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ll of the Spear RAW novel - Chapter (584)
낭선기환담-583화(584/600)
2부 293화 – 특별 외전 10
북공천을 유난히도 밝히는 금천은 천공서를 집어삼키고도 한동안 고고히 그곳에 자리했다. 커다랗게 떠올라 있는 금색의 태양 위.
그곳에는 안락한 의자에 기대있는 듯 올라서 앉아 있는 한 사내가 있었다. 제집이라도 되는 듯 편안한 안색으로 손아귀에 명패를 쥐고 묘한 미소를 띠고 있었으니.
바로 천공서를 없애고.
하늘의 천겁을 없애버린 사내.
천범이었다.
“더 강해졌군.”
그 곁에는 오직 한 명의 진선.
구영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래 보이나.”
“화담이라는 그 석장으로 천공서에 담겨 있는 모든 겁을 취했겠지. 네놈의 방식은 이제 안 봐도 뻔하다.”
“설명하지 않아도 되니 편하군.”
겉으로는 틱틱거렸으나, 구영은 가슴 한 켠에 그에 대한 경외심이 무럭무럭 솟아났다.
대라천에서도 난다긴다하는 진선들을 모아 놓은 것이 바로 천공서이거늘, 그곳을 하나의 술법만으로 모조리 집어삼키고 소멸시켰다.
어떻게 했는지 머리로는 대강 이해가 가지만 실감은 나지 않았다.
‘점점 더 강해지고 있다.’
대라에 올라선 이후.
금천은 더욱 강해지고 있었다.
끝을 모르는 것처럼 모든 지식과 법칙을 흡수하고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일에 도가 튼 사람처럼 말이다.
마치.
‘원래 제 힘을 찾는 것처럼….’
천공서에 있던 겁선들이 떠들어 댔던 것처럼 구영 또한 그러한 생각을 떨쳐낼 수 없었다.
말도 안되는 일이라 생각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망념을 떨치지 못했다.
“이처럼 쉬울 것이라 생각지 않았다. 대체 네놈은… 아니, 그대는 정체가 뭐지?”
묻자, 피식 비웃음으로 화답한다.
“내 진명은 낭선인데. 몰랐나.”
“그런 소리가 아니지 않나.”
“난 그저 나일세. 그저….”
욕심이 조금 많은 사람일 뿐.
“크흠. 근데 그건 뭔데 그렇게 만지작거리고 있나. 천공서의 다른 보물은 거들떠도 보지 않더니, 무슨 명패를 그리 만지는가. 혹, 내가 알아보지 못한 보물인가?”
“보물이라. 보물은 보물이지. 허나 자네에게는 그다지도 필요가 없을 그러한 보물이야.”
애정 깃든 시선에 머무른 명패 하나에 구영은 알겠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저러한 눈을 할 때, 그가 무엇을 떠올리는지는 대강 안다.
“그것뿐이던가?”
“그럴 리가 있겠나.”
이내 그의 품에서 여러 개의 명패가 쏟아져 나왔다.
둥둥 떠오른 명패들의 안에는 익숙한 이름들이 수없이 적혀 있었다.
그것을 들여다보노라면, 어떠한 겁을 받는지, 어떠한 날짜에 어떠한 강도로 겁을 떨어뜨려야 하는 지도 알 수 있었다.
“…….”
명패를 쥐는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유독 다른 명패들에 비해, 천범이 있던 상천의 겁만이 강도가 높았다.
아마도 가만히 있었다면 그들은 열 배나 불어나 있던 위력의 천겁을 버텨내지 못했겠지.
그 또한 천범의 탓이었으나 겁 자체를 없애버렸으니 탈은 없으리라.
안도를 하고 있는 그때.
구영이 고개를 빼내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아래의 하늘에 더 이상 겁이 존재치 않으니… 혼란이 빚어나겠군.”
“그렇겠지.”
천겁이 없어졌으니 수선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인 살아남고자 하는 의지가 결핍되어 갈 것이다.
겁이 없으니 깨달음 또한 없다.
하천은 수명대로 살아갈 것이고, 수선에 큰 뜻이 있는 자도 자신의 수행을 늘리기 위해 위험을 스스로 겪으며 깨닫는 바를 늘려야 한다.
“허나 그 또한 변화겠지.”
변화는 언제나 혼란을 빗는다.
허나 그것으로 하여금 새롭게 나타나는 것도 있으리라.
“벌써부터 천공서를 없애버린 자네에 대한 이야기가 천파만파 퍼졌더군. 금천진군의 소문이 발이 달린 듯 부풀어지고 지금은 천존의 목을 따겠다는 헛소문이 진짜가 아닌가 하는 의심이 커지고들 있어.”
“그런가.”
“물론, 지체 높은 자들은 아직도 헛소문이라 치부하며 그대의 신원과 신분을 낮추어 얕잡아 보는 자들도 있겠지.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들의 생각도 달라질 것이 불 보듯 뻔하군. 금세 생각을 고쳐먹을 걸세.”
천범은 손을 휘휘 휘저었다.
“그치들이 어찌 생각하듯 나는 별 관심이 없네. 천공서를 없애버린 것은 시기와 이해가 맞아 떨어져서 할 수 있었던 일이었을 뿐이야.”
할 수 있기에 했다.
그러한 말이 구영의 심장을 뜨겁게 만들었다.
감히 누가 대라천의 천공서를 쓸어버린 일을 할 수 있기에 했다는 가볍기 그지없는 말로 답할 수 있을까. 구영의 가슴이 웅장해졌다.
“금천진군.”
“왜 그런 눈으로 보는 거지.”
“돌연, 자네와 평생을 함께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군.”
“사내를 안는 취미는 없네.”
“여인의 모습으로 바뀔 수도 있네. 본래 혼돈에서 태어난 존재들은 성별에 유무가 확실치 않은 법이지.”
“한 번만 더 헛소리를 하면 자네부터 불구덩이에 직접 던져주지.”
“크크큭, 농담도 못하겠군.”
한참을 낄낄거리며 웃던 구영은 이내 차분한 눈을 하며 물었다.
“근데 이제 어쩔 셈인가.”
“뭐가 또.”
“천공서를 박살 냈으니, 그동안 뿌려 두었던 미끼에 고기들이 몰려들 것이 아닌가. 이제 슬슬 거물들이 무거운 엉덩이를 들고 일어날 게야. 어떻게든 자네를 보려 하겠지.”
그게 살(殺)이든 협(協)이든.
고요하던 대라천의 새바람을 불어 일으킨 것이니.
“살심을 품은 자들이야 자네가 잘하는 것이니 그대로 하면 되겠지.”
하지만 그 반대.
“내 밑으로 고개를 조아리는 자들은 어찌할 거냐는 물음이군.”
“그래. 없지는 않을 걸세. 자네와 비슷한 사상을 지닌 자들이 이 넓은 하늘에 몇 없겠는가.”
적지 않을 것이다.
당장 봉황조차 그렇게 하지 않았던가. 그녀만이 특별하단 보장은 어디에도 없을 테니.
그들이 몰려와 고개를 조아리게 된다면. 그때는 대라에 흐르는 헛소문이 실체를 가지게 될 것이다.
구영은 그것을 말한다.
준비가 되었느냐고.
그리되면 진정으로 돌이킬 수가 없다. 모든 것을 뒤엎은 후에야만 대라의 평온을 되찾을 것이니.
“이제 와서 뭐가 두렵겠는가. 이미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저질렀거늘.”
그는 이미 하늘의 이단아이자, 역모를 일으키려는 만인의 적이다.
이미 돌이킬 수 없다.
그리고 돌이킬 이유도 없다.
천범은 그것을 위해 올라섰으니.
“그리고 아직 끝나지 않았네.”
“뭐가 말인가.”
“아직 천공서의 탑주들을 나는 어쩌지 못했거든.”
천범은 그리 말하며 자신이 앉아 있는 태양을 흘겼다.
구영과 그의 시선이 동시에 태양으로 쏠리자 화답하듯 쿵, 소리와 함께 박동을 시작했다.
“대라가 펼쳐진 이래. 억겁의 시간을 천공서와 함께 보낸 이들이지. 간단하게 그들의 목숨을 거두기란 요원할 것이야.”
가두기는 했으나 그들의 목숨을 취하기란 꽤 힘든 일이다.
머릿수도 머릿수지만 그들은 아직 자신이 지닌 힘을 제대로 펼치지도 않았으니.
“내가 어쩌길 바라나.”
“시간을 벌어 주시게. 내 이치들을 무릎 꿇리는 그때 동안.”
자신을 지켜야 한다.
그 어떤 외부의 위험에서도.
“말은 참 쉽게 하는군.”
“한 배를 탄 사이가 아니던가. 아니면 자네가 안으로 들어가던지.”
천범의 말에 구영은 치를 떨었다.
저곳에는 천공서에서도 엄청난 힘을 축적해온 탑주들이 자리해 있다.
다른 이들은 죽었어도 천공서를 대표하는 겁을 관장하던 탑주들은 아직도 저곳에 갇혀 제 힘을 부리고 있다.
구영 자신이 들어갔다가는 뼈도 추리지 못하고 당할 것이다.
‘한둘 정도야….’
어떻게든 할 수 있겠으나.
저기 있는 이들은 열이 넘는다.
아무리 제 머리가 아홉이라도 열이 넘는 탑주들을 상대하기란 힘들다.
“다녀오게. 내 뭔가를 지키는 일은 생소하네만 못할 건 또 없지.”
“그럼 기다리게.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터이니.”
스르륵.
연기처럼 사라지는 천범을 뒤로한 채. 구영은 팔짱을 끼고 좌선했다.
허나 눈빛은 또렷하고 입가는 호선을 그린다.
전신에는 선홍빛 갑주가 어깨를 감싸고 검은 망토가 뒤로 펄럭인다.
“그렇다는데 어쩔 텐가.”
이내 허공에 대고 외치자 물결치듯 대기가 일렁이며 각각의 기이한 관모를 쓴 사내들이 나타났다.
긴 수염은 가슴까지 내려오는 늙은이들이었으나, 그들이 지닌 현기 짙음은 젊은이의 혈기를 뛰어넘는다.
“천공서가 사라진 것이 사실인가.”
“저 금양(金陽) 안에서 겁선들의 기운이 조금이지만 느껴집니다.”
“아직 늦지는 않은 모양이군!”
저것을 지키는 자는 오직 하나.
그렇다면 두려울 게 무얼까.
“천존들의 뜻을 떠받치며 하늘을 위해 이바지하는 겁선들을 살해한 죄! 목숨으로 갚는 것이 마땅한 바! 당장에 역모자의 목을 베고 하늘을 위해 바치리라!”
하늘이란 곧 삼청이니.
삼청을 배척하는 것이야 말로, 하늘의 반역자이리라.
“혓바닥 긴 것들이란… 꽤 오랜 시일이 지났으나, 너희들은 새로이 내 이름을 각인시킬 존재들이 되겠구나. 너희들은 내 이름을 아는가?”
“네깟 놈의 이름이 무어길래 그리 자신만만 하느냐!”
“나의 진명은 구영.”
그 단어에 좌중이 잠시 조용해진다.
일부는 생소함에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그 중의 일부는 안색을 굳히며 입을 열었다.
“구영…?”
“구영이라면 설마….”
“대라상제가 계시는 대라상전에서 혼란을 꾀하고 추방당한 용을 말함이 아닌지….”
아홉 머리를 지닌, 혼돈에서 태어난 신수이자 대흉으로 불린 용.
어떤 이는 흉이라 부르고 멸시하고, 또 어떤 이는 길이라 부르며 떠받들었던 용.
그에게 깃든 운명이 조금만 달라졌어도 대라천의 대라상전에서 한자리를 차지했을지도 모르는 용.
“어디, 네놈들은 날 죽일 수 있는지 한 번 보지. 대라상제도 나의 강인한 생명을 어쩌지 못해 추방으로 끝냈거늘 네놈들이라고 뭘 할 수 있을까.”
놈들의 수가 많지만 그래봤자 열이 넘지 않는 숫자.
그렇다면 승산이 있다.
스스스슥.
구영의 몸에서 연기가 새어 나오고, 이내 갑주를 전신에 무장한 아홉 개의 머리를 지닌 용이 드러난다.
[네놈들을 찢어발기는 것 정도도 하지 못한다면 놈에게 체면이 서지 않아서 말이야.]이기는 것은 어려울지 모른다.
허나.
[시간을 끄는 것이야 어렵지 않지.]그는 목이 베어도.
사지가 찢긴다 한들.
죽지 않는 혼돈의 아들.
대흉(大凶)의 구영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