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ll of the Spear RAW novel - Chapter (51)
낭선기환담-50화(51/600)
낭선기환담 – 50화
“요수들이야 원체 난리를 치는 놈들이지 않습니까. 한데 조금 이상한 게 하나 있지요.”
그는 수방봉에 자리 잡은 도선 중 하나인 수개였다.
그의 앞에는 말끔한 사내가 앉아 있었는데, 인간으로 둔갑한 산군이었다.
한동안 경지를 다지고 있느라, 수방봉의 대장 노릇을 하는 수개와는 이런저런 일로 엮일 일이 많았다.
산군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 좋았고, 수개는 비선과의 한담으로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할 수 있어 좋았다.
“뭐가 이상했소?”
찻잔을 내려놓은 산군이 물었다.
“요수 놈들이 유정이라는 자를 찾는다더군요! 누군지 몰라도 단단히 원한을 산 듯합니다.”
산군의 입꼬리가 꿈틀했다.
이것을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아이러니했다. 유정을 찾는다 하지만 그들은 산군을 찾고 있다.
다행이라면 산군을 유정이라는 이름으로 알고 있다는 것 정도?
하지만 그것에 안심할 수는 없다.
그의 인상착의와 보구, 그리고 그가 다루는 청염에 관해서도 밝혀졌을 가능성이 농후하니 말이다.
‘…슬슬 떠나야겠구나.’
가능하다면 홍연을 데리고 가고 싶었다. 하지만 호리가 아직 폐관수련 중이라 그럴 수 없다.
자신의 주인을 버리고 산군을 따라 올 리가 없으니 말이다.
산군은 수개와의 담화를 정리하며 수련실로 돌아갔다.
그의 탐화오공은 금장사의 빛이 바래 있었다. 그 이유는 어처구니없었는데 다름 아닌 놈의 탐욕 때문이었다.
금긴의 통술로 강화된 다리 한 짝을 한눈 판 사이 홀라당 먹어치워 버렸다.
한창 영결에 매달리고 있을 때라 미처 손쓰지 못했다.
화란은 그것을 보고도 나쁘지 않겠다 싶어 내버려 뒀는데, 탐화오공은 자그마치 한 달 동안 다리를 갉아 먹었다고 한다.
그런 강력한 신통이 깃든 다리를 먹어서 그런지 금장사에 검은빛이 섞이며 조금 탁해졌다.
나쁠 것은 없었지만 저 식탐을 어떻게든 해야 할 듯 싶었다.
산군은 탐화오공을 품에 넣으며 다른 보구들도 하나씩 챙기기 시작했다.
붉은 염주와 류곡자. 그리고 자색 호리병과 벽에 기대어 있는 구환도를 챙기며 미소 지었다.
금긴의 남은 다리 한 짝은 홍연의 도움으로 구환도에 제련했다. 그때 보여준 강도라면 구환도와 잘 맞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산군은 만삼과 태양화리들을 챙기고 항보신목을 향해 수정 구슬 하나를 허공에 띄우며 통술을 읊었다.
그러자 항보신목이 구슬 속으로 빨려 들어가 투명한 구슬이 녹빛으로 물들었다.
그제야 산군은 깨끗하게 비워진 석실을 보며 바깥으로 나갔다.
“떠나십니까?”
밖으로 나서니 홍연이 나타났다.
“슬슬 떠날 때가 됐지.”
영결이 됐다 하더라도 그보다 강한 이들은 얼마든지 있다. 아무리 강력 한 신통과 보구를 가지고 있다 해도 위험한 것은 매한가지.
게다가 10년이면 오래 있었다.
홍연에게 알게 모르게 도움 받은 것이 적지 않을 것이다. 수방봉은 10년이나 요수의 습격 없이 평탄했다.
그 이유는 굳이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그러니 떠나야지.’
홍연의 주인은 까망호리다.
산군이 아니다.
후일을 생각한다면 지금 떠나는 것이 옳다.
앞으로 몇 년만 더 지나면 도계는 아비규환으로 바뀐다. 요수와 도사의 전쟁이 산불처럼 번질 것이다.
힘없는 자는 풍전등화(風前燈火)의 신세를 면치 못할 테니.
‘영결로 만족할 수 없다.’
우선으로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다.
‘금명지령을 내 편으로 만들어야 해.’
영명에 오르기 위해서도 그렇고, 다른 것들을 따져 봐도 그것이 최선이다.
안전하게 영명에 오르려면 그의 도움이나 일족의 도움을 받는 것이 좋다.
‘금명지령이 사월랑(社月狼)의 핏줄임을 알았으니 빚을 만들어둬서 나쁠 게 없다.’
“…산군이시니 잘 처신하시겠지요. 곧 뒤따라 갈 테니 무운을 빌겠습니다.”
산군은 홍연과 인사를 나누고는 곧장 매로 변해 하늘을 가로질렀다.
* * *
보름 뒤.
하늘을 날아다니던 매 한 마리가 돌연 방향을 틀어 내려갔다.
이곳은 방곡과 수월의 중간 부분에 위치한 이름 모를 산.
그때 매의 품에서 여인의 음성이 뻗어 나왔다.
-왜 그러십니까?
의아한 음성이었다.
-이상해서.
매는 산군이 둔갑한 모습이었다.
산 정상을 살펴보던 산군의 눈이 번득였다.
동공이 확대되며 그 안에 있던 또 다른 동공이 튀어나왔다.
영결에 오르며 익힌 단령금정이었다.
물론 단순한 단령금정은 아니었다.
금긴의 선천신통.
괴비여각이 담긴 놈의 눈을 녹인 후, 단령금정의 구결과 함께 버무려 익힌 것이었다.
홍연의 도움이 없었다면 만들지 못했을 눈이었다.
아무튼.
유심히 무언가를 살피던 그가 돌연 눈가를 좁히고 날개를 퍼득였다.
순식간에 꼭대기로 올라서 인간으로 둔갑한 산군은 운무가 요동치는 것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환진이구나.”
그리 대단한 환진은 아니었다.
산군은 환무로 거침없이 뛰어들며 구환도를 꺼내 허공을 찔렀다.
쩌적!
무언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그를 감싸던 환무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정상의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산의 정상에는 서른 장 크기의 호수가 있었는데, 그 가운데에는 기괴하게 생긴 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꼭, 뱀이 승천하려다 나무가 된 것 같은 모습. 산군을 그것을 유심히 바라보다 탄식했다.
“하, 뭔가 했더니 진명수목(臻鳴獸木)이구나.”
“진명수목이라면…. 요수들이 진수명화를 치르다 목숨을 잃었을 때가 아닙니까.”
“그래, 그렇지.”
경지를 올리려다 실패한 영수의 말로나 다름이 없었다. 인간과는 달리 영수들은 경지 상승에 실패하면 이렇게 나무가 되고는 했다.
이 나무는 높은 곳으로 이르지 못한 짐승의 나무라며 진명수목이라 불렸다.
“아마도 진수명화를 위해 환진을 설치했으나 결국 이겨내지 못하고 죽고 말았겠지.”
산군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허공에 몸을 띄우고는 진명수목에 다가갔다.
하늘 높이 솟아있는 진명수목의 끝에는 나뭇잎이 무성했으나, 자세히 살펴보니 교룡이 입을 쩍 벌리고 있는 모양새라 씁쓸함이 감돌았다.
진수명화에 이르다 죽어버렸으니 남 일 같지 않았다.
산군 또한 후일엔 영명에 오를 준비를 하게 될 텐데 이리되지 않을 거란 보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걱정되십니까.”
옆으로 다가온 화란이 물었다.
“아니 된다면 거짓이겠지. 천운이 닿아도 한 치의 실수로 죽을 수 있는 것이 진수명화일진대 왜 안 그렇겠느냐.”
지금 시간에도 많은 영수가 진수명화를 치른다.
하지만 그들의 절반은 내단의 배분을 잘못해 터져 죽거나 이처럼 심마에 휩싸여 진명수목이 된다.
“괜찮을 겁니다. 산군이시지 않습니까.”
화란은 산군을 다독이며 거대한 진명수목을 바라봤다.
마치 하늘로 승천하기를 거부당한 듯한 모습의 교룡.
그가 변한 진명수목은 왠지 모르게 쓸쓸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그래. 되어야지. 그리 만들어야지.”
산군은 그리 말하며 나무를 손으로 쓰다듬다 청염을 일으켰다.
그의 봉악청화가 순식간에 진명수목에 치솟아 푸른 화염을 꽃 피웠다.
화염이 번져가며 타오르는 진명수목은 한없이 덧없고도 아름다웠다.
하늘 높이 뻗어있던 나무가 윗부분부터 푸른 재가 되어 사라진다.
“난 이리되지 않을 것이다.”
복잡한 심경으로 바라보던 산군은 돌연 그리 중얼거렸다.
화란은 이런저런 감정이 뒤섞인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 스르륵 사라졌다.
그때 문득 호수 한가운데에 반짝이는 것을 보고 손을 뻗었다.
그러자 호수 밑바닥에 가라앉으려 하던 무언가가 그의 손에 날아들었다.
회색빛의 둥그런 돌이었다.
손바닥만 한 크기의 돌.
겉보기엔 평범한 돌로 보였지만, 단령금정으로 살펴보자 묘한 기운이 일렁거려 산군은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영력을 불어 넣어도 별다른 반응이 없자 그는 금세 흥미가 식었다.
“나중에 알아보면 되겠지.”
그것을 공정강에 집어넣은 산군은 진명수목이 사라진 호수를 바라보다 사라졌다.
그가 사라진 호수는 잔잔한 파문이 일어나며 푸르른 하늘을 비출 뿐이었다.
* * *
하늘 높이 솟아있는 백산.
그곳의 16개의 봉우리 중,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봉우리 장군봉(將軍峰).
그곳에 눈처럼 흰 백조 한 마리가 날아들었다. 그것은 이내 사람의 형상으로 바뀌었는데, 흰 머리칼을 비녀로 틀어 올린 선녀 같은 여인이었다.
“…….”
장군봉의 거대한 동굴.
천호군(天虎君).
그것을 바라보는 여인의 눈에는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깃들어 있었다.
머나먼 추억을 상기하는 듯하다가도 갈등의 빛이 어렸고, 후회와 회한으로 점철되었다.
“진즉 찾아왔었다면…….”
그리 중얼거린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 했어도 변한 것은 없었으리라.
그녀가 왜 그 이름을 버리고 백련이라 이름 붙었던가. 그가 불러주던 이름이 희석되지 않기를 바랐고, 그의 복수를 위해 그 이름을 버리지 않았던가.
“이곳은 변함이 없구나.”
높게 자란 고목 위의 발톱 자국.
[서방님! 저건 서방님 것이에요?] [당연 내 것이지. 저리 해둬야 한 주먹도 안 되는 놈들이 지레 겁먹거든.]비밀스러운 호수로 가는 길목.
[어디 가셔요?] [마실 간다.]배려 없이 산길을 향하던 그의 뒷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선했다.
“그랬었지.”
백련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우는 듯 웃는 듯한 낯으로 한참이나 옛일을 떠올렸다.
꽃가마를 타고 천호군에 왔던 일.
언골마을에서 산삼을 빼앗겼던 일.
그가 다시 산삼을 찾았던 일.
그의 등에 올라탔던 일.
그의 품에서 잠을 청했던 일.
보잘것없던 일.
그것은 그녀의 가슴에 자리 잡아 포근한 온기를 가져다주었다.
그 시절의 일을 상기하다 보니 꼭, 예전의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
지금도 저 천호군에 들어가 그를 부르면 어찌 될까.
눈살을 찌푸리며 툴툴거리실까?
그리하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자신을 품어 주실까?
그런 것들을 생각하던 그녀는 문득 자신의 손을 매만졌다.
통통하고 짧던 손가락은 가늘어졌다. 그뿐만 아니라 전체적으로 성장해 어린 시절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곳은 변함없는데……. 나만이 변해버렸구나.”
이런 것을 격세지감이라 하던가.
많은 것이 달라졌다.
꼭 어제 일처럼 생생한 일들은 아이가 성년이 될 정도로 세월이 흘렀다.
하지만 이곳만은 달라진 것이 없다.
달라진 것은 자신뿐.
벅차오르던 가슴은 이내 잠잠해졌다.
상기되던 볼은 다시금 백지장처럼 변했다.
백련은 씁쓸한 안색으로 천호군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그때.
그녀의 아미가 찌푸려졌다.
“…누구냐.”
온화하던 대기는 그녀의 표정처럼 삽시간에 바뀌었다.
살을 에는 듯한 한기는 백련의 중심으로 넓게 퍼져나갔다.
짙은 살기와 함께 뿜어진 한기.
그것은 천호군 속에 있는 이를 향해 뻗어 나갔다.
“누군데 천호군을 더럽히더냐.”
이곳이 어떤 곳인데.
살심이 동했다.
하지만 이곳에서 피를 뿌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가 지내던 곳이다.
그와의 추억이 있던 곳이다.
그곳을 더럽힐 수는 없었다.
“그대야말로 누구신데 그런 살기를 내비치시는지요.”
하지만 상대는 올곧은 음성으로 그리 물었다.
백련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허리춤에 걸린 검에 손이 가려는 찰나.
“혹, 제 스승님과 친분이 있으십니까?”
“스승?”
의아해 살기를 거두자 천호군에서 발걸음이 선명히 다가왔다.
잠시 기다리자 그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이는 검 한 자루를 들고 있는 여인이었다.
심지가 곧아 보이는 미려한 여인.
이름 모를 여인은 백련의 외양을 보고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스승이라니. 무슨 말이냐.”
백련이 물었다.
“제게 검을 안겨주신 분이지요.”
그녀는 세월이 묻은 검을 애정이 어린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백련은 눈을 가늘게 떴다.
“스승님은 제게 백산을 맡기셨습니다. 당신이 누군지는 모르나, 이곳에 함부로 발 디디게 할 수는 없습니다.”
강경하게 말하는 여인의 언변에 주위의 수풀이 들썩였다.
백련이 주위를 흘기니, 영물로 보이는 영수들 수십 마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각양각색의 영수.
그들은 모두 백련을 침입자로 보는 듯했다.
하지만 백련은 무표정했다.
아니.
미세하게 몸을 떨고 있었다.
이내 입을 달싹거리는 듯하더니, 한참을 침묵하다 다시금 입을 열었다.
“…스승 되시는 분이 혹시, 백산의 산군이더냐…?”
그러자 천호군에서 나온 여인의 입이 작게 벌려졌다.
“정말 스승님의 지인이십니까?”
놀란 듯한 음성.
하지만 그것으로 백련의 낯은 이지러졌다.
아-
사실이구나.
정말 사실이었구나.
거짓이 아니었구나.
“살아…있었구나.”
내 낭군은.
내 서방님은.
살아 계셨구나.
달빛이 비치는 백산의 천호군.
그곳에서 백발의 여인은 밤이 새도록 기쁨을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