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ll of the Spear RAW novel - Chapter (64)
낭선기환담-63화(64/600)
낭선기환담 – 63화
모락모락 김이 뿜어져 나오는 욕간.
그 사이로 유려한 미모의 여인이 눈을 감고 앉아 있었다.
물결 사이로 힐긋 보이는 외형이 퍽 아름다웠다. 하지만 여인의 아미는 찌푸려져 있었는데, 그 이유는 다름 아닌 산군 때문이었다.
“륜.”
“예.”
륜이라 불린 사월랑 육사가 그녀의 뒤에서 나타났다.
칙칙한 무도복을 입은 여인이었다.
“네가 보기에 어떠하더냐.”
“많은 것을 감추고 계신 분 같았습니다.”
륜은 담담히 산군의 대한 평가를 내렸다. 하지만 금명지수는 그것이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것이 아니다. 네 보기에 내 미모가 어떠냐는 것이다.”
“……아름다우십니다.”
“그렇지? 네가 봐도 내가 좀 그렇지? 한데 은자는 어찌 날 돌보듯 본단 말이냐!”
또 시작이었다.
본래 이런 분이 아니었는데,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혼담이 시작도 전에 깨져서 그런지 예민하기가 말로 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수도에 힘쓰고 계신 분이라 들었습니다. 대도(大道)를 목표에 두고 계신 분이니 자연히 여색을 멀리 하는 것이 아니신지요.”
틀린 말은 아니다.
사월랑의 수장에게 천수일기겁을 요구했고, 혈붕수를 찾으러 나섰으니 두말해야 입 아플 정도다.
“알고 있다. 100년이 조금 넘는 나이에 영결의 경지라니 당연 그렇겠지.”
영결에 오르는 이들의 나이가 빨라봐야 500살인데 고작해야 100년이라니. 뛰어난 자질을 지닌 금명지수라 해도 놀랄 정도였다.
“하지만 그리 결론짓기에는 내 마음이 편치 않구나. 거절당한 내 마음은 누가 보상해준단 말이냐.”
그걸 왜 보상 받아야 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으나, 륜은 묵묵히 지수의 투정을 받아줬다.
“어이가 없지 않느냐! 내가 이리 어여쁘고! 신통 또한 뛰어나다 칭송 받는 여인인데! 영결에 머무르는 사내에게 거절당했다는 게 응? 그리 생각지 않더냐?!”
“예, 그렇습니다. 은자께서 큰 실수를 범하신 것 같습니다.”
“아니 실수는 아닌 것 같고, 분수를 아는 것이지.”
륜은 뜬금없이 은자를 두둔하는 지수의 모습에 눈썹을 치켜 올렸다.
이게 대체 뭐하는 건가 싶다.
“근데 또 내 맘이 그리 간단하지 않으니…. 응?”
주저리주저리 떠들던 금명지수의 머리에 늑대귀가 나타나 쫑긋거렸다.
“륜, 숨거라.”
“어째섭니까.”
“은자께서 아무래도 욕간을 들여다보실 생각이신 것 같구나. 그래. 그렇지! 겉으론 점잖은 척 하더니 결국엔 은자도 사내로구나!”
“아닌 것 같은데….”
“어허! 숨어 있거라. 내 이번에 은자께 제대로 한마디 할 터이니.”
륜은 눈살을 찌푸리며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금명지수는 머리칼을 매만지고 밖에서 잘 보이는 위치로 이동까지 했다.
마치 선녀에 빙의되기라도 한 듯, 우아한 낯으로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있길 일다경.
금명지수의 얼굴이 와락 찌푸려졌다.
“아니라하지 않았습니까.”
“……시끄러.”
짜증이 치솟는지 이를 짓는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의 윤곽으로 물방울들이 흐르다 떨어져 내렸다.
“인간들 마을에서 뭘 하셨는지 보아야겠다. 오자마자 피비린내를 풍기시니.”
가볍게 옷가지를 두르고 나서니, 쓰러진 인간 하나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는 산군이 보였다.
“오셨습니까.”
“예. 그리 소란스러운데 어찌 가만히 있겠습니까.”
새초롬한 낯으로 툴툴거린다.
“한데 그것은 무엇입니까. 인간은 아닌 듯한데.”
산군의 곁에는 웬 사내 하나가 의식을 잃고 누워 있었다.
하지만 그 외양이 평범한 인간은 아니었다. 비늘이 돋고, 털이 난 것이 인간과 영수의 혼아 같기도 했다.
“혼괴입니다. 마도 놈들이 범인과 영수를 이어붙이거나… 영수의 피를 주입해 만든 것이죠.”
“혼괴요? 신기하네요. 처음 듣습니다.”
하지만 그뿐.
별다른 감흥은 없었다.
애초에 인간들은 무엇이든 뚝딱 만들어 내거나 하는 이들이었으니.
“그럼 그것은 무엇입니까. 웬 귀신을 달고 다니십니까?”
그의 곁에는 예쁘장한 귀신 하나가 있었는데, 금명지수로는 처음 보는 것이라 의아했다.
귀신은 그녀를 보며 고개를 숙였는데, 산군의 낯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제 오랜 지기입니다.”
“오랜 지기요? 귀신이 말입니까?”
하고 많은 것 중에 어찌 귀신을 지기로 삼는단 말인가. 어이가 없어 묻자 그는 입을 다물었다.
순식간에 냉랭해진 분위기에 쌀쌀한 겨울바람이 그것을 더했다.
하지만 금명지수는 떳떳했다.
“어찌 말이 없으십니까. 제 혼담을 거절했던 것도 귀신 같은 것과 뒹구는 재미가….”
금명지수의 눈이 반달처럼 휘었다.
어느새 자신을 압박하는 살기.
그리고 주위에는 구슬 수십 개가 떠 있었기 때문이었다.
수십 개의 구슬은 영명인 그녀라도 쉽사리 얕볼 수 없었다. 하나하나가 보구의 기운을 지니고 있으니 당연했다.
고작해야 영결.
은연중 얕잡아 보았던 터라 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다.
“감당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녀가 물었다.
사월랑의 여식에게 검을 드리우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아느냐고.
그는 말했다.
“물론.”
그 담담한 음성에 그녀의 목울대가 고저를 그렸다.
이런 긴장감은 오랜만이었다.
게다가 자신을 같잖게 보는 저 눈빛은 또 어떤가.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는 적안은 이미 그녀의 피를 보고 있는 듯 했다.
일촉즉발의 상황.
그녀의 손이 꿈틀거리려는 때.
“그만하시지요. 산군.”
그것을 깨트린 것은 다름 아닌 그의 곁에 있던 귀신이었다.
‘산군?’
그녀는 산군의 손을 감싸 쥐며 고개를 저었다.
“널 욕보인 것은 날 욕보인 것과 같다.”
“제 잘못입니다.”
“네가 무엇을 잘못했단 말이냐!”
“제 존재 자체가 보기 좋은 것은 아니니 그럴 수밖에요.”
귀신은 인간에게나 영수에게나 그리 보기 좋은 것이 아니다.
더군다나 그것이 창귀라면 더더욱.
‘창귀라…. 은자가 범이었군.’
“그렇지 않다.”
“산군이 그러셔도….”
“절 앞에 두고 잘도 떠드시네요. 고작해야 영결의 경지로 절 상대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까.”
허풍도 그 정도면 대단하다는 듯한 태도였다.
하지만 산군은 담담히 받아쳤다.
“마을 하나 정도는 날아가겠지만, 그것이라면 영명 육사의 못자리로 충분하겠지.”
“산군!”
귀신이 소리치자 그가 한숨을 내뱉었다. 이내 주변에 떠오른 구슬들이 자취를 감추고 그가 등을 돌렸다.
“후회할 것이오.”
그리 중얼거린 사내가 휘적휘적 산속으로 들어갔다.
한시름 놓은 듯한 표정의 귀신이 금명지수에게 고개를 숙이고 사라졌다.
금명지수는 한동안 말없이 자리를 지켰는데 륜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대단한 자신감입니다.”
그 속에는 그를 얕잡아보는 감정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금명지수는 그렇지 않은 듯 했다.
“그것은 모르는 것이지.”
“영결 중경입니다.”
영결과 영명은 한 계단 차이라고 할 수도 있었으나, 그 한 계단에 평생을 쏟는 이들도 부지기수다.
영결 육사 수십이 있어야 겨우 영명을 붙들 수 있다. 그만큼의 차이가 있는데 어찌 저리 확신한단 말인가. 륜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의 보구를 보지 못했더냐.”
“보았습니다만 보구라면 공주도 가지고 계시지 않습니까.”
영결의 육사가 보구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 놀라웠지만 그뿐이다.
영명들은 하나 둘 정도 보구를 지니고 있었으니 그다지 놀라운 것도 아니다.
그리 생각하는데 금명지수가 의외의 말을 건넸다.
“난 그리 많은 보구를 지니고 있지 않다.”
“예? 많은 보구라니요?”
“당금 주변에 떠올랐던 보구들은 한 벌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하나하나가 보구 한 벌이었다는 것이지.”
그녀의 말에 륜이 화들짝 놀랐다.
“설마요! 그리 똑닮은 보구를 그리도 많이 가지고 있는 게 말이 됩니까?”
“안 되니까 모른다는 거야. 싸우게 됐다면 그의 말대로 마을 하나쯤은 날아갔을지도 모르지.”
륜은 당최 이해할 수 없었다.
영결의 육사 하나가 지니고 있을 수 없는 보구의 숫자였다. 한 벌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면 그것들 전부를 개별적으로 조종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만한 숫자를 수족처럼 부리려면 어찌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평범한 육사라면 그것들을 띄우는 것도 좀처럼 하지 못할 것이다.
그제서야 소름이 돋은 륜은 자신의 팔뚝을 매만졌다.
“흥, 혼담을 걷어찰 만하구나.”
금명지수는 퍽 만족스럽다는 듯 등을 돌려 자신의 거처로 돌아갔다.
* * *
한편.
산군은 정처 없이 산을 올랐다.
“산군. 어디까지 가시려고요.”
그의 뒤를 쫓은 화란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이런 일이 생길 것을 고려해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의 창귀가 되기로 마음먹었던 날.
이까짓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것은 진즉에 알고 있었다.
창귀라는 존재가 무릇 그렇다.
사람을 홀려 범의 아가리로 넣는 것이 바로 창귀다. 그런데 어느 누가 창귀를 좋아하겠나. 귀신이라는 것 자체가 죽음을 부정하고 한으로 연명하는 존재이니 그럴 수밖에.
살아있는 것이라면 부정적으로 볼 수밖에 없다.
그런 것은 어쩔 수 없다 받아들인 지 오래다. 창귀로 살아온 지도 어언 백 년이 넘어갔으니 당연하다.
하지만 자신의 주인 되는 범은 그렇지 않아 보인다. 솔직히 그렇게까지 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불같은 성정은 알고 있었으나, 때와 장소를 가리는 냉정함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실망한 것은 아니다.
내심 그의 행동에 기쁜 것도 사실.
그러니 일단 멈춰 세워야 했다.
“저는 아무렇지 않습니다.”
우뚝.
산길을 오르던 산군의 발이 멈췄다.
슬쩍 주변을 돌아보니 어느새 뒷산 정상에 올랐는지 주변 일대가 훤히 보였다. 미미한 달빛이 비추던 밤하늘은 먹구름이 끼었는지 어둡기만 했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은 침묵으로 하여금 적막함을 더했다.
그러나 잠시 뒤.
그의 입이 열렸다.
“내가…. 괜찮지 않다.”
그의 음성은 조금 떨리고 있었다.
꽉 말아 쥔 주먹에서는 살가죽이 비명을 내질렀다. 화란은 서둘러 그의 손을 두 손으로 잡았다. 주먹에서는 분노로 점철된 핏자국이 흘러 내렸다.
“이리도, 이리도 화가 날 줄은 몰랐어.”
“…저도 몰랐습니다.”
영명의 육사.
그것도 사월랑의 공주를 죽이려 했을 때는 화란이라 해도 화들짝 놀랐다.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것이 산군이다.
그런 그가 그렇게까지 한 의미를 그녀가 모를 리 없었다.
“난 이해타산적인 놈이다. 그런 내가 사월랑의 공주를 죽이고, 사월랑의 추적을 뿌리칠 궁리를 하고 있더구나.”
본래라면 죽이지 않으면 되는 간단한 문제다.
하지만 그것을 염두에도 두지 않았다는 말이었다. 화란은 말없이 그의 등에 얼굴을 묻었다.
그가 왜 그랬는지 알고 있어서.
어찌 그런 판단을 내렸는지 알아서.
“100여 년 전, 널 살렸다면….”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었겠지요.”
산군은 허리춤에 둘러진 그녀의 손을 매만졌다. 곱디고운 섬섬옥수에선 온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티내지 않았다만.
그것이 항상 서글펐다.
“후회하십니까.”
“무엇을.”
“절 창귀로 만든 것을요.”
“아니.”
즉각 나오는 답변에 화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럼 되었습니다. 저도 아직은 산군 곁에 더 있고 싶으니.”
“…너는 후회한 적이 없더냐.”
“감사하고 있습니다.”
“…….”
산군은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손을 어루만지는 그의 온기는 그대로였다.
“이제 내려가실까요.”
“날이 쌀쌀하다.”
아귀가 맞지 않는 소리.
“그러니.”
하지만 그녀는 알 듯 했다.
“조금 더 이리 있자꾸나.”
화란은 말없이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