자 옥별과 만각은 서로를 쳐다보고는 어색하게 웃었다.
“왜 그러시는지요.”
“크흠, 부끄러우나 우리는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 보지 못했소.”
“보지 못했다니요… 아무것도 없다면 없을지언정 보지 못했다는 말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만….”
“만각의 말이 맞소, 천 선사. 젊은 날 우리는 건원해목으로 들어간 적이 있었으나… 끝에 도달하지는 못했지. 그렇게 하지는 못했어.”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말투였다.
사정이 있는 듯하다.
“물어도 되겠습니까.”
그들의 꽤나 부끄러워한다는 것을 알게 되자 천범 또한 묻는 것이 조심스러웠다.
옥별은 입을 다물었고, 만각은 그를 바라보다 쩝 입맛을 다셨다.
“우리는 건원해목 속으로 끝도 없는 무저갱으로 향했지… 허나 몇 날 며칠이고 수십 년이 지나도 끝은 보이지 않았소. 언제고 끝이 보이겠지 했으나 그런 것은 없고 다가온 것은 우리를 잠식한 두려움, 공포였네.”
범은 잘 이해되지 않았다.
건원해의 밑바닥으로 향하면서 공포를 느꼈다니.
허나 만각과 옥별은 그때의 공포가 아직도 몸 안에 스며 있었는지 떠올 리고 싶지도 않은 듯, 더 말하는 것을 꺼려했다.
덕분에 범 또한 더 묻지 않았으나, 마음 속 한켠엔 건원해목에 대한 의구심이 더욱 깊어졌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말해줄 수 있네. 건원해로 스며든 원선의 선기는 대체 어디로 향하는가가 사위님 또한 궁금한 부분이겠지.”
“…그렇습니다.”
“옥별과 나는 끝을 보지 못했으나… 이것만큼은 확신하오. 망자의 선기는 모두 건원해목의 땅밑으로 향하네.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농후한 기운의 농도를 느꼈네.”
알고 있는 것은 그뿐이라며 만각변왕은 다소 수치스러워했으나, 그것만으로도 중대한 정보였다.
‘건원해목의 끝에 뭔가가 있기는 있는 모양이군.’
그 비밀을 알게 된다면, 무언가 달라지는 것이 있지 않을까.
지금 당장이라도 건원해로 뛰어들었던 산처럼 천범 또한 뛰어들어 밝혀내고 싶었다.
‘수십 년간 내려갔어도 도달하지 못했다면….’
지금은 때가 아니다.
다른 일들을 모두 마치고 나서도 그것은 늦지 않을 테니.
“슬슬 느껴지는군.”
옥별천왕이 말하니, 천범의 신식에도 그들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상천해월에 한석을 차지한 원선태사들의 기운이었다.
개중에는 익숙한 기운도, 아닌 것들 몇몇도 자리해 있었다.
선살전이 한창인데도 원선들은 관심 없는 듯 만골의 죽음으로 열린 건원해목으로만 모여드는 꼴이 퍽 아니꼬웠으나 어쩔 수 없었다.
본인 또한 원선의 경지에 들고나니, 선살전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아니, 관계가 없어졌다는 뜻이 맞으리라.
그들이 얼마나 싸우든.
얼마나 승리하던.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될 수밖에 없는 전쟁이다.
워선들은 고작 땅 덩어리를 차지하기 위하여 목숨을 내걸지 않을 뿐더러 고작이라 해도 자신의 땅을 빼앗기려 하지도 않을 것이니.
‘애꽃은 자들만이 목숨을 잃는군.’
고개를 내젓던 범은 이내 뒤에 자리한 만각과 옥별에게 인사를 고했다.
“이쯤에서 헤어져야 할 듯싶군요.”
“으음.”
만각변왕과는 상관 없을지 몰라도 옥별천왕은 다르다.
린은 어째서인지… 옥별에게 원한이 있어 보였으니.
이쯤에서 헤어지는 게 낫다.
“그럼.”
화르륵.
불꽃이 화하고 천범의 모습이 사라지자 잠자코 있던 옥별의 눈꺼풀이 떠올랐다, 다시금 감겼다.
* * *
화르륵.
척.
불꽃이 피어 오르고 천범이 나타나 땅에 발을 딛었다.
건원해 근처의 이름 모를 섬이었다.
하늘 위에는 선살전으로 인한 군대가 인산인해였고, 흉포한 천살기를 흩뿌리며 돌아다니는 살선들이 몇몇 보이기도 하였다.
허나 그들은 감히 천범의 기운을 느끼지 못했고, 그저 저들끼리 경계하며 싸울 뿐이었다.
잠시 후.
잠시 기다리고 있자, 익숙한 기운과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검은 궁장을 입고 있는 여인.
호리.
아니, 주린이었다.
“….”
범은 주린을 보자 무슨 말로 그녀를 반겨야 할지 몰랐다.
린 또한 범을 바라보며 묘하게 긴장하고 있는 듯 보였다.
당연하다.
원선이 되었으나, 그가 범인지 아니면 자신이 알던 산인지 의아한 것일 테니 섣불리 말 걸지 못한다.
산이 아니면 실망하게 될 테니 두려워하는 것이리라.
그녀는 호리지만 자신이 알던 호리는 아니다. 그녀에게 있어 자신은 범이 아니고, 산이기를 바라는 것처럼.
‘허나 난, 산이 아니다.’
허나 주린은 그리 바랄 것이다.
그렇다면 산인 척을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오랜 세월을 지나고 지나, 지금까지 이어져 와 살아있는 여인이다.
복수를 위해서, 자신의 연인을 위해서 노력한 자가 아니던가.
하여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산이 아니라 한다면 실망하겠지.’
허나 거짓을 말하고 싶지는 않다.
하여 범은 말했다.
“온전한 평안은 찾지 못했구나.”
그러자 린의 얼굴이 밤에 피어난 수련처럼 활짝 피었다.
“산!! 산이구나!”
린은 와락 달려들어 품에 안겼다.
눈물을 흘리며 더없이 기뻐했으나, 등을 두들기는 천범은 그저 씁쓸할 뿐이었다.
“네게 묻고픈 게 있어. 린.”
“응! 뭐든 물어봐. 그게 뭐든, 무엇이든 말해줄 테니까.”
범은 고개를 주억이고 린의 어깨를 잡고 물었다.
“내가 죽은 뒤, 넌 어찌 되었느냐.”
린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물론, 나도 놈들에게 당했어… 내 힘으로는 둘을 상대할 수 없었으니.”
범의 눈가가 좁혀졌다.
“달아나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었을 텐데… 날 위해 싸웠구나.”
“응… 네가 눈앞에서… 그리고 우리 자식들이 죽어가는데 어떻게 나 혼자 도망갈 수 있겠어.”
“그렇구나. 그래. 내 괜한 걸 물었다. 괴로운 기억일 텐데… 미안하다.”
범은 린을 품에 다시금 안았다.
토닥토닥, 등을 두들겨 주니 다시금 린이 어깨를 들썩이며 눈물 흘렸다.
다시는 놓지 않겠다는 듯 꽈악 껴안은 린을 내려다보며 범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근데 린.”
“응….”
린은 행복한 표정으로 답했다.
지금만큼은 세상 부러울 것 없다는 듯 행복해 보였다.
“그런데 내게는 왜 네 주적이 옥별천왕이라 말했느냐. 우리의 적은 옥별이 아니라 신위와 아검이잖나.”
“일부러였어.”
“일부러 그랬다고.”
“응, 내 영향으로 인해 전생의 기억이 깨어나면 좋지 않을 거라 생각했어. 그래서 아예 언급도 하지 않았고, 결과적으로는 그게 맞았어. 내가 본 예지 또한 그러했으니까.”
그리고.
“옥별천왕은 적이 맞아.”
“어째서냐.”
“내가 막 상계로 다시금 등선했을 때의 일이야. 놈과 엮여 죽을 뻔했으니까… 그때의 나는 아직 힘을 모으지 못한 때라 잘못했으면 놈에게 죽었을 거야. 그리 되었다면 너와 만나지도 못했겠지.”
그러니 꼭 죽여야 할 원수라며 린은 그리 말했다.
“산, 네가 돌아와서 다행이야. 마침 네게 보여줄 것도 있어.”
린은 품에서 작은 구슬을 하나 꺼내고는 땅으로 던졌다.
쨍그랑 소리와 함께 구슬이 깨어지더니 은은한 안개와 함께 검은 쇠사슬에 묶인 여인이 나타났다.
전신에 피칠갑을 하고 있었으나 천범은 그녀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신…위?”
피칠갑을 하고 묶여 있는 여인은 바로 오경계주 신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