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ll of the Spear RAW novel - Chapter (91)
낭선기환담-90화(91/600)
낭선기환담 – 90화
다음날.
눈을 뜬 연아는 침소에 알몸으로 있는 자신을 보고 놀랐다.
우란이 결국 자신을 덮친 것인가 싶어 가슴이 철렁했다.
그러나 이내 산군을 떠올리고는 봉악청화로 담금질한 것을 기억해냈다.
연아는 자세를 바로하고는 가부좌를 틀어 자신의 단전에 자리 잡은 미약하지만 무시 못 할 청염을 느꼈다.
그 어떤 화염보다 청렴하고 맑은 기운을 토해내는 한 줄기 청염.
이내 손을 펼치자 손바닥 위로 청염 한 줄기가 떠올라 불이 피어났다.
푸른 연꽃과도 같았다.
맑게 일렁이는 것이 아름다워 한참이나 바라보다 눈물을 글썽였다.
그녀에게 청염이 가지는 의미는 가볍지 않았다.
백지자 댁에 붙잡혀 갔을 때.
그 초가삼간을 순식간에 지워버리며 자신의 운명을 바꾸었던 불.
그것이 이제는 자신의 불이 됐으니 어찌 감복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뿐만이 아니다.
봉악청화를 받아들인 탓인지, 몸 전체의 독소가 빠져나가 한결 편안해짐은 물론, 환골탈태를 이룬 듯 영기의 감응이 또렷해졌다.
게다가 피부 결부터 달라져 거칠었던 피부는 아기처럼 부드러워졌다.
화정지체가 된 탓인지, 불필요한 잔털들도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연아는 청염을 거두고, 자신의 몸을 살피다 얼굴을 붉혔다.
이런 은혜를 베풀어준 것이 누구인지 왜 모르겠는가.
그녀는 급하게 옷을 걸치고는 자신의 거처에서 나왔다.
이내 천호군으로 향하려는 찰나.
주변에 모여 있는 영수들을 보고 발길을 멈췄다.
“너희들!”
그들은 우란의 금제가 심어져 시름시름 앓던 이들이었다.
그녀와 함께 백산을 지키던 전우들이기도 했다.
“어떻게 된 거야?”
아니나 다를까.
잠들어 있었을 동안, 백산의 주인이 찾아와 간단히 금제를 거두었다 한다.
연아는 벅찬 가슴을 억누르며 해후를 나누고는 천호군으로 달려갔다.
숨이 한가득 찼다.
천호군이라 적힌 곳으로 들어섰다.
그곳에는 경전과 서찰이 허공에 두둥실 떠다녔고, 자리에 앉아 그것들을 살피고 있는 사내가 있었다.
“왔느냐.”
그녀의 스승.
산군이었다.
그녀는 대답조차 하지 못하고 아랫입술을 앙다물었다.
금세라도 울음보가 터져 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이리 멀뚱멀뚱 서 있을 수는 없는 일.
이내 고개를 숙여 절을 올린다.
“시름시름 앓고 있던 놈들이 있어 내 손을 써주었다. 너와 동고동락하며 백산을 지키던 녀석들이라지?”
“예, 예…. 감, 감사합니다!”
“다 큰 줄 알았더니 아직도 툭하면 우는 어린애구나. 초아랑 닮았네.”
부끄러웠으나 수치스럽진 않았다.
퉁명스러운 음성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감정은 매몰차지 않았다.
오히려 포근한 감이 있었다.
“서방님도 참….”
샐쭉한 낯으로 차를 가져오는 초아가 그를 나무랐다.
“맞잖아?”
“아니거든요? 설사 울었다 하더라도 연아 앞에서 못 하는 말도 없으셔요!”
“뭐 어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연아인데 그 정도야 뭐.”
안 그러냐. 라고 묻는 듯 바라본다.
연아는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소매로 닦으며 함박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동안 응어리진 멍울이 스르륵 녹아 없어지는 듯 했다.
“아, 참. 이것 받아라.”
산군은 품에서 검 한 자루를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본래 연아가 지니고 있던 검을 다른 귀물들로 제련해 만들어낸 보구였다.
“근화신연(斤化訊延)이라 지었다.”
“근화신연….”
“내가 지니고 있던 보구를 갈아 만들었다. 천근추의 묘리로 상대를 붙잡기 좋은 보구였으나, 이제 검이 되었으니 어찌 사용하기는 네 나름이다.”
보구를 갈아 넣었다니.
아직 도선에 불과한 그녀에게는 너무도 과한 물건이었다.
연아는 침을 꿀꺽 삼키며, 검집에서 검을 빼내보았다.
스릉. 듣기 좋은 검명과 함께 붉은 검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피처럼 시뻘건 검신에, 빼곡한 법문이 적혀 있었다.
연아는 그것에 영력을 불어 넣었다.
그러자 검이 번득이며 천근만근 같은 무게가 그녀를 덮쳤다.
쿠웅-!
연아가 무게를 못 이겨 근화신연을 놓치자 지면이 쩌지적 갈라졌다.
가히 어마어마한 무게였다.
어안이 벙벙해 검을 바라보다 산군을 쳐다보자 그는 흡족하게 웃었다.
“더 정진하거라.”
연아는 쓰게 웃었다.
의문이야 많았으나, 그것은 스승의 물음이었고 자신이 내야 할 답이었다.
“이것도 가져가 수행에 힘써라.”
산군은 몇 가지 경전들과 약병이 담긴 공정강을 건넸다.
“네가 다행히 화속성 금단을 품었으니 그와 관련된 통술들이다. 네게 쓸 만한 비술과 선단도 넣었으니 네 것으로 만들면 더할 나위 없겠지.”
이제 그에게는 필요없는 물건들이다.
연아가 가지는 게 좋다.
“어찌 이리 많은 것을….”
“네가 스승이라 불리는데 해준 것 하나 없었으니 이제라도 해주려는 것이다. 어차피 내겐 계륵 같은 것들이니 받아가거라. 하나뿐인 제자에게 옹색할 수야 없지. 제자에게 얄궂다면 내 얼굴에 침을 뱉는 셈이니 당연한 일이다.
부담 갖지 말고 받거라.”
무슨 할 말이 있을까.
연아는 감은부복(感恩府伏)하여 깊이 머리를 조아렸다.
“되었다. 네 고생을 모르지 않으니…. 그래, 이참에 그동안 못 다한 말이나 해보자꾸나. 어찌 지냈더냐.”
그 뒤.
산군과 연아는 다과를 먹으며 몇 시진이나 가담항설을 나눴다.
연아의 가족들 중, 둘째는 상단을 꾸려 착실히 부를 쌓고 있었고, 첫째는 연아를 따라 도를 닦는 중이라 했다.
아비와 어미는 백산을 탐내던 영수 집단에 휩쓸려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그 밖에도 점점 영기를 되찾는 백산을 노리는 이들은 많았고, 그 탓에 많은 생명이 죽어 나갔다.
그 와중에 우란이 나타나 단숨에 백산을 장악했던 것이라 한다.
연아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부터 중요 사항까지 담담하게 말했다.
그중에는 낯익은 이름도 있었다.
백지자가 살아 있다는 얘기였다.
“호, 그 작자가 아직 살아 있더냐.”
“예, 뒷방 늙은이나 다름없으나 아직까지 정정합니다.”
그때로부터 40년이 훌쩍 지났으니, 수명이 다하지 않았을까 했다.
한데 아직 살아 있다 하니 반갑기도 하고 얄밉기도 한 놈이었다.
“그 이후로 개과천선하여 마을을 위해 나름 힘썼습니다. 너무 고까워하지 마시옵소서.”
“한낱 범인에게 무슨 감정이 있겠느냐, 나보다는 부인이 더 고까웠지 않았을까 싶은데?”
그리 말하며 초아를 바라보자 그녀는 선선히 미소 지었다.
“제가 그곳에 있었기에 산군께 시집 올 수 있었지요. 그리 생각한다면 오히려 고마운 사람들입니다.”
괴롭힘을 받은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어릴 적 그녀는 마을 사람들에게도 귀신으로 불리는 종이었다.
그런데 원망하는 마음 하나 없으니 그 심성을 어찌 칭찬치 않을까.
산군과 연아는 그 뒤로도 한참이나 못 다한 이야기를 나누다 헤어졌다.
* * *
다음날.
산군은 초아와 함께 백산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그러다 연아의 곁에 있던 토끼를 발견하고는 아니꼬워했다.
“네놈도 명줄이 참 길구나.”
[어, 어쩌다 보니…. 송구하게 되었습니다, 나으리!]예전, 산군이 영물이었을 무렵 그를 놀려 먹다 호되게 혼난 토끼 영수였다.
“인연이란 게 참 재미있지. 그렇지 않더냐. 이놈에게 속아 토끼를 산군이라 부르던 게 엊그제 같은데 말이야.”
연아를 처음 만났을 때의 일이었다.
이제는 아련하기까지 한 추억이다.
“그런 일도 있었지요. 하지만 심성이 악하지 않아 지금은 제 벗입니다. 너무 노여워하지 말아주세요.”
저 산토끼는 벌써 40년이나 함께 하고 있었다. 수십 번이나 연아의 목숨을 살려주기도 했다고 한다.
참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제자를 잘 도와주거라.”
[무, 물론입지요!]산군은 쓰게 웃고는 놈을 지나쳐 초아와 함께 수풀로 향했다.
“오랜만이네요.”
수풀이 우거진 곳은 초아에게도 퍽 낯익은 공간이었다.
“어릴 때는 참으로 야박하셨죠. 넘어져도 다정한 말 한마디 건네주지 않으셨어요.”
입술을 삐죽이며 말한다.
40년이 더 지난 일이거늘.
“네가 이상하게 자주 넘어져 그런 것이다. 아무것도 없는데 자꾸 넘어지니 왜 아니 그럴까.”
“치, 한데 이곳에는 왜…. 아.”
무언가 떠올랐는지 그녀의 낯이 둥그스름하게 변한다.
“그러고 보니 이곳에는 호수가 하나 있었지요.”
잉어도 함께.
초아는 오랜만에 보는 백산의 호수에 눈을 감고 지난 일을 추억했다.
이곳에서 지금도 머리에 꽂고 있는 비녀를 선물 받지 않았던가.
다른이라면 몰라도 초아는 이곳에서의 일을 잊어버릴 수 없었다.
그에게서 받은 첫 선물이었다.
게다가 그 이후로 하염없이 도모을 바라며 울고 웃지 않았던가.
“더 좋은 것도 줄 수 있다.”
“어머, 정말요?”
“갖고 싶은 게 있나?”
그의 물음에 그녀는 희희 웃었다.
“아니요. 어젯밤에도 잔뜩 받았는걸요. 괜찮답니다.”
그녀는 아랫배를 감싸며 몸을 배배 꼬았다. 적잖이 부끄러운 듯 했다.
산군 또한 괜히 헛기침을 하며 호숫가를 바라봤다. 이곳은 본래 태양화리 가족들이 살던 호수다.
때문에 다시 내어주기 위해 왔다.
“나오너라, 명화야.”
산군이 부르자 공정강에서 빛이 일더니 붉은 인영이 호수로 뛰어들었다.
명화와 그 부인.
그리고 그의 자식들이었다.
새끼들은 참방참방 물장구를 쳤다.
“앞으로 너희들은 이곳을 벗어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영명에도 올랐으니, 백산에 있는 동안에는 생명에 위협을 받는 일은 일절 없을 것이다. 애초에 이들을 데리고 온 이유가 남겨두고 갔다가 다른 이들에게 먹히지 않을까 싶어서다.
이제는 명화도 영물을 벗어나 영화에 올랐고, 영결을 눈앞에 두고 있으니 제 앞가림은 알아서 할 것이다.
[산군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그 뜻을 헤아렸는지, 명화가 깊이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전했다.
고개를 주억이며 그들과 인사하다 만삼이도 꺼내 내려놓았다.
동자의 모습으로 나타난 만삼은 초아를 보며 몸을 흠칫 떨었다.
“…또 뵙게 됐네요. 사모님.”
“아직도 절 껄끄러워하세요?”
“껄끄러워 하다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이제야 진정한 산비가 되셨으니 아주 기쁘시겠습니다, 하하….”
만삼과 초아는 사이가 그리 좋지 않은 편이었다. 그 이유는 잘 모르겠으나, 초아의 말에 따르면 자신을 일방적으로 눈엣가시처럼 본다고 한다.
산군은 둘 사이가 왜 저런지 의아했으나 별로 신경 쓰지는 않았다.
이내 영초들과 신목을 꺼내니 만삼이 그것들을 분류하여 심기 시작했다.
“항보신목 상태는 어떠하더냐.”
“나쁘지도, 좋지도 않습니다.”
“자주 옮겨 심어서 그런가?”
“아마도요. 특별히 관리하고 있기는 하나, 가지 하나를 꺾어 영기가 쇠했으니 그것을 보충해야 할 것입니다.”
40년 가까이 상태가 호전되고 있지 않았다. 항보신목의 가지를 꺾어 항보사인검으로 그 효력을 톡톡히 보고 있으나, 신목의 상태가 좋지 않아 더 만들 수 없는 게 매우 아쉬웠다.
신목을 안전하게 옮길 비술은 알고 있으나, 그것을 장성하게 키우는 것은 또 다른 일이었다.
그나마 만삼이가 있어 악화되지는 않으나 다른 방도를 찾기는 해야 했다.
‘진법패로 12개 만들어 백산 전역에 설치한다면 결계는 물론, 항마의 효과를 볼 수 있을 텐데….’
아쉬웠으나 어쩔 수 없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를 수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그럼 부탁하마.”
“예, 걱정마세요!”
그 뒤.
산군은 초아와 함께 백산 이곳저곳을 둘러봤다.
지나다니는 영수들이며 도사들이 그의 기운을 감지해 도망가거나 존경을 담아 먼저 다가오기도 했다.
“좋네요.”
“그렇더냐.”
“예. 그 시절에는 이런 생활은 꿈도 꿀 수 없었어요. 정말 꿈에서나 그리던 나날들이 펼쳐지니 꿈이 아닐는지, 볼이라도 꼬집어보고 싶습니다.”
초아는 돌연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산군의 볼을 꼬집었다.
“아프십니까?”
“왜 내 볼을…, 아프니 놓아라.”
히죽히죽 웃는 낯이라 화를 내지도 하고 산군은 쓰게 웃고 말았다.
그 뒤로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추억에 잠겼다. 백 마을로 내려갔을 때에는 어린아이들을 한데 모아 백산의 이야기를 하는 꾼도 있었다.
주된 내용은 백산을 주름잡았던 범에 대한 것으로, 산군의 이야기였다.
나이 많은 노인이 지팡이를 턱에 괴고 이야기를 시작하자, 초아가 산군의 팔을 잡아당겨 귀를 기울였다.
“백산의 주인은 가히 어마어마했지. 몸놀림은 바람과도 같아 어중이떠중이 같은 사냥꾼들의 화살은 절대로 맞는 일이 없었어. 그리고 힘은 어찌나 강한지 발을 한번 구르면 땅이 열리고, 한번 뛰어오르면 머리가 구름까지 닿는 것은 일도 아니었지! 산군의 하루 일과가 낮에는 태양으로 뛰어들어 그곳에서 뜨뜻하게 몸을 지지고, 밤에는 달로 뛰어들어 술잔을 기울였다니까!”
‘뭔 개소리야, 이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