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ll of the Spear RAW novel - Chapter (557)
낭선기환담-556화(557/600)
낭선기환담 – 2부 266화
스르륵.
옥좌에 앉은 채로 여지껏 아무 말도 없던 천범의 눈이 떠졌다.
그의 반짝이는 금색 눈동자는 이전보다 선명함을 잃었다.
입술은 수분을 머금지 못한 듯 메말랐고, 부드러웠던 머리칼조차 푸석해져 이전보다 몸 상태가 좋지 못해 보였다.
“…화란. 얼마나 지났느냐.”
“백일정도입니다.”
“이렇게 긴 백일은 난생 처음이군.”
백일.
고작 백일이다.
오랜 세월을 살아가는 수선에게 백일은 찰나와도 같은 것.
그것이 상천의 끝에 닿아있는 원선이라면 두 말할 것도 없다.
‘아직 멀었는가.’
여러 술법을 동시에 펼치고 있어서 그런지 몸에 부담이 심했다.
“괜찮으십니까.”
“…괜찮다.”
“괜찮지 않으신가 봅니다.”
“괜찮대도.”
“산군께서는 하계에서부터 항상 그러셨지 않으십니까.”
“….”
“진정 괜찮았다면 아파 죽겠다며 어린아이처럼 징징거렸을 겁니다.”
“내가 또 언제 징징거렸다고….”
“허나 지금은 그러시질 않으니.”
화란은 좋지 않은 낯빛을 한 범의 얼굴을 매만지며 말했다.
“저는 걱정이 됩니다.”
괜한 걱정을 시켰다.
장난치질 않으니 진심으로 걱정해 버렸나 보다.
허나 란의 말이 맞다.
그럴 기운이 없는 것이기도 했다.
예상보다 길어지고 있다.
천범의 상태는 란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좋지 못했다.
허나 어찌 그리 말할까.
“걱정은 하나로 충분하다.”
지금은 우선, 눈 앞에 있는 적.
검노일택에 관한 것이면 족하다.
“이제 곧이다.”
움찔움찔.
미세하지만 검노일택의 육신이 반응하고 있다.
빈껍데기일 육신이 저리 움직이는 것이라면 주체인 의식이 겪는 혼돈은 더할 나위 없을 터.
‘이제 곧이다.’
이제 곧.
이 싸움의 결말이 놓일 것이다.
그때까지 조금만.
“조금만이면 된다.”
아주 조금만.
조금만 참으면 된다.
그리하면….
“새 길이 열릴 테니.”
움찔.
철컥!
검을 뽑은 란의 모습에 천범이 손을 들어 올린다.
“호들갑 떨 것 없다.”
“뭘 보여주고 있는 겁니까.”
“이제부터는 내가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보는 것이지.”
“무슨 소릴….”
“길을 터줬을 뿐이란 거다. 그 앞은 나 또한 모르지. 오직 그만이 알고 있는.”
새로운 지옥일 뿐이다.
* * *
흠칫.
“왜 그래?”
“아니다.”
주변을 살피던 아검은 고개를 갸웃하다 다시 신위의 곁을 지켰다.
“우린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글쎄.”
이들의 스승, 황천은 승천했다.
산 또한 머지않아 사라졌다.
덕분에 남겨진 이들만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나머지 놈들이 어디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건 중요치 않지. 우린 우리의 길을 나아가면 된다. 스승님이 사라지셨으나 다를 건 없지.”
“목표가 사라졌어.”
“사라진 게 아니다. 더 높이 가셨을 뿐이지. 우리 또한 나아가면 된다.”
“하늘 너머로?”
“그래.”
진중한 아검의 답변에 신위는 어이 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그는 그런 그녀의 미소를 보며 작게 기뻐했다.
허나 품에는 아직도 그녀에게 건네지 못한 빗이 그를 찔렀다.
쓸데없이 날카롭게 만들어서 간혹 그를 찌르고는 했다.
허나 아검은 줄 수 없었다.
당당하지 못했다.
그녀가 목표로 하는 것은 황천.
자신의 스승이니, 그녀에게 당당해지려면 그 정도는 올라야 하리라.
‘이 검 한 자루로 난 그리 하겠다.’
그러니 이건 그때까지 세상 밖에 나올 일이 없으리라.
아검은 그리 다짐했다.
그렇게 천년.
또 다시 천년.
그것보다 더 많은 세월이 흘렀다.
아검은 수행에 수행을 거듭했다.
진정 이곳이 지옥이 아닐까 싶은 고통스러운 수행이었다.
허나 검 한 자루로 하늘에 닿으려면 어쩔 수 없었다.
품에 넣은 빗이 간혹 가슴을 찔러, 그녀를 상기시켜도 겨우 참아냈다.
참고, 인내하여 수행을 거듭했다.
그리고 그는 강해졌다.
‘이 정도라면….’
산이 다시 돌아온다 해도 그리 밀리지는 않으리라.
이전처럼 암담한 벽을 느끼지는 않으리라고, 그는 생각했다.
척!
후웅!!
검 하나를 휘두르자 커다란 바위가 쩌적 갈라졌다.
손가락을 휘저어 그것을 도로 맞추자 탁 하고 맞아 떨어졌다.
손을 뗀 이후에도 바위는 떨어지지 않았다. 아검은 그제야 만족스러운 미소를 흘렸다.
“뭘 혼자 그렇게 실실거리고 있니.”
“신위! 내 폐관을 기다린 건가?”
“너 폐관했었어?”
실망스러움을 감추지 못한 아검은 검을 검집에 꽂았다.
“…무슨 용건이냐.”
“네 검이 필요해.”
“검?”
“따라와 보면 알 거야.”
이내 신위를 따라가니.
“전장이군.”
보이는 것은 전장이었다.
와아아아아아!!
전장의 함성.
철성과 비명.
죽음으로 가는 단말마.
그것들이 뒤섞여 아검의 눈과 귀에, 그리고 머릿속으로 꽂혔다.
“무슨 일이지?”
“간단히 말하면 선산의 영역과 그리고 원근에 관한 탐욕 탓이지. 그것들이 있어야 더 많은 힘을 가지고 눈앞의 벽을 돌파할 수 있으니까.”
대부분은 범인들.
허나 그 틈에 섞여 있는 뛰어난 자들이 보인다.
“동문들인가.”
“이해관계가 어긋났다면 뿌리가 어찌 되었든 적이니까.”
“…그런가.”
아검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주억이고 곧장 검을 뽑았다.
“전부 베어버리면 되나.”
“그래주면 좋고. 너한테도 나쁜 일은 아닐 거야. 우리가 넘을 벽은 하늘처럼 높고 바다처럼 깊으니.”
마침 잘됐다.
큰 성취가 있던 참이다.
힘을 시험하기에 이보다 좋은 장소가 어디 있을까.
아검은 곧장 전장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그가 참전한 직후.
연이은 승전보가 전장을 지배했다.
힘에 도취 됐다.
그가 검을 휘두르면 적군의 목이 하늘을 날았고, 수많은 검을 날리면 죽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는 전장의 검귀였다.
아검이 날뛰자 전쟁은 한순간에 한쪽으로 기울었다.
그의 적수는 없었다.
적어도 그렇게 느꼈다.
하지만 잘 날던 새도, 실수하면 고꾸라지듯 승승장구 하던 그때.
치명적인 실수를 범했다.
“오만방자하게 전장을 활보하더니 꼴좋구나, 아검!!”
황천의 밑에서 같이 수행하던 동문이었다.
그들은 덫을 파놓고 아검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기습했다.
덕분에 그의 검은 모조리 부러졌고,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말았다.
“이놈들!!”
겨우겨우 반격을 행하고 빠져나왔지만 다친 상처가 아물지는 않았다.
한순간.
한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아검은 상처투성이 몸을 이끌고 걷고 또 걸었다.
적막한 사막을 거닐고, 숲을 지나, 안개 가득한 산을 넘었다.
‘난 아직 도달하지 못한 것인가….’
비통했다.
온몸이 시리고 아팠으나, 유달리 아픈 것이 가슴이었다.
털썩.
기운 없이 쓰러져 하늘을 바라보니 하늘은 유례없이 맑았다.
겨우겨우 품에 손을 집어넣으니 그의 빗이 들려졌다.
“찌르지도 않는데 왜 계속 아프냐.”
울컥 눈물이 치솟았다.
왜 눈물이 나는 것인지 모른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허나 눈물은 계속 흘렀다.
흐르고 흘러, 한참을 울고 나자 때가 됐다는 듯 비구름이 몰려왔다.
폭우가 쏟아졌다.
“잘…됐네.”
눈물 자국은 남지 않을 테니.
눈 감아 쓰러진 아검은 이후, 아군에게 발견되어 궁으로 이동됐다.
그 이후, 산이 나타났다.
반가웠다.
산이라면 그들에게 복수 할 수 있을 거라고, 힘을 합쳐 그리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은 착각이라고 느낄 수 있었다.
산은 나 같은 건 상관이 없었다.
있으나 없으나, 산은 적들을 모조리 섬멸했다.
놈의 존재 하나로,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전쟁은 끝이 났다.
“허… 허허. 하하하!!”
허탈했다.
박탈감 또한 느꼈다.
그리 노력하고 노력하여 힘을 손에 넣었으나 도달할 수 없었다.
허나 놈은 아니었다.
놈은 그렇지 않았다.
항상 여유 가득한 얼굴과 저 다정한 눈으로 주변 모든 것을 살피며 손쉽게 내가 얻고픈 걸 얻어버린다.
“내가 아무리 힘을 쌓아도….”
나의 힘은 필요치 않다.
쓸모없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아무리 칼을 휘두르고 검을 찔러도 옷자락 하나 붙잡을 수 없다.
“스승님께서는 그것을 알아보셨던 것인가. 먼 훗날을 미리 점지하셨나. 그래서 올라 가셨나이까!!”
그래서… 죽였다.
그놈의 핏줄을 모조리 죽였다.
“내가 죽였다. 내가!! 그런 강대한 힘을 지닌 존재조차 내 손에 죽었으니 난 하늘에 닿은 게야!!”
소리쳐도 듣는 이 없는 공허한 외침이었다.
충족감 또한 없었다.
오히려 허망함이 더욱 가득 찼다.
“신위….”
산이 죽고 난 뒤.
신위는 이상해졌다.
그 누구와도 단절하여 만나주지 않았다. 나조차, 그녀를 만나는 일이 손에 꼽았다.
사실 알고 있었다.
그녀가 산을 마음에 품었다는 것을.
거절할 수 없는 말로 그녀를 얽매어 산을 죽이게 했다.
그리하면 될 줄 알았다.
꽉 찬 마음이 갈 곳이 없어지면 자연스럽게 비워지리라 생각했다.
허나 그것은 오히려 그녀가 지닌 마음을 더 터트리게 할 뿐이었다.
아직도 기억한다.
산이 완전한 죽음을 맞이했을 때.
그녀의 낯빛을.
하여 내겐 선택권이 없었다.
그저 여지껏 해왔던 대로.
검을 수련했다.
많은 검이 내 손을 거쳐 갔다.
만들어지고, 또 만들어졌다.
허나 어느 하나 마음에 차는 것이 없었다.
허나 그럼에도 만들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것밖에는 존재치 않았다.
그 뒤.
많은 세월이 흘렀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난 뭘 위해 살고 있지?”
의문이 의문을 낳았다.
꼬리에 꼬리를 물어 자문자답하니 그 끝은 죽음이었다.
살아야 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니 죽는다는 결론밖에 나오지 않았다. 무엇에 홀린 듯 난 죽음을 위해 걷고 있었다.
그러다 놈이 나타났다.
죽음의 가도에 나타난 산의 환생을 본 모두가 기뻐했다.
내게는 후회로 점칠된 여지를 지울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더할 나위없이 기뻤다.
하여 기다렸다.
놈이 힘을 기를 때까지.
천천히 기다릴 생각이었다.
도움 또한 줄 수 있었다.
하지만 놈은 역시나 내 도움 따위는 필요치 않았다.
누구보다 빠르게, 전례 없는 속도로 놈은 힘을 길렀다.
그리고.
신위가 죽었다.
이제는 허물어진 마음.
차라리 잘 되었다 싶었다.
내게 더 이상의 미련은 없을 테니.
잘 되었다며.
이제는 털어내자며 오래 품은 빗을 나는 던져버렸다.
허나….
“미련했군.”
스윽, 시선을 내리자 자신의 가슴에는 검이 꽂혀 있었다.
검은 이내 옥으로 만든 아름다운 빗으로 바뀌어 검노의 손아귀에 들려 있었다.
모든 풍경이 무너져 내렸다.
이내 보이는 것은, 옥좌에 앉은 채 자신을 바라보는 금색의 동공.
천범이었다.
“신위의 마지막은 어땠나.”
턱.
두꺼운 책을 덮은 천범은 검노의 물음에 담담히 답했다.
“실없이 웃었다.”
천범은 가만히 그를 바라보다 물었다.
“네놈, 왜 죽지 않지?”
“죽지 않는다라….”
검노는 손아귀에 들려 있는 빗을 보며 실없이 웃었다.
천범은 그 모습을 보고 입매를 굳혔다.
그것은 마치 신위가 죽었을 때 지었던 웃음과 비슷하여.
“너.”
천범이 옥좌에서 일어나려 하자, 검노는 손아귀에 들려 있던 빗을 움켜쥐어 부러트렸다.
“방금 죽었다.”
두 동강난 파편을 쥐고 자신의 가슴에 찔렀다.
그리고 이내.
검노의 몸으로부터 수많은 칼날이 튀어나와 사방을 덮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