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 returned as a genius violinist RAW novel - Chapter 105
105화
‘그러고 보니 한예종에도 티켓이 왔겠네.’
서진과는 별개의 행보였지만, 한예종의 관현악단도 축제에 참가했기에 초대권이 꽤 할당되었을 터.
서진 역시 협연자이자 작곡가로서 상당량의 티켓을 – 그것도 합창석이 아닌 VIP석으로 – 배부받았지만, 어머니 외에는 딱히 줄 데가 없었다. 아는 사람들이라고는 전부 음악 관계자인지라, 굳이 자신을 통해 티켓을 받아갈 필요가 없을 터이기에.
이번 교향악 축제의 프로그램에는 한국 창작곡이 적극 장려되었는데, 이에 서진의 곡도 두 개나 쓰였다. 직접 참가하는 서울시향의 공연에서 하나, 그리고 KBS 교향악단에서 또 하나.
이외에도 많은 교향악단이 관심을 보였으나, 웬만한 실력으로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적극적으로 나서지는 못했다.
곡 자체가 난곡인 건 아니었지만, 원작자만큼 표현해낼 자신이 없는 것이었다. 작곡가가 버젓이 살아있는 마당에 괜히 망치기라도 하면….
반면 서울시향은 서진과 인연이 깊기에, 그리고 연주에도 어느 정도 자신 있었기에 오히려 적극 관심을 보였다.
“서울시향이 그렇게 유명하다며? 그리고 또… 아, 부천필인가 하는 곳도 들어봤어!”
“맞아요. 서울시향, 부천필, 수원시향 등등… 해외에도 공연을 갈 정도로 기량이 있는 곳이죠.”
서진이 협연했던 해외 유수의 오케스트라들에 비하면 아직 발전의 여지가 있다지만, 국내에서 나름의 명성을 가진 관현악단이었다.
그럼에도 서진의 유명세가 워낙 큰 탓에, 이제는 예전과 달리 조금 과장하자면 오히려 서울시향이 서진의 이름값의 덕을 보는 형국이었다.
“역시 K-클래식!”
서진은 나직이 웃었다. 어머니도 국뽕이 은근 취향이신 모양이었다.
“우리나라의 관현악단들도 언젠가 세계에서 앞다투어 초빙하는, 그런 최고의 악단으로 우뚝 자리매김하면 좋겠어요.”
“그러게. 생각만 해도 뿌듯한걸? 그리고 그 중심에 우리 아들이 있을 걸 생각하니… 아들 덕 좀 톡톡히 보겠네? 호호.”
“아하하, 엄마. 너무 나갔어요. 참, 거기까지는 몰라도 적어도 이번 올림픽에 좋은 자리 정도는 제 덕을 볼 수 있게 해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개회식에서 제가 나름 메인이거든요.”
“어머! 평창!?”
“네.”
개막식 공연에 참가하는 덕분에 좋은 자리에서 관람할 수 있는 티켓을 받을 수 있어 일석이조였다. 그동안 보통의 클래식 공연에서 협연자로서 챙겨 받은 티켓에는 큰 감흥 없었는데, 올림픽은 달랐다.
회귀 전의 기억으로 아무리 평창 올림픽이 망했다고 알고 있지만, 그래도 국위 선양의 의미로 올림픽 개막식에 서는 것만 한 게 어디 있을까.
“준비는 다 했고?”
“물론이죠.”
작곡은 해외를 오가는 틈틈이도 꾸준히 해 두었다. 꼭 한국에서 머물지 않아도 할 수 있는 일이니까.
하지만 본 행사 참석을 위해서는 반드시 귀국해야 했기에, 이래저래 일정에 맞춰 미리 들어온 것.
“그런데 서진아, 혹시 여자친구는… 안 사귀니?”
흐뭇하니 고개를 끄덕이던 선희가 문득 물었다.
“…네?”
“아니, 그냥 궁금해서.”
음악도 좋지만, 한창나이의 청춘이 아닌가.
아직 성년이 되기 직전으로 미성년자의 나이라고는 하지만, 공식적으로는 대학생인 데다가 사회생활 측면으로만 보면 이미 프로의 세계에 발을 담근 서진이었다.
그러니 마냥 어린 나이로만 보기에는 힘든데…. 슬슬 연애에도 관심을 가질 나이가 아닌가…?
요즘 애들은 중고딩, 아니 초딩만 되어도 여자친구다 뭐다 난리라는데… 솔직히 학생 나이에는 입시 때문에 연애를 삼가는 거지, 피끓는 십대 청춘이야말로 가장 연애 욕구가 활발할 때가 아닌가.
‘게다가 지연이랑 저렇게 붙어 지내는데….’
“아직은 그다지요. 아시다시피 너무 바쁘잖아요. 학교도 제대로 못 나가고 있는걸요.”
기껏 입학한 한예종이었지만, 서진은 아예 휴학 중이었다. 처음에는 오가는 틈틈이 다녀보려 했는데 갈수록 바빠져서 2학기에는 아예 휴학을 해버린 것이다.
워낙 특수한 케이스가 많은 한예종이다 보니 연주 일정을 얼마든지 배려해주는 편이었지만, 그럼에도 도저히 병행하기에 힘들어서였다.
“…그래. 바쁘면 뭐… 어쩔 수 없지.”
선희는 지연에게 온 안부 문자가 담긴 핸드폰을 스윽 숨기며 멋쩍게 웃었다.
지연은 개인 일정으로 먼저 귀국한 상황이었다. 함께 콰르텟 활동을 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처음 출국할 때 외에만 다 함께 나갔을 뿐, 모든 일정을 전부 같이 하는 건 아니었다.
어휴, 불쌍한 지연이…. 이러니 친구 이상 진전이 없지. 귀국해도 연락 한 통 없는 야속한 아들 녀석 때문에 얼마나 속이 타고 있을까.
남들 같으면 이맘때쯤 정분이 나도 열 번은 났을 시간인데, 어쩜 이렇게 음악밖에 모르는지…
제 아들이지만 조금은 신기한 그녀였다.
* * *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평창 무대를 앞두고 판소리 공연 팀과 리허설을 해보기 위해 발걸음한 자리. 서진은 싹싹하게 모두를 향해 인사했다.
“꺄…! 안녕하세요!”
서진의 등장에 여기저기서 작은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이어 ‘하, 한서진!? 진짜? 대박!’, ‘대박, 존잘!’ 등등의 소리도 작게 들려왔다.
심지어 누군가는 직접 실물을 영접하게 되어 정말정말 영광이라며, 얼굴을 새빨갛게 붉힌 채 사인을 청해오기도 했다.
서진은 친절히 미소지으며 사인 요청을 전부 받아주었다.
그렇게 한바탕 소란이 지난 후,
“곡은 받아보셨죠?”
“네. 뭐 저희야 봐도 잘 모르긴 하지만요, 하하. 가락이라면 모를까, 반주보를 보고 파악할 만큼 서양악기에 빠삭하지 못해서요. 저희는 그저 한서진 군만 믿고 있어요!”
리더로 보이는 여자가 웃으며 답했다. 부담스러우면서도 고마운 말이었다.
개막식 연주의 메인이 될 공연은 판소리였다.
한국에서 열리는 올림픽이니 우리 소리가 중심이 되어야 하는 만큼, 최소한 하나 정도는 국악을 넣겠다는 윗선의 뜻이었다.
다만 기존의 판소리가 아닌 창작 판소리로 무슨 국악 작곡 콩쿨에서 우승한 곡이라는데, 여기에 필요한 반주의 작곡을 서진이 맡은 것이었다.
어쨌든 기본 멜로디 자체는 기존에 작곡된 곡 그대로였기에, 서진으로서도 부담이 훨씬 덜한 상황.
문제는 내용은 판소리지만 반주 악기는 국제적 행사임을 고려해 서양음악을 차용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굳이 이름 붙이자면 창작 퓨전 판소리라고 해야 할까.
이에 서진이 먼저 공연될 판소리 곡을 받아 분석한 후, 적당한 편곡작업과 함께 그에 맞는 반주를 써넣는 작업을 했다.
“감사합니다. 그럼 바로 시작해 볼까요?”
리허설을 위해 빌린 무대에 판소리 팀이 자리를 잡았다.
참고로 무대는 지난번 대관령 음악제 때의 그곳이었다.
이번 대관령 국제음악제는 특별히 평창 동계 올림픽과 연계해서 열릴 예정인데, 어쩌다 보니 서진은 음악제에도 자연스레 한 발 걸치게 되었다.
물론 예전처럼 학생으로서 배우기 위해 마스터 클래스에 참가하는 것은 아니었다. 음악제에서 공연 하나만 해달라는 부탁이었으니까.
“참, 일단 지금은 제가 메인 선율인 1 바이올린을 맡고, 나머지 파트는 미디로 재생시킬게요. 아직 저희 멤버들이 다 귀국하지 않아서요.”
“네. 괜찮아요.”
연주는 K 콰르텟이 함께 할 예정이었다.
반주 형태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말에, 서진은 친구들이 다 함께할 수 있도록 현악 4중주를 반주로 넣었다. 판소리와의 어울림을 생각하면 오케스트라보다는 그편이 낫다는 판단이었다. 원래의 판소리는 반주 편성이 그리 화려하지 않은 편이니까.
먼저, 판소리 공연 팀의 리더 유하나의 힘찬 목소리가 국악 창법 특유의 음색으로 적막을 가르며 울렸다.
서양식 성악 발성과는 전혀 다른 창법이었지만, 어느 길이든 그 끝은 서로 통한다는 말처럼 그녀의 목소리가 주는 울림은 특유의 감동이 있었다.
서진의 선율이 덩기덩 북소리를 묘사하며 뒤를 따랐다.
이어지는 애절한 선율.
분명 바이올린으로 연주하고 있는데, 그 소리는 마치 해금 같기도, 때로는 가느다란 피리 소리 같기도 했다.
4 파트의 악기가 서로 어우러지며 더할 나위 없이 구성진 반주를 뽑아냈다.
‘이게 무슨….’
유하나는 깜짝 놀랐다. 국악과 서양의 현악기가 과연 어울릴지 긴가민가했는데, 눈이 휘둥그레지다 못해 하마터면 삑사리가 날 뻔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녀는 프로였다. 놀란 와중에도 주거니 받거니 소리를 놓치지 않았다.
소리는 점점 무르익어 갔다. 그에 따라 반주 역시 절묘하게 그를 받쳤다.
오케스트라처럼 절정으로 향한다고 더 많은 악기가 더 많은 소리를 내는 것이 아닌, 여백의 미를 중시하는 동양의 소리답게 반주는 기가 막힐 만치 절묘한 소리의 농도로 창을 보조해 나갔다.
실로 전율적인 수준의 조화였다.
‘이건 정말 상상도 못 했는데….’
놀란 건 유하나를 비롯한 팀원만이 아니었다.
국제음악제에 관련한 일 처리와 사전점검을 하기 위해 왔다가 잠시 공연장에 들러본 송여름.
그녀는 우연히 보게 된 리허설 장면에 말을 잇지 못했다.
‘정말… 천재는 다르구나.’
그녀의 옆에는 낯선 외국인이 한 명 서 있었는데, 그의 표정은 가히 가관이었다.
“오…! 오!”
태어나 처음 들어보는 ‘한국’이라는 나라의 전통 음악은 그야말로 쇼킹했다. 어떻게 이렇게 대단한 음악이 여태 세계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걸까.
“저 아이가… 자네가 말한 그 유명한 아이인가?”
“네, 마에스트로 빈.”
올해는 올림픽이라는 특수 때문에 음악제에 참여한 음악가들 면면이 더욱 대단했다. 남자는 그중에서도 독보적인 존재로,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지휘자였다.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극장 지휘자를 거쳐 현재 뉴욕필의 음악감독으로 재직 중인, 역사에 한 획을 그은 거장.
그런 그가 보이는 지대한 관심에 송여름은 침을 꿀꺽 삼켰다. 역시나, 저 아이가 제 눈에만 대단해 보이는 건 아니었구나.
“그러니까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있는 저 소년이, 이 곡의 작곡가이기도 하단 말이지?”
송여름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에스트로 빈은 그녀에게 그것 말고도 서진에 대해 이것저것 잔뜩 물어대는 한편, 작품에 대해서도 궁금해했다.
“저건 창이라고 하는데, 판소리에서…,”
송여름은 그런 그의 궁금증을 성실히 풀어주었다.
“이런… 이건 정말….”
어떻게 이런 연주가….
휘몰아치는 이 처절한 감정선, 섬세한 표현력. 짜릿하게 몰려오는 카타르시스에 두 눈이 질끈 감길 지경이었다.
듣고 있는 곡이 ‘퓨전 현대 국악’이라는 난생처음 들어본 생소한 양식이라는 점은 전혀 문제 되지 않았다.
감동의 끝은 결국 다 하나로 통하는 법이니까.
얼핏 거칠게 갈라지는 듯한 목소리만 들어보면 투박하기 그지없는 음악인 듯 보였지만, 실은 결코 그렇지 않았다.
어쩌면 그렇게 느껴질 수도 있는 음색을, 현악기의 선율이 적절한 양념을 더하며 비탄을 토해내는 목소리와 기막힌 어우러짐을 만들어냈다.
‘저 소년….’
천재 바이올리니스트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