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ll of the Spear RAW novel - Chapter (562)
낭선기환담-561화 (외전)(562/600)
낭선기환담 – 외전 1화
멸문
솨아아.
시린 바람이 앙상한 나무에 부서져 쓸쓸한 소리를 자아냈다.
달빛을 머금은 듯 차디 찬 바람은 자신을 알아봐 달라는 듯 빗장을 두드리는 중이었다.
그 탓에 잠겨 있는 빗장이 덜컹덜컹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단잠을 깨우는 소리.
달빛을 빗장 틈 사이로 보내는 그 시린 바람에, 사내가 잠에서 깨어났다.
침소에 자리해 있던 사내는 슬그머니 일어나 빗장에 손을 가져가 댄다.
덜컥.
그러자 이음새로 새어 들어오던 찬 바람도, 시끄러운 소음도 더 이상 들리지 않고 오히려 포근한 바람이 침소를 물들였다.
“으음….”
다소곳이 자고 있던 여인의 눈이 눈꺼풀 닫힌 채로 흔들린다.
사내는 괜찮다는 듯 그녀의 머리칼을 쓸어 주었다.
애정이 담긴 눈과 손으로 어루만지자 그녀는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고 사내는 의자에 앉아 호롱불 하나에 의지하여 붓을 들었다.
언뜻 보이는 사내의 외모는 선이 가늘었으나 눈매는 날카로웠다.
하지만 인상은 온화하고 두 눈은 빛나는 금색을 지니고 있었다.
일필휘지의 유려한 글씨로 한자 한자 글을 써 내려가는 사내의 모습은 경건하고 신성했다.
얼마나 붓을 잡았을까.
막힘없이 써내려가던 그의 붓은 이내 여인의 목소리에 멎어 들었다.
“무엇을 쓰세요?”
툭.
벼루에 붓을 내려놓은 사내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보았던 하늘. 그리고 앞으로 보아야 할 하늘을 적고 있었다.”
새하얀 머리칼을 길게 풀어헤치고 있는 여인은 그가 쓴 글귀를 힐긋 보았으나 이해할 수 없었다.
생전 처음 보는 글이었다.
허나 그 글자 하나하나에 헤아릴 수 없는 미지의 힘이 담겨 있음은 그녀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하여 여인은.
아니, 그의 부인은 싱긋 웃었다.
“그럼 제게도 들려주시겠어요? 당신께서 오시며 지나쳐 온 하늘에는 저도 궁금한 점이 많답니다.”
사내의 목과 가슴으로 뻗어나간 부인의 두 손이 그를 끌어안았다.
교태 가득한 그 손길에 사내는 픽 웃고는 부인의 살결과 온기를 느끼며 입을 열었다.
“마침 쓰고 있는 곳이 부인과 처음 만났던 하늘이니 잘 알 테지.”
“아… 다녀오신 겁니까.”
그와 그녀가 처음 만난 하늘.
수많은 하천 중에서도 유독 특별하고 미련 많은 하늘.
그리고 산.
“백산은, 많이 변했던가요.”
그리움 가득한 부인의 물음에 사내는 답했다.
“글쎄 나 또한, 아직 보는 중이라.”
영문 모를 소리와 함께, 그가 입을 달싹이니 적어 두었던 글자가 허공으로 두둥실 떠올라 빛을 발했다.
이내 그것이 사방으로 펼쳐져 방안이 모두 금빛으로 반짝였을 때.
그들의 시야에 산 하나가 보였다.
그리운 하얀 산.
백산이었다.
* * *
백산(白山).
높디높은 하늘에 닿은 듯 새하얗게 눈 덮인 영산.
그것을 바라보는 한 사내의 모습이 새하얀 눈밭에 점을 찍은 듯 보였다.
소용돌이치는 바람을 따라 점차 엿보이는 사내는 허리춤에는 검 한 자루와 삿갓을 쓰고 있는 떠돌이.
금색의 눈을 지닌 낭선.
천범이었다.
“흠….”
쌀쌀한 겨울 날씨와 더불어 영험한 기운이 서려 있는 듯 보이는 백산은 어딘가 모르게 경건함이 엿보였다.
휘이이잉. 날카로운 바람과 함께 백산에 쌓인 눈의 새하얀 눈가루가 어지러이 흩날렸다.
허나 천범의 눈은 안타까움에 사로잡혀 헤어 나오지 못했다.
“이곳이 정녕 백산이 맞는가….”
틀림없다.
허나 보여야 할 것이 없었다.
견고하게 서 있는 거대한 누각.
그 아래에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
그 어느 것 하나, 흔적 하나조차 보이지 않았다.
하여 우두커니 서서 지나간 추억을 떠올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왜 이곳을 계속 보고 계십니까. 연이 있는 산이라도 되는가 봅니다.”
슬쩍 고개를 돌리자 어느 한 사내가 다가와 넌지시 물었다.
허나 예의 차린 음성과는 달리, 한껏 경계 가득한 눈빛을 보냈다.
‘산지기인가.’
초라한 행색으로 여러 겹의 도포라 부르기도 힘든 천 따위를 덧입은 중년의 사내였다.
허름한 삿갓과 손질 못한 머리칼이 흘러내려온 모습, 그리고 무엇보다 그에게서 풍겨오는 오랜 산내음이 인상적이었다.
이름 모를 산지기의 경계는 타당한 것이었다.
이 추운 겨울날.
눈보라마저 휘날리는 이때에 백산에 올라 가만히 풍경만 바라만 보고 있으니 왜 아니 그럴까.
“내 알기로 본래, 이 장엄한 산에는 그에 합당한 수도문(修道門)이 있다 들었는데….”
보이지 않는다.
그러자 산지기의 눈빛이 바람 앞의 초롱불처럼 흔들렸다.
허나 그것은 일순뿐.
웃기지도 않는 소릴 들었다면서 산지기는 헛웃음을 흘렸다.
“수도문? 우스운 소릴 다 하시는군. 지금의 세상에 그러한 미신을 믿는 사람이 다 있소이까? 산속의 신선이든 요물이든 다 지나간 옛 시절의 이야기일 뿐이오. 지금 시대가 어느 때인데 그런 허무맹랑한 소릴….”
쯧쯧, 혀 차며 고개를 내젓는다.
“젊은이가 허상만 보며 살다가는 제 앞길을 무너뜨리는 법이오.”
“허상이라….”
매몰차게도 휘날리는 눈보라를 바라보며 씁쓸함에 젖었다.
아닐 거라 생각했으나 맞았다.
‘이 또한 흐름인가.’
그의 등선을 기억하는 자가 없을 만큼의 오랜 세월이 흘렀다.
헤아리기도 어려운 시간이 흘렀으니 이리 변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이제 더 이상.
백산에 자리한 백산파는 없었다.
세월에 아스라져가는 것은 형태가 있든 없든 마찬가지.
당연한 수순이라 알고는 있었으나 괜시리 가슴 한 켠이 시린 것은 어쩔 수 없으리.
“설사 있다 해도, 그 따위가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이오. 작금의 시대에는 총이란 놈 하나만 손에 쥔다면, 허리춤만 한 꼬마 아이도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시대요. 혼탁한 세상이 도래한 이때에 수도문? 그게 있다 한들 대체 뭘 할 수 있겠소. 차라리 총술을 배우는 것이 더 나은데.”
“…….”
그리 말하며 하늘을 슬쩍 보더니 깊은 한숨을 내쉰다.
“내 싫은 소리를 하기는 했으나, 이따금씩 당신 같은 젊은이들이 이 산을 올라와 묻는다오. 하면 나는 항상 같은 소릴 할 수밖에 없지. 그러니 너무 노여워 마시오.”
“그렇지 않소. 그저….”
“그저?”
“그저 마음에 담아둔 자들의 마지막이라도 가슴에 품기 위함이었지.”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형태가 있든 없든, 모든 것은 언젠가 닳아 없어지기 마련이다.
하물며 수도를 나아가는 자들은 그 굴레에 벗어날 수 없다.
한때 인연 있었으나 이제는 끊어진 추억 속의 인연이 어찌 되었는지.
그것을 한 번 보고자 했을 뿐이다.
그들의 마지막을 가슴에 품을 수 있을까 했으나….
‘이제는 그들의 이야기 한 줌 들어 볼 수 없을 정도로 세월이 흘렀구나.’
흔적도 없이.
야속한 세월은 그들의 이상이 닿았던 수도마저도 지워버린 듯 했다.
‘하천의 천지원기가 기이하다 했다. 내 착각이 아니었어.’
그가 이전에 있었던 때와는 달리, 하천의 천지원기는 희미하기 그지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작금의 사태에 빠지지 않았나 싶다.
천지원기가 부족하니 수도자들이 수행하기 힘들었고, 점점 쇠퇴의 길로 빠져들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도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하늘.
당금의 하늘이 그러했다.
이제 더 이상 이곳에 수도란, 수선이란 존재치 않았다.
‘나의 죄가 무겁구나.’
이 모든 일들이, 그가 여러 하천의 기운을 자신의 것으로 하여 휘둘렀기 때문이었다.
“오늘은 이만 늦었으니, 내려가는 것은 내일로 하시오. 누추한 곳이지만 자네 하나 뉘일 자리는 있지. 백산은 누구에게나 평등하기에 지금 내려갔다간 산짐승의 먹이가 될 거요.”
“내가 두렵지는 않으시오.”
천범은 허리춤의 검에 손을 얹어 놓으며 말했다.
그러자 산지기는 피식 웃더니,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보였다.
나무와 쇠로 만들어진 기이한 형태의 물건이었으나, 천범은 그것이 무엇인지 단번에 눈치챌 수 있었다.
“총인가.”
“내 몸 하나 건사할 물건은 있단 것이지. 죽고 싶다면 말리지 않겠으니 알아서 하시오.”
다시 품속에 총을 넣은 산지기는 성큼 성큼 산을 올랐다.
변한 시대에 발 맞춰 천범 또한 그의 뒤를 따랐다.
잠시 후.
산지기와 천범은 산장 비슷한 곳으로 향했다.
그곳은 이전, 그가 지냈던 천호굴의 거대한 동굴과 이어진 산장이었다.
“이곳에 혼자 살고 있는 거요.”
“그렇소. 귀찮게 사연 따위를 묻지는 마시오. 나 또한 이리 살고 저리 살다 보니 눌러 앉게 됐을 뿐이니.”
세상에 사연 없는 자가 어디 있을까. 천범은 그의 눈을 꿰뚫어 보듯 바라보다 시선을 거뒀다.
“한데 당신은 수도문을 왜 찾는 거요. 신선이라도 되고 싶으셨소?”
피식 거리며 묻자 범 또한 허허 웃으며 답했다.
“되면야 좋겠지. 허나 난 다 같이 사는 것이 좋지, 나 홀로 사는 것은 그리 바라지 않아서.”
“하하하! 누가 보면 벌써 신선이 된 줄 알겠소!”
무릎을 탁 치며 파안대소하던 산지기는 이내 웃음을 거두고 턱수염을 매만지며 고민했다.
“홀로 사는 것이라… 하긴, 신선이 되면 불로장생한다 하니 가족이든 친구든 모조리 죽어버리겠군. 그런 관점은 생각해 본적이 없소.”
연신 표정이 없던 산지기는 신선에 관한 이야기를 하자 흥미로운 듯 표정이 다양해졌다.
“정말로 신선이란 것이 있다면, 자신 외에 다른 신선도 있지 않겠소. 그들과 친해지면 되는 것 아닌가? 게다가 신선이라 함은, 하늘의 역할을 이어 받은 자일 테니 응당 그 정도는 감수해야 할 테지!”
산지기답지 않은 답변이었다.
천범은 씁쓸하게 웃었다.
“하긴, 그도 떨쳐내지 못했으니 내가 지금 이러고 있는 거 아니겠소.”
그러자 한바탕 웃음꽃이 피었다.
겨울바람이 산장으로 스며들었으나, 지금 만큼은 따스한 온기만이 둘 사이를 자리하였다.
하여 웃음이 멎어들 즈음.
범이 운을 뗐다.
“예전에는… 이곳에 백산파라는 거대한 수도 문파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소. 아주 대단한 곳이었다던데.”
산지기의 눈이 타오르는 모닥불처럼 일렁였다.
“…허나 작금에 이르러서는 모두 유명무실해졌지. 나 또한 그런 허상에 이끌려 다니던 놈이었으나….”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는 산지기는 숭늉과도 같은 차를 후루룩 마시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보따리에 들어있던 오래된 고서 하나를 즉 건넸다.
“자네를 보니 내 옛 시절의 날 보는 것만 같아 내버려둘 수 없군.”
“이게 무엇이오.”
“자네가 찾는, 지금은 사라져 흔적도 찾아보기 힘든 수도 세계의 끝을 알리는 서적이라네.”
오래된 문헌인 듯 보였다.
닳고 닳아 글귀가 잘 보이지는 않으나 천천히 읽어보면 읽을 수 있는 수준의 서적이었다.
‘이곳은….’
그가 말하는 선경.
어디를 말하는지 알듯 했다.
“그곳은, 옛 선인들에게도 선경이라 불리우는 곳에 관한 글귀를 적고 있지. 단순한 망상을 적은 것인지, 아니면 실제 있었던 곳인지는 모르나 난 한때 그곳에 가고 싶었소. 어떠한 이름을 지닌 곳인지도 모른 채 말이지.”
허나 이제는 옛 일이라는 듯, 그는 뒷짐 진 채로 등을 보였다.
타닥, 타다닥 타오르는 모닥불이 일렁이자 그림자가 흔들거렸다.
천범은 언뜻언뜻 보이는 글자를 천천히 읽어 내렸다.
“불을 가리는 돌. 산 속의 산, 불속의 불로 가야만 길이 있으리.”
“하지만 선경으로 가는 길은 알 수 없는 말뿐이오. 나는 진즉 포기했지. 여러 곳을 다니고, 도전했으나 번번이 실패하여 난 손을 놓았소.”
그곳은 바로.
산속의 산.
내산.
영내산을 뜻하는 것이었다.
영내산.
‘이 글을 쓴 자는 진정 수도에 정통한 자다.’
천범은 서적을 매만지며 글씨를 유심히 살폈다.
글자를 매만지며 눈을 감자.
주변의 풍경이 어둠으로 물들며 순간 어느 여인의 모습이 나타났다.
글이 써진 기억을 읽어낸 것이다.
‘…….’
붓을 들어 글을 적어내려 가는 여인은 어딘가 익숙한 모습이었다.
날카로운 눈매를 지녔으나 강단 있는 입술을 지녔다.
고풍스러운 방안 풍경과 언뜻 서글픈 눈빛은 천범의 마음을 흔들게 하기에 충분했다.
왜냐하면 상천을 자신의 것으로 한 사내의 마음을 차지한 여인.
허나 홀로 남겨 둘 수밖에 없었던 여인이자, 자신의 부인.
“……요호.”
요호였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