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ll of the Spear RAW novel - Chapter (518)
낭선기환담-517화(518/600)
낭선기환담 – 2부 227화
건원해목.
바다에 눈이라도 달린 듯, 뻥 뚫려 있는 거대한 구멍.
이질적으로 깊은 심연 속.
그곳에 자리한 존재들이 있었다.
“얼마만인지 모르겠군. 여태 안 죽고들 잘 살아 있는 모습을 보니 참으로 껄끄럽고 좋구만. 하하하!”
건원해목.
바다 위에 뒷짐을 지고 자리한 사내는 사계의 왕.
만각변왕이었다.
그가 자리한 다른 존재들은 각각 멀찍히 떨어져 있었다.
건원해목을 사이에 두고 보이지도 않을 만큼 멀리 있었으나, 그들의 경지에 그 정도는 문제되지 않았다.
[만각변왕. 사계의 태사 하나가 사라졌는데도 낯짝이 좋군.]“우리 사위님이 나와의 약조를 지킨 거겠지. 별 일도 아니네. 그는 본래부터 뛰어난 사내였어. 게다가 그 정도는 해야 응당 만각변왕의 사위라 할 수 있지 않겠나. 지랄위.”
[지란위다.]“아아 맞지. 그런 이름이었군. 나이가 들어 그런가 영 내 멋대로 기억해버린단 말이야… 내 아내를 죽인 것 또한, 누구였는지 가끔 헷갈리기는 해. 오래도록 살아와서 그런지, 기억이란 확고하면서도 홀연하니.”
크흥.
지란위가 거대한 용의 모습으로 콧방귀를 꼈다.
건원해에 반쯤 잠겨 있는 모습은 신화 속에서나 나올법한 용의 자태.
허나 이곳에 자리한 이들은 모두, 하나 신경 쓰지 않았다.
수계의 지란위.
사계의 만각변왕.
선계의 검노일택.
그리고. 다소 음침한 미청년.
붕계의 절마대군까지.
이곳에 모여 있는 자들은 모두, 각자의 계에서 정점에 도달해 있는 자들.
“수선의 번영. 그것의 시작을 함께 했다. 하니, 끝 또한 함께하려 한다. 모두, 살만큼 살지 않았나.”
검노일택의 담담한 언변에 모여 있는 자들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저 여태 그래왔던 것처럼.
고고히 존재할 뿐이었다.
* * *
한편.
대천궁의 지하에서 나온 천범은 그녀와 함께 수계를 거닐었다.
그를 기다리던 대천무장은 다시금 최전선으로 향했고, 대천문장 또한 자신의 죄를 뉘우치며 현재 위치에 걸맞은 책임에 열과 성을 보였다.
그리하지 않으면 언제 어느 날, 천범의 손에 죽게 될지 모르니.
허나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음울하게 감도는 전란도, 상천해월의 미묘한 분위기도 아닌.
“언제까지 울 것이냐.”
호리의 상태였다.
천범은 그녀에게 차근차근.
등선 후의 일을 말해주었다.
그녀가 어찌하여 이곳에 있는 것인지, 또 홍연은 어디 간 것인지.
그것을 말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여러 가지를 이야기해야 했다.
그렇다 보니, 이야기는 길어졌고 며칠 밤낮을 새워 말했다.
그리고 나서 그녀가 한 행동은 당연, 눈물을 보이는 것이었다.
“한 달을 내리 우는구나.”
하기사.
반평생을.
아니, 거의 평생을 함께 지낸 이다.
자신의 반쪽이 사라진 것과 같은 상실감을 느끼고 있을 터.
처음 일주일은 펑펑 울었고, 한 달이 지나자 차츰차츰 멎어들었다.
그러나 불현듯 다시 울어댔고, 지금처럼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려대기 일쑤였다.
눈물을 보이는 것이 흠은 아니다만 이제는 그만 보고 싶었다.
기껏 다시 살아난 그녀다.
응당 슬퍼해야 하는 것을 슬퍼하는 건 당연하다만, 천범으로서는 이제 홍연의 상실을 이겨냈으면 했다.
하여.
천범은 수계를 돌아다니기로 했다.
자신 또한, 이곳을 마음 놓고 돌아다녀본 적은 없었다.
수계가 어떤 곳인지 설명하는 것은 자신도 어려웠기에, 범은 그녀를 달랠 겸 수계를 여행하기로 했다.
“식도락?”
“어차피 최종 목적지는 정해져 있으니, 그곳까지 발길 닿는 대로, 마음가는 대로 걸어보려 한다.”
수계는 넓다.
평범한 인간은 걷고자하면 평생을 걸어도 닿지 못할 만큼 넓은 것이 수계이다. 그리고 그런 만큼 지역 간의 편차가 크고, 특색도 남다르다.
“특산물도 남다르지. 한동안은 그리 하자꾸나. 나도 수계의 이런저런 것을 보고 싶은 마음이 있으니.”
천범은 호리의 손을 꼬옥 붙잡고 이끌었다.
그녀는 히끅거리며 울면서도 그가 이끄는 대로 종종 걸음으로 따랐다.
* * *
백년 후.
산청(山淸).
수계의 중심이라 일컬어지는 통천수궁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산청이라는 곳은 첩첩산중이라는 말이 매우 어울리는 장소이다.
이곳을 봐도 저곳을 봐도 산.
각각 동서남북을 따라 산의 기운과 특색이 모두 다른 기이한 곳이기도 했다.
“때문에 외부와 단절되어, 종종 귀한 자제의 수선들이 이곳에 찾아와 세상과 담 쌓고 수행하기도 하죠. 댁들도 그 때문에 온 거 아니슈?”
“뭐, 겸사겸사.”
발이 여덟인 환수를 다루는 마차의 주인은 때를 기가 막히게 맞춰 왔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내가 산청에 자리 잡은 수선들 중, 대단히 뛰어난 수선 몇몇을 아는데… 어떻소?”
“뭐가 어떻다는 거요.”
“거참! 사람 말 못 알아듣기는, 조금만 적선하면 그들과 연줄을 살짝 만들어줄 수도 있다는 게지!”
흥미가 생겼는지, 사내는 어떠한 방법으로 연줄을 만들어줄 것이냐 마부에게 물었다.
그러자 마부가 말하기를.
“산청에 수행하러 온 수선들은 모두 일정 기간마다 하나씩 선행해야 하는 조건을 지니고 있소.”
“선행?”
“산청이라는 땅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모름지기 이게 필요하잖소.”
마부는 엄지와 중지를 붙여 동그라미를 만들었다.
상계의 화폐.
즉, 돈을 말하는 듯 했다.
“그렇겠지. 내가 알기로 산청을 다스리는 가문이 있을 테니, 그곳에서 수행을 위해 찾아온 수선들을 관리하며 각각의 수련실을 배정하는 모양이군. 선기가 밀집된 선산이라도, 각각의 차이는 있으니까.”
허나 그들에게 금전적인 것을 내달라 하지 않는 대신.
선행이라는 이름으로, 몇 년에 한 번씩 그들을 부리는 모양이었다.
그들 입장에서는 수행하기 좋은 곳을 무료로 사용할 수 있어 좋고, 산청의 가문은 많은 수선을 때에 따라 부릴 수 있어 좋은 것이다.
“그래서? 그들과 어찌 연줄을 만들게 할 수 있단 거요.”
“내가 이래 뵈도, 산청의 눈과 귀라고도 할 수 있거든. 수선님들의 선행을 언제 떠나시는지, 어떤 선행을 하시러 가시는지 다 안다 이 말씀!”
고작 마부 따위가?
이러한 눈빛으로 바라보자, 그는 헛기침을 뱉어내고는 가슴을 퉁퉁 두들겼다.
“뭐 물론, 자세하게 아는 건 아니지만, 수선님들이 선행을 떠나시기 전에는 반드시! 이곳을 찾거든!!”
푸르르르르!
때마침 마차가 멈춰 섰다.
이내 보이는 것은 산청과 그곳에서 조금 떨어진 천잠화(天蠶化).
천잠화라는 객잔이었다.
“천잠화가 또, 산청에서는 빠질 수 없는 명물 중의 명물이거든. 내가 또 이곳에서 일한다 이거 아닙니까! 그러니 언질만 주시면 산청의 수선님들 누구든 안면을 트게 해주겠다 이 말씀이지! 그 누구든! 산청을 떠날 때는 천잠화에 들리기 마련이니!”
천잠화(天蠶化).
천잠이란 나방의 애벌레는 뜻하는 말이다. 그 천잠의 뒤에 될 화자를 붙여 놓았으니.
나방의 애벌레가 된다는 뜻.
이게 도통 무슨 작명인지 모르겠으나, 산청에서는 모르는 이 없는 객잔이라고 한다.
“하아아암~ 다 왔어?”
“그래. 산청에서도 이곳이 명물이라 하니, 가보지 않을 수 없겠다.”
이제 막 성년이 되었음직한 여인은 자다 깼는지 연신 하품을 해댔다.
그 모습이 퍽 순수함의 결정체를 보는 듯하여 마부는 저도 모르게 넋을 놓고 가만히 쳐다봤다.
“뭘 봐?”
“아, 아니요. 크흠! 뭐 어찌됐든 그러하니 생각 있으면 나, 구문을 찾으시오! 그럼!”
“그러지.”
발 빠르게 천잠화 안으로 사라지는 마부와 마차를 보며 여인은 사내를 재촉했다.
“범아, 이곳은 또 어디냐?”
“못 들었더냐.”
“자느라 못 들었어.”
“천잠화라는 객잔이라는구나.”
“근데 여기는 대문밖에 없는걸?”
그녀의 말마따나, 이곳에는 무성한 나무들과 다 쓰러져가는 대문 외에는 있는 것이 없다.
허나 무너져가는 대문의 명패만은 천잠화라 쓰여져 있고, 방금 그곳으로 들어간 마부와 마차가 사라졌으니 어떠한 곳인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들어가 보면 알 것이다.”
범은 호리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그리고 이내, 숲밖에 보이지 않는 대문에 한 발 걸치는 순간.
위잉.
공간이 비틀어졌다.
탓.
“오오… 범아, 객잔이다!”
아무것도 없는 대문을 지나자, 풍경이 바뀌었다.
분명 대낮이었는데, 이곳은 밤처럼 어두웠고 화려한 연등이 곳곳에 놓여져있었다.
흥겨운 가락소리와 함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으며 두터운 담벼락과 높고 높은 고층 누각이 엿보였다.
한 눈에 보아도 퍽 화려한 객.
“천잠화. 그래서 천잠화인가.”
나방은 밤에 돌아다니는 법이니.
그런 뜻인 모양이다.
“이처럼 화려한 것을 보니, 임무를 받고 출타하기 전. 이곳에서 즐기다 가는 것이 관례인 모양이구나.”
유흥을 즐기는 것 말고도, 즐길 거리가 꽤 많은 듯 보였다.
객잔에 들어서기 전부터, 마당에서 술래잡기를 하는 이들이 보이는가 하면, 어떻게 쓰이는지 모를 여러 지형지물과 건물들이 엿보였다.
“저건 무엇이냐?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는데.”
“온천도 있는 모양이구나.”
별 게 다 있는 곳이었다.
“네게도 나쁠 것은 없겠다. 이곳에서는 수행을 위해 찾아온 수선들도 많을 터니 교류해봄이 어떠냐.”
“우선 배고프니까, 밥부터 먹자!”
“…그러든지.”
별로 관심 없는 모양이다.
‘그로부터 백 년.’
수계의 이곳저곳을 다니며 많은 추억을 쌓아 올렸다.
그 결과 호리는 울지 않게 됐다.
홍연의 빈자리는 메울 수 없었으나, 그나마 자신으로 하여금 조금씩 이겨내는 듯하다.
아직도 잠자리에 들 때면 가끔 훌쩍거리는 하나, 잘 이겨내 주고 있다.
‘수행에는 영 관심이 없다만.’
그거야 차츰 나아질 것이니.
“범아, 범아! 저거 봐라!”
“왜 그러느냐.”
빨리 와보라며 손짓하는 호리의 모습이 퍽 아이처럼 귀엽다.
천범이 실소하며 뒷짐 지며 다가가자, 호들갑을 떨며 말한다.
“저거, 저거! 저놈들이 지금 뭘 하고 있는 것이냐!?”
“흠… 저게 보이느냐.”
“응! 아주 잘 보인다! 너무 잘 보여서 남사스럽기 그지없다!”
그녀의 대답에 천범은 쓰게 미소 지었다.
그녀가 가리킨 곳은, 아무나 볼 수 없도록 금제로 가리어져 있는 곳.
천범 정도의 원선태사가 아니고서야 쉽게 안을 들여다 볼 수 없게 만들어진 곳이었다.
‘몸뚱이는 원선의 그것이니.’
그녀 또한 보이는 모양이다.
안에서는 웬 사내들이 가벼운 옷을 입고 여인들과 즐거운 한 때를 보내고 있었다.
‘생각보다 문란한 곳이군.’
산청은 분명 여러 곳에서 찾아온 귀한 자제들이 수행하는 곳이라 들었거늘, 저리도 문란한 것을 보니….
“취지가 타락한 모양이다.”
수행을 목적으로 온 놈들이, 수행은 안하고 음행이나 해대니 영 보기 좋은 꼴은 아니었다.
“그만 가자. 보라고 둔 곳이 아니니 봐서 좋을 게 없다.”
“어어, 쟤들 싸운다?”
호리의 등을 밀던 천범의 발걸음이 뚝 멈췄다.
“싸움 구경해도 돼?”
“뭐… 그거야 나쁠 것 없지.”
“그런데 왜 싸우는 걸까?”
“글쎄, 억지로 이곳에 오게 된 이들도 있는 모양이지.”
범은 매우 흥미진진하게 보고 있는 호리를 보며 말했다.
“들어보고 싶으냐?”
“들을 수 있어?”
금제를 꿰뚫어 보기는 해도, 소리까지는 듣지 못하는 모양이다.
범은 그녀를 위해 금제의 술식을 조금 건드렸다.
-내가 누군 줄 알고 감히 반발해!? 네가 정녕 그러고도 이 청산에서 맘 편히 수행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이런 치욕을 당하기 위해 힘들게 등선하여 온 것이 아닙니다! 내가 어찌 이런 음행을 감내해야 합니까!!
-건방진 것. 뭣들 하나! 저놈을 잡아서 내 앞에 당장 끌고 와!!
대충 흘러가는 상황을 보니.
“저들이 강압하는 모양이다.”
“저들 말이냐? 왜?”
거의 헐벗은 모습으로 상석에 자리한 여인들은 낯빛이 좋았고, 아닌 자들은 낯빛이 좋지 않았다.
저들을 강압하는 것이 여인이고, 핍박받는 게 사내들이라 조금 이해가 되지 않았으나 상황이 그러했다.
“저들은 아마 산청에서도 지체 높은 가문의 자제들일 거고, 저기 똥 씹은 얼굴로 시중드는 사내들은 변변찮은 가문의 수선이거나 뒷배가 없는 자들이 아니겠느냐.”
“무엇 때문에 저러는 거지? 싫으면 그냥 나가면 되지 않느냐.”
“저마다의 사정이 있겠지. 그것 하나하나 내가 어찌 알겠느냐.”
썩 보기 좋은 풍경은 아니나, 그렇다고 관심 가는 것도 아니다.
천범은 괜한 것을 보고 있는 호리의 볼을 쿡 찔렀다.
“가자, 네가 볼 필요 없는 것이다.”
“왜, 재밌는데?”
“뭐가 재밌는데.”
“저 사내가 이제 싸우려고 하지 않느냐. 아주 용맹한 것이 꼭 너 같다. 조금 닮기도 했고.”
스윽.
다시 보니 불합리한 상황에서 홀로 반발하여 싸우는 사내의 얼굴이 영 낯익기는 하다.
“여인들이 좋아할만한 얼굴이기는 하구나. 기생오라비 같은 것이 나와 닮지는 않았군.”
“무슨 소리냐. 너랑 비슷하게 생겨서는 아주 얼굴이 요염하다!”
“…날 줄곧 그리 봤느냐?”
“사, 사실을 말한 것뿐이다.”
그리 생각한 모양이다.
범은 가만히 반항하는 사내를 바라보다 눈가를 좁혔다.
그리고 이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여인들에게 제압 당한 사내의 몸 속에서, 매우 익숙한 기운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금천지화를 가졌구나.”
“금천지화? 그건 네 불이 아니냐?”
“맞다.”
상계에서 오직, 천범만이 지니고 있는 불꽃이다.
허나 그것을 저 상선 사내가 지니고 있다는 뜻은.
‘그러고 보니….’
한 번 건넨 적이 있다.
금환선향에서 손녀인 천소청에게.
그것을 지닌 사내가 있다는 뜻은, 둘중 하나가 아니겠는가.
‘소청의 자식이거나.’
소청을 죽이고 빼앗은 자거나. 허나.
“후자일 리는 없겠지.”
아마도 그는.
천범의 피를 이은 후손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