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ll of the Spear RAW novel - Chapter (537)
낭선기환담-536화(537/600)
낭선기환담 – 2부 246화
“이거 참….”
이 세상에서 술이 단번에 깰 수 있는 효과적인 해소제는 무엇이냐 묻노라면 단언컨대 그것은 부인의 매서운 손속이라 말하리라.
술이 아주 확 깼다.
이제와 자신이 천범임을 밝혀도 도통 믿어주지를 않으니 참으로 난감하기 이를 데 없었다.
-다 네 업보구나.
-시끄럽다.
멀찍이 떨어져 구경하는 녀석을 무시하며 어찌해야 이 상황을 타파할 수 있을지 머리를 굴려본다.
하지만 답이 없다.
단단히 화가 난 사하와 화양을 상대하는 것이야 어렵지 않으나, 영 마음이 편치 않으니 이것을 어찌할까.
사방이 사하의 화신통에 불바다가 되고, 기괴한 환계와 꼭두각시 술이 펼쳐지는 동안에는 천범은 생각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하나의 답을 펼쳐내기를.
‘도망가자.’
더 이상 도망치는 짓은 하지 않겠다 마음먹고 강해진 것이거늘.
그것이 부인들 때문에 깨어지게 될 줄이야.
하지만 암만 생각해봐도 다른 방도가 없으니 어쩔 수가 없다.
결단을 내려야 했다.
스르륵.
천범은 다시금 노인의 모습으로 변모했다.
자신이 왜 이 짓을 해야 하나 자괴감이 들기도 했지만 어쩔 수 없다.
“건방진 것들!”
촤르륵!
선등음석을 접선으로 변모시켜 펼치자 환계로 이루어진 공간이 비틀리고 그의 주위로 물방울이 모여든다.
바닥에 떨어져 깨어진 술들이 방울방울 모여드니 순식간에 하나의 형태로 탈바꿈되기 시작했다.
“사 가주!”
“알고 있어요!”
화르르륵!!
가만히 내버려둘 생각이 없는지 사하의 본선법패.
기화선이 맹렬한 빛을 뿜었다.
화기린의 자수가 그려진 기화선이 빛을 내뿜자, 이내 적화의 불꽃에서 나타난 화기린이 우레와 같은 울음 소리를 내질렀다.
“죽여라!”
약간의 성취가 있었는지, 못 본 사이 사하의 화신통은 더욱 날카로워져 있었다. 잘 벼린 칼날처럼 군더더기 없는 솜씨였다.
“제법이군.”
입꼬리를 끌어 올린 범은 접선을 촤르륵 펼쳐 들어 올렸다.
선등음석을 들어 마치 춤을 추듯 유유하게 흔들자 수신통으로 이루어진 고고한 쌍룡의 자태가 모습을 드러냈다. 수기 가득한 안개에 휩싸여 용머리를 드러낸 쌍룡은 공간을 장악하듯 강력한 기운을 드러내고 있었다.
허나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촤악! 접선이 접히자 그의 손아귀에서 진득한 천살기가 스며 나와 수신통의 쌍룡에 스며들었다.
스르륵 새까맣게 변하는 비늘과 붉은 안광과 함께 흉흉한 천살기가 하늘을 찌르니 사하와 화양은 순간 흠칫 몸이 굳을 수밖에 없었다.
“가라.”
접어진 접선으로 가리키자, 그의 쌍룡이 나아가고, 이내 기화선의 화기린과 맞부딪치기 시작한다.
콰아아아아아!!
불과 물이 뒤섞이자 당연 기화되어 환계를 가득 채운 연기가 구름처럼 불어 닥쳤다.
그 와중에 쌍룡은 화기린의 목을 물어뜯고 드리운 화기를 잠식시켰으며 공간 자체를 집어 삼켜 풍경을 뒤바꾸어 버렸다.
삽시에 사방에 물바다가 이루어지고 사하와 화양은 와류 속에 휘말려 중심을 잡고 있지 못했다.
‘이런.’
저도 모르게 조금 힘을 써버린 천범은 선등음석을 거두어들이고 가득 메워진 바다를 안개로 사라지게 만 들고 모습을 감추었다.
잠시 뒤.
문득 화양은 주변의 풍경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온 것을 느꼈다.
“달아났군요.”
그제야 사하 또한 흠칫 놀라며 주변을 살폈으나 놈의 기척은 이미 사라지고 난 뒤였다.
“찾을 수 있겠습니까.”
“글쎄요. 아무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애초부터 수신통을 부린 것 자체가 이걸 노린 것은 아니었나 싶네요. 영악한 놈입니다.”
사하의 수심이 깊어졌다.
기화선을 붙잡은 손에 분한 감정이 깃들어 있었다.
“그냥 두어서는 아니 될 놈입니다.”
“저도 그리 생각합니다.”
“그를 잡기 전까지는 상서 전역에 경계를 강화해야 할 것 같습니다. 동의하시지요?”
“군수.”
“예. 말씀하세요. 사 가주.”
“반드시 잡아야 합니다. 놈을 잡기 전까지 상서에 평화는 없습니다.”
“……그러지요.”
휙!
사라진 사하의 모습을 뒤로 하고.
화양은 묘한 눈빛으로 노인이 사라진 객잔을 바라보다 사라졌다.
* * *
상서의 어느 이름 모를 절벽 위.
객잔이 있는 곳을 깊은 눈동자로 내려다보고 있는 노인이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를 한심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여인도 함께였다.
“잘~ 하는 짓이다. 지 마누라 보고 도망가는 놈은 상계 전역을 뒤져봐도 네놈이 처음일 거다!”
“…닥쳐라. 상황이 상황이다.”
“상황은 개뿔. 지가 멋대로 오해하고 무게 잡고 개짓거리 하다가 민망하니까 도망간 거면서.”
“…….”
쩝.
머쓱함에 입맛을 다신 천범은 콧잔등을 긁었다.
“아니, 그래서 내가 정체를 밝혔는데도 안 믿어 주는 걸 어떡하냐.”
“네가 믿을 짓을 했어야 믿지. 지 혼자 계집애처럼 힘써서 기억 뒤져 본 게 잘못 아니냐?”
“크흠… 뭐 그럴 수도 있지. 응당 부부 사이라는 것은 깊고 깊은 인연과 운명으로 엮여 있는 것 아니냐. 그러니 나 없이 지낸 지난 과거 정도는 남편이 엿볼 수도 있는 것이지.”
“개소리를 길게도 하는구나.”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는 법. 원선의 경지에 올랐다 하더라도 난 아직 진선이 아니니, 얼마든지 실수할 수 있지 않더냐.”
뻔뻔하게도 말한다.
신랄하게 천범을 까대던 호리는 이 상황이 너무 웃겨 입술을 깨물었다.
웃음을 참고 있기는 하나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듯 어깨를 들썩였다.
“웃기냐?”
“솔직히 웃겨 죽겠다! 꺄하하!”
이제는 대놓고 웃겨 죽겠다며 배를 잡고 꺄르륵거리는 호리를 보니, 어처구니가 없어 웃음도 안 나온다.
남은 심각해 죽겠는데 저리 웃다니.
저게 정녕 벗이란 말인가!
“넌 오늘부터 내 벗이 아니다.”
“친구도 없는 게 까불기는.”
“친구가 없는 건 내가 아니라 너지. 난 많은…….”
인연을 쌓았다고 말하려던 범은, 아차 하며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홍연을 잃은 그녀에게 남은 것은 천범뿐이 없으니 단번에 분위기가 착, 가라앉았다.
괜한 긁어 부스럼을 만들었다.
‘괜히 나만 나쁜 놈 됐군.’
두피를 벅벅 긁은 범은 호리를 끌어당겨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런 표정 짓지 마라. 평생지기가 바로 여기 있지 않냐.”
“홍연 보고 싶어.”
“…어디선가 환생하여 잘 살고 있을지도 모르지. 네게 사하의 이야기를 내 언젠가 해주지 않았더냐.”
“응.”
어찌 사하를 보고파 하나 했더니.
생각해보니 하계의 인연이 상계로 환생한 장본인이 바로 사하였다.
잠시 잊고 있었지만 호리는 아직도 홍연의 빈자리를 슬퍼하고 있었다.
때문에 사하를 만나보고 싶어 했던 모양이다.
찢어진 조각이 맞추어지듯 호리의 생각이 이해되자 절로 측은한 마음이 들 수밖에 없었다.
“가자.”
“어디를?”
“상서에 내 술벗이 하나 있다. 그에게 가면 분명 좋은 술을 내주겠지.”
슬픔을 잊는 데는 술이 최고니.
그도 그렇고, 호리도 그렇고 마음이 심란하니 술로 잊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지 않겠는가.
“그놈들한테도 술이 필요할 테니.”
* * *
쪼르르르.
화매봉의 한켠.
비석과 함께 마련되어 있는 위패.
술병을 손에 든 채 비석에 술을 붓고 있는 한 사내가 엿보였다.
산기슭을 내려와 가까이 다가간 비해는 눈에 익은 노인의 모습을 보고 긴장감을 늦추지 못했다.
“상서가 모두 당신 하나 때문에 큰 소란이라던데.”
언제든 공격할 수 있도록 법기를 꺼내든 비해였으나, 이름 모를 노인은 눈길 하나 주지 않고 그윽한 눈빛으로 비석에 적힌 이름을 읽었다.
“후해, 곤사비…. 탄고말도 여기에 있었나. 어쩐지 안 보이더라니.”
중얼거린 노인의 말에 비해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그분들을 아시오.”
묻자.
노인은 그제서야 고개를 돌려 비해와 시선을 마주쳤다.
“한 잔 해라.”
휙.
술병이 던져지자 탁 낚아챈다.
허나 긴장을 풀지 않았다.
그 마음을 모르지 않는지 노인.
아니, 천범은 시선을 비석으로 가져가 조각된 이름을 손으로 매만졌다.
“탄고말은 내 오랜 술벗이다. 용마골의 용마주를 만드는 방법을 알려 줬더니, 제 입맛대로 바꾸어 자기가 만들어냈다며 너스레를 떨던 유쾌한 친구였어. 허세가 조금 있는 놈이었지만 그 마음이 선하니, 주변의 지인들도 그를 싫어하지 않았지.”
툭툭.
비석을 두드린 그의 시선이 씁쓸한 빛을 자아냈다.
어디로 가버렸나 했더니, 찾을 수 없는 먼 곳으로 가버렸을 줄이야.
“흘러간 시간을 탓해야 할까. 냉담한 하늘을 탓해야 할까.”
꿀꺽, 꿀꺽, 꿀꺽.
어느새 술병 하나를 더 꺼내 마신 그의 시선이 이번에는 곤사비와 후해에게 향했다.
“내게 사비와 후해는 눈엣가시였다. 솔직히 귀찮은 녀석들이었지. 그래, 시작은 분노였다.”
놈들과 엮일 적에는 그러했다.
그가 아직 미숙하고, 연약할 적.
사비를 만나 수계에 자리한 가문의 영향력을 알았고, 후해를 만나 명문가 자제의 어리석음을 몸소 느꼈다.
곤가와 후가의 가주들에게 그들의 가보를 전해 받아 어찌저찌 대부의 행세를 하게 되었을 때.
사비와 후해는 천범에게 있어 그저, 짐덩이들이었다.
무엇하나 마음에 들지 않는 철없는 핏덩이들.
자기 가문의 위세를 등에 업어 패악질을 부리다, 그 후광이 사라졌음에도 한없이 까불다 죽을 뻔한 놈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어리석은 존재들.
“그 시작이 가보에 의한 것이었다. 할지라도….”
대부님이라 부르며 졸졸 쫓아다니며 실없이 웃던 후해와 그런 놈을 투덜거리며 뒤따르던 사비의 모습은 아직도 눈에 선하다.
“미운 정이 들어버린 거겠지.”
이리 마음이 좋지 않은 걸 보면.
그리고 그 끝이.
“사하를 위했다 하니… 내 이것들을 건네지 않을 수 없구나.”
이내 그의 손에서 나타난 것은 다름 아닌 두 개의 보물.
하나는 두 개의 날을 지닌 창이었으며 다른 것은 우아한 깃털.
바로 후가의 가보, 쌍멸과 곤가의 가보 영화비였다.
“내 이것들을 진즉 주었다면, 너희들이 이 작은 놈만 남겨두고 먼저 가버렸을까.”
천범은 놀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비해를 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나의 질문에 너희들은 이런 답을 내놓았으니… 나 또한 답을 내놓지 않을 수가 없구나.”
손아귀에 자리한 쌍멸과 영화비가 빙그르르 선회하며 하나의 빛으로 합일되어 비해에게 향했다.
따스한 빛덩이가 몸속으로 스며들자, 흠칫 놀라던 비해는 이내 자신을 채우는 보물의 힘을 느꼈다.
“이제라도 대부의 역할을 해주는 것이라면, 편히 눈 감을 수 있겠지.”
“당신은 설마….”
그러며 노인의 전신에 금빛이 아른거리더니, 본래의 모습이 나타난다.
살랑거리는 머리칼과 함께 금안의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기는 사내.
범접할 수 없는 현기가 흐르는 주변의 색을 금빛으로 바꾸는 사내.
“금천….”
“대부라 부르거라. 네게는 그것을 허락할 터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