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ll of the Spear RAW novel - Chapter (84)
낭선기환담-83화(84/600)
낭선기환담 – 83화
산군이 지내는 석실에는 방이 많다.
그 중에는 만삼이가 지내는 약초원도 있고, 태양화리가 지내는 연못도 있을 뿐더러 탐화오공, 삼척귀동마, 연단실 등등 사월랑의 편의에 방이 아주 많은 봉우리 중 하나에서 지내고 있다.
때문에 침소로 쓰는 곳 또한 널찍한 공간에 이름 모를 영수의 거대한 모피가 깔려져 있다.
인간이라면 검소하게 적당한 크기의 방을 주었을 테지만 산군은 범이다.
집채만 한 범이니 석실의 크기 또한 방대하기 짝이 없었다.
그렇다.
굉장히 넓은 공간.
그곳에 초아가 몸을 뉘인다 하여 부족할 공간이 있을 리 없다.
있을 리가 없었다.
아무튼.
산군은 초아가 가져온 술상을 보며 입을 꾹 다물었다.
가벼운 옷차림으로 술상을 가져온 연유가 무엇이겠는가. 아무리 그가 둔하다지만 이리 노골적으로 나오니 차마 모를 수가 없었다.
‘난감하군.’
이내 산뜻한 향기가 산군의 코를 찔렀다. 목욕까지 한 모양이다.
“드, 드세요.”
빛깔 좋은 주안상을 한참동안 물끄러미 바라보다 젓가락을 집었다.
안줏거리가 제법이다.
빛깔고운 경단부터 시작해 육포, 어포, 곶감에 식혜까지 있다.
술병을 잡아 향을 맡으니 썩 나쁘지 않다.
“백화주에요.”
온갖 꽃을 백가지 정도 말려 술을 빚어 만든다는 백화주였다.
산군이 향에 취해 미소 짓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얼굴을 굳혔다.
‘혼례를 올릴 때 나눠 마시는 술이 백화주 아니던가…?’
단숨에 산군의 낯이 떨떠름해졌다.
“한잔…. 따라드릴게요.”
“어? 어, 어어….”
쪼르륵.
얼떨결에 술잔을 받아들었다.
술잔에 비친 제 얼굴이 상당히 꼴불견이었다. 이리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었나 싶어 뺨을 어루만졌다.
“왜 그러세요?”
“아…. 아니다.”
공교롭기 짝이 없다.
어릴 때는 무시하면 그만이었다.
허나 이제는 다소곳한 여인네의 모습으로 저리하니 어색해 죽겠다.
면박을 줄 수도 없고.
‘모르겠다.’
따라줬으니 한잔 마시고 물꼬를 틀어야 한다. 술을 넘기니 꽃향기의 향취가 가득해 미소가 번졌다.
“이것도 잡숴 보세요.”
그때 초아가 전 하나를 집었다.
그것을 산군의 입으로 가져가려다 눈이 마주치자 화들짝 놀라며 접시에 내려놓는다.
산군은 가만히 전을 보다가 술잔을 내려놓고 한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엄지와 중지로 관자놀이를 눌렀다.
이게 지금 뭐하는 짓인가 싶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더냐.”
“예?”
“아니, 주안상을 가져왔기에.”
“아아….”
초아는 손을 꼼지락거리며 말했다.
“꼭… 한번 해드리고 싶었어요.”
미소 짓고 있으나, 그 미소가 왠지 모르게 사연 있는 듯 서글퍼 보였다.
“서방님이 눈 감으셨다 착각했을 때는 제가 너무 어렸습니다. 그랬기에 해드린 것 또한 아무것도 없었지요.”
받은 것만 한 가득이었을 뿐.
그리 중얼거린 그녀는 품에서 새하얀 비녀 하나를 꺼냈다.
그가 선물한 도모잠이었다.
“제게는 그것이 후회였고, 미련이었으며, 종국에는 한이었습니다.”
초아는 그윽하게 산군을 바라보다 다시금 술병을 들어 술을 따랐다.
“허나, 이제 그 한도 사라졌네요. 정말… 정말 다행입니다.”
살아 있으셔서.
‘내가 죽은 줄 알았구나…. 그래. 화란이 만든 것을 보았던 게야.’
하기사.
이상하다면 이상했다.
후에 만난 초아는 사람이 완전 바뀐 것처럼 행동했었으니까.
다른 사람처럼 바뀐 초아를 보며 세월의 야속함을 느꼈건만, 그것이 전부 자신 탓이었다니 씁쓸하기 그지없다.
그제야 초아가 고선에 당도한 연유가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모종의 이유로 자신이 살아있음을 깨닫고 찾으러 왔다 귀음나찰에게 잡힌 것이리라.
“한번 불러주실 수 있을까요.”
“무엇을?”
“제…. 제 이름을요.”
불현듯 바라본 그녀의 눈가에는 물기가 촉촉이 감돌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빙궁에서는 초아가 아닌, 백련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다.
문파에 입문해 새로이 이름을 만든 것이야 흔한 일.
이름을 부르는 것 또한 어렵지 않다.
“초아야.”
“한번만 더.”
그게 그렇게 좋을까.
제 이름을 자신이 불러주는 게.
“초아야.”
“네…!”
그녀는 끝내 눈물을 보였다.
또르륵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
그러나 초아는 더 없이 기뻐보였다.
“초아가 고생이 많았구나.”
“예.”
초아는 울먹거리며 산군에게 안겼다.
“더 불러주세요.”
불러주는 거야 아주 쉽다.
근데 좀.
“그만 좀 달라붙어라.”
품으로 파고들다 못해 놓아주지 않을 기세다.
“이제껏 떨어져 있었는데….”
“아니…. 어, 그래.”
등을 토닥여주자 기분이 좋은지 얼굴을 가슴팍에 부빈다.
“그리 좋더냐.”
“당연하죠….”
그리 말하더니 얼굴을 마주본다.
“서방님은 싫으신…가요?”
싫지는 않다.
그러나 조금…. 애매했다.
코흘리개도 아니니, 초아의 언동이 어떤 감정으로 저리 되는지는 모를 수가 없었다.
‘부담스럽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랬다.
어린애가 뭣 모르고 서방님이라며 쫄랑쫄랑 따라다닐 때면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성숙한 여인이다.
어찌 안 그렇겠는가.
게다가 산군은 100년 간 여인과 인연이 별로 없었다.
화란과 부대끼고 살았다지만, 그것과 이것이 같을 리 만무하다.
“아니.”
하지만 어찌 대놓고 싫다하겠는가.
초아는 십년이 넘는 세월동안 자신을 그리워하며 살아온 아이다.
게다가 이곳이 어디 평안한 세상이던가. 온갖 계략이 난무하고 말 한마디로 인해 목이 날아가는 곳이다.
그런 곳에서 여인네 몸으로 이리 성 장하여 자신을 찾아왔는데 사내된 자로서 어찌 모른 척 할까.
“다행이에요. 혹시나 절 내치시면 어찌해야 하나 노심초사 했답니다.”
“…그래.”
답을 하자고 했는데, 막상 때가되니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자, 해드릴 이야기가 많습니다. 어서 한 잔 더 드시지요.”
“음…. 그래.”
술잔을 나누다보면 어떻게든 되겠지.
그 뒤로 그 둘은 도란도란 앉아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자신이 어찌 빙궁으로 가게 됐는지부터 백산을 지키고 있는 연아까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술은 곧 바닥을 보였고, 배가 부르니 잠이 솔솔 몰려왔다.
얼큰하게 취한 산군이 드러누웠다.
술상을 치운 초아가 슬쩍 그의 팔을 베고 누웠다.
“정말 꿈만 같습니다.”
아직도 믿기지 않는 모양이다.
옷자락을 꼬옥 잡으며 안긴다.
나이가 먹었어도 어찌 이리 젖먹이마냥 안기는 걸 좋아하는지.
산군은 크게 숨을 뱉었다.
술기운이 올라왔다.
그러나 해야 할 말은 해야 했다.
“네가 살 날이 앞으로 얼마더냐.”
“비선의 수명이 500년이니 별탈이 없다면 그 정도 살겠지요.”
500년.
범인들에겐 가히 헤아리기도 어려운 숫자의 세월.
하지만 영수들에겐 고작이라 불리기도 하는 세월이었다.
“난 이곳에서 영명에 오를 것이다. 인간으로 치면 환선과 동급이지. 그리 된다면 내 수명 또한 기하급수로 늘어나 2000년의 수명을 얻게 된다.”
500년과 2000년.
그 차이는 굳이 헤아리지 않아도 안다.
초아는 동공이 정처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영수의 수명이 그리 긴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그, 그럼 저도 열심히 수행해서….”
“만약에. 정말 만약에 네가 지선이 된다면 나와 엇비슷한 수명을 갖게 되겠지.”
지선은 3000년의 수명을 지녔다고 들었으니 얼추 맞을 테지.
“허나, 내가 언제까지 영명에 있으리라 생각지는 말거라.”
정말 지선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가 지선이 될 때까지 산군이라고 가만히 있겠는가.
그의 목표는 영원에 올라 신수가 되는 것이다.
초아가 지선이 되고, 산군 또한 영원의 육사가 된다면 그 수명의 차이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다.
그녀가 혼아혈이라 해도 마찬가지.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어느 누가 천수를 누리겠느냐마는…. 너는 나보다 일찍 죽게 되겠지.”
그것이 두렵다.
초아의 외모는 선녀라 불리어도 아깝지 않은 절세미인이다.
게다가 그 심성은 또 어떤가.
비단결처럼 곱기 짝이 없다.
그런 아이가 자신을 향한 마음이 이리 각별하니 어찌 좋지 않으랴.
하지만 그녀는 인간.
자신은 영수.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것이 인생이라지만 그래도 자신의 수명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에는 크나큰 차이가 있다.
그것이 배우자에 대한 거라면 더더욱.
“하, 하지만…!”
“그래. 얼마 후 난 천수일기겁을 받아 영명으로 진수명화를 시도한다. 인생사 어찌 될지 모르는 것이니 내가 심마에 휩싸여 죽을지도 모르고, 다른 영수들처럼 진명수목이 되어 덧없이 생을 마감할지도 모르지.”
인간과 달리 영수는 목숨을 건다.
진수명화의 실패는 죽음뿐.
“어, 어찌 그리 급하게….”
“할일이 많다. 그리하여 내게는 힘이 필요하고, 어쩔 수 없이 떠돌아다녀야 하니 내 반려가 되는 이는 참으로 고단할 것이다.”
애초에 답은 정해져 있었다.
그것을 망설인 것에 지나지 않다.
이제는 그 답을 내려야 할 때.
산군은 가만히 기다렸다.
일다경이 지나고, 일각이 지났을 때.
초아가 스르륵 상체를 들었다.
“그것 아십니까.”
“무엇을?”
“대도를 나아가는 도사들은 저마다 성을 버리거나 하지요.”
그것은 산군도 익히 알고 있다.
속세를 버리고 수행에 매진하여 신선이 되기 위한 길을 가기 위해서다.
“본래는 그런 연유입니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 또한 있지요.”
“뭔데 그리 뜸을 들이더냐.”
초아는 쓰게 웃으며 자신의 배를 두 손으로 감싸 안았다.
“도사들은 입문과 동시에 몸속의 독기를 배출합니다. 그 이후에는 수행하며 몸을 관조하고, 식사 또한 철저히 관리 받아 온전히 그릇으로 만들지요.
그렇기에 남성은 씨를 뿌릴 수 없게 되고, 여성 또한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이 됩니다.”
술이 확 깨는 듯 했다.
영수는 전혀 관계없는 이야기다.
하지만 인간은 다른 듯 했다.
초아는 쓴웃음을 삼켰다.
“아이도 낳지 못하는 여인을 무슨면 목으로 받아 달라 하겠습니까.”
“…….”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산군은 도통 이해하기 어려웠다.
초아의 말은 이상했다.
자신은 여인으로서의 가치가 없다는 듯 말하면서도 여전히 눈빛은 영롱했고, 얼굴에는 홍조가 감돌았다.
“그러나 이 또한 신선이 된다면 모두 상관없는 일이지요. 우화등선하여 진정한 여선이 된다면 아이를 가지는 것 또한 가능하다 들었어요! 그리고 서방님께서 걱정하시는 것 또한 신선이 되면 불로장생하게 되니 걱정할 것이 전혀 없어요!”
산군의 머리 양 옆에 손을 짚은 초아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의 말대로 신선이 된다면 고민할 필요가 없는 문제들이긴 했다.
하지만 그게 어디 쉽던가.
고선의 일인자인 환망선사도 그것을 목전에 두고 올라가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신선이 된다하여도 선계에는 선계만의 법칙이 있고 세력이 있다.
‘신선과 신수의 아이는….’
어쨌든 모든 것은 신선이 돼야 한다.
“전 신선이 될 것입니다. 반드시 여선이 되어 보일 거예요! 그러니 서방님도 신수가 되어 불로장생하시면 돼요!”
“아니, 잠깐만! 오, 옷고름은 왜 푸는 것이냐! 자, 잠시만!”
화들짝 놀라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밤은 길고도 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