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ll of the Spear RAW novel - Chapter (570)
낭선기환담-569화(570/600)
낭선기환담 – 외전 9화
수많은 하늘.
그중에서 으뜸이라 하는 것은 대라천임에 틀림이 없다.
하면 그 밑에 있는 하늘들은 대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새끼인 거지 새끼.”
“……새끼요?”
유무간의 충수들을 막아내며 호리는 담담하게 말했다.
“유무간은 아니지만, 다른 상계의 하늘들은 모두 거대한 대라천에서 파생된 하천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뜬금없이, 아무런 이유 없이 생겨난 것은 없다.
모두 이유가 있고, 의의가 있다.
상계의 하늘 또한 그러하다.
“우리가 살고있는 상천 또한 그렇게 생겨난 하늘일 거라고….”
“아버지께서 말씀하셨군요?”
“그래,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있다.”
그제야 천선은 고개를 주억였다.
갑자기 답지 않은 심오한 주제를 꺼내길래 의아하다 했는데, 천범에게 들었던 이야기인 모양이다.
“그런데 갑자기 그 이야기는 왜 꺼내는 거야?”
사천이었다.
유무간에 들어와 지성 없는 충수들을 격파하며 들어가기를 사흘째.
어디로 향하는 것인지, 길이 있기는 한 것인지는 모두 그녀에게 맡기며 새로운 기연이나 벽을 허물어 줄 깨달음을 얻을 기대에 가득 차 있는 그들에게 그녀의 말은 의뭉스러웠다.
“모든 것에는 원인이 존재하고, 그 원인에서 비롯된 현상들이 나타나기 마련이기 때문이지.”
틀린 말은 아니나, 지금 나와야 할 말이라 하기에는 고개가 기울어질 만한 답변이다.
허나 그녀 답지 않다.
맨날 헛소리만 해대던 여인이 고명한 신선이나 할법한 현숙한 말을 해버리니 어안이 벙벙했다.
역시, 그녀 또한 원선은 원선이었단 말인가. 이제야 진정한 원선태사의 일면을 보는 듯했다.
하여 낯설고, 어색했다.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려고 한다는 뜻이죠?”
청연이었다.
호리의 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그는 곧장 마음을 다잡았다.
원선태사가 저리 진지하게 말을 할 정도라면,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생겼다 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이곳은 평범한 공간이 아닌, 어떠한 일이라도 생겨날 수 있는 미지의 공간이자 혼돈 그 자체.
유무간이지 않은가.
청연이 운을 띄우자 천선과 사천 또한 흠칫 놀라 호리를 보았다.
유무간은 참으로 어둡고 알 수 없는 공간이다.
생전 처음 보는 기괴한 충수들이 자리하고 크고 작은 생물들이 기묘한 생태를 이루며 살아간다.
그것에는 한순간에 자신들의 목숨을 위협할 만한 놈들도 있다.
흉수.
또는 대흉수라 불리우는 유무간의 오묘한 공간 속에서도 각자의 영역을 이루고 살아가는 놈들.
그녀는 아마도 그것을 염두에 두고 저런 진지한 말을 하는 게 아닐까.
그들은 생각했다.
“아니다. 그런 건 아냐.”
하지만 호리는 단호히 아니라 답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럼 어떠한….”
진중한 그들의 물음에 호리 또한 진지한 낯빛으로 답했다.
“길을….”
“길을?”
“길을…… 잃었다.”
“길을… 네?”
꿈뻑꿈뻑.
아이들의 눈이 동태눈깔처럼 빛을 잃었다. 그야말로 참담한 표정이 아닐 수 없다.
아이들을 볼 면목이 없는지 호리는 연신 눈을 내리깔고 시선을 피했다.
길을 잃었다.
그것은 직접적인 표현인가, 아니면 간접적인 표현인가.
그도 아니라면 신선의 깊은 통찰력과 깨달음이 녹아 있는 은유적인 표현인 것일까.
하여 다시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천선이 물었으나 청연이 답했다.
“도의 길을 잃었다는 거겠지. 유무간에 도달하니 새로운 깨달음을 얻어 길을 다시 찾고 있다는 말씀이시죠?”
청연은 현 상황을 완곡히 부정하려 고 하고 싶어 했다.
허나 현실은 냉혹한 법.
“그게 그거겠냐 멍청아.”
매몰찬 사천의 답변에 청연의 낯빛이 새하얗게 변했다.
“거, 거짓말….”
현실의 냉혹함에 호리 또한 에라 모르겠다하며 박차를 가했다.
“본녀는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그녀의 말에 이번에는 천선이 발끈하며 답했다.
“거짓말이라고 해요!! 자신 있게 여기까지 데려와 놓고 길을 잃었다는 게 대체 말이나 돼?!”
“그래서 말하지 않았느냐. 우리는 길을 잃었지만, 그 또한 수많은 하늘 중에 하나일 뿐인 길을 잃었으니 새로운 길을 찾으면 그만일 뿐이다.”
궤변도 이런 궤변이 없다.
앞서 말했던 헛소리가 전부 이것을 위한 디딤돌이었지 않던가.
이것을 치밀하다 해야 할지, 아니면 치졸하다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게 상천으로 가는 길은 아닐지도 모른다 이 말이지?”
“바로 맞췄다. 하하하하!”
“지금 웃음이 나오십니까?”
“그렇다고 울 수는 없잖느냐.”
“하…….”
지끈거리는 이마를 부여잡고 천선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이래서 어머니가 작은 어머님이랑 어울리지 말라하셨는데….”
“떽! 초아 고것의 말은 귀담아 들을 필요가 없노라!”
“아니요! 반드시 귀 담아 들었어야 했을 말이었습니다! 유무간에서 길을 잃다니, 그게 말이나 되는….”
“아니! 말 그대로다. 아무리 원선태사라도 유무간에서 길을 잃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역대 수많은 원선들도 함부로 유무간을 드나들지 않았더랬지.”
“뭘 그리 자랑스레 말하십니까.”
“그러니 내 잘못이 아니다. 내 역량 밖의 일이니 어쩔 수 없지!”
사천이 쌍멸을 꺼냈다.
청연이 그녀를 막았다.
“놔.”
“뭐, 뭘 하려고!”
“사지를 찢어 죽여버리겠어.”
“그래도 원선태사이고 네 작은 어머니인데 그러면 안 돼!”
청연은 필사코 그녀를 막았으나, 천선은 그냥 구경만 하고 있었다.
“너도 좀 말려봐!”
“뭐 하러 말리니. 어차피 덤벼봤자 변하는 것도 없는데.”
“아, 그것도 그렇네.”
사천의 경지는 소선.
그리고 호리의 경지는 하늘에 맞닿았다 하는 원선.
제 아무리 대단한 보물인 쌍멸을 겨눈다 할지라도, 위험한 것은 소선이지 원선이 아니다.
청연은 곧장 사천을 놓았고, 그녀는 화살처럼 쏘아져 창을 내질렀다.
그러나.
틱.
“꼬맹아. 이것이 너와 내가 밟고 있는 하늘의 격차다.”
“…칫.”
사천은 혀를 차고 쌍멸을 거뒀다.
분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은연 중 흘러나온 그녀의 기가 쌍멸을 막아 세운 것뿐이었다.
아니, 아니다.
‘뚫지 못한 거야.’
자신이 그녀의 기를 뚫지 못했다.
하기사, 소선이 제아무리 날고 긴다 하더라도 어찌 원선을 상처 입힐 수 있을까.
겉으로는 저리 한심해 보여도 역시 원선은 원선.
상계의 모든 수선들이 우러러보는 원선태사이다.
“그래도 너무 걱정 마라. 나름대로의 방법은 있으니까.”
“역시! 믿고 있었습니다!”
“정말요? 뭔데요?”
“또 헛소리겠지.”
모두의 기대 속에, 호리는 품에서 기묘한 상자 하나를 꺼내보였다.
“이게 뭐에요?”
“묘청반석(妙淸盤石)이다.”
그리 말하며 묘한 웃음을 지어 보이고는 천선에게 그것을 건넸다.
“열어보거라. 그리하면 네가 원하는 길을 제시해 줄 터이니.”
* * *
같은 시각.
상서를 다스리는 사씨 세가의 가주, 사하는 왠지 모를 불안감에 휩싸여 심기가 불편해져 있었다.
“흐음….”
하여 근처에 자신이 좋아하는 정자 한켠에 마련된 못을 거닐었다.
하염없이 걷고 걷기를 몇 시진이나 지났을까.
돌연 들려오는 인기척에 멈추지 않았던 그녀의 발걸음이 멎었다.
“누구시오.”
붉게 물든 석양은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렸다.
땅거미진 땅 위에 내려선 것은 그보다 더욱 검은 것이었다.
사하의 눈가가 좁혀졌다.
이내 터벅터벅 걸어오는 발소리는 묘하게 낯이 익었고, 한결 여유로운 몸짓은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다.
“당신….”
허나 그 누군가는 이곳에 있어서는 아니되는 인물이었다.
어찌하여 그녀가 이곳에 있는지, 이곳에 있을 수 있는지 사하는 얼떨떨한 낯으로 물었다.
“어째서 여기 계십니까…?”
의아하다는 듯 물으니 답하기를.
“내가 여기 있으면 안돼?”
퉁명스레 답한다.
사하는 고개를 저었다.
“그것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뭘 안다는 거야? 겨우 대호 놈이 천겁 대신이랍시고 만들어놓은 봉인식을 풀고 출관하는 참인데.”
“…네?”
“뭐…야? 반응이 왜 이래?”
물 위에 떠 있는 낙엽처럼 사하의 동공이 격렬히 흔들렸다.
“그, 그럼 얼마 만에 출관을… 하신 겁니까?”
“흠… 글쎄. 한 일, 이천 년 정도?”
이내 사하의 안색이 파리해졌다.
그녀는 급히 품에서 이전에 받았던 서찰을 꺼내 보였다.
“이거, 당신이 보내신 게 아닙니까.”
“뭔데 이건.”
촤르륵.
펼쳐 읽어 내려가던 그녀는 이내 눈살을 찌푸렸다.
“난 보낸 적 없는데?”
사하의 눈이 화등잔만하게 떠졌다.
믿기 어려운 말이었다.
그녀가 보내지 않았다면 대체 이 서찰은 누가 보냈단 말인가.
‘부인께서 보내오신 연통에 의하면 천궁에서 그녀의 모습을 확인했다 들었거늘….’
그럼 지금 이곳에 자리한 그녀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칠흑처럼 검은 머리.
여우의 그것을 한 귀와 꼬리를 달고 새침한 듯, 또는 멍한 듯한 얼굴을 한 그녀를 무어라 할 수 있을까.
“아무래도 큰일이 난 것 같습니다.”
서찰을 읽어보던 호리 또한 사태의 심각성을 느꼈는지 고개를 주억였다.
“내가 아무리 철이 덜 들었단 소릴 들어도 아이들을 데리고 유무간에 갈 정도로 정신 빠지진 않았다! 이놈은 누구냐, 감히 본녀를 사칭하다니!”
그녀의 호는 광멸.
주가 성에 호리를 쓰는 원선태사.
광멸호사 호리였다.
그녀가 이곳에 있다는 소린.
“아이들을 데리고 간 자는….”
호리로 둔갑한 무언가라는 뜻.
일, 이천 년이나 폐관해 있었다.
그렇다는 말은 그녀가 없는 동안 은밀히 자신들의 경계 안으로 스며들고 있었던 것이리라.
“다른 원선태사분들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의 교묘한 둔갑이라니.”
필시 보통 놈이 아니다.
게다가 유무간을 목적지로 강행한 만큼, 사특한 의중이 있을 터.
그것이 무엇인들.
“아이들이 위험합니다.”
* * *
묘청반석.
반듯한 돌로 이루어진 독특할 것 없는 단함이다.
허나 그것을 손에 쥔 천선은 묘한 기시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이 느낌…. 어디서 느껴본 적 있는 기분인데 뭐였더라.’
허나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뭐해, 빨리 열어. 그래야 길을 찾을 수 있다고 하잖아.”
“재촉하지 마. 지금 열 테니까.”
달칵.
끼이이익.
이내 묘청반석이 열리고.
눅진눅진한 연기가 단함 안에서 피어나더니 이내 그들을 모조리 집어 삼켜버렸다.
휘리릭.
턱.
아이들 셋을 집어 삼킨 묘청반석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정적을 선사했고, 그제야 입가에 호선을 그린 여인이 그것을 품에 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