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ll of the Spear RAW novel - Chapter (535)
낭선기환담-534화(535/600)
낭선기환담 – 2부 244화
외도, 이 작은 단어 하나가 어두컴컴한 감옥에 자리한 천범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아니, 강제적으로 떠나지 못하게 하는 존재가 있었으니.
“쯧쯧. 하긴, 다 늙어빠진 놈보다는 파릇파릇 탱탱한 것이 좋기는 하지.”
바로 호리였다.
“탱탱…?”
“그렇지 않느냐. 다 늙어빠져서 흐물흐물한 것보다는 젊고 튼실한 놈이 좋은 법이지.”
그게 무엇이든. 오래되어 낡은 것보다는 젊고 창창한 것이 낫다.
“내가… 늙었나?”
“젊지는 않지. 게다가 네놈도 잘못이 없지 않다! 한창 때 여인을 독수공방시켰으니 저리 되는 게 당연한 것 아니겠느냐?”
비해와 함께 나간 여인의 얼굴이 잊히질 않았다.
복잡 미묘한 감정이 다분했으나, 안도하는 표정은 그녀가 비해를 얼마나 아끼는지 알 수 있었다.
“못난 놈.”
호리는 기분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혀를 쯧쯧차면서도 묘하게 입꼬리는 조금 올라가 있었다.
“지금 웃냐? 웃음이 나와?”
“안 나올 건 또 뭐냐. 본래 불구경은 내 집이 아니니 재밌는 것이다.”
할말이 없어 가만히 노려보니 뭐 어쩌라는 듯 어깨를 으쓱거린다.
“그러게 마음을 주려면 적절한 상대에게 주었어야지. 여자 보는 눈은 개 코딱지만큼도 없어 가지곤.”
“시끄럽다. 뭔가 오해가 있을 거다. 사하는 그런 여자가 아니야.”
어처구니없는 듯 대차게 콧방귀를 뀐 호리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오해는 개뿔. 다 큰 사내를 저리 애틋하게 껴안는데 무슨 오해가 끼어드냐! 그깟 게 들어갈 틈도 없어 보이더구만 대체 뭔 놈의 오해!!”
“아잇! 시끄러!! 지금 그 오해를 생각해보는 중이지 않느냐!”
당사자는 호리가 아니라 천범이다.
머릿속에는 오만생각들이 만연하고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가름하기 바쁜 상태다.
“막말로 네 아들이라면 모를까. 저리 큰 사내를 껴안을 이유가….”
호리의 말문이 턱 막혔다.
“뭐야. 정말 네 아들 아니냐?”
증손주까지 있는데 아들이 더 생기지 않는다는 보장이 어디 있을까.
생각해보니 비해 놈 말하는 싸가지를 떠올리는 천범 어릴 적과 별반 다르지 않다.
“비상하게 머리 굴리는 쪽이나 얍삽하기 그지없는 게 똑같네….”
아들이라 생각하고 하나하나 맞춰 보니 썩 들어맞는 게 한두 개가 아니다.
어쩐지 말하는 거 하나하나마다 영 재수가 없더라니, 저놈 피가 섞여서 그랬던 모양이다.
“개소리. 그놈은 내 아들이 아냐.”
“어찌 그리 확신하느냐?”
천범은 호리를 힐긋 보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계에서와는 달리, 상계에서는 신선들끼리 동침한다고 아이가 생기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생겼다면 잉태 즉시 내가 알았을 것이야.”
그쪽으론 전무하다시피 한 호리의 눈이 순수하게 반짝거렸다.
“그럼 어떻게 하면 생기는데?”
“별반 다를 게 없기는 하다. 동침과 동시에 음과 양의 기운을 합일시켜야 하지.”
그 때문에 자식을 가진 신선들은 여인이나, 사내할 것 없이 적잖은 원기를 소모한다.
정도가 심한 자는 수행이 떨어지기도 하기 때문에 수선들은 웬만하면 아이를 가지는 일을 제대로 계획을 세워 원기가 충만할 때에 가지는 것이 보편적인 현실이다.
“그럼 넌….”
“난 그런 적이 없다.”
아이를 만들 생각도 없었고, 시기가 시기이다 보니 그럴 수도 없었다.
한참 윤회절온공을 사용해 수행이 떨어졌던 때인데 어찌 그럴까.
“어… 그럼 네 아들이 아니네?”
“그런 거지.”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난 천범은 수갑을 툭 풀어내 떨궜다.
“어, 어딜 가느냐?”
“내 머리로는 잘 모르겠으니 어찌된 상황인지 알아봐야 하지 않겠느냐.”
철창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가는 천범의 모습을 보고 호리도 손목에 묶여진 수갑을 힘줘서 부숴버렸다.
탈칵.
“뭐, 뭐야! 수갑을 어찌 풀었어!?”
너무도 손쉽게 수갑을 풀어내는 모습에 보고 있던 간수가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방금 나간 여인과 사내는 어떤 관계인지 알고 있나?”
“자리로 돌아가! 어떻게 풀어낸 건지 모르겠지만, 사대장들이 걸어 둔 금제는 네놈이 풀어내지 못…!”
콰창!!
천범은 보란 듯이 철장에 드리운 금제를 박살냈다.
어려울 것도 없었다.
손가락을 허공에 슥 그으니 갖가지 금제가 겹쳐져 있던 감옥의 철창은 손쉽게 부서져 내렸다.
“이, 이놈!! 정체가 뭐냐!!”
하지만 범은 간수의 물음에 답하지 않았다.
“다시 한번 묻겠다.”
쿠우웅….
그의 중심으로 슬며시 풀어진 살기가 사방을 집어삼킨다.
“컥!!”
쿵!!
감당키 어려운 천살기에 간수는 물론이요, 자리한 감옥의 죄수들 모두 개거품을 물거나 바닥에 짓눌려 고통어린 신음을 내뱉는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천범은 담담한 눈으로 살기를 흘리며 그에게 질문할 뿐이었다.
“방금 나간 여인과 사내의 관계를 알고 있느냐.”
몰라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원선태사의 진노가 불똥 튈 것이니.
“아, 알고 있습니다!!”
겁에 질린 간수는 오체투지한 채로 힘겹게 입을 열었다.
“상서의 주인이라 할 수 있는 사씨 세가의 가주, 그리고 그 밑의 하나뿐인 아들 비해는 상서에 자리한 자라면 모를 수가 없는 각별한 모자 관계이옵니다!!”
모자관계.
애틋한 표정을 보노라면 그리 보는 것이 당연하다.
외도를 벌일 사내라기엔 너무 앳되어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아들과 어미의 관계라는 말에 천범은 더더욱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비해는 자신의 아들이 아니다.
아들일 수가 없다. 그런데 모자 관계라니 이상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나올 수 있는 답은 하나.
“…뭐야 그럼. 네 부인이 다른 놈 자식을 낳은 거라는 게야?”
놀라 중얼거리는 호리의 독백만이 감옥의 적막함을 깨자.
천범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 * *
흠칫.
정사를 살피던 사군의 군수.
화양은 삽시에 드리운 거대한 천살기의 압박에 몸을 떨었다.
“무슨 일이냐!”
일순간이었지만 느낄 수 있었다.
보통의 살기가 아니다.
정말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향선 최고봉인 후기 끝자락의 경지인 화양이 두려움을 느낄 정도였다.
그것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한순간 불어 닥친 북풍마냥 스치고 지나가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분명 천살기였다.’
보통 살기도 아니다.
살겁은 받은 자만 사용할 수 있는 살기 중의 살기.
천살의 기운이었다.
대관절, 상서에서 향선에 버금가는 천살기를 드러낼 수 있는 자는 자신을 포함해 이곳에 없다.
오래 전.
선살전으로 상계의 남쪽을 공략하다가 그의 서찰을 받고 수계에 몸을 담게 된 지 오래이다.
그녀의 뜻을 이해해준 다른 사계의 고위 신선들은 모두 다른 곳으로 향했다.
상서만큼은 사계의 어떤 군대도 감히 다가오지 못하게 지켰다.
이곳에는 그의 흔적이 다분했고, 자신과 같은 여인 하나가 한 사내를 오래도록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생각을 정리하고 있자 신하들이 앞다투어 헐레벌떡 들어왔다.
“누구냐.”
“그것이….”
자초지종을 들은 화양의 낯은 당연 찌푸려졌다.
“모르겠다? 지금 내가 들은 말이 정녕 사실입니까.”
“소란이 일었습니다. 병사 하나와 얽힌 외지인들을 지하 감옥에 잠시 수감해 놓았는데….”
심문을 하려는 찰나, 수갑을 풀어내고 행적이 묘연해졌다고 한다.
“그 병사는 누굽니까.”
“그것이… 그 아이이옵니다.”
“…비해를 말하는 거군요.”
철가면 너머로 화양의 수심이 짙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여러모로 유명한 녀석이지요.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사씨 세가의 핏줄이면서 화신통과 무도의 재주 하나 없는 망나니가 아닙니까. 또 놈이 사고를 쳤나 보군요.”
화양을 따르는 신하들이 보는 비해의 인상은 꽤나 좋지 못했다.
특출 난 것 하나 없으면서 여기저기 사고만 치고 다니는 얼간이.
그저 부모 잘 만난 것 하나를 제외하면 거들떠도 보지 않을 망나니.
그들의 평가가 신랄하니, 화양은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괜한 말은 삼가도록 하세요. 비해는 어디 있답니까.”
“사 가주께서 이미 데려가셨습니다. 그것에 관해 먼저 군수께 전언을 남기시기도 했습니다.”
그러며 화양에게 곱게 접힌 서찰을 건넨다.
받아들자 화기린의 문장이 허공에 떠오르고 서찰이 저절로 펼쳐졌다.
펼쳐진 서찰 위로 그녀의 글씨가 하늘하늘 떠올라 내용을 읽어보니.
“용무가 있어 데려갔다는군요.”
“군수님, 아무리 사씨 세가의 가주라 하더라도 이번에는 조금 성급했던 것이 아닐까 사료되옵니다.”
“….”
“아무리 그래도 상서의 치안을 책임지고 있는 것이 우리 사군인데, 이리 마음대로 병사를 데려가는 행위는 월권이라고 할 수 있지요.”
“이는 작게는 사계의 군사들을 무시하고, 크게는 그 위에 자리한 군수 님을 무시하는 행위라 볼 수도…….”
격앙된 신하들의 언사에 화양은 슬쩍 일어나 자리를 피했다.
“어디를 가시려는….”
“당사자에게 물어보려 갑니다. 우선 중요한 것은 상서에 나타난 천살기를 지닌 자이니 비해를 한 번 만나 자초지종을 들어봐야겠습니다.”
천살기가 우선이었다.
그와 연관이 있는 비해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면, 어떤 자인지 무엇을 위해 나타났는지도 알게 될 터.
“군수님. 그 아이는 항상 거짓만을 말하는 놈입니다. 묻는다고 진실을 토해낼지는 모르는 일입니다.”
“비해를 싸고돌기만 하는 사 가주 또한 우리의 편이 되어주지는 않겠지요. 안 그래도 상서에서 불온한 움직임이 자주 엿보인다 들었는데, 어찌될지 모르니 대비를 하심이….”
변했다.
화양은 저들을 보며 그리 느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상서에 자리하며 평화로운 한 때를 보냈기 때문일까.
저들은 이미 상서가 자기들 땅이라도 되는 듯한 말투를 내비치고 있다.
“허나 그렇다 하여 가만히 있다고 뭔가가 해결되지는 않지요.”
의미 없는 탁상공론을 늘어놓을 시간에 발 빠르게 움직인다면 대부분의 일은 금세 처리될 것을.
“사 가주와는 내가 이야기 해볼 테니 그대들은 직무를 다하세요.”
바깥으로 빠져나온 화양은 하늘을 가로지르며 상서의 사씨 세가가 자리한 화매봉으로 향했다.
* * *
금은색의 빛줄기가 하늘을 가로지르며 날아가던 때.
그 밑에 자리한 상서의 한 객잔에서는 웬 노인 하나가 이곳을 전세내고 홀로 고고히 술을 마시고 있었다.
“왜 홀로 청승맞게 술이나 퍼먹고 있는 게냐. 눈에 보이는 건 다 때려 부술 듯이 살기를 내뿜을 때는 언제고.”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는 여인이 슬쩍 자리에 앉았다.
그들은 방금 전까지만 해도 사군이 관리하는 감옥에 하옥되어 있던 호리와 천범이었다.
“생각해보니, 그럴만하기도 하지 않더냐.”
“뭐가 그럴만한데.”
“오래도록 자리를 비웠으니, 그 마음에 새 남자가 찼을 만도 하지. 마음이 변하는 것은 한순간인데 내 어찌 그것을 탓할 수 있겠느냐.”
곁을 지키지 못한 건 자신인데.
어찌 그녀의 변심을 탓하기만 할까.
“그래서 이리 청승맞게 술이나 퍼 먹고 있는 것이냐? 아들이 아닐지도 모르는 것이니 확정지을 수는 없잖아.”
“이미 상서의 몇몇 이들에게도 물었고, 답을 들었다. 비해는 사씨 세가의 아들이 맞다고 하더구나. 사 가주가 꽤 아끼는 자식이라고 하는데….”
다른 답이 있을까.
“주워온 자식일 수도 있지.”
“사하는 그런 여인이 아니다. 괜한 아이를 양자로 들이지 않아. 한 가문을 책임져야 하는 가주이다. 가문의 번영과 혈통을 위하면 위했지, 다른 피를 데려올 여인이 아니다.”
그녀가 사씨 세가를 얼마나 끔찍이 여기는지는 천범이 가장 잘 안다.
혈통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각별히 느끼는 것이 바로 사하이니, 피 하나 섞이지 않은 놈을 양자로 들이지는 않았을 터.
“그런 여인이 아니기는 무슨. 그렇게 잘 알아서 다른 놈 애 낳아서 키우고 있게 했냐? 꼴좋다 멍청아!”
짜증이 확 돋은 호리는 인상을 잔뜩 구기고 물었다.
“그래서, 계속 이러고 있을 거야? 뭐 그녀의 행복이라도 빌어주게?”
“그게 그녀의 선택이라면. 나는 그것을 존중할 수밖에 없다. 부인에게 나는 언제나 죄인이니.”
단 한 번도.
죄인이 아니었던 적이 없다.
아마도 착각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 놈이라도, 사랑해주기에 모두 이해해 주고 있다는 그런 착각을 말이다.
“너도 알지 않느냐. 그들은 날 기다리고 있다. 누구 하나 목숨을 보존하기는 힘들겠지.”
건원해목에 자리한 그들은 모두 때를 기다리고 있다.
그 말로가 어찌 되든.
상계에서의 마지막을 위해.
차분하게, 그리고 서늘하게 자신의 날을 가다듬고 있다.
그것은 천범도 예외가 아니니.
그들과의 전투 이후.
살아남을 수 있을지 없을지는 누구도 알지 못한다.
호리와의 수계를 여행 다닌 것 또한, 대부분의 미련을 풀어내고자 하는 것 또한 모두 그것의 일환이다.
“너를 잊고 사는 것이 그녀의 행복일 수 있으니까?”
범은 그저 술잔을 입에 머금었다.
그게 답이라는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