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ll of the Spear RAW novel - Chapter (512)
낭선기환담-511화(512/600)
낭선기환담 – 2부 221화
‘끝은 존재하는 건가.’
몇 번이고 반복됐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끝을 맞이하면 다시금 새롭게 시작됐다.
어느 날은 평범한 오후였으며, 어느 날은 피바람이 몰아치는 전장이었다.
또 어느 날은 스승님의 가르침을 받기도 하였으며 함께 장난을 치는 날이기도 했다.
그 어느 곳에서도 신위는 산과 함께였으며 이윽고 마지막은 항상 그녀를 일깨웠다.
행복한 순간을 보여주고, 끝에는 나락으로 떨어뜨려 버렸다.
그럴 때마다 신위는 괴로움에 울부짖었으며 모든 것을 찢어 발겼다.
“흐아아아아아아!!”
거문고를 꺼내들고 전방위에 힘을 휘둘렀다.
엄청난 파괴력과 함께 일대가 날아가 버렸으나, 잠시 후면 다시금 평온한 풍경과 함께 그녀가 바라는 산이 다가온다.
한 번이 지나고 두 번이 지나, 수십 번이 지날 때마다 그녀의 머리는 몽롱해지고 분노 또한 잠재운다.
“또….”
또 시작이다.
죽이고 죽여도 또 다시 나타나는 풍경과 존재는 어찌 보면 무섭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으나, 그녀에게 산은 절대로 그러할 수 없었다.
볼 때마다 반갑고, 애틋했다.
허나 그것과 동시에 그녀의 기억은 점점 어지러이 펼쳐졌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반복된다.
그럴수록 그녀의 기억은 모호하고 안개처럼 뿌옇게 변했다.
수백, 수천을 넘어 수만 번에 이르는 횟수로 반복한다. 신위가 제정신을 차리는 빈도수가 잦아든다.
“산, 산….”
오매불망 산을 찾아 부르며 그의 품에 닿는 것만을 원한다.
그곳이 제 집이라도 되는 양.
그와 함께 서서히 수면 아래로 잠겨드는 그녀의 정신은 발끝에 돌무더기를 매단 듯.
떠오를 생각을 아니한다.
턱.
책이 덮이는 소리가 들려오고, 저 멀리서 어둠 속에 숨어든 사내의 인형이 떠오른다.
“이제 끝났나.”
바위 위에 걸터앉아 두꺼운 책을 덮은 천범은 무감정한 눈으로 덧없이 웃고 있는 신위를 보았다.
“웃고 있으니 보기 좋군. 그리 바라는 것을 몇 번이고 주어서 그러한가.”
이미 그녀의 혼과 육신이 떼어진 지 오래고, 범의 눈에 보이는 신위는 혼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육신을 잃어버렸다지만, 원선의 혼은 강건하여 자체적으로 육신의 형태를 유지한다. 하여 지금 그녀의 모습은 호리가 아닌, 신위의 형태였다.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허나 이제는 끝을 봐야지.
천범은 많은 고민을 거듭했다.
신위의 혼에 호리의 것이 뒤섞여 있음을 눈치챘으나, 이미 하나된 것을 떼어내기란 역부족이었다.
창조 법칙으로 고강한 환계를 만들어 둔 것 또한 그러하다.
그녀의 혼에서 호리를 떼어낼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가졌기 때문에 이런 번잡한 일을 벌인 것이다.
혼만 온전하다면 그녀를 되살릴 수도 있을 테니까.
허나….
‘포기해야겠군.’
그나마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혼과 육신을 떼어내는 것 정도.
그 이상은 어렵다.
원선의 혼은 불완전하지 않다. 원선이 되는 조건 중 하나가 혼의 완전성을 이루는 것 때문이다.
그녀의 혼에 뒤섞인 조각난 호리를 모으는 일은 상계의 그 누구라도 어려운 일이다.
‘대라신선이 와도 어렵겠지.’
가망이 없다.
씁쓸한 눈으로 신위를 바라본 그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네가 먹거라.”
이내 품에서 대도를 꺼내 내던지자, 신위의 몸에 푹! 박혀든다.
천범의 구환도.
나찰이었다.
신위의 혼 중간에 박혀든 나찰은 게걸스레 그녀의 혼을 빨아먹는다.
그녀는 멍한 얼굴로 삼세삼신과 사월제항의 힘으로 만들어낸 산의 모습을 바라보다 고개 돌려 범을 보았다.
범 또한 그녀의 마지막을 피하지 않았고, 둘은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아무 말 없이 끝을 맞이했다.
“평온한 죽음은 네게는 사치이니.”
나찰의 안에서 여러 악귀들과 뒤섞여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른 채, 먹고 먹히며 죽음을 갈구하는 귀신 따위가 되어 살아가리라.
그것이, 그가 신위에게 내리는 벌.
잠시 후.
신위가 완전히 사라지고, 천범은 호리의 육신을 보았다.
혼 없는 껍데기일 뿐이나, 이것은 분명히 호리의 것이다.
주인 잃은 육신.
범은 그것을 가만히 지켜보다, 품에서 작은 반지 하나를 꺼냈다.
오래 전.
하계에 있을 때, 호리가 범에게 선물한 반지였다.
그녀의 신통으로 만든 철지환.
새까만 사철로 이루어진 반지다.
투박하지만 그녀의 신통이 깃들어 있는 것이었는데, 원선이 되고 나서야 이 반지의 내력을 깨달았다.
자신을 주기 위해 오랜 시간 그녀의 신통이 모여 굳혀진 것이다.
이 안에는 작지만 그녀의 분혼까지 담겨 있었다.
분혼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그녀의 흔적이라 해야 할 터.
‘멍청한 녀석.’
허나 그 탓에 일말의 가능성은 존재했다. 범은 철지환을 육신의 손에 끼워주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것으로 널 되살릴 수 있을까.”
확신은 없다.
허나 가능성은 있었다.
비록, 되살아난다 해도 본래의 그녀는 아니겠으나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너무도 괴롭다.
산은 천범이 아니다.
린 또한 그와 엮인 여인이 아니다.
허나 호리는 다르다.
호리가 린일지라도, 호리는 자신과 추억을 쌓은 친우다.
그런 친우가… 그리 비참하게 사라졌는데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을까.
다른 누구도 아닌 천범이기에 그저 죽음을 기릴 수는 없었다.
더는, 누군가의 죽음을….
‘기리고 싶지 않다.’
스르르륵.
주변에 자리한 금천지화가 수그러들고, 다시금 건원해의 모습이 천범의 시야에 내비친다.
그를 기다리고 있던 사내.
유정이었다.
“끝났나.”
범은 누더기를 뒤집어 쓴 유정을 바라보며 고개를 주억였다.
그의 모습은 이전과 달리 조금 흐릿하고 투명했다.
존재가 바람 앞 등불처럼 위태로웠으나, 표정은 유달리 평온했다.
“내게 사월제항을 넘긴 탓인가.”
“내가 이곳에 있을 수 있는 이유 또한 그것이니 당연히 그렇겠지.”
이만한 환계를 만들어내고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유정이 건넨 사월제항 덕분이다.
그의 사월제항 또한 존재가 희미하게 변해갔다. 대부분의 힘을 소진한 탓인 듯 했다.
“돌아가는 건가.”
“돌아가야지. 무엇 하나 남지 않은 세상이지만… 그곳이 내 장소이니.”
그저 사라지는 것이 아닌, 원래의 시간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천범은 안도와 아쉬움이 공존하는 감정을 느꼈다.
“그런가.”
짐짓 담담한 듯 답했으나, 커다란 아쉬움이 가슴을 짓눌렀다.
자신을 위해 많은 것을 희생한 놈이 바로 저놈이다.
어찌 그게 가능했을까.
‘난 널 한 번 죽였거늘.’
하지만 그 마음을 입밖으로 내는 일은 없었다.
유정의 몸이 더욱 희미하게 사라지고 작은 별빛이 은은하게 반짝였다.
범은 그를 그윽하게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가는 거냐.”
“그래.”
천범과 유정.
참으로 신비한 인연으로 엮인 그들이다.
유정은 가만히 범을 바라보다 한 가지 부탁을 했다.
“한 가지 부탁이 있다. 그 정도는 들어주는 게 내 노고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 생각되는군.”
그냥 부탁하면 될 것을.
정당성을 덧붙이는 걸 보니 유정은 유정이다.
“무엇이냐.”
“지금이라면 충계에 있을 것이다.”
충계?
“누가 말이냐.”
“나의 스승. 내 스승을 도와주게. 아마 너와도 인연이 깊은 자일 테니.”
인연이 깊은 자라.
‘그러고보니 신위 또한 충계에서 누군가와 싸웠다 하지 않았나.’
원선정도의 인물이라면, 천범이 모를 수가 없다.
“그게 누구냐.”
물으니.
“일신홍성.”
“….”
“일신홍성 예동이다.”
* * *
상계의 어느 한켠.
절벽 위에 홀로 자리한 노인은 능선 멀리 보이는 저버린 빛을 보며 연신 혀를 찼다.
“쯧쯧, 같잖은 감정을 품으니 그리 꼴사납게 끝을 맞이하는 것이지.”
저 멀리 떠오른 태양과도 같은 빛이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상계의 몇 안 되는 강대한 기운 하나가 사그라들었으니, 그 뜻이 무엇인지 모를 자가 없으리라.
“신위… 바보같은 여인 같으니. 사사로운 감정에 휘둘려서는 끝이 좋지 않다 말했거늘. 산의 마지막을 보고도 깨닫지 못하였단 말인가.”
새하얀 머리와 수염이 성성한 다소 마른 체형의 노인.
검노일택이 연신 혀를 차며 그녀가 사라진 광경을 보았다.
그날 이후, 교류하지는 않았으나 서로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었다.
하염없이 비를 처 맞을 때부터 상태가 조금 이상해졌다 느꼈지만… 저런 끝을 맞이할 줄이야.
오랜 세월을 함께 존재해온 자로서 아쉬움이 검노의 낯에 물들었다.
스윽.
품에 고이 넣어두었던 작은 빗 하나를 꺼내었다.
옥으로 만든 작은 빗.
투박하나 혹은 영롱하고 박혀있는 무늬 또한 아름답다.
여인이 쓸 만한 빗이었다.
그녀의 머리색과도 참 잘어울리는 빗이다.
검노의 얼굴에 진한 아쉬움이 주름 사이사이에 깃들었다.
“이제는 아무 쓸모 없구나.”
휙.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옥빗이 부딪치는 파도 속으로 삼켜진다.
이제는 사라진 그녀의 존재처럼 옥빗 또한 자취를 감춘다.
잠시 눈을 감자.
품어진 마음처럼 요동치는 바닷바람이 매섭게도 불어 닥쳤다.
검노일택의 머리칼과 수염이 위태롭게 바람 앞에 흔들렸으나 그 또한 잠시뿐.
그가 다시금 눈을 뜨자, 강렬하게도 불어 닥친 바람은 언제 그랬냐는 듯 멎어들고 파도 또한 잠잠하다.
“그래… 같잖은 감정이지.”
검노는 연신 자신에게 되뇌이듯 같잖은 감정이라 내뱉으며 저 멀리 능선을 바라보았다.
잠시 뒤.
그의 얼굴에는 씁쓸하고 음울한 감정보다는 흥미로움으로 가득했다.
그녀의 죽음은 이미 잊어버린 듯 이전과는 색다른 얼굴이었다.
“검이란 두들기면 두들길수록 정순해지고 강인해지는 법이지.”
검노일택의 입가가 비틀어지며 조악한 웃음을 내보인다.
“신위, 너로 인해 나의 검은 더욱 찬란히 빛날 것이다. 네 죽음 헛되이지 않았음을 내 증명하지.”
검노의 손.
그의 시선 끝에는 영롱하게 빛나는 한 자루의 검이 자리하고 있었다.
“천검은 곧! 완성된다. 흐하하하!!”
콰아아아아.
파도가 부딪치는 절벽 위에서, 검노일택의 광소만이 널리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