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ll of the Spear RAW novel - Chapter (533)
낭선기환담-532화(533/600)
낭선기환담 – 2부 242화
용마골.
아니, 이제는 천정이라 이름 지어진 곳에서 상서 사이에는 수일이 걸리는 거리가 있었다.
거리가 거리였으나 시급한 일도 아닌지라 천천히 여유를 만끽하며 걸어가고 있었다.
한동안은 천축 부부와 함께 지내느라 단 둘이 길을 거니는 것도 꽤 오랜만이었으니 말이다.
“예로부터 신사가복(信使可覆)이라 하였다.”
“그게 무슨 말인데?”
“믿음은 움직일 수 없는 진리, 그러니 남과의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말이다.”
갑자기? 라는 표정으로 천범을 바라보는 호리의 모습.
범은 큼큼거리며 목을 가다듬고 은근히 그녀를 떠봤다.
“난 너와의 약조를 지켰으니 한 가지 진실 되게 묻고 싶구나.”
“뭐 대단한 걸 물으려고 그리 뜸을 들이는 게냐. 묻고프면 어서 물어라.”
“만나면 뭘 하려는 게냐.”
“뭘 하다니?”
“내 처와 만나보고 싶다 하지 않았더냐.”
괜히 신경 쓰인다.
사하와의 만남은 천범 또한 기대가 가득했지만 그 사이에 호리가 끼게 되었다는 게 조금 마음에 걸렸다.
“내 말하지 않았더냐. 네가 고른 짝이니만큼, 친우된 자로서 한 번쯤 인사를 하고 만나보고 싶었다고.”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 퉁명스레 대답했다.
허나 왜인지 날카롭게 들리는 것은 천범의 착각일까.
“크흠….”
진정한 속내가 궁금했지만, 저리 나온다면 더 캐물을 수 없었다.
천범은 내심 관심 없는 척 고개를 돌리고 산길을 올랐다.
툭, 툭.
그의 오른손에 잡혀 있는 지팡이가 푹푹 땅을 찔렀다.
-제가 보기엔 머리끄덩이를 잡고 싸우려는 것이 아닌지요?
-닥쳐라. 성성이놈.
범이 들고 있는 지팡이는 선등음석이 변한 지팡이였다.
놈은 지옥의 지자만 꺼내도 벌벌 떨어댔고 천범을 주인으로 모시기로 하였다.
여러 가지 금제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동안 수계를 여행하며 천범이다. 그리 악한 존재가 아님을 알게 된 것인지 요즘 들어 부쩍 말을 자주 걸어왔다.
-제가 보기에는 호리님께서는 금천대사의 여인들을 모두 때려눕히고 자신이 본처가 되기 위함이 아닌 건지 의심스럽습니다.
우뚝.
천범의 발걸음이 멎었다.
“왜 그러느냐?”
“아니다.”
가늘어진 눈가로 선등음석을 노려보자 다시금 잠잠하다.
자기 나름대로 이간질을 하려는 건지 놀리려는 건지 모르겠으나, 심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나중에 한 번 부러트려 놔야겠군.’
하는 짓이 영 밉상이다.
자기 나름대로는 범에게서 벗어나 자유가 될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나름 꾀를 부리는 듯하다.
그런 게 통할지는 미지수지만 한 가지는 통하는 듯하다.
-심히 언짢구나. 내 팔대지옥 중 일대지옥은 벌써 구상을 마쳤는데 한 번 들어갔다 와 보겠느냐.
그러자 지팡이에서 미세한 떨림이 손바닥을 타고 흘러왔다.
천범은 그제야 만족스러운 미소를 흘리며 발길을 재촉했다.
“미친놈처럼 뭘 혼자 실실 쪼개고 있는 것이냐.”
“…음, 이제 곧 다 왔나보구나.”
“아직 다 안 왔잖아.”
“거의 다 왔다.”
천범의 말에 슬쩍 고개를 들어보니 도시다운 것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거라고는 첩첩산중.
상서에 도착하려면 아직 멀었다.
속았다는 기분에 아미를 찌푸리고 쳐다보자 범은 고개를 홱 돌려 시선을 피했다. 기분 좋은지 휘파람까지 불어대고 있었다.
“근데 왜 그 꼴을 하고 있는 게냐.”
“무슨 꼴?”
“왜 늙은이로 둔갑했냐는 말이다.”
“아아, 별 것 아니다.”
상서에서 천범은 퍽 유명한 편이다.
소선들은 수명이 짧아 그의 얼굴을 잊어버렸겠지만, 그곳에 자리한 상선들은 여럿 있으니 혹시나 자신의 얼굴을 아는 자가 있으면 소란이 일어나지 않겠는가.
“하늘 위에 자리한 자의 배려랄까. 작은 자들이 놀라서 소란이 일어난다면 좋을 게 없지 않느냐.”
“재수 없는 놈.”
“그리고 나 또한 상서를 떠난 지 오래 되었으니, 그동안 얼마나 발전을 이룩했는지 두 눈으로 차분하게 살펴보고자 함이다.”
어련하겠냐는 듯 입술을 댓발 내민 호리는 먼저 성큼성큼 산꼭대기로 올라가 버렸다.
“왜 저리 툴툴거리는 것인지….”
쯧쯧 혀를 차려는 순간.
“야~! 범아! 여기 뭐 있다!”
산꼭대기에서 범을 부르며 빨리 와 보라며 손짓하여 다가가보니.
“뭐하고 있는 게냐.”
“보면 알지 않느냐? 이놈이 갑자기 창을 들이밀었다.”
스윽, 보니.
호리의 목을 향해 창을 겨누고 있는 병사 하나가 있었다.
“네놈들은 누구냐!”
창을 겨누는 병사는 오히려 당황한 듯 눈을 빠르게 깜빡거렸다.
목에 창을 겨누는데도 눈 하나 깜짝 않는 여인이나, 부름에 달려온 노인네나 긴장감이 전혀 없었기 때문.
때문에 오히려 창을 겨눈 병사만 혼란스러워했다.
“그러는 네놈은 누군데 이곳에 있는 것이냐. 가만 보니 수계의 신선은 아닌 듯한데?”
군복의 양식이나 쥐고 있는 법기의 문양이 상서의 것이 아니다.
“범아, 이놈 상처 입었어.”
“그렇구만.”
쓰고 있는 투구나, 갑주의 양식이 일반 병사의 것이다. 아마도 어디선가 전투를 벌이다가 다친 듯하다.
산꼭대기에 있었다는 건 상처를 치료할 곳을 찾아 헤맸던 것이고, 급박한 상황에 누군가에게 도망쳐 이곳에 숨어 있었을 확률이 높다.
아직도 선살전은 이루어지고 있으니 수계의 적군이 아닌가 싶었으나 애매하게 그건 또 아닌 듯하다.
“신기하구나. 갑주는 사계의 것인데 그것을 입고 있는 놈은 사계의 신선이 아니라니.”
수계의 신선이다.
말 못할 사연이 있는 듯하다.
아니면 변절자거나.
“속세의 가장 큰 고통은 후회라 하더군. 네놈, 후회할 짓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그건 내가 할 말이다! 네놈들은 누구냐! 상서에서 나고 자란 내가 처음 보는 놈들이니 분명 외지인일 터! 지금 시기에 상서로 다가오는 네놈들의 목적이 대체 무엇이냐!”
지금 같은 시기?
“범아, 상관없지?”
슬슬 귀찮다는 듯 인상을 찌푸린다.
그 또한 고개를 끄덕거리니 호리의 시선이 병사에게 향한다.
“우, 움직이지 마라!”
“시끄럽다 이놈!”
우드득, 휙!
단번에 겨누어진 창을 잡아 꺾어 분질러 창날을 놈에게 향한다.
꽤 강력한 법기였으나 원선태사의 몸을 지닌 호리에게는 아이들이나 가지고 노는 노리개나 다름없었다.
전세가 역전되니 병사는 화들짝 놀라며 거북이처럼 목을 움츠러들었다.
“사, 살려주시오!”
“이놈 참 분주한 놈이구나. 태도가 그리 휙휙 바뀌면 어지럽지 않더냐?”
“살려주시오! 살려만 주신다면 반드시 크게 사례하겠소!!”
재미난 놈이다.
범은 두 손을 번쩍 들고 살려 달라 말하는 놈을 보며 묘한 얼굴을 했다.
“죽여버릴까?”
으름장을 놓자, 병사의 낯이 사색이 되어 털썩 무릎을 꿇고 손바닥을 싹싹 비빈다.
“한 번만 봐주십시오! 저는 꼭 죽어서는 안 될 이유가 있는 놈입니다! 제 밑으로 여우 같은 마누라와 토끼 같은 처자식들이…!!”
“얼굴을 보니 이제 막 성년이 된 듯한데 부인과 자식이 있단 말인가?”
“그럼요!!”
그렇기에는 너무 앳되어 보인다.
“범아 믿지 마라! 혓바닥이 긴 것을 보니 분명 거짓일 것이다!”
“거짓이 아닙니다!!”
“이놈! 네놈은 아직 풋내기의 냄새가 난다! 여인의 잡내가 섞이지 않은 걸 보니 아직 여자를 탐해 본 적이 없는 놈이지 않더냐!”
“뭐… 그런 것도 아는 거냐?”
천범이 흠칫 놀라 바라보니, 호리가 묘하게 얼굴을 붉힌다.
“작은 콧구멍으로 별의별 냄새를 다 맡는구나.”
“시끄럽다! 아무튼 이놈은 거짓말쟁이다! 감히 나와 너를 세치 혀로 농락하려 했으니 당장 거꾸로 묶어 전신에 꿀물을 발라놓고 고독에 던져 놓아야 함이 옳아!”
이 무슨 잔인한 고문 방법이란 말인가.
단단히 화가 났는지 호리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일단 진정해라. 몇 가지 물어볼 것도 있으니 묶든지 던지든지 그 뒤에 해도 상관없지 않느냐.”
“살려주십시오, 어르신!!”
네 발로 기어와 천범의 다리를 붙잡고 애걸복걸한다.
“사실, 저는 상서를 위해 죽어서는 아니 될 대의를 갖고 있습니다!! 절 살려주시면 반드시 상서에서 사례할 것입니다!!”
“네놈이 누구인데 상서에서 너의 목숨 값을 내준단 말이냐. 복장은 사계의 군복을 입었는데 상서의 사람이라 하니, 네 말을 누가 믿을까.”
“하지만 사실입니다! 도탄에 빠진 상서를 그들에게 되찾고자 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도탄에 빠진 상서.
천범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간절함이 넘치는 어투다.
어느 정도 진심이 엿보였으나, 진실 속에 가리어진 거짓도 꿰뚫어보지 못할 정도로 범은 어리석지 않다.
“이상하군. 가령, 네 말이 사실이라 한들 상선도 되지 못한 소선 따위의 도움으로 빼앗긴 상서를 되찾을 수 있단 말이냐.”
고작 그 정도에 빼앗길 상서라면 그냥 줘버리는 게 나을 정도다.
애초부터 말이 되질 않는 소리.
고작 소선 나부랭이 따위가 어디 감히 대의를 논할까.
“힘없는 자의 용기만큼 공허한 것은 없다 했다. 허나 그들은 적어도 일신의 영달을 위해 대의를 논하지는 않지. 네놈과는 달리 말이다.”
“젠장!”
퍼엉!
새로 둔갑한 놈이 연기를 자아내고 하늘로 달아났다.
호리는 당장에 저 괘씸한 놈을 잡아 목을 부러뜨리겠다며 달려가려 했으나 범이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왜! 저놈을 붙잡아 목을 비틀지 않으면 오늘 밤 잠이 안 올 거다!”
“그리하고 싶으면 갈 필요 없다.”
툭툭. 지팡이로 지면을 두들기니 꿀렁꿀렁 들썩이다 괴이한 비명이 내질러진다.
쿠와아아!
“우와아아아악!”
땅 밑이 용오름처럼 치솟아 오르며 그 속에 숨어있던 놈이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단순한 속임수다.”
연기를 피우고 괴뢰를 보내 도망가는 척하며 땅 속에 숨은 것이다.
단순하지만 효과적인 속임수였다.
물론, 상선 정도에게나 먹혀들 것이었지만 말이다.
“이, 이거 놔!!”
“하는 짓이 간사한 것을 보니 네 부모 밑에서 무얼 배웠는지 궁금하구나. 그래, 까부는 것은 이게 다더냐.”
범이 지팡이를 들어 올리자, 세 갈래의 나무줄기로 갈라진 지팡이는 순식간에 놈의 몸을 꽁꽁 묶어버렸다.
“윽!”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게 몸을 옥죄어진 놈은 붉어진 얼굴로 달아나려 했으나 소용없었다.
“죽, 어!”
호리가 당장에 놈의 머리통을 깨부수려 했다.
콰앙!
쩌저저적!!
지면을 찍은 호리의 발길질이 얼마나 강한지 일대가 쩌렁쩌렁 울릴 정도. 허나 놈의 골통을 깨부수지는 못했다. 천범이 손을 썼기 때문이었다.
“아, 왜!!”
단단히 화가 났는지 이마에 핏줄까지 세우고 있다.
천범은 그 모습이 조금 우스워 허허 웃고는 답했다.
“그거 가짜다.”
“뭐?!”
천범이 옭아맨 괴뢰 또한 흠칫 놀라 눈을 번쩍 떴다.
어떻게 알아챘느냐는 듯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꽤 공들여 만든 괴뢰구나. 잔머리가 퍽 비상한 놈이다. 오늘은 놓아 줄 것이나 다음 번에는 어림도 없을 것이니 마음 준비를 단단히 하거라.”
괴뢰에 대고 말하자.
“잠깐!”
다급하게 말하려던 찰나.
파사삭!
천범의 선등음석이 변한 지팡이가 괴뢰를 한순간에 찌부려트려버렸다.
이내 잠시간의 정적이 흐르고의 문투성이인 호리가 천범을 향해 불만스러운 듯 물었다.
“네가 진정으로 놓쳤을 리 없다. 난 머리에 피가 돌아 그랬다지만 너라면 놈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을 터! 또 무슨 괴상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게냐.”
“별것 아니다. 이 또한 하나의 인연이지 않겠느냐. 그 인연을 한 번 따라가 보려는 참이다. 상서가 이전과 같지는 않은 듯하니, 때마침 길잡이가 있으면 좋지 않겠는가.”
호리의 말대로 천범은 놓치는 척하여 놈의 방심을 이끌었다.
제깟 놈의 수완이 아무리 좋다지만 그것이 원선에게까지 통하겠는가.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소리.
“가자, 상서로 가면 자연히 만나게 될 놈이니.”
호리는 불만 어린 표정이었지만 이내 천범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잠시 후.
그들을 반기는 것은 상서가 아닌, 사계의 군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