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ll of the Spear RAW novel - Chapter (523)
낭선기환담-522화(523/600)
낭선기환담 – 2부 232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천축은 낯선 천장을 보며 자신의 몸을 점검했다.
“분명 팔이 잘렸었….”
한데 상처 하나 없이 말끔하다.
잘렸다가 붙였다면 조그마한 흠이라도 남아 있어야 정상이거늘.
그런 적 없다는 듯 생채기 하나 없이 멀쩡했다.
‘분명….’
의식을 잃기 전.
금색의 물결이 퍼져나가고 신비로운 사내가 나타났다.
그리고 누구냐 묻자….
“천씨 성을 쓴다고…!!”
드디어 기억이 났다.
천씨 성을 지닌 사내.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어안이 벙벙하던 천축의 턱이 옅게 떨렸다.
“축! 일어났구나!”
축이 쉬고 있던 방문이 열리고 미서단이 나타났다.
서단은 깨어난 서단을 보며 한달음에 달려와 그의 안위를 살폈다.
“서단…!”
축은 서단의 팔뚝을 움켜잡고 물었다.
“내가 기억하는 것이 사실입니까.”
서단은 커다란 눈망울을 깜빡거리다 미소지으며 긍정했다.
“네 조부님에 관한 거라면… 맞아.”
그제야 안심이 된다.
그리고 가슴이 뛰었다.
‘살아 계셨구나. 존재하셨구나…!’
꿈이면 어쩌나 불안했다.
덧없는 꿈을 꾼 것이면 어찌할까 고민했다.
허나 아니었다.
사실이었다!
천축이 등선한 지 수천 년이 흘렀다.
그동안 수계에서 수선하며 천씨 성을 지닌 자에 대해 자기 나름대로 수소문을 한 적이 왜 없을까.
당연히 수선들과 인연이 닿고, 친분을 맺을 때마다 한 번씩 물어봤다.
허나 그럴 때마다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이 넓은 땅에 천씨 성을 쓰는 자는 몇 있었으나 모두 그가 아니었다.
진정한 백산파의 시조는 없었다.
물론, 의심 가는 자가 한 명이 있기는 있었으나 너무 오래 전이고, 생사 또한 불분명하여 아닐 거라 생각했다.
살벌한 전쟁통에 이름 한 번 날려 보지 못하고 흐드러진 것은 아닐까, 아니면 애초부터 존재하지도 않은 분이 아닐까 의심하기도 했다.
허나 아니었다.
“몸은 괜찮은 거지?”
“괜찮습니다. 제, 제 조부님은….”
“나와의 이야기는 안중에도 없나 보구나.”
“죄송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농담이다. 그분께서도 기다리고 계시니… 어서 가 봐.”
어디 계시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밖에 없을 테니.
천축은 방문을 나섰다.
그가 있던 곳은 공묘굴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작은 산장이었다.
흠칫.
“그렇군.”
말하지 않아도 알 거라니 딱 그 말대로였다.
느껴졌다.
포근한 금색의 기운.
마치 하늘에 퍼트려진 듯 금색의 물결이 사방에 자욱하다.
천축은 무엇에 홀리기라도 한 듯 안개처럼 내리깔린 곳으로 향했다.
머뭇머뭇 걸었던 다리는 점점 발 빠르게 뛰었고 수풀을 지나 어느 절벽에 도달했다.
그리고 그 절벽 앞에는 뒷짐 지고 있는 한 사내.
천씨 성을 쓰는 사내가 있었다.
“왔느냐.”
기다렸다는 듯 말하는 사내의 친근한 어조에 천축은 울컥, 감정이 치솟았다. 대도에 큰 뜻을 품어 등선하여 수선한 지 오랜 시간이 지났다.
어느 곳을 가도 연고 없는 곳이요, 연고 없는 인연들이었다.
생면부지의 이들만이 자리한 이곳에서 처음으로 만나 듣는 말.
자신을 기다렸다는 듯한 말.
천축은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
천축은 고개를 푹 숙였다.
주먹을 꽉 말아 쥐고, 울지 않으려 부단히도 애를 썼다.
허나 흘러나오는 눈물을 막을 수가 없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사람이다.
이 세계에 유일한 피붙이다.
하여 축은 다시금 물었다.
“하늘 천에… 범어 범자를 쓰시는 분이 맞으, 맞으십니까…!”
“맞다. 내가 천범이다. 날 아느냐.”
빙그레 웃으며 뒤도니, 천축은 아이처럼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어찌…! 어찌 모르겠습니까!”
한 가득 터져 나오는 눈물과 웃음을 억누르며 말한다.
“태어나 자라면서, 걸음마를 떼기도 전부터 들어온 게 증조부님의 이야기였습니다! 그저 백산의 자리 잡은 산군의 이야기부터, 끝에서는 지금의 저를 있게 만든 어머니에게 들었던 이야기까지. 저의 수생에 조부님은 언제나 함께하셨습니다!!”
그 동안의 설움이 새어나오며 감격에 벅찬 것일까.
아니면 울분이 터진 것일까.
무엇인지 모를 복잡한 감정을 다스리며 천축은 소리쳤다.
그에 천범은 옅게 미소 지었다.
“소청의 아들이 맞구나.”
“예, 맞습니다! 백산파의 4대 장문이자 제 어머니이신 천소청의 아들이 바로 저 천축이옵니다! 저희 어머니를 아십니까….”
다시금 확인받고 싶은 마음인지 그리 묻는다.
어찌 모를까.
자신의 하나뿐인 손녀인데.
“그래. 내 손녀, 그리고 네 어머니인 소청을 모를 수가 없지. 어여쁜 아이였다. 금환선향에서 만나 내가 지닌 금천지화와 장충지태를 주었던 기억이 떠오르는구나.”
“예! 예! 그렇기에 제 어머니는 구륭절맥을 치료하여 제가 태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러했다.
천소청은 구륭절맥이란 절맥증을 앓고 있었고, 때문에 천범이 하계에서부터 몸속에서 배양하던 영충.
장충지태를 건네었다.
“지금은 네가 지니고 있구나.”
천범은 다소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것을 그가 지니고 있다는 뜻은 그녀 또한 시간이란 불변의 법칙 속에 녹아든 것일 테니 말이다.
안타깝지만 어찌할까.
세상이 그러한 것을.
“예, 어머님께서는 이것을 보여야 증조부님께서도 확신하실 수 있는 증표라 했습니다!”
“그래….”
천축의 손목을 잡고 관조하자, 장충지태 또한 화답하듯 작은 기운을 발산했다.
“증조부님을 알아보는 걸까요.”
“녀석의 입장으로 따지면 예전 자기의 집이었던 셈이니, 그럴지도 모르지. 어쨌거나 반갑구나.”
그리고 이것으로 천축은 완전한 천범의 증손주인 것으로 밝혀졌다.
“하고픈 이야기가 많습니다… 그리고 묻고픈 것들도….”
산더미처럼 많다.
“그래, 나 또한 그러하다. 저 아이도 데려와 이야기 해보자꾸나.”
“아이요?”
천범의 시선에 따라 고개를 돌리니, 그곳에는 멀찍히 떨어져서 이곳을 바라보고 있는 미서단이 있었다.
“당신이 왜….”
“나도 도움을 받았으니…까요.”
“왜 갑자기 경어를 쓰십니까?”
고개를 갸웃하는 천축의 시선을 외면하고 천범에게 공경의 예를 다하며 포권했다.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만 미천한 것이 하나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
천축은 깜짝 놀랐다.
아무리 그래도 미씨 세가의 금지옥염인 미서단이 자신을 미천하다 표현하다니! 천축의 머리로는 이해되지 않는 언사였다.
‘증조부님의 경지가 심후하다지만 그녀가 저리 낮출 것까지는….’
없다.
왜냐하면 그녀의 뒷배가 바로 수계의 오대세가중 하나인 미씨가 아니던가. 딱히 목숨이 경각에 달하지도 않았는데 저리 낮추는 건 이상했다.
“그리 예를 다하지 않아도 된다. 묻고픈 것이 있으면 물으라.”
“혹시… 금천대사님이 아니십니까.”
금천? 천축은 처음 들어보는 말이라 두 눈을 깜빡거렸다.
“금천대사라니….”
“축, 당신도 몇 해 전, 온 하늘이 황금빛으로 물든 것을 보았을 겁니다. 해도 달도 모두 금빛으로 물들여 한때 금천파월(金天波月)이라 부르며 신기한 하늘이라고 떠들썩하던 때가 있었지요.”
알고 있다.
그랬던 적이 있다.
“그랬었죠. 그런데 그게 지금과 무슨 상관이라는 겁니까.”
“세간에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저희 가문의 어른들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언뜻 들은 적 있습니다. 새로운 원선태사의 등장과 그 별호가 금천이라는 이야기를요.”
“!!”
말인즉슨.
천축의 증조부.
천범의 경지가 향선의 수준이 아닌, 원선태사가 아니냐 묻는 것!
“저, 정말이십니까…?”
그에 대해 천범은 묘한 미소만을 지을 뿐 곧장 답하여 주지 않았다.
턱을 매만지며 흥미롭다는 얼굴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내 알기로 미가에서는 원선이 없어 그런 이야기를 듣기 어려울 텐데… 잘도 주워들었구나.”
서단은 곧장 한쪽 무릎을 꿇었다.
“저희 미씨 세가는 오래토록 가문에 원선으로 승선한 자가 나오지 않아 여러 대비를 해 두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선등음석(仙等音石)이라는 보물인데, 미가의 선조께서 만드신 선등음석에는 각각, 상계의 존재들에 관한 음각이 저절로 쓰여집니다.”
거대한 석판과 같은 비석.
그곳에는 거대한 힘을 지닌 존재들이 표시된다.
그들이 죽으면 사라지고, 나타나면 새롭게 쓰여지는 선등음석.
“그렇다는 말은….”
“그래, 어쩌다보니 모두 날 금천이라 부르기는 하더구나. 아마 미가의 선등음석이란 것에 쓰여진 건, 내가 맞을 것이다.”
“역시…!!”
천축은 어안이 벙벙했다.
그저 만난 것으로도 더할 나위 없는 기적이자 축복이라 생각했거늘.
자신의 증조부가 상계의 정점에 오른 존재들 중 하나라니!!
너무 놀라 말도 나오지 않았다.
“눈에 띄는 걸 좋아하는 성정은 아니라 아는 이가 없을 텐데 용케도 눈치를 챘구나. 그래, 미가라고 했지. 미가에서 나와 면식이 있는 자는 미세파 그 친구밖에 없군. 잘 있나?”
“자, 잘 있으십니다! 어떤 인연인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선살전이 막 시작되던 때, 그 친구와 함께 전쟁에 나선 적 있었네. 개계오경에 도달하는 임무였는데 그때 함께 동거 동락했지. 자네와는 어떤 관계인가. 친척쯤 되는 모양이군.”
그러자 서단은 활짝 웃었다.
이유를 묻자.
“제 친부이십니다.”
“뭣… 네가 정녕 미세파의 딸이란 말이냐?”
“예, 그렇습니다.”
“놀랍구나… 허허, 인연이란 것이 정말 있기는 있는 모양이야.”
미세파의 딸과 천범의 증손주.
기가 막힌 인연의 굴레다.
“넓디넓은 수계에서 이런 인연이라니, 이럴 때마다 세상이 참 좁아 보여.”
서단은 무엇이 그리 기쁜지 답지 않게 수줍어하며 기뻐했다.
범은 그것이 축과의 관계 때문임을 알았으나 구태여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그 이후.
천축은 자신의 증조부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전했다.
세상에 하나뿐인 가족이라 생각하여 그런지, 만나게 된 지 하루뿐이 되지 않았음에도 그는 어린아이처럼 상계에 올라와 힘들었던 점이나 쓸쓸했던 시기를 미주알고주알 말했다.
그 모습이 꼭, 어린 손주가 할아버지의 이쁨을 받고 싶어 하는 모습 같아 서단은 홀로 실소를 흘렸으나 천축은 개의치 않았다.
평소에 의젓한 모습과는 달리, 오늘만큼은 그리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가문을 만들려 했다고….”
“예. 증조부님을 찾는 것은 그 시절의 제게 너무 어려운 일이었고, 찾을 수 있으리란 확신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선 천씨 가문을 만들어 이름을 떨치면 증조부께서도 한 번쯤 이야기를 듣고 찾아오시지 않을까 했죠. 그리고 시간이 흘러, 하계에서도 등선한 천씨 성을 지닌 후손들 또한 손쉽게 만날 수 있을 테니까요.”
범은 고개를 주억였다.
그 또한 그러려고 했으니 말이다.
“나 또한 그러려 했으나, 내 일이 바빠 그쪽으로는 진전이 없었다.”
허나 앞으로는 다를 것이다.
“네가 있고, 또 널 도울 여인이 있으니 그 정도는 쉽겠지.”
천축과 서단은 얼굴을 붉혔다.
“이미 서로의 마음은 확인하지 않았더냐. 미세파와는 내 언제 한 번 혼담 이야기를 해보마.”
“아, 증조부님. 저희는 그런 사이가 아닙니다….”
“그래, 같은 생각이냐.”
물으니 선뜻 답하지 못한다.
우물쭈물하고 있는 모습을 보아하니 알 만하다.
“지금 당장 정할 필요는 없겠지. 허나 앞으로는 가문의 배경을 이용해 내 손주를 겁박하지 말거라.”
“….”
미서단은 이내 파리한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조부님. 그게….”
“괜찮다. 그럴 수 있지. 앞으로는 네가 곁에서 잘 돌봐주면 될 게다. 본래 여인이든 사내든, 곁에 있는 짝이 옳은 길로 인도하면 되는 거니까.”
쓰게 웃는 천축의 얼굴을 보아하니, 괜한 소리를 한 듯하다.
허나 증조부된 입장으로서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었고, 어긋난 애정의 종착점이 어찌되는지를 잘 알고 있는 천범이라 한마디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미세파는 어디 있더냐.”
“지, 지금은 전선에서 잠시 물러나 본가에 계십니다….”
“마침 잘 됐군.”
미씨 세가의 본가라면 산청에서도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
“오랜만에 얼굴 한 번 보는 것도 나쁘지 않지. 이제는 나 혼자가 아니고, 날 기다리는 자들도 많을 테니… 슬슬 얼굴을 보여서 나쁠 게 없지.”
때마침 잘됐다.
서단이 말한 선등음석 또한 한 번 살펴보고 싶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