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ll of the Spear RAW novel - Chapter (538)
낭선기환담-537화(538/600)
낭선기환담 – 2부 247화
세월의 야속함을 어찌 말 몇 마디로 담아낼 수 있을까.
흘러간 세월은 물길따라 흐를 뿐이고, 우리는 그 흐름에 흘러가는 대로 살아가는 생인 것을.
그러니 우리는 매순간을 감사하며 세월이란 인과와 허물 같은 생사를 감내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어찌 이리도 덧없이 허물어질까.”
비석에 자리한 이름과 따로 만들어 둔 위패를 매만진 천범은 골몰했다.
“덧없지 않으셨습니다.”
홀로 중얼거린 말에 대답한 이는 다름 아닌 그들 부부의 자식.
비해였다.
“…그래. 네 듣기에는 그리 들렸을 수 있겠구나. 실언했다.”
천범에게 있어, 잠시간의 시간으로도 연약한 꽃처럼 바스러져 가는 것이 죽음이란 것이다.
유약하기 이를 데 없어, 잠시만 눈을 돌려도 사라지는 것이 목숨.
저들만이 아닌 하늘 아래 자리한 것들의 명(命).
그들의 죽음이 세월의 야속함인지, 하늘의 장난질인지 알 수는 없으나 한 가지 명확한 것은 남겨진 자들의 심경을 헤아리진 않았다는 것.
그나마 다행이라 할 것은 그들이 남겨둔 게 있다는 것 정도려나.
“세간에는 네 어미가 사씨 세가의 가주이며, 아비는 금천이라 알려져 있다 했다. 하지만 네 반응을 보아하니 이미 진실을 아는 듯하구나.”
“…예. 사 가주께서는 저를 아들처럼 대하고, 양자로 들여 깊은 애정을 두어 키우셨습니다.”
“…그래.”
천범은 그윽한 눈으로 비해를 내려다보았다.
이전에 보았을 때는 몰랐으나, 하나하나 찬찬히 뜯어보니 그들의 얼굴이 조금씩 묻어 있었다.
툭툭, 어깨를 두들겨 주니 깊이 고개를 숙인다.
그러더니 털썩 무릎을 꿇는다.
“왜 그러느냐.”
“일전에는 무례를 끼쳤습니다. 상계의 새로운 하늘이신 금천이시지 않습니까. 그런 분에게 감히 그러한 무례를 끼쳤으니….”
허나 말 속에 다른 의미가 담겨져 있음을 모르지 않았다.
자신의 사과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무언가를 부탁하고자 하는 어투다.
“뭔가 바라는 것이 있더냐. 내게 어쭙잖은 허례허식은 떨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네 부모 또한 내게 그리하다 많이도 혼쭐났으니.”
꿀꺽.
비해는 침을 삼키고 이마를 땅에 조아리고 말했다.
“상서를 구해주십시오!!”
범의 미간이 좁혀졌다.
“구해 달라?”
“상서는 지금 사군들에 의해 천천히 잠식당하고 있습니다. 저는 힘이 없어 그것을 알고도 저지하지 못하니 앞으로 천 년. 만 년이면 상서는 본래의 색을 잃게 될 것이옵니다.”
“너는 뭔가를 오해하고 있구나.”
“오, 오해라니요? 무엇이 오해라 할 수 있는지요!”
“상서가 외세의 침략을 받지 않는 것은 모두 사군 덕분이다. 정확히는 이곳에 자리한 사계의 공주이자 사군을 통솔하는 군수, 화양의 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상서는 지금보다 더한 고통을 받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부인께서는 후해와 사비의 아들을 너무 품에 안아 키웠나 보군. 자고로 사내라면 넓게 보아야 할 것을.”
우물 안 개구리.
상서가 세상의 전부인 아이다운 말이라 할 수 있다.
“그렇지 않소, 화양.”
슬쩍 고개를 돌려 물으니, 어느 허공의 공간이 흐려지고 아름다운 궁장과 철가면을 쓴 여인이 나타났다.
화양은 가면을 덮고 있었으나 그것으로도 가리어지지 않는 눈물을 눈가에 매달고 있었다.
“그 무거운 가면은 왜 아직도 쓰고 있는 것이오.”
묻자 답하기를.
“풍류를 즐기느라 모습조차 드러내지 않는 어떠한 사내 덕에 이리 가릴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답니다. 혹시나 멀리서 내 모습을 보고 사라지지 말라고 말이죠.”
그리워하라고.
그리하여 앞에 나타나라고.
그것을 위해 여지껏 쓰고 있었다는 말이었다.
천범은 그녀의 대답에 고소를 머금고는 가까이 다가가 손을 뻗었다.
가면에 손이 닿자 차갑고, 딱딱해 보이던 철가면은 한 줌 가루가 되어 사라져 그녀의 낯이 다시금 드러났다.
“기다렸습니다. 이 날만을.”
“하여 이리 되었구려.”
“이리 될 줄 아셨습니까.”
“당신께서 애노벌주를 내게 남겼을 때부터.”
“너무 늦으셨습니다.”
“그런 사내를 마음에 품었지 않소. 응당 감내해야지.”
뻔뻔하게도 말하는 그의 말에 화양은 눈물을 매달면서도 풋 웃었다.
그리고는 이내 즉 시선을 돌리더니 비해를 향해 말했다.
“네가 걱정하는 일은 없을 거란다. 내가 상서에 있는 이유는 오직, 이 분을 기다리기 위해서였으니까.”
알았으면 빨리 물러나라는 듯 소리치자 비해는 어안이 벙벙하여 어찌 할 줄을 몰라 하다,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그게 자신의 무지에서 비롯한 오해 때문인지, 철가면을 벗은 화양의 미모 탓인지는 알 수 없었다.
* * *
잠시 후.
비해가 물러나고, 천범과 도란도란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화양은 금세 나타난 방해꾼을 흘겼다.
“그런데 이분께서는….”
“본녀는 범의 하나뿐인 친우다.”
“뭐 그런 거지.”
“그런 거라니! 제대로 말해라!”
호리는 지극히 가벼운 천범의 소개에 산통이 깨졌다는 듯이 날뛰었다.
“아니 뭐…. 제대로 이야기하자면 너무 길지 않냐. 하계에서부터 이어져 온 길고 긴 인연이지.”
“그, 그런 거다.”
의기양양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호리.
똑같은 대답을 저리 뻔뻔히 말하니 천범의 입장에서는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그 간단한 답에 화양의 심기를 건드린 것이 있던 모양이다.
“…저 또한 금천과 하계에서의 인연의 실이 이어졌답니다.”
“안 물어봤다.”
“저도 물어보지는 않았답니다.”
“범! 이년 말하는 것 좀 봐라!”
“틀린 말은 아니지 않느냐.”
호리는 괜히 씩씩 대며 천범의 곁에 찰싹 붙어 있는 화양을 노려봤다.
한동안 둘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서로를 노려보기만 하더니, 이내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고 나서야 비로소 서로의 시선을 등졌다.
“부군!”
사하였다.
그녀는 이전에 나타난 노인이 천범인 줄은 꿈에도 모르는 눈치였다.
그것에 범은 내심 안심했다.
“부인!”
범은 이전의 싸움은 모르는 척 하며 매우 기쁘게 사하를 반기고 안아주었다.
그리고 이내 차 한 잔을 곁들이며 이제까지의 일을 간단히 이야기했다.
“그렇군요.”
“증손주라니… 그럼 전 증조모가 되는 건가요?”
“그게 그렇게 되나?”
“증조모보다는 어미가 먼저 되고 싶었는데 말이죠.”
사하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
하계에서 올라온 천범의 증손자.
천축과 만나게 되었다는 소리에 처음에는 놀랐으나, 이윽고 그가 천범의 도움을 받아 과거 용마골이었던 곳에 부부가 함께 가문을 세운다는 말을 듣고 새침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도 아는 것이다. 어째서 상서의 곁에 증손주를 두고 그곳에 천씨의 시작을 두게 하였는지.
“이제는 증손주를 돌봐야겠네요. 내가 돌보고 싶은 건 하나 뿐인 내 남편인데.”
“크흠, 이쯤이 괜찮겠군.”
천범은 그 모습을 가까스로 외면한 채 하나의 문을 만들고 그곳에 진법을 마무리했다. 갖가지 금제와 법술은 섞어 넣는 것도 당연했다.
“혹여나 무슨 일이 생기거든. 이곳으로 향하시오. 가끔씩 왕래해도 나쁘지 않을 터이니.”
그것은 천락경곤으로 향하는 문.
일종의 전송진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깊게 파고들면 조금 다르기에 평범한 이라면 이곳으로 향하는 순간 공간의 압력에 전신이 찌그러들거나 목적지에 도달치도 못하고 중상을 입거나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향하게 될 것이다.
이 상계에서 현재 천락경곤보다 안전한 곳은 없다.
천락경곤은 천범이 만들고, 대라천의 보물.
사월제항의 한켠에 자리했으며, 누구도 쉽사리 건들지 못하는 상계의 태양 안에 있으니 말이다.
그러하여 천범은 만약을 위해서 이 특정한 전송진을 만들어두었다.
거리로는 수만 리에 가까웠으나, 한두 명이 움직일 수 있는 전송진을 만드는 것은 원선태사가 된 천범에겐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누구나 갈 수 있나요?”
“여러 금제를 걸어두어서, 표식을 지닌 자들만 왕래할 수 있도록 할 것이오.”
“표식이라면….”
“몸 어딘가에 나의 표식을 새기면 건널 수 있지.”
그 표식이 무엇인지, 어떠한 은밀한 곳에 새겨지는지는 부부들만 알 수 있으리라.
“우선 문은 연결을 해 두었….”
끼이익.
그때였다.
문을 열기도 전에 스스로 열리더니 그곳에서 새하얀 여인이 나타났다.
“꽤 오래 모습을 내비추지 않으신다 하셨더니, 이곳에서 사내의 풍류를 즐기고 계셨나 보네요. 서방님.”
“…딱히 그렇지는 않은데.”
“어머, 그런가요? 그렇다기에는 저도 깜짝 놀랄 만한 미인들인걸요.”
생글생글 웃고 있으나, 그 어떤 때보다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한 자리로 모일 수 있도록 하려 했으나, 미리 언질을 주고 안 주고의 차이는 있을 수밖에 없다.
초아가 이렇게 갑자기 나타날 줄은 몰랐기에 조금 당황스러웠다.
“이분은….”
화양과 사하 또한 적지 않게 놀란 눈치였다. 문을 만들었더니 새하얀 여인이 나오고선 천범이 잔뜩 당황하는 게 아닌가.
“어 쟤는….”
호리만이 어디서 본 것 같다는 눈치로 고개를 갸웃거릴 뿐.
“어, 어차피 소개해주려 했으니 차라리 잘 됐군. 이렇게 모였으니 우선 함께 차라도 한 잔 할까.”
“차보다는 술이 어떨까요.”
“술 좋지.”
확실히 차보다는 그것이 사태 해결에 더 도움이 될 것이다.
“서방님은 잠시 빠지시고요.”
“…내가?”
“네. 여인들끼리의 대화에 눈치 없이 끼어드는 분은 아니시잖아요.”
“어, 어… 그렇지.”
뭐가 그런지 몰라도 그렇다고 말해야 할 분위기다.
이건 아닌데 싶은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지만 여인들끼리의 눈초리가 심상치 않으니 이 또한 나쁘지 않나 싶기도 하다.
어차피 자신이 떠나면 서로 왕래하며 지낼 이들이다.
‘뭐 설마 치고 박고 싸우길 할까.’
싸우면 누가 이길까 조금 궁금하기도 했지만, 빠지라니 빠지는 것이 사내가 할 일 아니겠는가.
“그럼….”
“크흠, 그럼 나도….”
호리 또한 무언가를 느꼈는지 천범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쪽 분은 남으시는 게 좋지 않으십니까.”
“나, 나? 난 왜?”
“절 기억하지 못하십니까. 금환선향에서 언뜻 뵈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 그런가? 난 잘….”
“남으시지요. 드리고 싶은 말도 있고, 여인들끼리의 담화에 빠지면 그리 좋지 못하실 거랍니다?”
호리는 눈으로 어찌하냐 눈치를 보냈으나 천범은 어깨를 으쓱였다.
덥석!
손을 잡아채는 호리였으나, 천범은 웃는 낯으로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비겁한 놈!!”
“여인끼리의 대화에 끼는 것도 사내가 할 일은 아니지.”
“후회하게 될 거다!”
“뭐 그렇게까지 할라고.”
끼이익… 쿵.
문이 닫히자 일사불란하게 금제가 둘러진다.
이야기가 새어나가지 못하도록 하는 듯하다.
천범은 문 밖에서 잠시 골몰하다 손가락을 툭 튕겼다.
그러자 그의 손가락에서 선축문 그려져 문틈으로 스며들었다.
잠시 기다리자.
[……순서…를 정……하죠.]여인들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간단히 만든 것이고, 겹겹이 쌓여 있는 금제에 스며들어 엿듣는 것이라 제대로 들리지는 않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들리기 시작했다.
[수… 순서? 무…… 순서…?!] [당연히…….] […………흐업!!] [그분께서는…… 그러니까… 순….]신경 쓸 이야기는 아닌 듯하다.
“뭐 대단한 이야기를 하나 했더니.”
별 것 아니었다.
천범은 휘적휘적 건물 밖으로 걸어 나가 화매봉의 봉우리 끝에 올랐다.
그리고 적적한 바람을 맞으며 좌선한 채로 손아귀를 펼치니, 새하얀 구름이 흘러나왔다.
선등음석이었다.
선등음석은 이내 구름으로 이루어진 상계의 지도가 되었다.
이내 천범의 시선이 중계 어딘가로 향했다.
“대강의 일은 다 마쳤으니….”
이제는 충계로 갈 때가 되었다.
건원해목에는 아직도 원선들이 자리하고 힘을 비축하고 있다.
“우백자, 이 자도 움직였군.”
듣기로는 폐관하여 속세와 연을 끊었다 들었거늘.
위치가 바뀌었다.
충계의 왕이라 불리는 자 또한.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는 모양.
“그리고….”
검의 형상을 띄고 있는 자.
검노일택 또한 움직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