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ll of the Spear RAW novel - Chapter (554)
낭선기환담-553화(554/600)
낭선기환담 – 2부 263화
“이걸로 괜찮으시겠습니까.”
털썩.
다시금 자신이 만든 옥좌에 앉은 천범은 초점이 흐려진 금안으로 멀거니 서 있는 검노일택을 보았다.
그의 육신은 이곳에 있으나, 혼은 다른 곳에 있는 듯 움직이지 않았다.
천범의 벽공부촉멸단은 그러했다.
일만삼천쉰여섯 개의 계단을 오른 자는 시간과 공간, 그리고 기.
삼대법칙에 영향을 받게 되고 그로 인해 육신은 남고, 정신은 역행하여 첫 번째 계단으로 향한다.
거기서부터, 한 계단 한 계단.
다시 올라오게 되는 것이다.
계단 하나, 하나에 새롭게 펼쳐진 세계를, 지옥을 겪게 되면서.
“내겐 최선이다. 애초에 누군들 칼침 박아서 더 뭘 할 수도 없다.”
은근히 탓하는 눈길로 보자 곁에 자리한 란은 힐긋 눈을 피했다.
“엄살떠시기는.”
다소 예상치 못한 일들과 태화만등-겸세를 유지해야 하는 탓에 그다지 여유가 없다.
몸속에 남은 선력 또한 서서히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란의 검에 찔렸을 때….’
놈의 술법에 당하기도 했다.
란은 모르는 듯 했으나, 놈이 미리 손을 써둔 듯하다.
마치 독처럼 서서히 천범의 몸속에 퍼져 기의 순환과 선력의 응집을 방해하고 있다.
상처가 아물지도 않는다.
아마도 존재를 검으로 만들어버리는 놈의 기이한 술법 또한, 천범의 몸에 잠재되어 버린 듯하다.
“바가지 긁는 여인네 하나 구하자고 꽤나 무리했다.”
“누가 구하랬나.”
괜히 찔리는지 머리칼을 베베 꼬다 멀거니 서 있는 검노의 육신을 보며 발검한다.
“그냥 지금 죽이면 되지 않습니까?”
“그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안 될 게 있나요.”
“검노일택의 힘은 나보다 네가 더 잘 알지 않더냐.”
검노 앞에서 어려운 기색을 내보일 수는 없었으니 여유를 부렸지만.
아슬아슬하게 펼쳐놓은 술법이다.
육신에 문제가 생기는 즉시….
‘결함을 눈치 채고 깨고 나오겠지.’
검이 목을 베는 그 순간.
천범이 고안한 수많은 지옥이 무로 돌아갈 것이다.
“태화만등-겸세로 만든 공간은 또 다시 그에게 보여줄 세계를 뜻한다. 허나 세계는 말 그대로 세계. 우리는 누구나 자신을 압박하는 세계를, 공간을 깨고 나올 수밖에 없어. 그건 본능이다.”
어미의 뱃속을 빠져 나오는 것처럼.
우리는 누구나 태어남과 동시에 자신의 세계를 빠져 나온다.
“쉽게 좀 말하시죠.”
“건들면 풀린다고.”
탱탱하게 차오른 봉오리처럼.
건들면 토옥 하고 터져 나올 것이다.
“내가 본, 훗날에 놈의 모습은 존재치 않다. 허나 그리 쉽게 사그라드는 것을 볼 수도 없다.”
“무슨 말입니까.”
“쉽게 죽어서는 분이 안 풀려.”
게다가.
‘쉽게 죽을 놈도 아니니.’
괜히 가장 오랜 시간을 견뎠다 불린 원선이 아니다.
가진 법칙과 술법은 물론이고, 정신력 또한 타의 추종을 불허할 것이니.
“우선 기다려라. 저쪽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겠으니까.”
검노는 붙잡아 놓았다.
나머지는 그들이 재빠르게 우백자와 지란위를 처리해주는 것뿐이다.
“걱정 되십니까.”
“없다 할 수는 없지. 그쪽은 몰라도 천외양군은 걱정이 되는구나.”
허나 그 또한.
“그가 감당해야 할 숙원이니.”
끼어들 수 없으리라.
* * *
화르르륵.
핏물이 피어오른 것 마냥 시뻘건 화염은 상대를 놓치지 않겠다는 일념처럼 사방을 불바다로 만들었다.
“사위가 만들어준 자리이니 더할 나위 없군. 아니 그러한가, 지란위.”
맹렬히 타오르는 불바다 속에 자리한 것은 두 명의 사내.
천외양군과 지란위였다.
“나쁠 것 없겠군.”
지란위의 대답에 천외양군은 잠시 놀라다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주둥이까지 지배되지는 않았나.”
그는 분명 검노일택의 검이 되었을 터. 다른 무엇보다 등 뒤에 기괴하게 만들어진 검 손잡이가 그 증거.
명백한 증거다.
“그의 검이 되었음은 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믿기지 않기도 하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나의 정신은 아무 문제가 없다. 하지만 검노에 대한 충성심은 놀라울 정도로 강하게 생기는군.”
그게 신기하다는 소리였다.
그의 검이 되어 명령을 받는 입장이 되었으나, 정신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맑고 선명하다고 한다.
검노의 술법이 얼마나 두려운 것인지 몸소 보이고 있는 지란위였다.
“오히려 좋군.”
허나 그것 모두가 천외양군에게는 오히려 좋았다.
“단순히 산송장처럼 이지를 잃은 상태였다면 내 오래 묵은 숙원이 신념 없는 대의처럼 심심하기 짝이 없는 모양새가 될 뻔하였다.”
다른 것은 관여치 않으리.
“내 가슴에는 복수심이 불타고, 그 날의 치욕을 선사한 네놈이 내 앞에 있는데 다른 무엇이 문제일까!! 당장 나와, 이 천외양군과 생사를 가르자. 서로의 잘잘못을 가르기에 세월은 많이 흘렀고, 수선계라는 강자존의 법칙 아래에 존재하는 죄라는 것은 응당!!”
나약한 죄 밖에 없으니.
“이제는 진정한 죄인을 가릴 때다.”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긴 머리를 쓸어 넘긴 지란위는 이내 길게 찢긴 동공으로 천외양군을 바라봤다.
입가엔 조소 또한 머금은 채로.
“그때의 일을 아직도 가슴에 담고 있었는가.”
겨우 그것이었냐며.
웃음을 한가득 끌어안은 입가에는 그를 향한 모멸 또한 함께였다.
“오래토록 이어져 온 수선의 생중에서, 그보다 더한 치욕과 능멸을 겪어본 적이 없거늘. 어찌 그것을 잊을 수 있을까!!”
“그래, 당연하군. 수선하는 자가 은원을 잊어서는 아니 되니… 물론 내게는 은도 아니고, 원도 아니라 옛날옛적에 잊어버렸다만.”
지란위의 능청스러운 태도에 천외 양군은 더 분노하기 보다는 오히려 잔잔한 호수처럼 차분해졌다.
“사위에게 감사해야겠군.”
“무엇을?”
“널 찢어 죽일 순간을 만들어주었으니 기꺼이 그에게는 내 목숨이라도 내놓을 수 있을지어다.”
“무슨 소릴 하는 건지….”
그때였다.
쾅!!
천외양군이 있던 자리에 화염이 폭발하고 일순 지란위의 눈앞에 그의 살기 가득한 눈동자가 다가왔다.
“널 죽이는 것에, 그리고 그의 승리를 위해 나는 목숨까지도 기꺼이 걸겠다는 소리다.”
목숨을 걸어 널 죽이고.
그를 해하려는 자에게도 나의 목숨을 걸어 전부 불태우리.
“내 목숨을 태워 널 멸하겠다.”
나의 오랜 숙원이여.
* * *
뚝, 뚝.
“하나의 계단은 하나의 세계라….”
재밌는 법술이로군.
손에 들린 검에서부터 떨어져 내리는 핏방울이 지면을 적신다.
지면을 적시는 피는 웅덩이가 되고, 그것이 계곡을 따라 흐르는 물처럼 흘러내려 하나로 모인다.
찰박, 찰박.
피로 이루어진 못을 거니는 검노의 발소리가 비정하게도 들려온다.
“진즉 베어냈다 생각했다.”
검을 휘두르자 아직 뜨거운 피가 얼굴을 적시고 시체가 허물어진다.
허나 그럼에도 계속 다가온다.
시체가 산을 이루고 그것을 계속 밟으며 올라가나 끝은 보이지 않는다.
“벽공부촉멸단이라 하여 무엇인가 했더니 이런 것이었나.”
올려다본 하늘은 언제나 푸르다.
하늘처럼 푸르지 않은 것은 일념을 이루지 못하는 나의 마음뿐.
“뻔한 환계로다. 이깟 것으로 날 어찌할 수 있으리라 보는가. 산.”
촤악.
휘두른 검이 살을 베고 뼈를 벤다.
그 감촉이 나쁘지 않다.
“천 번, 만 번의 휘두름에도 검에 닿는 감촉은 천차만별이지. 느껴지는구나, 일만삼천쉰여섯 개의 계단이라 하였나. 그 계단이 얼마 남지 않았음이 내게도 느껴진다. 네가 만든 지옥이라는 것도 내게는 그저 내 살아온 삶과 다를 바 없구나.”
그 어떤 지옥이라도 검노일택에게는 그저 베어내면 족할 뿐이니.
사람을 베고.
짐승을 베고.
나무를 베고.
고통을 베고.
감정을 벤다.
그에게는 그것이면 충분했다.
“삼세삼신도 이토록 별 것 없다니 참으로 실망스러울 따름이야. 듣고 있느냐 산!! 나가면 너 또한 내 이리 베어주겠다! 흐하하하하!!”
그의 추억.
“아버지, 어머니. 어찌 자꾸 살아나서 절 번거롭게 하나이까. 진정 아들을 생각한다면 미련 없이 흙으로 돌아가시지요.”
어렴풋이 남아 있는 부모.
가족의 기억. 그것을 들추어 보인다 한들, 이미 진즉에 베어낸 미련일 뿐.
그들이 죽고, 자신의 손에 죽는다 한들 한줌 동요도 없다.
그저 순리.
순리대로 돌아갈 존재들.
흙으로 돌아가 윤회의 굴레에 속하여 그저 살아갈 뿐인 이들이다.
태어났기에 사는 하늘 아래에 수많은 생명들처럼.
하늘의 법칙에 짜여진 삶을 사는 그저 꽃처럼 피다 지는 존재들.
그저 그뿐인 이들이다.
“부모의 시체가 산을 이루고 피가 강을 이루어도 내가 눈이라도 하나 깜짝 할 성 싶었더냐.”
어림없는 소리.
다른 풍경, 다른 인연, 다른 조화를 부린대도 검노는 막지 못했다.
모든 것을 베어내고 앞으로 나아가기만을 한다.
어떤 것이 와도 그는 베었다.
베고 또 베었다.
백 년을. 천 년을 베고 베었다.
오랜 시간, 허나 그 또한 지나가면 찰나인 추억이 아니던가.
“흔들리지 않는 일념을 지녔다면, 백 년이든 천 년이든, 만 년이든 모두 한순간을 지나는 찰나이니.”
그에게 시간의 흐름 따위가 무슨 소용이요, 아픈 상처가 무슨 소용일까.
“산. 내가 어찌 너의 술법을 베지 않고 있는지 아느냐.”
대답은 들려오지 않는다.
허나 검노일택은 미소 지었다.
“진정으로 네게 승리하기 위함이다. 너의 술법을 온전히 받아내 파훼할 것이다. 너의 모든 것을 쏟아봐라. 그것이 무엇이든 모조리 베어내, 나는 지난 과오를 승리로 덮을 것이니.”
그리고 다시금 검을 휘두르는 찰나.
“아검? 멍청한 이름이구나.”
그녀가 나타났다.
멈칫.
“……이런.”
스걱. 한 발 늦게 나타난 여인을 베어 냈으나.
감은 눈꺼풀을 다시 떠보니.
나락과도 같은 풍경은 어느새, 그리운 옛 시절과 닮아져 있었다.
그리고.
“뭘 보는 거냐. 더러운 놈.”
어린 아이가 그를 힐난했다.
매우 자연스럽게, 꿈에 나올까 그리운 그 얼굴로.
“…신위.”
“내 이름 부르지 마라.”
어린 시절의 신위가 자리해 있었다.
까드득.
“뭐니, 그 검은. 날 베려고?”
“…그렇다.”
촤악!!
단번에 신위의 목을 날린다.
어린 그녀의 머리가 단번에 잘려 바닥을 굴렀다.
“…….”
허나 검노의 얼굴은 편치 않았다.
목을 날렸으나, 그녀는 다시 나타나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쳐다보지 마라 못생긴 놈아.”
“닥쳐라!!”
스걱!
다시 한번 머리를 베어낸다.
허나 이내 사라지고, 다시금 어여쁜 모습으로 나타난다.
기묘하게 휘어진 소나무 위에 앉아 풀줄기를 꼬아 뭔가를 만들고 있다.
다시금 검을 휘둘러 베어내려던 찰나.
신위의 머리칼이 벼락이라도 맞은 듯 꼬불꼬불하게 변했다.
“아, 실패다… 머리는 또 왜 이렇게 된 거야. 뭘 봐! 구경났어!?”
신경질적으로 머리칼을 손으로 다듬으며 괜히 화낸다.
“왜 아직도 안 가고 있어? 가버려!”
검을 잡은 그의 손이 다시금 하늘 위로 치켜 올라간다.
베어내라.
베어라.
머릿속을 울리지만, 또렷한 눈동자로 자신을 바라보는 신위의 모습이 눈을 감아도 선명하다.
‘죽여라.’
번쩍.
눈을 뜬 그의 검이 내려쳐진다.
이내 신위의 가는 목을 자르려는 순간.
“아검.”
신위의 입에서 그의 이름이 흘러나온다.
흠칫.
그녀의 목에서 멈춘 검과, 이내 노인의 모습이 아닌 아이로 변한 검노.
아니.
아검의 모습이 나타난다.
“신위….”
일만이천삼십다섯 동안.
단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던 검.
그 검을 쥔 손이 격렬하게 떨리기 시작한다.
* * *
스르륵.
눈꺼풀을 뜬 천범의 금안에 희미한 빛이 돌아와 입이 열렸다.
“그것이었나.”
베어내고 베어냈음에도 먼지 한 톨만큼 남아 있던 그의 미련.
허나 그것이.
“네 발목을 잡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