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ll of the Spear RAW novel - Chapter (517)
낭선기환담-516화(517/600)
낭선기환담 – 2부 226화
쓰임.
자신을 마치 도구라도 되는 듯, 그래야만 한다는 듯 일컫는 홍연의 말.
그 뜻이 무엇인지 지레 짐작한 천범은 되묻기보다 착잡해 했다.
“이리 될 줄 알고 있었느냐.”
그녀는 호리의 몸을 꼬옥 껴안으며 말없이 주억였다.
언뜻 호리의 몸을 차지하고 있던 신위가 이런 말을 했었다.
홍연의 도움으로 나의 앞길을 미리 엿보았었다고.
‘눈이 저리 된 것 또한.’
그러한 신통력의 영향일 가능성이 컸다. 어떠한 금기시 되는 공법을 익혀 부작용으로 인해 저리된 것일 터.
미래를 내다보는 일이, 그리 녹록치만은 않을 테니 말이다.
‘어떠한 마음으로, 이 날만을 고대하였을까.’
어떠한 마음으로….
자신의 쓰임을 다하고자 하였을까.
그는 그녀를 나무라지도, 격려하지도 못했다.
무엇을 하든 모순.
모순이었다.
홍연은 지금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여 호리를 되살리려 한다.
그것을 나무랄 수 없었다.
자신이 무엇이라고 그리 할까.
자신의 목숨을 어찌 쓰는 것이야말로 제 뜻이다.
게다가 그녀는 적뇌주랑.
주인을 위하며 주인만을 위한 존재.
존재의의가 자신이 택한 주인 그 자체인, 그런 삶을 사는 여인이다.
한데 어찌 나무랄까.
그렇다고 격려하기엔….
‘안타까울 뿐이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천범은 마지막 시간을 보내고 있는 그녀를 보며 그저 안타까운 마음만을 품었다.
“끝까지 널 고생시키는 놈이다. 아니 그렇더냐.”
“예, 그 끝을 보지는 못하겠으나… 산군이 계시니 이제는 괜찮겠지요.”
눈을 감고, 수척해진 상태로 호리를 껴안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참으로 이질적이었다.
허나 그 모습을 보는 범은 격한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날, 믿느냐.”
물으니 답하기를.
“제 주인이 택하신 분입니다.”
그러니 믿겠다.
처음부터 끝까지.
주인만을 생각하는 그녀에게 천범이 해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저 그녀의 마지막을 지켜보는 것.
마지막까지 신념을 지키는 그녀를.
그녀의 끝을 함께하는 것 정도.
고작 그 정도였다.
“감사합니다.”
“…무엇을.”
감사 받을 자격 따위 없는 몸이다.
무엇 하나 지키지 못한 것이 바로 자신이거늘.
“무엇을 감사하다 말하는가. 네 주인이자, 나의 절친한 지기 하나 지켜내지 못하고 고작 육신만을 간신히 가져온 것이 바로 나다.”
세상 모든 이들에게 떠받들어지면 뭘 하나. 세상을 뒤집을 힘이 손 안에 있다 하여 무엇하겠느냔 말이다!
“가장 소중한 벗 하나 지켜내지 못하고, 이리 차게 식은 너의 주인을 데려온 것이 나이거늘! 너는 대체 이 못나고 한심한 사내에게, 대체. 대체 무엇이 감사하다 하는 것이냐!!”
그런 내게.
그녀는 대체 무엇을.
무엇을 감사하다 하는 것인가.
왜 그런 말을 하는가.
대체 왜.
왜.
“…오지 말라.”
오지 말라 말하여도 그녀는 내게 다가와 다정하게 뺨을 어루만졌다.
“당신의 모든 것에 저는 감사를 드릴 뿐입니다. 살아 있어서, 성장하셔서, 나의 주인을 데려와 주셔서.”
감사할 뿐이었다.
“눈이 멀어, 당신이 울고 있는 모습을 보지 못하는 게 아쉽습니다.”
싱긋 미소 짓는다.
“울지 않았다.”
“그렇습니까. 제 주인께서 꽤 아쉬워하겠군요.”
홍연은 천범의 가슴에 손을 뻗어 툭, 툭 두드렸다.
“아파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 말의 의미를 모르지 않다.
허나 그럼에도 범은 슬퍼했다.
그러는 것이 예의라 여겼다.
여지껏 살아온 그녀의 삶을 기억해 줄 수 있는 건, 이 세상.
이 넓은 세상에서도 자신뿐.
오직 자신뿐이니.
한탄과 염려를 담아, 그녀를 가슴에 품어 슬퍼했다.
그것 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다시금 일어나실 겁니다.”
타이르듯, 격려하듯 말하는 홍연의 말에 범은 입술을 질끈 베어 물었다.
그리고 이내.
홍연이 호리의 곁에 자리했다.
입을 달싹이자 기묘한 노랫소리가 동부를 가득 메웠다.
힘없는 음성이었으나 오히려 그러 해서 감미로웠다.
기뻐하는 듯, 또는 슬퍼하는 듯한 그녀의 노랫소리.
천범은 가만히 그것을 들으며 그녀의 감정을 되새겼다.
탁.
홍연이 노래를 부르며 손목을 그어 피를 흘린다.
그녀의 피는 붉은 실처럼 바닥에 떨어져 문자를 이루고, 지면에 법진을 구축한다.
법진은 이내, 그녀의 몸으로 타고 흘러가 표면이 새겨진다.
홍연의 전신이 붉은 글자들로 이루어져 붉게 번뜩이고 그녀의 머리칼이 부채처럼 펼쳐진다.
“가는 게냐.”
허나 그녀는 답이 없다.
쓸쓸한 미소를 지을 뿐이다.
이내 희미하던 붉은 빛이 그녀의 전신을 가득 메우고, 피처럼 붉은 머리칼처럼 선명한 색을 싹 틔운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몸이 붉은 빛에 잠식되어, 서서히 사라져간다.
발끝부터 서서히.
서서히 피처럼 붉은 불에 형체가 타들어가듯 그렇게 사라지기 시작한다.
“슬퍼하지 마십시오.”
“어찌 슬퍼하지 않을 수 있나.”
이별이란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 녀석이다.
익숙해져도 싫고, 안 익숙해지기엔 너무 슬픈 놈이니 어찌할까.
“제가 이 세상에서 사라져도, 저는 언제고 곁에 있을 겁니다.”
“다른 형태로 말인가.”
“예. 부디 주인께는… 이 아이에게는 그리 말해주십시오.”
저는 한줌 재로.
실오라기 하나로 변해 그녀의 반지에 끼워질 테니, 언제고 함께라고.
타앙. 그녀의 형체가 깨어지고, 이내 바람처럼 모여들어 한가닥 붉은 실로 변하였다.
그녀가 변한 가는 실은 너무도 붉고 선명하여, 퍽 아름다웠다.
붉은 실.
홍연은 이내, 호리의 손에 끼워진 철지환으로 날아들어 그곳을 파고 들어 하나 됐다.
“여기까지 본 것인가.”
범은 터덜터덜 걸어가 호리의 손에 끼워진 반지를 보다 그녀의 몸속을 관조하고 울상 지었다.
잠시 뒤.
스르륵.
그녀가 눈을 뜨고.
멍한 낯으로 그를 불렀다.
“산군?”
“…그래. 나다.”
산군이다.
* * *
하나가 사라지고, 하나가 나타난 어두운 동부에서.
천범은 호리를 꼭 끌어안고 한참을 그리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녀는 영문도 모른 채, 슬퍼하는 그를 구박했다.
“그런데 얼굴이 왜 그 모양인 거냐?”
“내 얼굴이 어떻길래.”
“죽을상을 하고 있으니 묻는 게다. 바보 녀석아. 그리고 이것 좀 놓아라. 왜 이리 껴안는 게야!”
“그럴 일이 있었다.”
“그럴 일은 무슨 그럴 일! 이거 놔라 답답하다!”
호리는 호리였다.
그녀의 시간은 멈춰져 있었다.
그 시절. 하계의 귀수들을 부리던 그때의 호리였다.
그 이상은 기억하지 못하는, 어찌 보면 가장 평안한 나날을 보냈던 시절의 그녀였다.
홍연의 배려인지, 아니면 착오인지 모를 이 상황이 범에게는 꽤 서글프게 다가왔다.
“검둥아.”
“왜?”
고개를 갸웃한다.
바보처럼 천진난만한 호리를 보니, 이번에는 정말인 듯하다.
“이야기해줄 것이 많다.”
“그럼 말하면 되지 않느냐. 본녀는 바다를 품을 그릇을 지녔으니, 그게 무엇이라도 다 품을 수 있다.”
그녀 특유의 자신만만한 표정이다.
허나 범에게는 바보 같아 보일 뿐이었다.
“바다를 품을 네 그릇이 깨질까, 나는 염려스럽구나.”
“그것이 내 몸의 변화와, 이 공간의 이질적인 것에도 포함되느냐?”
“그래.”
“그리고 이 반지에 대한 것도?”
“…그래.”
“그럼 해보거라. 어찌된 영문인지 몰라도 보통 것은 아닐 테지만….”
범을 올려다보며 희희 웃는다.
“네가 있으니 상관없겠지!”
“….”
“이번에도 네가 날 구한 것이냐?”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물어왔으나 범은 답하지 못했다.
심각한 낯에 호리가 의아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럼… 지킨 것이냐?”
“…아니. 지키지 못했다.”
“그럼 뭘 했느냐?”
글쎄.
무얼 했을까.
“그러게 말이다. 무엇 하나 한 것이 없구나.”
무엇 하나.
무엇 하나 한 것이 없다.
호리를 지키지도, 홍연을 지켜내지도 못했다.
“그래? 잘 됐구나.”
“…뭐가 잘 됐다는 거냐.”
“무엇 하나 해낸 것이 없다면, 지금이라도 하면 되지 않느냐.”
그녀는 오히려 잘되지 않았냐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나 또한 인간들을 따라 돌탑을 한 번 쌓아 봤다. 높게, 누구보다 높게 쌓다 보니 어느새 주변의 돌이 바닥나서 더 이상 쌓을 수 없게 되었지.”
“그래서?”
“주변에 돌이 없어서 어쩔까 고민하다가 순간 깨달았다.”
깨달음을 얻었던 모양이다.
그녀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꽤 오랜만이라 범은 물었다.
그래서 어찌 했냐고.
하니, 답하기를.
“돌탑을 부숴버렸다.”
“잘 쌓던 돌탑을 왜 부쉈느냐.”
“쌓다 보니 바로 옆에 커다란 돌탑이 하나 더 있는 게 아니냐. 그것을 내 것으로 하기로 했다.”
“그게 뭔데.”
“커다란 돌산이었다!!”
돌산을 자신의 것으로 하면 돌탑을 쌓은 것이나 다름없는 궤변이었다.
그리하여 아무것도 하지 않고 많은 걸 이루게 되었다며 호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다 말했다.
하지만 천범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개소리라 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게 지금 이야기랑 무슨 상관이 있느냐.”
“글쎄? 꼭 상관이 있어야 하느냐?”
“…….”
진지하게 그녀의 이야기를 듣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천범은 그녀의 머리에 손을 가져다대 머릿속을 관조하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별 문제는 없는데.”
찰싹!
“본녀의 머리는 멀쩡하다!”
“멀쩡한 게 이 수준이라 문제구나.”
“흥! 어찌 뱁새 따위가 봉황의 깊은 뜻을 알 수 있겠느냐. 됐으니 빨리 설명이나 해봐라.”
왜 이곳에 있는 것인지.
그리고 이곳은 어디인지.
자신은 어찌된 건지.
그리고.
“홍연은 어디 있는지.”
범은 씁쓸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다 한숨을 내뱉었다.
어차피 언젠가는 알게 될 일.
늦던 빠르건.
그녀가 감당해야 할 일이다.
‘말하지 않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겠으나….’
하계와 이곳은 엄연히 다르다.
그리고 그녀의 신체와 맞물리지 않는 정신 또한 그러하다.
육신은 상계의 끝에 닿아있는 원선이나, 정신은 하계에 머물러 있으니 이 얼마나 심한 부조화던가.
하루 빨리 진실을 알게 하여, 조화를 이루게 하는 것이 낫다.
혼자라면 어렵겠으나, 그녀에게는 천범이라는 원선태사가 있으니 함께 고난을 극복하기엔 충분하다.
“하아….”
허나 그럼에도 꺼내기가 어려운 일.
“어디부터 말해야 할까….”
이왕 말하는 것.
처음부터 말해주는 것이 좋으리라.
“꽤나 오래 전. 내가 이곳. 상계에 발을 들였을 때였다….”
꽤 오랜 시간.
그는 자리에 앉아 오래 묵은 감정을 토해내듯, 이야기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