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ll of the Spear RAW novel - Chapter (83)
낭선기환담-82화(83/600)
낭선기환담 – 82화
“재밌는 말을 하는구나.”
흥미롭다는 투였다.
“범의 굴에 여우가 앉는다하여 달라질 게 무어있을까. 범이 돌아오면 한 끼 식사로 축나는 것이 여우이거늘.”
같잖은 소리를 한다는 표정.
하지만 산군은 도리어 웃어보였다.
“그 식사로 탈이 날 수도 있지요.”
의미심장한 말.
환망의 얼굴은 변함없었으나 입을 다물었다. 어느 정도 산군의 말에 귀를 열었다는 것과 진배없다.
“날개와 귀신이 굴을 탐하나, 그것이야말로 범을 잡으려는 덫입니다.”
환망의 눈매가 좁혀졌다.
날개는 궁비호.
귀신은 십해만척귀들을 뜻함을 모르지 않을 터. 그 덫이라는 게 무엇인지 자못 궁금한 낯빛이었다.
“퍽 요사스러운 혓바닥이군.”
“그들의 덫이 환망선사를 해하지 못하더라도 무분별한 희생은 감수해야 하실 겁니다.”
안 그래도 귀음나찰과 지모사들과의 전투로 많은 이들이 죽었다.
고선을 수호하는 탈의 대법주.
환망이라면 무시하지 못할 터.
“많은 이들이 죽었습니다. 죄 없는 이들의 피가 땅을 적시고 통곡이 하늘을 떠돌고 있으나 살 사람은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
침묵했으나 고민은 길지 않았다.
“말해보라.”
산군은 기꺼운 마음에 입을 달싹거렸고, 환망은 가만히 들었다.
잠시 후.
쿨럭!
다사금 발작하는 극독에 기침이 나왔다.
핏물이 바닥을 적시고 몸이 타오를 듯 뜨거워졌다.
긴장이 풀려 독성이 한 번에 몰려오는 듯했다.
정신이 혼미해지고 눈앞이 흐려졌다.
“네 죄가 깊다. 만성독염을 세상에 끄집어냈으니….”
만성독염.
그 불길한 독염을 산군은 회수하지 못했다. 그럴 여유는 물론, 힘도 없다.
영성을 얻은 재앙이 풀려났으니 존재하는 것만으로 많은 살아 숨 쉬는 것들이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쯧. 허나 살리지 않을 수 없구나.”
환망은 혀를 차며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산군의 몸이 허공에 떠오르며 극심한 열기가 칠공에서 뿜어졌다.
“으으으으아악!!”
화르륵!!
저주처럼 타오르는 적색의 화염.
그의 잔재가 몸에서 뽑혀져 나온다.
몸속의 장기가 뽑히는 것처럼 생경한 경험이었다.
극심한 고통 속.
산군은 들었다.
“몇 가지 조건이 있다.”
대답하고 싶었으나 말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첫째, 네놈이 흘린 똥은 네놈이 치우거라.”
만성독염을 말하는 것일 터.
그것이라면 염두에 두고 있었다.
골치가 아팠으나 방비를 한다면 어떻게든 회수 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다시는 고선에 발을 딛지 말라.”
나쁠 것 없다.
천수일기겁을 받아 영명에 오른다면 한동안 고선에 발 디딜 일은 없다.
있다 해도 차후에 환망이 사라진다면 이 약조 또한 의미가 없다.
“셋째, 네 여인을 검으로 찔러라.”
그게 무슨….
“때가 되면 다 알 것이다.”
흐릿해져가는 시야 속.
산군은 의뭉스러움을 느끼며 정신을 잃었다.
털썩.
쓰러진 그를 뒤로한 환망은 어느새 나타난 사내를 보았다.
“괜찮겠습니까.”
살려도 되겠냐는 물음.
환망의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이 또한 인연이겠지. 네게는 미안한 마음뿐이구나.”
누더기를 두르고 탈을 쓴 환선.
장천이었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장천은 고개를 깊이 숙였다.
환망은 제 수염을 쓸어내리며 고뇌하다 어느 순간 홀연히 사라졌다.
그 후.
하늘에서 수십 개의 때 늦은 빛줄기들이 내려앉았다. 그들은 머리 없는 짐승을 바라며 구슬피 울었다.
* * *
사흘 뒤.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은은한 불빛이 석실을 밝히고 몽롱한 정신이 깨어나길 거부하는 듯했다.
도로 눈을 감으며 왜 여기서 자고 있는 건가 생각하다 다시 잠들었다.
품에 뭐가 있는 듯했지만 수마가 몰려와 신경 쓸 수 없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다시금 눈을 떴을 때 정신이 번쩍 들었다.
[…….]순간 지난 일이 파도처럼 밀려와 아지랑이처럼 머릿속을 보았다.
고개를 털었으나 지난날의 과오는 쉽사리 털어지지 않았다.
둔갑이 풀려 범의 모습으로 우두커니 있자 품에서 새하얀 무언가가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깨어나셨어요?”
“아니, 일단 어찌된 건지 말이나 좀 해보거라. 내가 얼마나 잤지?”
“사흘 정도 주무셨어요.”
몸 상태는 나쁘지 않다.
상처는 이미 치료됐다.
늑대 냄새가 나는 걸보니 이곳은 사월랑의 거처인 모양.
그렇다면 그녀의 죽음도 알았을 터.
“장례는 잘 치렀더냐.”
“아…. 네. 이런저런 일이 많았어요.”
산군은 한동안 초아의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주억였다.
탈을 습격하려던 궁비호와 오귀는 역으로 당해 대부분 살아남지 못했다.
오귀와 그 수하들은 단숨에 목이 날아갔고, 궁비호 또한 죽음을 면치 못했다.
환망은 단숨에 지모사들마저 뿌리 뽑아 멸문지화시켰다고 한다.
그 후, 탈은 대부분 망가진 고선을 신통으로 복구하고 있다.
탈에 관한 건 여기까지.
“서방님을 도왔다던 그 여인의 장례는 삼일 밤낮으로 이어졌지요.”
수백의 늑대들이 모여 금색으로 물든 장례는 가히 장관이었다고 한다.
“어디 가세요?”
“가봐야 하지 않겠느냐.”
그녀의 죽음에 책임이 없지 않다.
몸져누웠을 때는 몰라도, 일어났으니 가봐야 함이 도리에 맞다.
초아는 우물쭈물 거리다 산군을 따라 나섰다. 그 또한 하고픈 말이 많았으나 우선해야 할 일이 있다.
석실을 나와 주변을 신식으로 살피자 사월랑의 육사들이 언뜻 보였다.
모두 전과 달라진 것 없어 보였으나 그 얼굴에 웃음기는 없었다.
그들 하나하나와 인사를 나누며 길을 나아갔다. 하늘은 맑고 바람은 선선했으나 거리는 적막만이 감돈다.
걸음걸음마다 그를 바라보는 눈길이 느껴졌다. 그 눈길을 모르지 않다.
그것을 감내하며 궁전 같은 누각에 들어서니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륜이 고개를 숙였다.
눈가가 붉다.
산군은 모른 척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어디 있나.”
“이쪽으로”
발걸음이 무거웠다.
그녀에게 가는 한걸음 한걸음이 이토록 무겁게 느껴졌다.
천근만근한 걸음을 묵묵히 옮겨 수풀을 지나자 굳건한 나무들이 하늘 높이 솟아 있는 곳으로 당도했다.
겨울인데도 불구하고 이곳만큼은 초록이 푸르렀다. 그곳엔 작은 아이하나가 뒷짐을 쥐고 있었다.
“오셨는지요.”
사월랑의 수장 금명옥서였다.
“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 속이 어찌 멀쩡할까.
일족을 끔찍이 여기는 사월랑이다.
게다가 그녀는 옥서의 딸.
억장이 무너져도 수십 번 무너졌을 것이리라.
“본족은, 화장하여 남은 뼛가루를 이 소귀나무에 넣습니다. 나무는 뼈를 먹고 자라 열매를 맺는데 그것을 양매라 부르지요. 달고 시큼하여 맛이 아주 좋습니다. 그것으로 담금주를 만들어 먹으면 그만한 명주도 없지요.”
“그렇습니까.”
“예. 이미 지수의 뼈를 머금고 초목이 이리 자랐으니 올 봄에는 열매를 맺을 겁니다.”
생소한 장례법이었으나 산군은 왜 저런 장례를 치르는지 알 것 같았다.
양매로 담금주를 만들어 그녀의 기일마다 술잔을 기울인다.
그것으로 죽은 자들을 잊지 않으려 만들어진 전통이겠지.
“추한 꼴을 보였습니다. 원체 여식 앞에서는 말이 길어지는지라.”
“아닙니다.”
옥서는 나무를 한동안 쓰다듬었다.
그녀가 깃든 소귀나무를.
“그럼 이제 들어봐도 되겠습니까. 제 여식의 마지막을.”
“예.”
작게 숨을 토한 산군이 말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여행길.
처음부터 끝까지 뭐 하나 빼놓지 않고 말했다.
그리고.
마지막에 자신을 위해 희생한 것까지.
모든 걸 들은 옥서는 한참을 잠자코 있다 고개를 들었다.
“혈붕수와 맞바꾼 꼴이 되었군요.”
산군은 품에서 혈붕수를 꺼냈다.
그것을 미련 없이 그에게 건넸다.
옥서는 여러 감정이 깃든 눈으로 혈붕수를 바라보다 품에 넣었다.
“천수일기겁은 언제든 말씀하세요.”
그는 그것을 끝으로 사라졌다.
그 뒤.
뒤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륜이리라.
어릴 적부터 함께했다 들었다.
그 슬픔이 어찌 작으랴.
산군은 침묵했다.
묻고 싶은 게 많았다.
듣고픈 것 또한 많았다.
그러나 입을 열지는 않았다.
그저.
가슴에 묻었다.
* * *
하루가 지나고 다시금 석실로 돌아온 산군은 바쁘게 지냈다.
요호에게서 받은 영약을 선단으로 만들기도 해야 했고, 그동안 내버려뒀던 만삼과 태양화리 부부의 수행을 지도해주기도 했다.
무언가에 쫓기는 것 같은 행보였다.
초아는 불만이 가득했으나 일단은 기다리기로 했다.
그날 밤.
“화란.”
“예”
“언제부터냐.”
“무슨 말씀이신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말투였다.
그러나 산군은 단호했다.
“그럼 얼마나 남았느냐.”
화란의 아미가 좁혀졌다.
“어찌 아셨습니까.”
“내가 모를 리가 없지 않느냐.”
화란은 복잡한 심경이었으나 티내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었다.
“붕계가 완전히 열렸을 때. 산군과 제 연결점이 흔들렸습니다. 그때부터일 것입니다.”
언젠가는 이러리라 생각했다.
창귀는 귀신이다.
귀신은 그릇이 없는 존재.
영원불멸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애초에 창귀는 사람을 홀려 범에게 인도하는 흉귀이니.
“앞으로…. 길면 10년입니다.”
길다고도 말할 수 있으나 천년이 넘는 세월을 살아갈 산군에게는 짧디 짧은 기간이다.
짐짓 얼굴을 굳힌 산군은 공정강에서 작은 향로를 꺼냈다.
“이게 무엇입니까.”
“궁비호의 대장로에게 건네받은 것이다. 보물 중에서도 혼을 가두는 것은 많지만, 그것을 보호하고 보전하기 위한 것은 많지 않다.”
언젠가는 올 일이다.
그 시일이 빨라졌을 뿐.
산군은 향로에 손을 얹고 물었다.
“100년.”
화란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100년만 이곳에 들어가 있거라.”
향로는 그것을 가능케 한다.
그리고 100년이면 방책을 찾기에는 충분할 것이다.
“잠시 자다 나오면 된다.”
“…싫습니다.”
왜 그러는지 물으니.
“또 무리를 하실 게 뻔합니다. 전 이미 오래 살았습니다. 이대로 윤회의 길에 드는 것 또한 나쁘지 않지요. 혹시 압니까. 후에 전생한 저와 산군이 다시 만나게 될지.”
그럴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가 행하려는 것보다는 그런 만남이 더 나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잃고 싶지 않았다.
“너의 주인으로 명한다.”
들어가라.
그 작은 울림이 퍼진 순간.
화란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향로로 빨려 들어갔다.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는 억제력.
산군은 처음으로 화란에게 명했다.
“다시 만나면 뺨을 때리겠습니다.”
“얼마든지.”
화란은 연기처럼 사라졌고 산군은 한숨을 내뱉었다.
해야 할 것이 너무도 많다.
만성독염, 궁비호, 화란, 그리고 영결 후경에 이르러 천수일기겁까지.
“그 아이와도 이야기를 해야지.”
묵묵히 기다리고 있을 그녀.
백련과도 같은 아이.
초아.
“저 부르셨어요?”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초아가 퍽 얇은 소복을 입고 그 앞에 멀뚱히 서 있었다.
항상 올려 묶던 머리칼도 풀었다.
허리까지 오는 새하얀 머리칼이 은은하게 빛나는 것 같았다.
“술상을 좀 봐왔는데….”
산군의 눈매가 좁혀졌다.
이상하게 볼이 붉었다.
한 겨울인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