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ll of the Spear RAW novel - Chapter (575)
낭선기환담-574화 (특별 외전)(575/600)
2부 284화 – 특별 외전 1
흠칫. 눈을 뜬 그는 저도 모르게 세상을 돌아보았다.
“….”
회색의 도시.
고층 건물이 주를 이루고 아스팔트가 깔린 도로 위를 질주하는 것들.
현대 도시와 그 문명을 이루는 것들이 사내의 눈에 내비쳤다.
도시.
자동차.
신호등.
스마트폰.
현대 문명의 이기들이 한눈에 사내의 눈 속에 들어와 정보로 변환된다.
순식간에 상황을 파악한 사내는 무감정한 얼굴로 자신을 부르는 친우의 목소리를 들었다.
“범! 너 거기서 뭐해? 빨리 타.”
도로 위에 정차한 트럭이 범 앞에 세워진다.
그를 부르는 사내의 이름은 용.
김용이었다.
김범과 김용.
어린시절 고아원 생활을 함께하며 자란 가족같은 사이.
범은 그것을 이해하며 친우가 부르는 트럭에 올라탔으나 묘한 기시감이 드는 것은 어쩌지 못했다.
“야, 그래서 제수씨랑은 잘 되가고 있는거냐? 저번에 한 번 대판 싸웠다고 했잖냐.”
“…그냥저냥. 잘 지내고 있지.”
제수씨.
여자친구를 지칭하는 친구의 말에 범은 멍하니 그녀를 떠올렸다.
보잘것없는 자신과의 연애를 몇 년이나 지속한 착한 사람.
그러나 결혼과 현실의 벽에 부딪쳐 몇 번이고 말다툼을 하게 됐다.
나는 바로서기 위해서 시간이 필요했다. 아니, 돈이 필요했다.
그러나 현실은 중소기업 공돌이였고 쥐꼬리만한 월급으로 결혼은커녕, 데이트하는 것도 벅찼다.
‘근데, 이런 장면.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데자뷰라 하던가.
지금과 같은 장면을 어디선가 본 듯한 기분이 든다.
“어어? 저거 제수씨 아니냐?”
“아.”
맞다.
여자친구다.
그러나 다른 남자와 함께 있다.
“뭐야…? 저거 내가 생각하는 그거 맞냐? 아니지? 설마 바람피우는….”
“아니야. 회사 대리일거다.”
“아… 그치?”
이상하다.
이 장면도 어디선가 본듯하다.
분명 화가 나야 하거늘.
화가 나지 않는다.
익숙하다. 몇 번이고 돌려본 비디오 영화처럼 이윽고 마주할 장면들이 눈에 선하다.
‘그리고 이후에….’
“야, 그래도 네 생일이잖냐. 내가 생일 선물을 준비했는데….”
이 또한 기억나는 장면이다.
그리고 이후에는….
콰앙!!
사고가 발생한다.
충격에 굴러가는 차 안.
범은 잃어가는 의식 속에서 한 여인의 얼굴이 비추어진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모르는 남자와 함께 있던 자신의 여자친구.
그녀는 자신을 보며 희미한 미소를 띄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시야가 암전된다.
“아.”
작은 탄성과 함께 눈을 뜨자 새하얀 병실.
그는 친구의 사망 소식과 화장했다는 이야기를 동시에 들었다.
시간은 흘러 퇴원하고 집으로 돌아가니 침대 밑에는 그가 말했던 책 한 권이 숨겨져 있다.
낡은 고서.
자신의 취미를 알고 있던 친구가 어렵게 구한 고서였다.
“악취미로군.”
범은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리고 곧장 고서를 찢으려 했다.
허나 고서는 무슨 짓을 해서 찢기지 않았다. 칼로 찔러도, 불로 태워도 사라지지 않는다.
범은 고서, 산해발산고를 바라보다 한자 한자 책을 읽어보기 시작했다.
휘리릭.
앞 부분은 이미 알고 있는 내용.
주인공은 하계에서 맹위를 떨치고 선계로 올라 일신의 영달을 취하며 이윽고 대라천으로 오른다.
페이지는 더 남아 있지만 쓰여 있는 것은 없다.
그것을 보고 범은 고개를 주억였다.
그리고 새롭게 눈을 뜨자.
그의 동공은 금색으로 물들고, 짧은 머리칼이 길게 돋아나며 입고 있던 의복도 고풍스러운 도포로 바뀐다.
이내 산해발산고를 들고 있는 손은 금색의 불꽃으로 화한다.
그러나 그의 금천지화로도 산해발산고는 사라지지 아니하니.
천범은 그 속에 담긴 알 수 없는 묘리에 감탄하며 입가를 비틀었다.
“이만한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것은 익히, 대라천의 존재뿐. 그중에서도 법칙의 이해마저 넘어 완전히 꿰뚫은 채 법칙합일(法則合一)을 이룬 존재겠지요.”
그가 뒤를 돌아보며 말하자.
그 자리에는 김범의 원룸이었던 풍경이 어느새 연기처럼 변해 사라지고, 아련한 깃털 하나가 내려앉으며 물음의 대답을 대신했다.
깃털을 감싼 기운은 감히 헤아릴 수 없는 무엇이었다.
생경한 무언가였으나, 이상하게도 천범은 익숙하다 생각했다.
그거야 그럴 것이.
어느새 천외천을 이루는 광활한 풍경 속, 내려앉은 깃털 한 조각은 너무 짙은 푸름을 안고 있었으니까.
“당신이었습니까.”
천범은 가슴 속에 헤아릴 수 없는 감정의 동요를 느낌과 동시에 묘한 안도감이 함께 자리잡는 것을 깨달았다.
* * *
스윽.
새롭게 눈을 뜨자 곁에는 거대한 오룡이 그를 지키듯 똬리를 틀고 있었고, 새하얀 숫사슴이 오룡의 등 위에 다소곳히 누워 있었다.
“얼마나 잠들어 있었느냐.”
“대라천의 하늘을 여신 후로, 감히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이었습니다.”
소년의 모습으로 변한 화담.
그리고 소녀의 모습을 갖춘 탐화가 곁으로 다가왔다.
“그날 이후. 그러니까. 아버지가 이름을 말한 후에 진정한 대라천이 열리며 수많은 진선들의 기운이 하늘 위로 수놓아졌을 때.”
그들의 천지법칙을 모두 감내하고 받아들였다.
“허나 일순간, 푸른 기운이 하늘을 잠식하더니 저희는 알 수 없는 공간으로 떠내려왔고, 주인께서는 줄곧 잠들어 계셨습니다.”
그랬나.
허나 이야기를 들으니 흐려졌던 기억이 점차 또렷해짐을 느낀다.
자신이 밟고 서있는 땅의 이질감을 느끼며 주변을 돌아봤다.
“평범한 땅이 아니군.”
“예, 뭔가 특별한 힘이 서린 대지로 보아 제가 취해보려 했었으나….”
“실패했겠지. 나 또한 느껴본 적 없는 땅이다. 네 흡성 신통으로는 아마 기운을 흡수하기 역부족이었을게야.”
지닌 기운을 분석해보자면, 성운의 힘을 지닌 것 같으면서도 음과 양의 조화마저 이루어진 대지다.
그는 자신이 선 땅이 속해있는 하늘이 대라천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저 평범한 땅마저 이러한 신성한 기운을 품고 있는데, 이곳이 대라천이 아니라면 대체 어느 곳이 하늘 위의 하늘이라 할 수 있겠는가.
“이제 됐다. 꽤 버거워 보이는 것 같으니 이제 쉬어도 된다.”
“그럼 염치 불고하고….”
“나도 이제 졸려.”
탐화와 화담에게는 대라천의 대기마저도 버거운 것이었다.
지금까지는 어찌 버티고 있었으나, 한계에 한계까지 도달해 있었다.
그는 그것을 알고 그들에게 자신의 품으로 숨어들 것을 말했다.
탐화와 화담이 한 줌 빛이 되어 몸속으로 스며들자 그제야 서슴없이 황망히 펼쳐진 기묘한 숲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생전 처음 와보는 생경한 곳이었으나,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걸었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한껏 여유와 기품을 담아서. 그가 그러한 연유로 걷는 것은 이유가 있었다.
‘지켜보고 있다.’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
어떠한 신통력이나 기운도 느껴지지 않지만, 그는 알 수 있었다.
그저 느껴졌기에.
이름 모를 누군가의 시선이.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문득 진한 복숭아 냄새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그러다 이내 거대한 복숭아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 것을 발견한 천범은 이내 발걸음을 멈췄다.
대라천의 복사나무는 하계와 상계의 복사나무와 비교해도 풍기는 기운이나 향 자체가 천지 차이였다.
기운은 맑고 진했다.
향은 독한 술처럼 조금만 맡아도 정신이 혼미해질 것처럼 어지러운 부분이 있었다.
그리고 제일 신기한 것은 열려 있는 천도에서 은은한 금빛이 어려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향기에 취해 천도에 손을 뻗다가 멈칫했다.
향기를 맡은 직후.
천범의 피가 역류하고, 기혈이 팽팽해졌으며 전신의 혈관이 터질 듯 부풀어 올랐기 때문이었다.
“그 정도에서 손을 멈춘 것이 다행이네요. 어리석은 대라선들은 유혹을 참지 못하여 금천도에 손을 대고 처음이자 마지막 황홀경을 맛보며 천도 나무의 양분이 되어버린답니다.”
“당신은….”
“저는 금천도를 관리하는 서황령(西凰領)의 천도선(天桃仙) 상희라고 합니다. 귀선(貴仙)께서는 함자가….”
“전….”
무어라 말하려던 그의 입이 무언가에 막힌 듯 내뱉어지지 않았다.
어떠한 억제력에 의해 목이 턱턱 막힌 듯 새어 나오지 않으니, 이상할 노릇이었다.
“보아하니, 귀선께서는 대라천에 오르신 지 얼마 되지 않으신 듯하군요. 진명(眞名)의 천율(天律)을 알지 못하시는 듯해 보이는데….”
진명의 천율이라.
“상희 선(仙)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제 막 대라천에 오른 일자무식이니, 감히 배움을 청해도 되겠습니까.”
포권하며 예의 있게 답하니 상희는 자신의 소매로 어여쁜 웃음을 감추며 고개를 주억였다.
꽤 신이 난 것처럼 눈매가 초승달처럼 휘어 눈웃음이 참으로 어여쁜 대라천의 진선이었다.
“진명의 천율이란, 하늘의 율법에 따른 자신의 진명을 뜻합니다. 아마, 귀선께서도 대라천에 오르기 전. 대천명선에게 자신의 이름을 말했던 기억이 있으실 겁니다. 그렇지요?”
대천명선(大天名仙)이라는 알기 쉬운 이름에 천범은 한 가지 기억을 상기했다.
‘그건가.’
하늘을 열고 이름을 묻기에 답한 그것이었다.
“이전에는 그 어떤 이름을 썼다 한들, 이곳에서는 오르며 진상한 이름을 쓸 수밖에 없습니다. 하늘의 인정을 받아 새로운 진명을 얻을 때까지는 오직 그 이름밖에 말할 수 없죠. 그것이 바로 진명의 천율입니다.”
천도선 상희의 답변에 그는 역시 그랬나 싶어 담담히 고개를 주억였다.
“낭선(狼仙).”
“…예?”
“이제 막 대라천에 오른 진선(眞仙). 낭선이라고 합니다.”
“……그러시군요. 독특한 진명이네요. 앞으로 절대 귀선의 진명은 잊어버리는 일이 없겠어요.”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낭선은 대라천에서 사용할 새로운 이름을 얻고 심란했다.
그러나 어찌하리.
그것이 대라천의 율법인 것을.
“그럼 이제야 제가 물어볼 차례군요.”
“예.”
“어쩌다 제가 관리하는 서황령의 금천도지에 나타나셨나요?”
“방해가 되었습니까.”
“아니요. 오히려 즐거움이 되었죠. 하지만 제 직무가 그러하니 여쭈어볼 수밖에 없답니다.”
그렇다면.
“제 대답의 여하에 따라, 상희 천도선과 제 관계 또한 달라집니까.”
그가 대답할 수 있는 건 적다.
어쩌다 이곳에 도달했나.
그것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게 있을 리 없었다.
상희 진선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곳은 아무나 들어올 수 없는 서황령의 금지인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리 말할 리가 없지 않겠는가.
싸우게 된다 하여 두려운 것은 없으나 왠지 그는 상희라는 진선과 척을 지고 싶지 않았다.
이제 막 만나 몇 마디 말을 나누지 않았으나, 한마디, 한마디에 서려 있는 그녀의 선함과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희라고 불러주시면 된답니다. 왠지 낭선께서는 저와 좋은 인연을 맺게 될 기분이 들거든요. 제가 이래 봬도 연에 대한 감은 틀리지 않거든요.”
“잘됐군요.”
“어째서요?”
“저 또한 마찬가지라서 말입니다.”
이내 상희의 입가에 짙은 호선이 그려졌다.
볼을 발그레하고 붉히는 모습이 꼭 잘 익은 복숭아 같은 여인이다.
“제, 물음에 아직 답변하지 않으셨어요. 낭선.”
“음, 저는….”
그는 잠시 고민했다.
허나 숨길 이유가 없다.
“진실과 진리를 위해 왔습니다.”
“진실과… 진리?”
“예.”
자신이 존재하는 진실을.
자신으로 하여금 하늘에 도달할 진리를 찾기 위해.
그는 대라천을 열었다.
“허나 지금은 진실이 먼저겠군요.”
그는 품에서 오래된 고서 하나를 꺼내며 말했다.
“이것을 만든 자를 찾습니다.”
그러자 상희는 두 눈을 토끼처럼 뜨며 답했다.
“산해발산고?”
“이것을 아시는지요.”
“알다마다요! 낭선께서는 이것을 만든 자를 찾으러 오셨다 했나요?”
“예. 그렇습니다.”
알만하다는 듯 고개를 주억인 상희 선은 이내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반겼다.
“그럼 잘 찾아오셨네요. 산해발산고는 저희 서황령의 서황모(西凰母)께서 만드신 천선시서(天船詩書) 중 하나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