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ll of the Spear RAW novel - Chapter (520)
낭선기환담-519화(520/600)
낭선기환담 – 2부 229화
“서단, 그 여자는 제가 등선했을 때부터 알아온 인연입니다.”
“귀한 인연이군. 내 언뜻 듣기로는 그녀가 꽤 귀한 가문의 여식이라지?”
천축은 고개를 주억였다.
이내 속이 타는지 술 한 잔을 꺾고는 탁 소리가 날 정도로 내려놨다.
“처음에는 저 또한 나쁘지 않았습니다. 서단의 용모는 녹빈홍안(綠醫紅顔) 그 자체였고, 나긋나긋한 어투는 노랫소리와 같아 귀를 간지럽혔죠.”
그 시절을 추억하는 천축의 낮은 지금과는 사뭇 달랐다.
설레는 감정을 지니고 있는 듯, 정인을 떠올리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점점 변했습니다. 한 번 크게 다툰 뒤로 더 심해졌죠. 본격적으로 엇갈린 것은 산청에 오고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산청에 말인가.”
“예.”
산청은 수계에서 옛부터 수행하기 좋은 곳이라 알려져 있었다.
양씨 가문의 터전.
하여 건너건너 연이 있는 가문의 자제를 맡기고 수행에 필요한 것들을 지원해주는 방식으로 조촐하지만 착실하게 어린 수선들에게 좋은 수행의 터가 되어주었다.
“당연히 수행하는 곳이니 이런 천잠화 같은 객잔이 있는 건 엄두도 못 낼 일이었지요.”
수행하러 오는 곳이 수행자들로 소란스러워져서야 주객이 전도된 꼴이니 꺼려함이 옳다.
한데 어쩌다 이런 화려한 객잔이 생기고, 명물이 되어버린 걸까.
생각해보니 참 신기하다.
“혹, 서단이라는 여인의 뒷배 때문에 이렇게 된 건가?”
천축은 술잔을 쿵 내려놓고 강하게 긍정했다.
“맞습니다!”
처음에는 그녀 또한 많은 수선들과 교류하며 수행에 힘썼다 한다.
허나 천축이 산청에 오고 천 년.
천 년이 지나니 산청, 그리고 서단 또한 조금씩 바뀌어가고 있었다.
“서단은 산청을 관리하는 양씨 세가와 친분을 쌓아갔습니다. 그녀의 가문은 수계에서도 엄청난 곳이라… 모두 그녀에게는 고분고분했지요.”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흐르다 보니 이제는 그녀의 말 몇 마디면 선행의 배분 또한 마음껏 주무를 수 있게 된 것이다.
“월권행위로군.”
“어르신께서도 아시겠으나, 수선계가 으레 그렇지 않습니까.”
천축은 담담한 척 말했으나, 내포된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다.
“실망스러운가 보군. 죽을 고비를 넘겨 등선한 곳이 이런 곳이라.”
“…아니라고는 못 하겠군요.”
왜 모를까.
그 마음 십분 이해하다마다.
자신 또한 그러했다.
하계나 상계나 수선하는 자들이 하는 짓은 별반 다를 것 없으니 실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등선하여 올라온 곳은 신선들의 선경인 줄 알았으나, 그 신선들 또한 하는 짓은 서로 죽고 죽이는 짓만 일삼으니 왜 질리지 않을까.
‘지금의 경지에 올라서도….’
그러하거늘.
“어르신께서도 비승수선이십니까.”
“그렇다네.”
천축은 역시라는 듯 웃어보였다.
“어찌 알았나.”
“제 이야기에 공감하시지 않습니까. 게다가 수계에 대해서도 많이 아시는 건 아닌 듯하니….”
천축은 말하다말고 혹시 하는 얼굴로 범을 보았다.
“수계의 신선이 아니십니까?”
“그럴 리가. 그저 이곳저곳을 떠도는 낭선인지라 그럴 뿐이네.”
“아아, 그러셨군요. 실례했습니다. 낭선이라… 좋지요. 저 또한 때가 된다면 자유롭게 떠나고 싶습니다.”
“선살전 때문에 어렵나 보군.”
“하하, 그렇지요. 어르신께서도 그 때문에 이곳에 계신 겁니까?”
“뭐… 그렇지.”
낭선.
천축은 그 명칭이 입가에 걸리는지 천천히 몇 번을 곱씹었다.
“자신을 낭선이라 소개하는 이는 등선하고 처음 들었습니다. 낭선… 좋지요. 저 또한 동경합니다.”
“동경? 그렇게까지 할 정도인가.”
“저는 어깨에 이고 있는 것이 많아, 하계에서는 기대에 부흥하기 위해 그러지 못했고, 등선하고 나서는 전쟁으로 인해 하지 못했습니다….”
천축은 씁쓸하게 말하며 술잔을 비우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뇨. 모두 변명입니다.”
천범은 피식하며 그의 술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쪼르르. 소리가 기분 좋게 들렸다.
“제 증조부께서는 그런 것 따위는 신경 쓰지 않으셨다 들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것을 이룰 수 있다. 하셨습니다. 무모하다 할 수도 있으나, 강단 있으셨죠. 저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손에 쥔 것을 잃어버릴까….”
행동에 옮기지 못했다.
그 말이었다.
“지금 보면 손에 쥔 것 또한 하찮기 그지없었는데 말입니다.”
천축은 이내 멋쩍게 웃고는 술병을 들어 범의 술잔을 채웠다.
“어르신께서 잘 들어주시니 저 또한 안 해도 될 말까지 하는 듯 합니다.”
“내 부적으로 말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 해뒀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네. 또 내 입은 무거운 편이니.”
천범은 부적 하나를 꺼내 보이며 그를 안심시켰다.
천축은 조금 술기운이 달아올랐는지 볼이 붉어져서는 전보다 입가가 많이 풀어졌다.
다 큰 사내놈 얼굴이야 볼 것도 없다지만, 그것이 증손자라 생각하니 보고 또 봐도 자꾸 보게 된다.
‘역시 핏줄은 핏줄인가.’
자꾸만 천축의 얼굴에서 다른 이들의 그림자를 보게 된다.
눈은 소청. 입은 천유.
귀는 천우. 눈썹은 요호.
언뜻언뜻 그들의 모습이 비춘다.
그렇다 보니 보는 것만으로도 참 재미진 녀석이었다.
천범으로서는 천축의 존재자체가 그저 신기하고 고마웠다.
“자네가 꽤 힘들었겠어. 백산파라고 했나? 자네가 있던 하계의 제일 문파를 창시한 자가 증조부고, 그곳의 적자였다면 어깨가 무거웠겠군.”
“아닙니다. 응당 제가 짊어져야 할 이름의 무게였습니다.”
백산파.
큰 울림이 있는 이름이다.
‘언젠가 한 번 내려가볼까.’
이전이야 어려웠다지만, 지금에 이르러서는 그렇지도 않다.
화신을 하나 만들어 하계로 내려 보내는 것 정도야 원선태사에게는 그리 어렵지도 않은 일.
마땅한 이유가 있지 않아 하지 않은 일이었으나… 마음만 먹으면 쉬이 해낼 수 있는 일이다.
“아차차, 그러고 보니 어르신께서 공묘굴에 대해 여쭈셨는데 제가 괜한 헛소리만 해댔군요.”
“즐거웠으니 됐네.”
“그래도 그럴 수 없지요. 공묘굴에 대해 이야기해 드리겠습니다.”
천축은 천범과의 대화가 꽤 즐거웠는지 이전보다 확연히 늘어난 웃음을 지니고 있었다.
“공묘굴은 삼천 년 전부터 꽤 말썽이 많은 곳이라고 하더군요. 어느 순간부터 그곳에 기괴한 충수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그들의 힘이 워낙 드세 강인한 상선도 순식간에 절명하는 위험한 곳이라 합니다.”
“그런 위험한 곳이 있었나… 상선이 어렵다면 향선을 내려 그곳을 토벌하면 되지 않나?”
그러자 천축은 뭘 모른다는 어투로 헛웃음 지었다.
“선살전이 한창인데 남아도는 향선이 어디 있겠습니까. 아니었다면 이렇게까지 악명이 자자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그렇긴 하다.
수계에 내로라하는 수선들은 모두 최전선에 향해 있고, 나머지는 방진을 구축하고 있으니.
전쟁이 이어지는 기간 동안 공묘국의 충수들이 자생하여 힘을 꾸리게 된 것이다.
그동안 잡아먹은 소선과 상선의 수가 제법 되니, 그곳에서도 대장격인 놈이 힘을 퍽 부풀린 모양이다.
“이런… 그런 곳에 가게 되었는데 자네는 괜찮나?”
염려하듯 묻자, 천축은 괜찮다는 듯 싱긋 미소 지었다.
“괜찮습니다. 저 혼자 가는 것도 아니고… 이 정도도 각오하지 않았다면 그녀와 척지지도 않았을 겁니다.”
천축은 이제 일어나야겠다며 비틀 거리며 일어나 인사했다.
“내일 공묘굴로 함께 갈 수선들을 수소문해 봐야겠으니, 죄송하지만 이만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음, 즐거운 시간이었네. 나 또한 공묘굴의 충수에게 볼 일이 있으니 연락을 취하고 싶다면 천잠화의 마부, 구문이라는 자에게 물어보시게나.”
“알겠습니다.”
포권하며 물러난 천축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범은 흐뭇하게 웃었다.
그때였다.
줄곧 잠자코 있던 호리가 닭고기를 내려놓고 물었다.
“범, 저 아이. 네 핏줄인 거야?”
입가에 고기 살점을 다 묻혀놓고 진중하게도 물어온다.
그간의 대화로 눈치챈 모양이다.
하기사, 백산파가 나왔는데 어찌 알아보지 못할까.
기억이 없다한들, 호리 또한 백산파에 대한 지식은 얼추 있었으니.
천범이 긍정의 표시로 끄덕이자 호리는 충격 받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식이 있었느냐…?”
“있었지. 천축은 아마 내 증손자일 것이다. 제대로 묻지는 못했으나 소청의 아들일 거다.”
“그, 그럼 왜 밝히지 않은 게냐! 저놈이 말한 증조부가 너라면… 필히 정체를 밝히고 말해주는 것이 좋지 않느냐. 덤으로 이 상황도 타개시켜서… 상봉하는 것이 낫잖아.”
허나 범은 구태여 답하지 않았다.
의미모를 웃음만 지을 뿐.
“변태 같은 놈. 또 무슨 꿍꿍이를 생각하는 것이냐.”
“어허, 증손주를 어여삐 여기는 것인데 어찌 그런 천박한 말을 하나.”
“이뻐하면 얼싸안고 손주 괴롭히는 년놈들을 흠씬 두들겨 패줘야지! 가만히 구경이나 하면서 무슨!”
범은 호리의 분개에 허허 웃으며 술잔을 기울었다.
“저마다의 방식이 있는 게다. 그리고 내 앞서 말하지 않았더냐. 지금 저놈은 한창 성장하는 중이다.”
응당, 성장이란 가시밭길을 걸을 때야말로 폭이 커지는 법.
자고로 어른이란, 아이가 넘어졌다면 일으켜주는 것이 아닌. 다음에는 어찌해야 넘어지지 않을 수 있는지 조언하는 것으로 족하다.
자신의 앞길은 자신이 개척해야 하는 법이니 말이다.
“난 모르겠구나. 자식이 있어본 적이 없어서.”
“부러우면 낳던지.”
술잔을 꺾으며 아무 생각 없이 툭 내던진 말.
천범은 뱉어내고 아차 했다.
“그럴까?”
“…무슨 눈빛이냐 그건.”
“내 눈빛이 어째서?”
“아무것도 아니다.”
괜시리 부담스러운 눈빛이다.
뭔가를 대단히 기대하는 눈이라, 천범은 저도 모르게 시선을 피했다.
“근데 생각해보니 이상하다. 대천궁에서 그리 어두운 곳에 단 둘이 부둥켜 안고 지내지 않았느냐. 근데 왜 난 애가 생기지 않지?”
“누가 들으면 오해할 소리만 하는구나. 네가 몇 날 며칠을 울기에 토닥여줬을 뿐이잖느냐.”
위로해줬을 뿐.
그 이상의 것을 한 기억은 없다.
“그러니까 말이다. 본래 아이는 남녀가 잠자리를 같이하면 생기는 것이 아니더냐. 한데 우리는 안 생겼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놀라야 할지 모르겠군. 진심으로 하는 말이냐.”
“뭐가?”
“아니다. 때론 모르는 게 약이지.”
“아! 또다! 또, 본녀를 바보 보듯이 보는 눈빛이 아니냐!”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아무튼, 가만히 있지는 않을 거다. 혼자 외롭게 있는 증손주니… 도움을 주기는 해야지.”
“말 돌리지 마라.”
무시했다.
“알아서 찾아올 거다. 내 느끼기로, 서단이라는 여인은 증손주를 꽤 마음에 들어하는 듯하니.”
그것이 저것이든, 이것이든 중히 여기는 마음은 다를 바 없으니.
타다다닷.
아니나 다를까.
많은 발소리가 연이어 들려온다.
척. 술잔을 머금는 천범의 앞에 여선들이 나타나 둘러싼다.
허리춤의 검이 언제라도 뽑힐 듯 굳건하다.
“당신을 만나고파 하는 분이 계시오. 따라오시오.”
권유도 아니고 명령이라.
꽤 흥미로운 일이다.
“어찌할 테냐.”
“왜 부르는지 알 듯하니 괜찮다. 서단이라는 것이 부르는 걸 테지.”
그때였다.
채앵!
검이 뽑히며 천범의 목에 드리운다.
“이놈!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그분의 이름을 쉬이 부르느냐!”
스릉, 스르릉!!
둘러싼 여인들 모두가 검을 꺼낸다.
섬뜩하게 서 있는 날이 날카롭기도 하다.
“그리 얼굴 붉힐 것까지 있나.”
웅성웅성.
이 여인들 때문에 객잔의 분위기가 뒤숭숭해졌다.
한창 즐거웠거늘.
“별로 좋은 검은 아니군.”
스릉.
목에 드리운 검을 매만진 범이 손가락을 튕겼다.
태앵!!
“꺄악!”
검이 활처럼 휘어진다.
순간적인 일에 반응하지 못한 여인은 힘에 못 이겨 휘청거린다.
그와 동시에 세찬 바람이 불어 여선들의 눈이 찌푸려지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노인은 객잔의 입구에 서 있었다.
꿀꺽.
“안내하시게. 왜 날 부르는지 한 번 들어봐야겠으니.”
대충, 예상이 가기는 한다만.
직접 만나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