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ll of the Spear RAW novel - Chapter (89)
낭선기환담-88화(89/600)
낭선기환담 – 88화
백산의 아래 펼쳐져 있는 작은 문파의 이름은 백해(白海).
그가 백산을 떠난 지 40년이나 지났으니 문파 하나쯤 생겼어도 그렇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충분히 그럴 수 있기는 한데….”
기이한 점은 영수들과 인간이 익숙한 듯 가까이 지낸다는 사실이다. 더군다나 백산을 중점으로 그리 되어 있으니 자못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혹시 몰라 장천을 바라보니.
“…보고를 받기는 했습니다. 백산을 중점으로 만들어진 백해라는 문파라고 하더군요.”
장천의 말대로 봉우리들 대부분에는 건물이 만들어져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중간 중간 누각이나 정자들이 만들어져 있기도 했다.
“직접 보시는 게 빠를 겁니다.”
산군은 일단 자신이 지내던 천호군으로 한 번 가보기로 했다. 자신이 거처로 삼았던 곳이기도 했고, 그 아이가 있다면 그곳에 있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그 생각은 백운봉에 내려서자마자 사라졌다.
“환진?”
그의 처소였던 천호군에는 가벼운 환진이 그 주변을 감싸고 있었다.
“이러면 조금 귀찮아지는데.”
산군이 미간을 좁히던 그때.
허공에서 메아리가 들려왔다.
[누가 감히 백해에 함부로 발을 디디는가!]이내 검 뽑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오고 발소리가 난무했다.
풍경이 기이하게 뒤틀리더니 불현듯 산군의 목에 검이 드리웠다.
햇빛에 반짝이는 검날이 섬뜩하기 그지없었다.
“정체를 밝혀라.”
어느새 갑주를 입은 열댓 명의 사내들이 나타나 살기를 내뿜었다.
“이놈들이 지금 누구한테…!”
초아가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무어라 하려는 찰나.
산군이 손을 들어 막았다.
“재밌네.”
검이 목에 드리워졌어도 입가에 호선을 그린다. 그 모습에 병장기를 든 사내들의 얼굴이 와락 찌푸려졌다.
“네 이놈! 무례하기가 하늘을 찌르는구나! 정체를 밝히지 않는다면 당장 네놈의 목을 잘라 죄를 물으리라!”
용맹한 기세요, 우렁찬 목소리였으나 슬기롭지는 않은 듯 했다.
“백산의 기세를 등에 업었다던 백해도 손님 대접은 변변찮은 모양이군. 그렇지 않고서야 우리를 이리 푸대접하지 않을 수 없을 텐데 말이야.”
그리 말하자 무사들이 주춤거렸다.
자신들이 모르는 귀한 손님이라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산군의 생각과 다르지 않은지 그들은 서로 눈알을 굴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피식 웃으며 목에 드리운 검을 툭 치자.
“헛!”
캉!
맑은 소리와 함께 검의 절반이 툭 부러져 튕겨나갔다.
“안내해라, 백해의 주인 앞으로.”
* * *
다소 검소하게 지어진 대궐.
그 안에는 사내 하나가 옥좌에 앉아 있었는데 옆에는 여인도 함께였다.
“그대와 함께 한 지도 얼추 30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내게 시집올 생각이 없소?”
멋들어진 장포를 입고 있는 사내.
그가 바로 백해의 주인.
우란이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시죠. 저의 협력을 호의라 생각지 마세요. 죽는 한이 있더라도 당신에게 시집갈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적색 치마를 입은 여인은 혐오감이 짙은 낯으로 그를 바라보며 일축했다.
하지만 사내는 익숙한 듯 호탕하게 웃으며 이죽거린다.
“벌써 40년 가까이 나타나지 않았다던데…. 그쯤이면 어디 가서 객사라도 한 것은 아닐는지 모르겠소? 이것 참. 그러면 나 또한 아쉬운데 말이야.”
그의 눈빛이 일순 사납게 바뀌었다.
“놈을 찢어죽이지 않으면 선조들의 원한을 풀 수도 없잖소.”
그는 옥좌의 팔걸이를 움켜쥐며 살기를 드러냈다. 그 날선 기운에 여인, 아니 연아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어리석은 짓을. 제 스승이 돌아온다면, 당신의 알량한 야욕이 만든 문파는 한낱 먼지로 산화할 것입니다.”
“그거야 모를 일이지. 나 또한 놈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으니.”
음흉하게 웃는 우란.
그를 못마땅하게 바라보던 연아는 침음을 삼켰다.
“나 또한 언제까지 기다릴 것이라 생각지 마시오. 그대가 부리던 복수들 또한 내 손아귀에 있으니.”
“그런 저급한 단어로 치부하지 마시죠. 그들은 제 전우입니다.”
“하, 인간이 영수와 전우? 지나가던 개가 웃지 않겠소?”
그럴지도 모른다.
인간과 영수의 골은 깊고 깊으니.
“그렇다 해도 저와 함께 싸우며 백산을 지키던 이들을 어찌 복수라 부를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언제까지나 제 전우일 것이며 가까운 벗입니다.”
“그런가? 그 잘난 전우가 그대의 발목을 붙들고 있을 뿐인데도?”
“그 또한 한순간이죠. 언제까지 그대가 이곳을 쥐락펴락할 수 있겠습니까.”
언뜻 보면 한 치의 물러섬 없는 대치였으나 그녀에겐 그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우란은 피식 웃고는 고개를 저었다.
“언제나 당신과의 담소는 퍽 재미있어 좋단 말이지.”
“담소라는 뜻을 잘못 알고 계시는 듯합니다. 저희는 웃고 떠든 적이 한순간도 없는데요.”
우란은 그저 귀엽다는 듯 허허 웃었고, 연아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지금은 강경하게 대하고 있으나, 그것이 언제까지 이어질 수 있을지는 모르는 법. 벌써 그가 백산을 장악한 지 30년이나 지났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오매불망 기다리는 백산의 주인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웬 개코같은 놈이 나타났으니 속이 오죽하겠는가.
더군다나 그녀는 그에게 백산을 지키라 명 받은 몸.
그것을 지키지 못했으니 극심한 자괴감에 몸부림쳐도 이상치 않다.
‘30년.’
그녀의 도움으로 도선에 올랐으나, 늘어난 수명으로도 30년은 결코 짧다 할 수 없다.
‘힘이 없는 게 언제나 한이구나.’
붓을 놓고 검을 잡았으나, 손에 쥔 검은 여전히 초라하기만 하다.
‘초라한 것은 검인가, 나인가.’
쓴웃음을 머금은 연아는 검 자루를 애틋한 눈길로 매만졌다.
스승이 자신에게 준 검이다.
어찌 초라하다 할 수 있을까.
적어도 자신에겐 그 무엇보다 무겁고 빛나는 것일진데.
“언제나 그 볼품없는 검을 매만지고 있더군. 보패도 아닌 것을….”
연아는 매서운 눈초리로 그를 쏘아보다 시선을 거뒀다.
우란 또한 입을 다물고 서찰을 유심히 살폈다. 한 문파의 문주는 능히 대소사를 살펴야 했으니 몸이 두 개라도 바쁜 것이 당연했다.
그때였다.
휘릭!
부적 한 장이 문틈 사이로 날아들어왔다. 전음부였다.
우란이 그것을 붙잡고 신식을 불어넣자, 단숨에 얼굴이 일그러졌다.
* * *
한편.
산군은 사내들의 안내를 받아 길을 거닐고 있었다. 그들 전부는 검선이었는데 이전과는 대접이 확연히 달랐다.
“정말 고선의 도사 분들이십니까?”
“보고도 모르겠더냐.”
산군이 으름장을 놓자 검선 하나가 살갑게 웃으며 말을 받는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신선에 가까워지면 질수록 풀내음이 짙다 하더니 그 말이 사실이었나 봅니다! 어찌 이리 향기로운 솔 향인지…!”
“풉!”
요호가 입을 가리고 비웃었다.
사내가 말하는 솔 향은 산군이 지닌 향낭에서 나는 것이기 때문.
그러거나 말거나 장천은 영 탐탁지 않은 눈초리로 산군을 노려봤다. 맘대로 고선의 이름을 빌렸기 때문이었다.
“고선의 도사들은 탈을 쓰고 다닌다 하던데….”
“말이 많군.”
“죄송합니다!”
“그건 그렇고 이곳을 지키던 여인에 대해 아는 건 없나?”
그러자 검선 사내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연 선자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연 선자.
어찌 그 성을 모를 수 있을까.
“그 아이는 잘 지내는가?”
“잘 지내고말고요! 연 선자님이 없으셨다면 백해가 이렇게 융성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 정도인가?”
“그럼요!”
검선은 묻지 않아도 침이 마르도록 연 선자를 칭찬했다.
그와 관련해 어찌 백산에 문파가 만들어졌는지, 문주의 이름과 그의 동료라는 이들까지 실컷 떠들어댔다.
“우란이라….”
산군은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툭툭 때렸다. 어디선가 들어본 적 있는 이름 같은데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우란.
우란.
한참을 고민하던 그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다 왔습니다!”
때마침 발소리가 멎었다.
앞을 보니 환진은 어느새 사라졌고, 웅대한 문 하나가 그들을 반겼다.
두 개의 송곳니가 큼지막하게 그려진 짐승의 문양.
“아….”
산군이 작게 탄식하자, 그와 동시에 대문이 끼이익 열리기 시작했다.
문틈 사이로 어두운 그림자가 생기 더니 순간 붉은 빛이 번뜩였다.
그것은 작은 비도였다.
비도는 붉은 기류에 휩싸여 구렁이의 형상을 지니고 짓쳐들었다.
빛살과도 같은 빠르기였다.
검선들은 물론, 비선의 경지인 초아마저도 숨을 들이킬 만큼 강렬했다.
그러나.
타앙!
산군은 그저 손을 털어버리는 것으로 비도를 튕겨냈다.
아무것도 없는 맨손이었다.
‘괜찮네!’
장충지태에 의해 육체적인 경도가 영명에 오름과 함께 비약적으로 상승한 지 오래다. 겨우 이 정도 보패로는 둔갑한 몸이라도 상처 하나 낼 수 없다.
힘 잃은 비도는 바닥에 대가리를 찔러 들었고, 검선들은 적잖이 당황했다.
첫째는 다짜고짜 공격한 문주에 대한 의아함이요, 둘째는 회심의 일격을 먼지 털 듯 무마시킨 무위 때문이었다.
“…….”
덕분에 당황한 것은 백해의 문주.
우란이었다.
인사치레로 공격한 것이 아니다.
정말 죽일 작정으로 공격한 일격.
그것이 간단히 뿌리쳐지니 적잖이 동요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우란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즐거운 듯 보였으나 타오르는 눈동자는 오직 산군만을 죽일 듯 바라봤다.
“한 치도 변하지 않았군. 다행이지 않은가! 덕분에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됐으니!!”
의미모를 말.
산군은 눈살을 찌푸렸다.
놈이 다시금 비도를 뿌려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지난 나날을 줄곧 네놈의 죽음만 바라며 살아왔다!!”
묻지도 않은 말을 지껄이며 수십의 비도를 뿌려댄다.
타앙! 탕! 타앙!! 쾅!
산군은 미간을 좁히며 비도를 손으로 쳐내며 고민했다. 바닥에 꽂히는 비도의 수가 순식간에 수십에서 수백으로 바뀌어갈 때 즈음.
“나의 조부와 아비의 복수를 내 손으로 이룰 것이다!! 으하하핫!!”
“조부?”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런 원한을 살 짓을 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놈의 반응을 보면 거짓은 아닌 듯하니 아이러니하다.
“내 조부 우단! 아비 우자를 잊은 것이냐 백산의 산군!!”
우단과 우자.
우둔산의 돼지들을 떠올린 산군이 눈이 치켜떠졌다.
그렇다면 놈은 설마.
“우둔산의 마지막 혈육, 이 우란이 네놈의 목을 받아가겠다!!”
돌연 놈이 자신의 손목을 그었다.
동시에 정혈이 사방으로 튀어 지면에 뿌려졌다.
우란의 안색이 단숨에 새하얗게 변하고 지면에 흩뿌려진 비도들이 부르르 몸을 떨어댔다.
“검진!”
장천이 놀라 소리쳤다.
그의 말 대로였다.
비도들은 단순히 떨어진 것이 아닌, 검진의 형태로 진을 구성하고 있었다.
“영명에 올랐다고는 하나, 내 검진에서 벗어나지는 못하리라!”
바닥에 꽂힌 비도에서 불길한 화염이 터져 나와 교룡으로 화했다.
수백의 화룡들이 치솟아 그 중심에 있는 산군에게 향했다.
무슨 검진인지는 모르나 그 위력이나 기세가 만만히 볼 것은 아니었다.
영결의 영수가 펼친 것이라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죽어라!!”
우란이 수결을 맺자 수백의 화룡들이 산군에게 짓쳐들었다.
순간 거대한 광풍이 휘몰아치고 폭음이 울리며 불기둥이 치솟았다.
콰아아앙!!
“산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