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ll of the Spear RAW novel - Chapter (87)
낭선기환담-86화(87/600)
낭선기환담 – 86화
사월봉이라는 봉우리에 자리한 산군은 주위를 슬쩍 둘러보았다.
그곳에는 100여 마리의 사월랑들이 제각각 천수일기겁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 곁에는 금명옥서와 그 처자식들 또한 자리했다.
다른 말은 필요치 않았다.
산군은 곧장 거대한 범으로 변해 진법 가운데에 자리했다.
‘혈향이 짙군.’
혈붕수로 그린 진이라 그런지 혈향이 꽤 짙었다. 특이하게 십이간지를 그려 놓은 독특한 진이었다. 진이라기보다는 그림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시작하겠습니다. 시작과 동시에 100일 간은 아무도 움직이지 못하니 유의하십시오.”
문득 하늘을 바라보자 날개를 펼친 요호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원망의 눈초리였으나 개의치 않았다.
“시작하라!”
때마침 천수일기겁의 준비가 끝났다.
100명의 사월랑이 인간 모습으로 낮게 울었다.
그러자 핏물로 그려진 진이 번뜩이며 거대한 진법이 발동됐다.
사월랑들은 하나같이 울음소리를 내며 영기를 흩뿌렸다. 처음엔 소음이었으나 듣다 보니 그것이 꼭 노랫소리와도 같아 마음이 점차 고요해졌다.
이내 몇 겹으로 둘러앉은 사월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원을 이루어 쉬지 않고 노래하며 규칙적인 발걸음을 자아내 공명했다.
점점 그들의 몸이 금색으로 빛나고 진법 또한 핏빛이 아닌, 금빛으로 빛나 찬란했다.
그러자 금명옥서가 품에서 기륭붓을 내던지며 수결을 맺었다. 기륭붓이 부르르 몸을 떨며 붓털이 사월랑 인원에게 쏟아졌다. 붓털 하나하나가 이내 갖가지 악기들로 탈바꿈되었다.
그들은 익숙한 듯 악기를 하나씩 손에 들어 연주하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신묘한 화음이 어우러진 연주가 벌어져 귀를 간지럽혔다.
그때였다.
금색 찬란한 진법이 빛나더니 그려져 있던 십이간지의 그림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열둘의 짐승들은 이내 영기의 형체를 가지고 허공에 떠올랐다.
그들은 천천히 선회하며 산군의 주위에 머물렀다. 그러자 산군의 털 색깔 또한 금빛으로 물들었다.
이내 그의 눈꺼풀이 덮였다.
내면으로 빠져드는 것이리라.
그것을 바라본 금명옥서가 고개를 주억였다.
“부디 경거망동 마시길. 일족의 부흥을 책임져야 할 테니 말이오.”
“흥.”
노파심에 경고했으나 요호는 콧바람을 뀌며 날개를 퍼득였다.
십이간지들은 그의 주위를 맴돌다 이내 하늘 높이 치솟았다.
여러 짐승들이 한데 어우러져 금빛으로 치솟으니 마치 용오름 같았다.
쿠르릉.
하늘로 치솟은 십이간지들로부터 먹구름이 몰려들어 하늘을 가렸다.
이내 천둥번개가 번쩍번쩍 내려쳤다.
“이제 자리로 돌아가라.”
옥서의 지시에 금색의 사월랑이 모두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러자 하늘이 조금 환해졌는데, 먹구름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이내 먹구름에서 금색이 발발했다.
콰르르릉!!
구름 속에 이름 모를 영수라도 사는 것 같은 굉음이 일었다.
그러나 사월랑의 늑대들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고개를 빳빳이 들었다.
어느새 손에 쥔 악기들은 다시 붓으로 돌아가 진법 사이사이에 꽂혀 있었다. 그러자 그들은 인간의 모습을 버리고 본신인 늑대로 돌아갔다.
콰쾅!!
뇌전 한 줄기가 땅으로 내려 꽂혔다.
그것은 사월랑 한 마리에 맞아 떨어졌으나 소리만 요란할 뿐이었다.
사월랑은 평온하게 눈을 감으며 뇌전을 받아들였다.
“익히 알고 있었으나 놀랍구나.”
요호가 중얼거렸다.
금명옥서는 한껏 가슴을 폈다.
사월랑이 자랑하는 천수일기겁.
그것을 목도하는 것은 수천 년을 살아온 요호라 해도 처음이었다.
놀랍지 않을 수 없었다.
뇌전을 맞은 늑대는 신들린 것처럼 현묘한 영력을 발산했고, 그것은 가운데에 있는 산군에게 흘려 보냈다.
“하루에 한 번씩 치는 뇌전. 그것이 100일에 달했을 때 완성되는 진법.”
“자질만 충분하다면 진수명화 확률을 최대 5할까지 올릴 수 있소. 이 진법을 고안한 선조는 참으로 대단하시지.”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
자질이 충분하다면 최대 5할.
그렇지 않다면 3할.
대단한 진법이기는 했다.
영결 영수 100마리를 모아 영명으로 이끄는 대진법이라니.
여기 모인 이들이 영결이 아니라 영명 100두였다면 영겁에 오를 때도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미약하긴 하겠지만.’
요호는 옥서를 흘기며 팔짱을 꼈다.
“내 아들의 아비가 될 자이니…. 나 또한 한 손 거들어주마.”
요호가 날개를 퍼득이자 깃털 수십 장이 사방으로 날아갔다.
이내 풍경이 흘러내리고 거대한 환진이 만들어졌다. 사월봉 전역에 짙게 운무가 깔렸으니 도사들이나 육사가 함부로 접근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하루, 이틀이 지나 100일이 되었다. 천수일기겁을 이루는 늑대들은 모두 금색으로 빛났으나 몹시 지쳐 있었다.
그때 마지막 뇌전이 100번째 늑대에게 내리꽂혔다.
콰르릉!
마지막 늑대에게 뇌전이 꽂히자 그와 공명해 금색 늑대들이 부르르 몸을 떨어댔다.
그때 뇌전을 전부 떨어뜨린 금색 먹구름이 폭포수처럼 떨어져내렸다.
산군에게 떨어져 내린 먹구름은 둥근 구를 형성해 그를 감쌌다.
“조금만 더 버텨라!”
빛이 점멸하듯 금색이 깜빡거리는 늑대 하나가 이내 탈진해 쓰러졌다.
한 놈뿐만이 아니었다.
순차적으로 하나씩 금색을 빼앗기는 것처럼 쓰러졌다.
그리고 이내 100마리 모두 금색을 뺏기자 진법이 번뜩였다.
우웅!
소리를 내던 금색 진법은 이내 핏빛으로 가라앉아 금색 구에게 흡수당하듯 빨려 들어갔다.
산군을 감싼 금색 구는 기묘한 핏빛 문양이 새겨진 채로 굳어졌다.
“후우- 수고했다.”
옥서는 꼼꼼히 점검하고는 지쳐 쓰러진 사월랑들을 내려다보았다.
“이제 됐나?”
불현듯 요호가 허공에서 나타났다.
“천운에 맡겨야지요.”
어찌 될지는 오직 하늘만이 알리라.
“앞으로 이곳은 어찌 지킬 테냐.”
“요호께서 지킬 것이 아닙니까?”
“뭬야?”
“딱히 할 일도 없으시지 않습니까.”
뻔뻔한 태도였다.
“흥, 꼬맹이가 그동안 능구렁이가 다 됐구나. 천둥벌거숭이처럼 날뛰던 게 엊그제 같은데 말이야.”
“그런 옛일은 잊어버릴 나이라 말이오. 그러는 요호께서도 적잖이 나이를 잡수셨는데…. 아직 100살 조금 넘은 은자를 반려로 생각하신다니 양심이 있으신 건지 모르겠소.”
비아냥대는 꼴이 익숙하다.
이전에도 몇 번 얼굴을 마주한 적이 있는 듯했다.
“꼬맹이가 뭘 모르나 보구나. 본디 여인이라는 것은 농익은 것이 새파랗게 어린 것보다는 맛이 좋은 법이지.”
요호는 그런 옥서를 비웃으며 한껏 교태를 부렸다.
허나 옥서는 아랑곳 않고 말도 안 되는 소릴 들었다는 듯 껄껄 웃었다.
“하하, 농익다 못해 불어 터진 것은 아닐는지…. 이거 참. 은자께서는 어쩌 다 늙어빠진 노괴와 엮여서는.”
“하! 지금 말 다했더냐?”
요호가 으르렁거렸다.
안 그래도 산군이 자신을 돌보듯 하여 자존감이 낮아져 있어 더 그랬다.
“할말만 했을 뿐이오. 애초에 그 나이까지 정조를 지켰다면서 농익은 것은 어찌 보여준다는 건지…. 나참.”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다. 틀린 말은 아니다.
수천 년간 혼례도 치르지 않은 여인이 알면 무엇을 안다 자신할까.
마침 잘됐다는 듯 옥서는 한껏 면박을 주며 놀려댔다.
영겁에 이르러 탈형(脫形) 한 탓에 어려진 외양도 한몫하며 요호의 심기를 어지럽혔다.
요호는 아랫입술을 베어물며 살기를 드러냈으나 옥서는 피식 웃을 뿐이다.
“그 나이 처먹도록 망나니 기질은 가시질 않았구나!”
“같이 처먹는 사이에 뭘 그럽디까.”
“곱게 처먹어야 하는 것도 있는 법이니라. 네놈이 어릴 적 호위익잔에 찾아와 고주망태가 되어 내게 보인 추태를 잊지는 않은 것이겠지? 그때 무어라 했더라…. 달도 어여쁜데 함께 달구경이나 하며 운우지정(雲雨之情)을 쌓아보자고 했던가?”
입가를 가리고 한껏 비웃자 옥서가 흠칫거리며 주변을 둘러봤다.
그곳엔 제 아비의 비밀을 엿본 듯한 옥서의 자식들이 쓰게 웃고 있었다.
“무, 무슨 헛소리를! 내가 언제 그런 소릴 했다고 그러시오! 에헴! 이, 이만 됐으니 내려가 보자꾸나. 너희들도 수고 많았으니 휴식을 취하거라!”
“어딜 도망가느냐?”
“도망이라니! 사월랑의 수장으로서 할 일이 막중할 뿐이오!”
큭큭 웃는 요호를 뒤로한 채 옥서는 이를 악물며 사라졌다.
모두가 사라지고 사월봉에 내려선 요호는 금색 구를 바라보다 그 앞에 자리를 꿰차고 앉았다.
“까짓거 몇 년이고 지키지요. 부디 제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지 말아주시길 바랍니다. 그대는 제가 쌓아올릴 초석이 되실 분이시니.”
요호는 겹겹의 환진과 금제를 걸어 철통같이 그 자리를 지켰다.
* * *
시간은 유수와 같이 흘러 30년이라는 세월이 눈 깜짝할 사이 지나갔다.
그동안의 고선에는 많은 일이 생겼으나 대체적으로 평온했다.
사월랑 또한 별반 다르지 않았으나, 그들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여인의 이야기가 퍽 흥미로웠다.
“벌써 30년 째라지.”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기도를 드리니 말일세.”
문지기를 서는 육사 둘이었다.
그들은 슬슬 올 때가 됐다며 중얼거렸는데 정말 누군가 다가왔다.
그녀는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전부 새하얀 여인이었다.
은자의 반려라더니 미색이 곱기가 사월랑 내에서도 수위를 다퉜다.
그뿐인가. 저리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찾아와 기도를 드리니 심성 또한 어여쁘기 짝이 없었다.
그녀는 문지기들에게 꾸벅 인사하고는 사월봉에 오르기 시작했다.
“날아가면 될 터인데.”
“그러니 지극 정성이라는 게 아닌가. 아침에 눈 뜨자마자 올라가 저녁이 되면 내려오는 짓을 30년이나 하니….”
이쯤 되니 인간을 좋아하지 않는 자들도 은자의 부인에겐 예를 다했다.
그 모습을 딱하게 여겨 금명옥서가 친히 비행 보패를 내주었지만 한사코 거절했다고 한다.
“뭐랬더라. 이리 하지 않으면 하루가 너무 길어 사양한다고 했던가….”
“하이고…. 은자께서는 빨리 좀 일어나시지 거참.”
산군의 편이었던 이들도 초아의 지극정성에 감복해 욕하기에 이르렀다.
문지기들이 그리 떠들어댈 때.
초아는 어느새 사월봉 정상에 올라 영패를 손에 들었다.
요호가 걸어둔 환진과 금제에 영향을 받지 않는 영패였다.
이내 운무 속으로 들어가니 날개를 지닌 거대한 범 한 마리가 보였다.
범은 가만히 엎드려 있었는데, 그녀가 나타나자 살며시 눈을 떴다.
[오셨습니까.]“예.”
둘의 대화는 길지 않았다.
그동안 친해질 법도 하건만, 그런 일은 일절 없었다는 듯한 태도였다.
초아로서는 눈엣가시 같은 여인이었으나 산군을 지켜주니 입 다물고 있는 것이고, 요호는 별 관심이 없었다.
초아는 산군이 있을 터인 금구를 하염없이 바라봤다.
무슨 말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바라보고.
또 바라봤다.
그렇게 해가 중천에 뜨고, 그것이 다시 산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하염없이 바라만 보았다.
그녀의 하루 일과는 이것뿐이었다.
수행을 하려고도 해봤으나 마음이 어지러워 그 조차도 어려웠다.
그렇기에 그녀는 30년이 지났음에도 아직 비선 중경에 머무르고 있었다.
제아무리 뛰어난 자질이 있다고는 하나 노력치 않으면 더뎌지기 마련.
애초에 한기를 다루는 통술 특성상 이곳에선 수행이 어렵기도 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그러시지요.]어느새 하늘이 어둑해졌다.
그럴 거면 이곳에서 지내라고도 말해보았으나 그녀는 말을 듣지 않았다.
그 이유가 짐작이 되기도 했다.
‘잠이라도 부군과 함께 했던 침소에서 취하고 싶은 거겠지.’
그가 남긴 복충이나 다른 복수들 또한 그곳에 자리하고 있으니.
요호는 쓸쓸한 그녀의 뒷모습을 보다 다시금 눈을 감았다.
하지만 그때.
돌연 초아의 발걸음이 멎었다.
그와 동시에 영기의 흐름이 발작하듯 분주해졌다. 요호가 화등잔만하게 눈을 치켜떴다. 허공에는 어느새 영기의 빛이 사방 천지에 떠올라 밤하늘을 밝게 빛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