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ll of the Spear RAW novel - Chapter (8)
낭선기환담-7화(8/600)
낭선기환담 – 7화
[안 무섭냐?]“흥!!”
고개를 홱 돌렸지만 입을 오물오물 거리고 있는 게 다 보였다.
산군은 순간, 다 필요 없고 백산에 가서 잠이나 늘어지게 자고 싶다고 생각했다. 애 보는 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래? 알았다. 난 돌아갈 테니 네 알아서 잘 살거라. 그동안 귀찮았고 더러웠다.]알아서 떨어져 나가주겠다는데 이보다 좋을 수가 없다. 그리 말하고 산군이 뒤를 돌자, 초아가 흠칫 놀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소리만 들어도 어찌하고 있는지 뻔히 보인 산군은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아! 같이 가요!”
제 아무리 삐쳐봤자 어린아이인 것이다. 역시 애는 애라며 뒤를 돌아 한마디 해주려는 찰나.
휘잉.
소슬한 바람이 그의 발길을 멈추게 했다.
순간 산군의 표정이 차갑게 식어가고, 그 모습을 바라본 초아가 흠칫 놀라 걸음을 멈췄다. 산군은 급히 초아 곁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그녀를 가리듯 섰다.
[나와라.]낄낄낄낄낄!
음산하게 우거진 수풀에서 쇳대를 긁는 듯한 기분 나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히끅!”
놀란 모양인지 초아는 연신 딸꾹질을 하며 산군의 털을 꽈악 붙잡았다.
산군 또한 기세를 퍼트리며 놈의 방향을 찾으려 애썼지만 은신에 조예가 깊은지 쉽게 찾을 수 없었다.
[내 별 말 하지 않으마. 그 계집을 놓고 사라져라! 그리하면 목숨만은 건드리지 않을 테니!]영력을 가득담은 음성은 산군마저 흠칫 놀랄 정도였다.
‘최소 영물.’
어쩌면 그 이상의 영물(靈物)을 넘어 영화(靈和)의 경지에 있는 놈일지도 모른다.
산군의 기억 속에 백척곡에 그런 영수가 있다는 건 들어본 적 없다.
백척곡이란 이름이 붙게 만든 영수는 옛날 옛적에 사라진 지 오래.
그럼 어찌 이만한 힘을 가진 놈이 이 작은 산에 있단 말인가. 머리를 팽팽 굴렸지만 답을 찾을 수 없었다.
그보다는 어찌 빠져나갈지.
그게 아니라면 어찌 싸워야 할지를 생각해야 할 때였다.
‘후……. 내가 초아 탓에 이리 될 줄 알았건만…….’
초아와 함께한다면 이런 놈들이 줄을 서고 찾아올 것이다.
백산에서는 이름 높은 산군이지만, 이 세계는 그보다 더 강한 자들이 바글바글한 위험한 곳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산군도 못 이기는 척, 처는 아니어도 양딸로 삼아 키우는 일도 생각해 봤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지닌 피와, 그 운명은 산군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여기서 이별을 고하는 것 또한 나쁘지는 않겠지.
‘일단…….’
[이 아이만 건넨다면 내 목숨은 건드리지 않는다, 약조할 수 있나?]산군의 곁에 있던 초아의 눈이 크게 떠졌다.
[푸흐흐, 그러마. 어차피 내게 필요한 것은 덜덜 떨고 있는 백발 아이지 범이 아니다. 애초에 범은 충분하기도 하고……. 곧장 저 아이를 취해야 하니 네놈을 쫓을 새가 없을 것이다.]‘범은 충분하다…….’
산군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발을 떼었다.
“서, 서방님!”
하지만 초아가 산군의 털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제 귀를 의심했다는 듯 눈물을 글썽거리며 장난이라고 말해주길 원하는 낯이었다.
그러나 산군은 그런 초아를 보며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놓아라.]“왜, 왜요! 초, 초아가 화내서 그래요? 다, 다시는 안 그럴게요 네? 그, 그러니까…….”
[시끄럽다! 네 탓에 나까지 죽게 둘 셈이더냐! 그래. 너와 정이 생기긴 했으나 그렇다 해도 고작 인간 계집 하나 때문에 죽음을 무릅쓸 정도는 아니다! 그러니 그만 놓고 네 운명을 받아들이거라!]산군은 핏기가 가신 초아의 얼굴을 보고도 냉담히 그 손을 뿌리쳤다.
“푸흐흐흐.”
그때.
스르륵. 수풀에서 모습을 드러낸 이는 추레한 얼굴의 노인이었다.
머리는 산발이었으며 눈동자는 시시각각 따로따로 움직이는 기괴한 모습이었으나, 사람의 형상을 이루고 있었다.
느껴지는 기운은 절대 인간이 아님에도 인간으로 보이니 그것이 뜻하는 바는 당연했다.
‘둔갑?’
산군의 낯이 묘연해졌다.
산해발산고는 인간이 주인공인 이야기라 모든 것이 인간 중심으로 쓰여진 소설이다.
그렇기에 둔갑에 관한 정보는 적을 수밖에 없었고, 그렇기에 산군도 둔갑에 관한 것은 제대로 찾을 수 없었다.
그렇게 범으로 백년 가까이 살아와 이제는 거의 포기했다고 봐도 무방했다.
‘이제 와서 둔갑이라…….’
영결의 경지에 이르면 자연스레 사용할 수 있다고는 하지만, 영물의 끝자락에 있는 산군이 영화를 넘어 영결의 경지에 이르려면 얼마의 시간이 필요할지는 미지수였다.
‘모르긴 몰라도 이, 삼백년은 족히 걸리겠지.’
산군은 눈앞에 추레한 노인을 바라보았다.
손에는 피 묻은 거대한 도 한 자루를 쥐고 있고, 섬뜩한 기운을 흘리고 있는 노인은 기분 나쁘게 웃으며 한걸음 한걸음 다가왔다.
“죽고 싶지 않다면 사라져라.”
‘영화 급.’
영물의 윗 단계인 영화.
놈이 흩뿌리는 기운은 확실히 산군의 윗줄에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은 둔갑에 관련된 보물을 지니고 있거나 산군이 모르는 방도가 있기 때문이리라.
산군은 진중한 얼굴로 멀뚱히 서 있는 초아를 힐긋 바라보다 몸을 돌려 수풀로 달아났다.
“제 주제를 아는 놈이야. 자……. 그럼.”
새하얗게 질린 초아의 얼굴을 보며 추레한 노인은 빙그레 웃었다.
“이런 곳에서 백혈귀수의 씨를 보게 될 줄이야……. 세상 천지에 나만큼 운이 좋은 놈은 없을 것이다! 크하하핫!”
* * *
녹이 슬어 이가 빠져, 무도 자르지 못할 것 같은 검.
그 검을 들고 있는 여인은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그것을 노인의 목에 가져다 댔다.
“…….”
“아시겠습니까?”
노인은 그녀의 물음에 노기가 역력한 낯으로 고개를 주억였다.
그러자 산군의 창귀.
화란이 검을 거두었고, 자신을 청도산이라 한 노인이 슬쩍 뒤로 물러서며 경계했다.
“믿어달라는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저희가 그 아이에게 해를 끼치려 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 주셨으면 좋겠군요.”
“……믿지 못한다 해도 나로서는 어찌 할 방도가 없으니 무엇을 하겠소. 그저 믿을 수밖에.”
“아시니 다행입니다. 제 주제를 모르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은 없으니까요.”
노인이 이를 빠드득 갈았으나, 그녀는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그래서. 당신과 그 아이는 어찌 이곳에 있는 겁니까. 그저 여행자라 말씀하시지는 않을 거라 믿겠습니다.”
“……보다시피 제자와 여러 곳을 떠돌며 수행을 하고 있었소.”
“곤륜산과 이곳은 꽤 멀리 있는 것으로 압니다.”
“그렇소. 믿을지는 모르겠으나……. 어찌하다 보니 이곳까지 오게 되었지. 그러다 소문 하나를 듣게 되었소.”
“소문.”
“백척곡을 주변으로 요수, 영수 할 것 없이 죽어나가고, 귀신들이 들끓어 해를 입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고 하더군. 그것을 알아보려 제자와 이곳을 찾아온 것이오.”
“흥미롭습니다. 더 해 보시지요.”
“크흠, 영수들의 사지가 절단 나 있고, 뱃가죽을 갈라 꼭 무엇을 찾듯 헤집어 놓아다 하더이다. 꼭 무슨 의식을 준비하는 것처럼 말이오.”
의식.
요수.
그것을 잠시 곱씹어본 화란은 그에게 무어라 말하려 하는 순간.
후웅.
이질적인 기운이 몸을 훑었다.
“이건!”
청도산이 화들짝 놀라 검을 들어 올리고.
그 뒤에 있던 꼬마마저도 비지땀을 줄줄 흘리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몸이 위축될 만큼 강대한 기운에 절로 긴장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화란은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으며 얼굴을 굳힐 뿐이었다.
“사달이 나긴 난 모양입니다……. 제 주인이 이리 급하게 부르는 것을 보니.”
작게 읊조린 그녀는 이내 공정강에서 꺼낸 칠흑처럼 어두운 천 하나를 펄럭이며 그대로 수풀로 뛰어들었다.
* * *
“백혈귀수……. 백혈귀수.”
초아를 내려다보는 추레한 노인은 도등에 걸려있는 아홉 개의 고리를 차르륵 손으로 쓸며 말했다.
[200년 전에 멸족 당했다던 백혈귀수가 아직까지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군. 하기사, 강한 힘은 더 강한 힘을 부르는 것이니…….]아련하게 옛 기억을 추억하던 노인은 이내 초아에게 손을 뻗었다.
발버둥치지 않을까 했던 초아는 눈이 빛을 잃은 채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범이 저를 버리고 간 것이 그리 큰 충격이었을까? 우습기 짝이 없었으나 노인은 그녀를 들쳐 메고 수풀을 가로질렀다.
순식간에 어느 암벽으로 다다른 노인이 그 앞에 거대한 바위에 손을 올리고 힘을 주었다.
드르르륵!!
옆으로 밀려난 바위.
그리고 나타난 거대한 동굴.
혈향이 코를 찌르고 악취가 진동하는 동굴이었다.
얼마나 많은 생명들을 도륙한 것일까.
차마 헤아릴 수 없는 숫자의 생명들이 죽임을 당하지 않고서야 이리 짙은 혈향을 내뿜을 리 없었다.
“좀 더 나중으로 생각했건만, 백혈귀수가 있다면 이야기가 다르지. 지금 당장 실행해도 문제가 없겠어.”
노인은 들쳐 멘 초아를 복덩이처럼 바라보며 기분 나쁜 웃음을 지은 채 동굴 안으로 사라졌다.
어두울 것이라 생각했던 동굴은 곳곳에 박혀있는 야명주가 발광하며 은유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여기저기 핏물이 끈적하게 묻어 있고, 점점 안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코를 찌르는 악취가 퍼져 나왔다.
기이하게 이 동굴은 안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통로가 점점 넓어졌다.
얼마나 걸었을까.
노인이 걸음을 멈추고 멍한 얼굴의 초아를 내려놓았다.
동굴 내부에는 온갖 짐승들의 장기들이 모여 있는가 하면, 사람의 머리만 덩그러니 쌓여있기도 했다.
범의 머리, 인간들의 머리, 그리고 그들의 심장과 장기들.
꼭 무슨 의식을 치루는 곳처럼 각각의 위치가 균일하고, 지면에는 핏물로 만들어 넣은 진법 또한 그려져 있는 것이 괴기스럽기 짝이 없었다.
초아는 온갖 것들이 쌓여진 한가운데에 있었다.
그제야 정신이 들어 주변을 두리번거렸으나, 그 얼굴에 표정이 없는 것이 마치 삶을 포기한 폐인 같았다.
그것을 의아하게 생각한 노인이었으나 어차피 별 상관없었다.
노인은 히죽 웃으며 거대한 도를 내려놓고, 품에서 단검 하나를 꺼내들었다.
투박하기 그지없는 단검이었으나 핏물이 덕지덕지 붙어있는 녀석이었다.
“네년의 피와 살은 삼통(三通)을 이루게 해줄 것이다. 내 너를 잊지 않을 터이니 극락왕생 하도록 하거라!”
초아는 빛을 잃은 눈으로 추레한 노인을 한번 쳐다보곤, 담담히 눈을 감았다.
푸우욱!
* * *
기억이 나지 않을 어릴 때부터 소녀는 그러했다.
“이 귀신! 저리가!”
귀신.
기분 나쁜 년. 등등.
입에 담기 험한 말을 하는 아이 들이나 어른들.
그저 자신과 조금 다른 외양을 지녔다하여 그들에게 멸시받고 천대받는 일은 어린 그녀가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억울한 일이었다.
“재수 없으니 썩 꺼져!”
쓰레기를 뿌리고, 구정물을 뿌리고, 부잣집은 비싸다 하던 소금을 뿌리기도 했다.
이 집. 저 집 의탁하였으나 행복했던 기억은 없었다.
언제나 그들의 눈치를 보아야 했고, 매질을 당하지 않으려면 눈에 띄지 않게 맡은 일을 해야 했다.
자신은 기분 나쁜 외양을 가지고 있으니, 그들에게 이쁨 받으려면 시키는 것을 잘하고 움츠리고 있어야 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던 어느 날.
기녀 언니들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었다.
서방. 혼인. 가족. 사랑.
가끔씩 시간을 내 기방에 드나들며 심부름을 해주고 그런 이야기를 듣는 것이 재미있었다.
자신은 절대 그런 감정을 느끼지 못하고, 이루지 못할 가정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잠시의 단꿈에 젖는 것은 행복했다.
자신이 사랑하는 지아비와 그의 아이를 낳아 행복하게 살아가는 일.
누군가 때려도 그것을 막아주고, 누군가 욕을 하면 그자를 찾아가 혼내주는.
그런 멋진 서방님.
자신의 지아비.
자신만을 사랑해주고, 자신을 위해서라면 모진 일도 마다하지 않는 자신만의 사랑.
소녀는 그렇게 하루하루 단꿈을 의지 삼아 살아갔다.
그리고 어느 날.
“네가 산군에게 시집가야겠다.”
소녀는 산군이라는 이에게 시집가게 됐다.
소녀는 산군이 뭔지 몰랐지만 어쨌든 시집간다는 소리에 뛸 듯이 기뻤다.
드디어 이 세상에 혼자가 아닌 것이다.
자신만의 편이 생기는 것이었고, 그의 아이를 낳아 가정을 만들 수 있는 것이었다.
소녀는 어서 빨리 상대를 보고 싶었다.
애정을 나누고 싶었다.
그의 아픔을 나누어 가지고 자신의 아픔 또한 보이고 싶었다.
많은 이들이 시집간다고 자랑하는 소녀를 애석하단 눈으로 보았다.
그것이 영 이해가 가질 않았다.
건넛마을 김판사댁 여식도 얼굴 한번 못 본 이에게 시집갔기 때문이었다. 면식이 없는 젊은 남녀가 혼인을 치루는 것은 드문 일은 아니었다.
“범이야 범. 네 낭군님은 호랑이라고…….”
기녀 언니가 해주는 말에 소녀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범.
그게 뭔지 잘 몰랐다.
나중에 자세한 설명을 듣고 나서야 그것이 인간이 아닌 짐승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아.
그렇구나.
나는 인간이지만 인간에게 멸시받고, 인간에게 천대받아 인간과는 혼인할 수가 없는 거였구나.
소녀는 혼자 생각했다.
그리고 납득했다.
그렇다면.
범이라도.
짐승이라도.
나의 낭군으로, 지아비로 받아들여 사랑받겠다고. 그와 가정을 이루겠다고.
나는 사랑받지 못하는 인간의 탈을 쓴 귀신이니까.
.
.
“극락왕생 하거라!”
추레한 노인은 소녀를 향해 단도를 들어 올렸다.
저 핏물이 뚝뚝 흘러내리는 단도는 자신의 몸을 파고들어 단숨에 이 세상에서 자신을 지워주겠지.
그러자 주마등처럼 산군과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와의 만남.
말을 해서 깜짝 놀라고 말았던 일.
그와의 동침.
-서방님의 품은 따뜻했다.
언골마을에 혼수를 하러 갔던 일.
-지아비가 있다는 것으로 서슴없이 말을 걸 수 있었다.
김부자에게 산삼을 빼앗겼던 일.
그리고 그에게 가 서방님이 혼쭐을 내줬던 일.
자신에게 도모잠을 주었던 일.
한밤의 꿈같은 일.
즐거웠다.
소녀는 그리 생각했다.
낭군이 생겼다는 사실 자체로. 그와 함께 한다는 것 자체로 소녀는 행복했고 마음이 따스해졌다.
자신이 누릴 수 없는 행복이라는 감정은 그녀를 웃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 또한 끝.
소녀는 눈을 감았다.
마지막으로 자신을 내치는 범의 모습이 떠올랐으나, 그를 탓하지는 않았다.
‘내가 나빠.’
죄가 있다면, 귀신의 모습으로 태어난 자신에게.
죄가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