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ll of the Spear RAW novel - Chapter (525)
낭선기환담-524화(525/600)
낭선기환담 – 2부 234화
미씨 세가의 본가에서는 금전대사를 성대하게 맞이했다.
갖가지 산해진미와 술들은 물론, 노랫소리에 취할 정도로 흥겨운 가락이 산 너머까지 울려 퍼졌다.
그를 배려한 것인지 여러 금제와 진법을 펼쳐져 있었다.
때문에 신원이 확실한 자들만 금천 대사의 연회에 참여할 수 있었는데, 대개 이름 있는 가문의 가주와 그들의 아들딸들이었다.
허나 그중에서도 그에게 가장 가까운 것은 단연, 미씨 세가.
미세파와 양미 부부.
그리고 그의 딸 미서단이었다.
“가만 보니 닮은 것 같기도 하군.”
닮기는 닮았다.
미세파와 양미의 얼굴이 서단에게 조금 남아 있는 듯하다.
“그렇습니까?”
“그런 듯하구나.”
곱상한 얼굴은 양미를 닮았고, 성격이 개차반인 건 아비를 닮았다.
생각해보니 저들 딸이 맞는 듯하다.
“어찌된 인연인지 참… 그래, 전쟁통에서 인연을 쌓게 됐다고?”
“예. 어르신께서 사라지시고, 저는 일개 병사로 전장을 떠돌았습니다. 그때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그에게는 빚이 있다.’ 라며 종종 그녀를 도와주고는 했다 한다.
그렇게 한해를 넘기고 몇 번의 만남이 이어지고 나니 자연스레 둘의 결실이 나타났다고….
“자네도 참 자네군. 문무선 중에서도 아끼던 아이였는데… 내게 허락도 받지 않고 데려갈 줄이야.”
“…송구합니다.”
미세파는 어색하게 웃으며 천범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쩔쩔 맸다.
아무리 과거의 인연과 친분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는 이제 감히 넘볼 수 없는 상천의 정점에 선 자.
게다가 자기 부인을 데리고 있던 상관이고 그녀를 어여뻐 하던 터라, 마치 장인을 대하는 것만 같았다.
“내가 양미를 꽤나 예뻐했지. 눈치도 좋고, 자질 또한 남달라 약간의 언질을 주는 것만으로 벽을 뚫어버리고 마음씨도 고우니 말이야.”
그런… 어린양 같은 아이를.
‘저 난잡한 놈이….’
생각해보니 화가 난다.
하필 만나도 저런 난봉꾼 같은 놈과 부부의 연을 맺어서는.
“자네 근데 짝이 없었나? 내 알기로 이런저런 여인과 인연이 있었다고 알고 있었네만.”
한마디로 다른 여자들 많지 않았냐는 소리였다.
그의 과거, 여성 편력을 조금 알고 있기에 물을 수 있는 질문이었다.
“저, 젊은 날의 혈기였죠. 지금은 제 눈에는 부인밖에 보이지 않지요.”
놀랍게도 그의 본처는 양미 혼자였고, 첩도 들이지 않았다 한다.
믿기 어려웠다.
“몰래 뒤에서 놀아나는 건 아냐?”
“아닙니다! 금천대사께서는 꼭 그랬으면 좋겠다는 듯 말씀하십니다… 너무 몰아세우시니 섭섭합니다! 저희는 전장을 돌아다니며 끈끈한 사내의 정을 쌓았잖습니까.”
“사내끼리 끈끈한 정은 무슨.”
퉁명스레 말하자 미세파는 진정으로 서운한 듯 시무룩했다.
그 모습이 비 맞은 강아지 같아 천범은 저도 모르게 실소하여 장난이라는 듯 손사래 쳤다.
그렇다하니 더 할 말이 없기도 하다.
애초에 그런 걱정을 할 입장이 아니기도 했다.
“크흠… 양미야.”
“예, 어르신.”
“놈이 잘해주고 있더냐.”
“더할 나위 없습니다. 어르신의 시중을 드는 것 또한 제게는 더 없는 행복이었습니다만… 부군과 함께 하는 지금의 생활도, 제게는 소중합니다.”
“그래, 그럼 되었지.”
부모 없이 자란 고아로서 통천수궁의 궁녀가 되었던 그녀다.
그 점이 마음에 걸려 내심 챙겨주었었는데, 이렇게 한 사내에게 정착하여 잘 살고 있으니 다행이다.
가족이 없던 그녀가 이제는 가정을 만들어 잘 살고 있는 모습을 보니, 괜시리 가슴 한켠이 뿌듯했다.
“이곳에서 괴롭히는 자는 없느냐. 출신이 미천하다 하여 그러는 자들이 있었을 것 아니냐.”
가문에서도 많이들 반대하지 않았을까 싶다. 부모도 없고 가문도 불분명 한 여인이 오대세가의 적자이며 불세출의 천재라 불렸던 미세파에게 시집온다 했으니 여기저기서 얄궂게도 굴었을 것이 아니던가.
그 점을 걱정하여 묻자 양미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아닙니다.”
없지는 않은 듯하다.
표정을 보니 알겠다.
“이제는 없겠지요.”
“…그래. 그래야만 할 것이다. 내 화를 감당할 수 없다면 말이지.”
천범은 주변에 모여 있는 미가의 인물들을 슬쩍 바라보며 말했다.
그들 모두 식은땀을 흘리거나 애써 웃는 낯을 했다.
원선태사와의 친분을 보여줬으니 이제는 감히 그녀에게 함부로 대하는 자가 없으리라.
‘시간 낭비가 아닐까 했는데, 정말 잘 왔군.’
자신 덕분에 이리저리도 고생했던 아이가 아닌가.
이제 때가 되었으니… 놓아두었던 인연들을 챙기는 것도 좋을 듯하다.
“그건 그렇고, 어르신께서 손주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그것도 이렇게 번듯하고… 저희 딸과도 인연이 있는 자였을 줄이야. 단아, 넌 어찌 이 아비에게 한마디 말도 없었느냐. 이런 사내가 있었으면 곧장 말하고 혼담을 나눴어야지!”
“호, 혼담이라뇨….”
아직 이르다는 듯 쑥스러워 한다.
그 모습이 어여뻐 미세파와 양미는 미소 짓고 천범 또한 허허 웃었다.
“혼담이라, 나쁠 것 없지. 내 둘 사이를 지켜보니 서로 연모의 감정을 품은 듯하기는 하더구나.”
“정말이요?”
“그래. 내가 여기까지 온 이유 중 하나에는 축과 서단의 혼담을 위해서 온 것도 있지.”
그러자 장난으로 혼담을 던져보았던 미세파의 눈이 휘둥그레 떠진다.
“정말이십니까?”
“그래.”
본래는 좀 더 두고 볼 생각이었다.
미씨에 관해서 그리 좋은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었으나, 둘 사이가 저러하니 혼담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 수밖에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래도 증손주의 혼인이니, 급할 것도 없고 둘 사이의 의견을 존중해야 함이 우선이었으나.
“양미의 딸이니 더 볼 것도 없지. 축아, 넌 어떻느냐.”
미서단의 첫인상이 그리 좋지만은 못했다.
그녀는 아니었다만, 주변이 조금 문란했고 권력을 이용해 증손주를 억압하는 장면이 기껍지는 않았다.
허나 그것이 어린아이의 치기와도 같은 마음임을 알았고, 천축 또한 그 마음을 모르지 않으니 덮어두었다.
“예? 아, 너무 갑작스러워서… 어떤 답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싫은 게냐?”
“아, 아뇨. 싫은 건….”
당황하며 말하는 모습이 여간 재미지다.
“단아, 넌 어떠니?”
양미도 서단에게 묻자,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배시시 미소 지었다.
싫지 않은 모양이다.
‘축이 보다는 서단, 저 아이가 더 애정이 큰 듯 했지.’
축은 조금 갑작스러운 내용에 놀라 했을 뿐이다.
하기사, 제대로 된 연인 사이도 아니었는데 갑자기 혼담 소리가 나오니 당황할 법도 하지 않겠는가.
허나 둘 사이의 마음이 있으니 이는 곧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였다.
“크흠, 어르신의 증손주에게 이런 말을 해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뭔가, 미세파. 기탄없이 말해보게.”
서로가 통하는 듯 눈빛을 교류한 천범과 미세파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천축이라고 했나? 여인을 사로잡기 위해서는 응당, 순간의 결단이 필요한 법이지. 그리고 그 기회는 오래도록 이어지지 않는 법일세. 게다가 단이가 우리 부인을 닮아 미모면 미모, 재주면 재주. 어릴 적부터 여러 곳에 능통하여 팔방미인 소리를 듣고 자랐지. 이 정도면 상계 전역을 뒤져도 흔치 않아.”
흐뭇하게 제 딸을 바라보는 미세파는 만족스러운 듯 팔짱 끼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잠시 못 본 사이에 팔불출이 되었군. 세상 참 오래살고 볼 일이야.’
그 미세파가 저리 될 줄 누가 알기나 하였던가.
“자식 자랑을 하는 건가, 아니면 꽉 잡으라 부추기는 건가. 하나만 하게. 그리고 우리 축이도 어디 가서 빠지는 아이는 아니지. 지금만 해도, 여러 가문의 자제들이 이곳에 모여 있지 않은가. 내 한마디만 하면 혼담이 오갈 수 있는 아이가 여럿 있을 터.”
운을 떼자, 그 말만을 기다렸다는 듯 이야기에서 멀어져 있던 미가의 친척들이 은근 슬쩍 다가왔다.
미가뿐만 아니라 다른 가문의 여식들을 앞세워 다가오기도 했다.
“증조부님….”
허나 축은 저러한 시선이 꽤 부담스러운 모양이다.
범은 그런 축이 우스워 파안대소하며 의자의 팔걸이를 때렸다.
“하하하! 뭘 그리 죽을상을 하고 있느냐. 이제 보니 내 증손주가 날 닮아 영 숫기가 없었군.”
“…….”
그리 말하자, 미세파는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바라보았다.
“뭘 그렇게 보나.”
“아, 아닙니다. 하하하!!”
멋쩍게 웃은 미세파는 천범과 함께 술잔을 나누었다.
한 차례 폭풍처럼 지나간 연회는 새벽이 되도록 끝나지 않았고, 천범과 미세파는 오래간만에 만나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새벽의 푸르스름한 달은 이제 와서는 하나밖에 없어 유달리 고즈넉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그렇구만… 산청의 양씨 세가가 양휘 그 친구의 친가였구만.”
“그렇습니다. 제 부인 또한, 그 친구 가문의 양녀로 들여 저와의 혼인이 가능하게 되었죠.”
“내 알았다면 만나고 왔을 것을.”
“…모르셨습니까. 주천무장은 오래 전 전사했습니다.”
흠칫.
“그런가….”
“예. 그다운 명예로운 죽음이었지요. 많이들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렇구만… 양휘 그 친구가….”
오래도록 인연을 쌓은 친구는 아니다만, 수궁에 입성토록 방법을 알려준 자 또한 양휘였다.
안타깝게도 전쟁통에 전사했다니, 입맛이 썼다.
“한 잔하시죠. 주천무장의 명예로웠던 수생을 위하여.”
한 입에 술잔을 털어 넣은 천범은 은은한 달빛을 보며 그를 추억했다.
추억은 다시 술잔을 채웠고, 이내 한 입에 털어 넣는다.
그의 죽음은 아쉬웠으나, 그와의 만남은 즐거운 일이었으니 한평생 마음속에 고이 간직하리라.
“근데 자네 말이야.”
미세파의 빈 잔에 술을 따르며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전선에서 물러났다 들었는데… 그거 옆구리에 상처 때문인가?”
흠칫.
몸을 떤 미세파는 이내 쓰게 웃으며 긍정했다.
“큰 상처를 얻고 죽을 뻔 했죠. 운이 좋아 구명했지만 후유증이 남아 제대로 된 힘을 쓰지 못합니다.”
“그렇구만….”
처음 보았을 때부터 내심 마음에 걸렸다. 현천무장이라는 직책에 큰 자부심을 갖고 있던 그가, 직책을 내려놓고 본가로 귀향했다니.
솔직히 직접 보기 전에는 믿기 어려운 말이었다.
“상처를 보니 꽤 오래됐더군. 이 상처를 갖고 난 후에… 혼인했나?”
“예. 한 번 죽을 뻔 했다 보니 제 삶이 더욱 소중해지더군요. 덕분에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딸을 얻었고, 이제는 혼담까지 오가게 되었으니 제 삶도 꽤나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런가.”
“그래서 말입니다만… 어르신.”
“둘뿐이지 않나. 옛날처럼 편하게 부르게.”
“밟고 있는 길이 다른데 어찌….”
“편하게 하게.”
천범의 부드러운 어조에 미세파는 잠시 입가를 달싹이다 이내 천천히 털어놓았다.
“범… 부탁이 있다.”
“그래, 뭐냐.”
“될 수 있으면, 둘의 혼례를 치르게 하는 게 어떠한가.”
“축이가 그리 마음에 들었나?”
“누구 증손인데, 당연하지. 그 시절의 자네를 쏙 빼닮았더군. 물론, 자네와는 달리 순수한 점이 더 마음에 들기도 했고.”
“나도 순수했네.”
나름 순수했다.
“아니, 전혀 아니었네. 난 처음 자네를 보았을 때, 그 재수 없는 상판대기를 반드시 후려갈기고 싶었어.”
“안타깝게 됐구만, 후려 갈겨진 건 자네였으니 말이야.”
선살전이 막 일어났을 때.
우연히 만나 신경전을 벌이고 화를 참지 못한 천범이 미세파를 후려갈긴 적이 있었다.
눈 감으면 어제와도 같은데, 이제는 머나먼 추억이 되어 버렸다.
“하! 그랬지. 그랬던 적이 있었지.”
미세파는 과거를 추억하듯이 웃음을 터트렸다.
허나 천범은 그 웃음에 화답하지 않고, 진지한 낯으로 물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게냐.”
미세파의 낯이 흠칫 굳었다.
이내 고소를 머금으며 말한다.
“…뭘 숨길 수가 없군.”
“그 정도도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어찌 원선일까. 자네 앞에 있는 사내는 대라천을 엿보는 자이네. 감출 수 있으리라 생각지 말게.”
미세파는 옷의 한 구석을 슬쩍 들어올렸다. 그곳에는 천으로도 모두 감추지 못할 정도로 흉한 상처가 그의 목숨을 좀먹고 있었다.
“그래. 이제, 얼마 남지 않았네. 해 봤자… 십 년 정도지.”
그러니 죽기 전에.
“딸아이의 혼례를 보고 싶은 게야.”
평생토록 마음대로 행하며 살아왔다. 순탄치 않은 인생이니 미련도 그리 많지 않다.
있다면, 하나뿐인 부인과 그녀를 닮은 딸에 대한 걱정뿐.
“들어줄 수 있겠는가.”
그의 호소에 범은 침음을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