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ll of the Spear RAW novel - Chapter (85)
낭선기환담-84화(85/600)
낭선기환담 – 84화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난 산군은 새근새근 자고 있는 초아를 뒤로한 채 나섰다.
석실 바깥에는 누더기를 뒤집어 쓴 사내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일 입니까.”
“전해줄 것. 그리고 당부할 것이 있어 왔소.”
마침 잘 됐다.
그렇지 않아도 찾아갈 셈이었다.
“장천 도사. 안 그래도 내 찾아가 보려 했는데 잘 됐습니다.”
“그렇습니까. 일단 이것부터.”
휙, 던지는 돌덩이를 받아든 산군은 고개를 갸웃하다 눈매를 좁혔다.
“이건?”
“만성독염의 잔재를 석화시켰습니다. 그것으로 놈의 위치를 알 수 있겠죠.”
아마도 산군의 체내에서 뽑아낸 독염이리라. 이것으로 놈을 추적할 수 있으니 나쁠 것 없다.
“헌데, 찾아오려 했다고요. 육사와 저희가 그리 돈독한 사이는 아닐진대.”
뼈가 있는 말이었다.
저번에 자신을 이용한 것을 염두에 두고 있는 듯 했다.
산군은 사람 좋은 웃음을 흘렸다.
“하하, 지난 일은 지난 일이니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마시지요.”
“원래 당한 놈은 기억이 오래가죠.”
소심한 놈이로다.
허나 아쉬운 건 자신이니 어쩌랴.
쓰게 웃고 있자 콧김을 뱉은 장천이 물었다.
“그래서. 용건이 무엇입니까.”
* * *
“식마합일에 관한 자료를 말입니까.”
“예.”
식마합일.
그것을 이룩한 자료만 손에 쥐어진다면 여러모로 쓰일 곳이 많을 터.
산군이 식마합일을 이룰 수는 없으나 그와 관련된 비술을 창안하는 발판이 되어줄 수는 있을 것이다.
영수의 신체를 보패화 했던 이름 모를 마사처럼.
하지만 장천은 영 미심쩍다는 눈으로 그를 향한 의심을 지우지 않았다.
“불허합니다.”
미간이 절로 좁혀지는 답변이다.
하지만 티내지 않았다.
“연유를 알 수 있을런지요.”
“그대는 대법주께서 주시하는 육사입니다. 작게는 고선의 혼란을 야기할 것이고, 크게는 도계에 피바람을 몰고 다닐 것이라 말하셨습니다.”
“그렇게까지 말할 것까지야….”
빌어먹을 노인네.
“아무튼 전 못들은 것으로 하지요.”
난감하기 이를 데 없다.
시마한일 관련 구결을 얻는다면 그도 하여금 영결 후경에 이르는 시간이 좁아질 것이 자명한 바.
단연코 쉽사리 포기할 수 없다.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고 자시고 할 것 없지요.”
자신만만한 태도다.
산군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탈의 대법주님과 조건을 걸었지요. 첫째는 만성독염을 처리하는 것이고, 둘째는 고선을 벗어나는 것입니다.”
“빨리 나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속을 긁으려는 건지 웃는 낯으로 독설을 날려댄다. 하지만 산군이 누군가.
“한데 공교로운 일이 있지 뭡니까.”
“…무엇이 말입니까.”
“대법주님께서 딱히 시일을 정해놓지 않으셨지 뭡니까. 그래서… 이곳에서 영명에 올라 나갈까 하는데 그 시일이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약조를 이행하는 것도 늦어질 테니 말입니다.”
장천의 얼굴이 와락 찌푸렸다.
“대법주의 화를 불러 좋을 것이 없을 겁니다. 육사께서는 부디 경거망동 마시기를 격언하지요.”
“저도 그러고 싶습니다만…. 방금 도사께서 거절하신 식마합일이 없으면 어쩔 수 없지 않겠습니까? 제 경지가 이제 영결 중경인데…. 어느 세월에 영명에 오르게 될지 모르겠군요. 하하.”
산군은 빙글빙글 웃었다.
하지만 장천은 화를 눌러 담는 듯 입을 우묵하게 다물었다.
“그것뿐이면 다행일까요. 전 어쩔 수 없이 고선 이곳저곳을 나다니며 수행에 힘써야 할 테니…. 아아, 이것 참. 공교롭기 짝이 없습니다.”
불난 집에 부채질이 이것일까.
속으로는 내심 통쾌해하며 겉으로는 정말 아쉽다는 듯 한숨을 푹 쉬었다.
“…대법주께.”
“설마 탈의 부법주께서 고작 마도 놈들의 비술 같은 하찮은 것으로 대법주님을 귀찮게 하진 않으시겠지요.”
혹여 나올 말조차 잘라버렸다.
이런 것을 두고 외통수라 하던가.
장천은 한참을 고심하다 이를 악물고 긍정의 뜻을 내비쳤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수월하게 정진할 수 있겠습니다!”
이제 그와 친분을 쌓는 것이 어렵겠다 생각하면서도 가슴 한 켠이 상쾌해지는 것은 막지 못했다.
* * *
수일 후.
산군은 식마합일과 관련된 문서를 건네받으며 어느 지하로 내려섰다.
임시로 만들어둔 죄인들이 수감되어 있는 곳이었다.
많은 이들이 있었으나, 대개 보름을 넘기지 못하고 죽어버렸다고 한다.
“대법주께서 직접 금제를 걸어놓았기에 허락된 자 이외에는 영력이 동결되고 사지가 서서히 굳어갑니다. 그렇기에 자결하거나 시름시름 앓다가 죽는 이들이 태반이지요.”
환망의 신통과 관계가 깊은 금제인 듯 보였다.
신기해하며 안내하는 곳으로 다다르자 거대한 범 한 마리가 보였다.
한 쌍의 날개는 부러졌는지 꺾여 있었으며, 피로 물든 가죽은 보기만 해도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야말로 처참한 몰골.
상처 입은 짐승은 잔뜩 웅크려 있었으나 눈만큼은 아직 살아 있었다.
“이리 빨리 만나게 될 줄은 저 또한 몰랐습니다. 요호”
그녀는 궁비호의 대장로 요호였다.
‘본래라면 죽었겠지.’
환망에게 궁비호의 계략에 대한 언질을 주었을 때 한 가지 당부한 것이 있었다.
대장로 요호.
그녀를 죽이지 말아달라고.
다행히 환망은 그의 부탁을 잊지 않았고, 덕분에 그녀만 살아남았다.
제 오라비도, 일족도 모두 잃은 채로.
[당신입니까.]돌연 그녀가 말했다.
산군은 옆에 자리한 장천을 보았다.
장천은 이내 자리를 비켰다.
[어째서 저만 살려두는 것인지 의아하던 참입니다. 다른 일족들에 대한 본을 보이려 살려둔 것인지 무엇인지 헤아려 보려 했으나 모르겠더군요. 한데…. 당신이었어.]“처지가 퍽 딱하다만 저는 잡담을 나누러 온 것이 아닙니다.”
이러쿵저러쿵할 시간은 없다.
“제게 회천각고를 준 연유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을 묻고자 왔습니다.”
물론 장충지태에 관한 것도 물을 수 있었으나 그것을 준 의도는 알 수 있으니 묻지 않는다.
다만 걸리는 것은 회천각고.
그 호의에 대한 연유.
그것이 궁금할 뿐.
[그것 때문에 절 살리셨습니까.]“무슨 소린지 모르겠군요. 당신이 죽지 않은 건 환망선사가 손속을 보아준 것 때문이겠지요.”
시치미를 뒀으나 요호는 대강 알겠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묻고 싶은 것이 많으나 일단 그에 대한 답변을 드리죠.]잠시 생각을 정리하는 듯 눈을 감은 요호는 그윽하게 눈을 치떴다.
[저희 시조께서는 오래전 두 쌍의 날개와 한 쌍의 뿔을 지니고 있었지요. 그러나 세대가 교체되면 될수록 두 쌍이었던 날개는 한 쌍이 되었고, 굳건한 뿔은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지금 제 모습을 보면 쉬이 알 수 있겠지요.]그녀의 말대로다.
마지막 남은 궁비호인 그녀에겐 뿔도 없었으며, 두 쌍의 날개도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뿔을 지닌 범인 당신께 회천각고를 드린 겁니다.]“장충지태도 주고 말이죠.”
한껏 비꼬는 투였으나, 그녀는 쓰게 웃을 뿐이었다.
[변명하지 않겠습니다. 장로들은 각기 다른 의견을 피력했고, 저는 결단을 내려야 했죠. 고민하던 저는 결국 둘 모두를 드렸고 그뿐인 이야기입니다.]석연찮은 답변이었다.
하지만 이해되기도 했다.
선조의 뿔을 잃어버린 일족.
그리고 그와 관련된 통술을 배울 수조차 없으니 그럴 만도 했다.
잠깐 익혀 사용한 회천각고의 성능은 직접 확인해 봤으니.
‘상대가 좋지 않았지만.’
[만일 당신이 살아 돌아온다면 납작 엎드려 사죄를 빌고 그에 합당한 죗값을 받을 생각이었습니다. 그랬기에 한 번 찾아와 달라 했던 것이고요.]이제야 대강 이해가 된다.
“제 뿔을 원했군요. 그렇다고 뿔을 뜯어 달라 청할 것도 아닐 테고…. 결국 절 종마로 부릴 샘이었습니까?”
결국 자신들 일족을 위해 씨를 뿌려 줬으면 했다는 이야기.
어처구니없음이 당연하다.
[설마요. 그 정도로 무례한 일을 요구하지는 않습니다.]“정략혼을 요구하였겠군요.”
[예. 책임을 지고 제가 육사의 씨앗을 품으려 했습니다.]“…예?”
낯부끄러운 말을 서슴지도 않는다.
역시 수천 년을 살아온 영수답달까.
“크흠. 그렇군요.”
[이래보여도 처녀의 몸이니 육사께서도 나쁠 것 없지요. 씨를 주는 것만으로 호사를 누릴 수 있었으니!]하지만 그 또한 옛말.
호위익잔은 불타버렸다.
궁비호는 씨가 말랐고.
마지막 생존자는 그녀뿐이다.
[대호 육사.]“뭡니까.”
[전 아직 포기하지 않았습니다.]눈빛이 형형했다.
포기하지 않았다.
그것은 복수에 대한 것일까.
아니면 씨앗에 대한 것일까.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다.
어쨌거나 이야기가 빨라서 좋다.
“무엇을 줄 수 있습니까.”
[선조가 창안한 다른 비술이나 숨겨 둔 보물 또한 많습니다.]그것 참 흥미로운 소리로다.
[혼수라 생각하고 모두 드리지요.]* * *
결과적으로 요호는 자유가 됐다.
산군은 궁비호의 비술을 모조리 습득할 수 있어 좋았고, 그녀로서는 자유의 몸이 되어 좋았다.
게다가 후일을 도모할 수도 있게 되었으니 서로 나쁠 것 없다.
받을 거 다 받았으니 알아서 갈길 가자고 했으나 요호는 받아들이지 않았고 산군의 곁에 머물렀다.
영겁의 육사가 곁에 있어서 나쁠 것 없었으나 눈총이 따가웠다.
“사내가 풍류를 즐긴다하여 흠이라 할 수는 없죠.”
아무렇지 않다는 말치고는 그 얼굴이 한겨울 연못처럼 얼어붙어 있었다.
산군은 묵묵히 옥간에 적힌 비술 구결을 해석했다.
“한데 그 분은 이상한 말씀을 하시더군요. 씨가 어쩌고 하며 말이죠.”
“헛소리니 신경 쓸 것 없다.”
“그렇죠?”
“그래.”
여인네 마음이라는 것이 저렇다.
항상 확인 받고 싶어 한다.
산군은 귀찮은 기색 없이 종달새마냥 조잘거리는 초아의 말에 답했다.
옥간을 들여다보며 고개를 끄덕이면 초아는 다시금 재잘거린다.
대부분 두서가 없는 말이요, 대답을 바라지도 않았다.
둘은 도란도란 해가 지는 것을 보고, 해가 떠오르는 것을 보았다.
초아는 그것으로 만족하는 듯 미소를 주렁주렁 매달며 지냈다.
얼마나 그리 지냈을까.
“이제 기다릴 만큼 기다렸습니다.”
요호가 나타나 소리쳤다.
“무엇입니까.”
초아는 팔짱을 끼우며 말했다.
둘 사이가 썩 좋지 않은 모양이다.
“언제까지 아까운 씨를 내다 버릴 겁니까. 선자는 잉태를 하지도 못하니 효율적인 관계를 위해서도 저를 우선적으로 품어 주시지요.”
“내, 내다 버리다니요!”
초아가 사납게 일갈했다.
틀린 소리는 아니다만 대놓고 들어서 듣기 좋을 소리도 아니다.
“하루 빨리 후사를 만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더군다나 부인께서는 잉태하지 못하시니 당연 부군의 씨를 제게 쏟는 게 도리에 맞지요.”
아직도 저 얘기를 할 줄이야.
포기를 모르는 여인이다.
“흥, 서방님께서 그대를 침소를 찾지 아니하시는 건 다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것을 가지고 이리 따져 물으시면 안되지요.”
자신의 미색이 부족한 것은 아니냐는 소리.
“설마요. 지금은 그 빛을 잃었으나 호위익잔이 번성하던 날에는 제 모습을 한번 보고자 천리길을 마다않는 사내들이 줄을 섰었습니다. 더군다나 같은 범이신 부군께서도 다르지 않으시겠지요. 게다가 부군도 겉으로는 내색치 않으셔도 아들을 보고 싶으실 겁니다.
제 어머니는 한 번에 열의 자식을 낳았으니 저 또한 정진하여….”
산군은 축지를 이용해 도망쳤다.
그녀는 퍽 매력적인 여인이었으나 그보다 우선해야 할 것이 많다.
첫째는 후경 최고봉에 이른 것이 먼저요, 후에는 영명으로의 발돋움이다.
모든 것은 그 이후의 문제.
수행에만 전념해도 될까 말까 한데 어찌 여색에만 빠져 있을 수 있을까.
이제 갖출 것은 대부분 갖추어졌으니 마음 놓고 수행에 힘써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