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 returned as a genius violinist RAW novel - Chapter 107
107화
맨 처음 여자애는 예고편에 불과했다.
어디서 기다리고 있다가 나타난 건지, 한 무리의 여자애들이 우르르 나타났다.
간접적으로, 혹은 직접적으로 고백해오는 수많은 여학생들 때문에 난감해하면서도 서진은 웃으며 받아주고 있었다.
그걸 또 일일이 사인해 주고 있다니…! 지연은 속이 터져 죽을 것 같았다.
저 좋다는 사람 저렇게 많은데 왜 연애는 안 하는 건지.
…그래. 차라리 다른 누구랑 그러면 좋겠다. 확실히 교통정리가 되게.
* * *
실제 공연보다도 오히려 골수팬들로 가득하기로 유명한 리허설 콘서트.
교향악 축제를 앞두고, 서울시향의 본진(?)인 세종문화회관에서 리허설 겸 공연이 열렸다.
원래 교향악 축제에는 리허설 콘서트가 없지만, 시향 측에서 따로 무대를 마련한 것이었다. 예술의 전당 측에서도 리허설 시간을 할당해주긴 했지만, 시간도 짧고 그건 일반에는 비공개로 진행되는 것이었으니까.
서울시향의 리허설도 원래는 보통 비공개로 진행됐었는데, 빈필의 신년음악회에서 착안해 얼마 전 처음으로 리허설 무대를 공개해 본 것이 호응이 좋아 간간이 이벤트성으로 열게 되었다.
신년음악회가 워낙 티켓팅 전쟁으로 악명이 자자한지라, 예매에 실패한 관객들의 원성을 달래기 위해 리허설 무대도 콘서트로 공개하기 시작한 것이었는데, 이 역시 만만치 않게 표 구하기가 힘들었다.
한데 이번 서울시향의 리허설 콘서트 역시 마찬가지였다.
명분이야 시향 설립 십몇 주년인가를 기념하기 위함이었지만, 실제로는 ‘한서진 특수’로 인한 것임을 모르는 이가 없는 상황. 특별히 리허설 무대를 공개한다는 말에, 본 공연 티켓팅에 성공한 사람들마저 예매 전쟁에 뛰어들어 객석은 순식간에 동이 났다.
‘본 공연은 리허설로서 진행되므로, 실제 공연장에서 연주되는 일반 음악회와는 차이가 있습니다.’라는 주의 문구가 친절히 붙어있음에도, 관객들은 서진을 보기 위해 열심히 줄을 섰다. 정작 한서진 본인이 리허설에 참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요소에도 불구하고.
“와… 줄 미쳤다.”
세종문화회관 예술동 5층 리허설룸.
서진의 오랜 팬이었던 한 여자 또한 친구와 함께 그 인파 속에 있었다.
표를 예매했음에도 불구하고 줄을 서야만 하는 이유는, 리허설 콘서트인 만큼 좌석이 비지정석으로 매우 저렴한 염가에 똑같이 판매된 탓이었다.
그런 장점이자 단점 – 비지정석이라는 – 이 있기에, 오히려 더욱 미친 듯 일찍 가서 줄을 서야 하는 상황.
가격이 착한 만큼 몸으로 때워야 하는 것은 만고불변의 진리였다.
“나 진심… 이번에도 한국 공연 제대로 안 하고 떠나면, 해외로 원정 가려 했다고…!”
드디어 한서진이 귀국했는데, 정작 티켓팅에 실패했다는 게 실화!? 기껏 팬심을 발휘하려 했건만, 기회조차 없다니…!
그러던 와중에 리허설 콘서트라니, 이 얼마나 단비 같은 소식이란 말인가!
이 가격에 볼 수 있다면 이까짓 줄쯤이야 얼마든지 설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며 그녀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러게 말이야. 아 진짜… 꼬꼬마일 때 미리 알았어야 하는데… 이제는 너무 유명해져서 표를 구할 수가 없다니.”
“진심 순식간에 매진임. 클릭도 못 해봤다고. 오픈과 동시에 매진 실화?”
“이게 다 얼굴 탓이지. 얼굴 탓이야….”
잘생겨서 더 인기인 거라며 여자는 투덜거렸다. 그러는 그녀 역시 비주얼에 혹해 덕질을 시작하게 된 케이스였지만.
일단 얼굴 때문에 관심을 가졌던 사람들도, 막상 한 곡이라도 듣고 난 후에는 찐팬이 되어버리는 마법 같은 일.
“어, 드디어 입장한다!”
오늘은 또 얼마나 마법 같은 소리를 들려줄까. 기대감에 심장이 콩콩 뛰었다.
길게 늘어섰던 모두가 자리한 후,
“안녕하세요. 서울시향의 부지휘자, 최수연입니다. 이번 ‘리허설룸 콘서트’는…. …게 약 40명의 단원들과, 두 분의 협연자가 함께 참여할 예정이며, …중간중간 곡에 대한 설명을 통해 관객 여러분들의 이해도를 높여드려 또 다른 재미를 더할 수 있도록 기획되었습니다. 한층 더 가깝게 클래식 음악을 접하실 수 있도록…,”
리허설을 진행하는 부지휘자의 설명에 관객들의 얼굴이 환해졌다.
다행히 한서진도 리허설에 참여했다. 혹시 시향 단원들끼리만 하면 어떡하나 걱정했는데… 정말 다행이었다!
‘역시 우리 최애! 팬들의 기대를 배신하지 않는다고…!’
사실 서진으로서는 꼭 참여하지 않아도 되는 리허설이었으나, 자신을 보기 위해 온 이들이 상당할 거라는 생각에 서진은 바쁜 가운데 시간을 내어 자리했다.
서진은 자신의 음악을 사랑해주는 팬들에게 언제나 고맙고 또 고마운 마음이었다. 음악이란 것은, 듣는 사람에게 어떤 유의미한 감정을 전달해 줄 수 있을 때 비로소 그 가치가 생기는 것이라 생각하기에.
* * *
첫 곡은 베토벤의 바이올린 협주곡이었다.
도입으로 일부러 대중들에게 친숙한 작곡가를 택한 것.
이 곡은 베토벤의 유일한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베토벤의 작곡 실력이 한창 무르익은 중기에 작곡된 걸작 중 걸작이었다.
연주의 난이도는 은근히 까다로운 반면, 소위 ‘연출적’으로 기교가 돋보이는 그럴싸한 요소가 없기에 초기에는 약간 애매한 취급을 받았던 작품.
하지만 추후 연주자들이 덧붙인 화려한 카덴차 덕분에 곡의 아름다움이 재조명되며, 현재에 이르러서는 바이올리니스트들에게 상당한 사랑을 받고 있는 곡이었다.
즉, 카덴차가 중요한 요소라는 것.
후대에 붙여진 카덴차인 만큼 누구의 버전으로 연주하느냐에 따라 악보가 조금씩 달라지는데, 서진은 새로운 선택을 했다.
즉, 직접 자신만의 카덴차를 붙인 것.
1악장: Allegro ma non troppo.
베토벤 특유의 비장감이 느껴지는 유려한 선율이 과르네리의 투박한 바디를 타고 느릿하니 흘렀다.
약 50분 정도의 길이를 가진 꽤나 긴 곡. 게다가 당대로서는 난해한 수준의 악보라 혹평을 받으며 묻혀버렸지만, 지금 시대에 와서는 이 정도는 사실 웬만한 전공생이면 얼마든지 하는 수준이었다.
본디 음악계에서는 이런 일이 제법 있었다.
바이올린 곡으로 상당한 인기를 끌고 있는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
이 곡은 매우 안타까운 비하인드 스토리를 가지고 있었다.
저 곡이 작곡된 당시, 대체 이 괴이하고 난해한 작품을 누가 연주할 수 있겠냐며 대차게 까인 것이다.
그러한 비판의 가장 큰 이유는 너무 어렵다는 것이었는데, 당대의 바이올리니스트들 중 이 곡을 연주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을 수준이었다.
한데 우습게도, 현대에 이르러서는 초딩 전공생들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정도니, 몇백 년간 바이올린 연주법이 얼마나 발전했는지 알 수 있는 단적인 사례였다.
어쨌든 베토벤의 협주곡 역시 차이코프스키의 그것만큼은 아니지만 만만치 않게 어렵다고 까였던 곡이었는데, 서진은 당대의 그러한 반응을 전혀 상상해보지 못할 만큼 쉽고 자연스럽게 연주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아무리 지금은 예전만 한 악명이 아니라지만, 그래도 만만치 않은 곡인데 말이다.
드디어 터져 나온 카덴차.
이건 단순한 기교가 아니었다.
영혼을 뒤흔드는 마법이었다.
작곡에도 천재적인 재능이 있는 어린 바이올리니스트의 카덴차는 클래식의 ‘클’ 자도 모르는 사람이 들어도 남달랐다.
바이올린의 애절한 울림. 흐느끼는 듯 가느다랗게 떨리는 트릴….
어떻게 이토록 자신만의 색으로 카덴차를 만들어 낸 건지, 대번에 ‘아, 한서진의 것이구나’ 하고 느끼게 해주는 그런 선율이었다.
그러면서도 베토벤 본연의 색을 흐트러트리지 않는다.
작곡가에 대한 존중과 연주자의 개성이 함께 살아 숨 쉬는 소리.
동시에 청중들에 대한 배려도 잊지 않았다. 화려함 속에서 심신을 편안히 해주는 묘한 울림이 있었다.
너무나 애절하고 살 떨릴 정도로 감미로운 선율이 가늘게, 때론 힘차게 흘렀다.
어떤 포인트에서 청중들이 희열과 절정을 느낄 수 있는지, 마음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는 느낌이랄까.
‘이래서 다들 한서진, 한서진 하는구나….’
이름만 많이 들어보았던 한서진이라는 소년의 연주를, 오늘 난생처음으로 들어본 어느 관객의 소감이었다.
이것이 한서진이구나.
아… 이래서 이 아이가 그토록 유명하구나.
처음엔 그냥 얼굴이 잘생겨서 그런 줄 알았다.
한국 특유의 냄비 근성으로, 그저 유명하다니까 유명한 줄, 남들이 난리 치니까 그냥 부화뇌동 좋다고 하는 줄 알았다.
한데 아니었다.
그녀는 클래식을 좋아하는 편이긴 했지만, 카덴차 등의 기교를 뽐내는 연주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오케스트라의 꽉 찬 소리가 좋지, 독주 악기 혼자 연주하는 건 애초에 취향이 아니었던 것이다.
바이올린이라는 악기의 특성상, 웬만큼 잘하지 않고서야 가끔 거슬리는 소리가 나기도 하고, 기교를 부리겠다며 지나치게 높이 올라간 고음이 신경을 긁을 때 많은 것이다.
한데 그게 착각이라는 걸 깨달았다.
자신은 카덴차를 싫어하는 게 아니었다.
아직까지 제대로 된 진짜배기를 들어본 적이 없었을 뿐.
거기에 더해 사람들이 입을 모아 말하면, 직접 들으면 뭐가 달라도 다르다는 말 역시 이해가 갔다.
그동안 다른 클래식 공연에서는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던 충만한 감각.
온몸의 세포들이, 오감을 넘어 육감까지 누가 장작을 피운 마냥 들끓어 오르는 묘한 기분.
‘이게 바로 사람들이 말한 그거였구나….’
아드레날린이니 도파민이니, 아무튼 사람 기분 좋게 만든다는 물질은 전부 날뛰는 느낌?
대체 무슨 마법을 부린 걸까.
워낙 압도적인 연주를 들은 탓에 절로 그런 느낌이 드는 것이겠지만, 정말로 마법 같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약 5분간 이어진 환상적인 소리에 장내는 숨소리도 들리지 않을 만큼 집중이 이어졌다. 누가 실수로 기침이라도 한 번 하면 매서운 시선이 꽂혀들 정도로.
순식간에 시간이 흘러,
1악장이 끝나자 실수로 박수가 몇몇 군데서 터져 나왔다.
악장 사이에는 박수를 치지 않는다는 걸 머리로는 알지만, 과하게 감동한 가슴 탓이었다.
그 마음을 느낀 서진은 살며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에 모두 아예 대놓고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지휘자 역시 미소로 청중들을 잠시 기다려 주었다.
본 공연도 아닌 리허설 무대인 만큼, 무대 매너에 빡빡히 구는 것보다는 다 함께 즐기는 쪽이 더 좋았으니까.
이어진 2악장과 3악장.
엉덩이가 배길 법한 긴긴 시간도 잊고, 관객들은 모두 별처럼 반짝이는 눈으로 뚫어져라 무대에 집중했다.
공연의 장르가 ‘음악’이니만큼 귀로 소리를 듣는 게 기본이지만, 오케스트라를 관람하는 묘미는 눈으로 보는 것에도 있었다. 특히 오케스트라와 함께 하는 협연자가 비르투오소적인 기교를 펼친다면 더더욱!
물론 그 ‘구경’에는 잘생긴 얼굴을 보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으나, 얼굴은 어디까지나 연주의 배경화면의 느낌일 뿐, 진짜배기는 역시 테크닉이 아니겠는가.
곡이 전부 끝난 후,
쏟아지는 박수에 서진은 조금 쑥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정식 무대가 아닌 만큼 무대인사까지 할 필요는 없었지만, 아무리 리허설이라도 자신의 음악을 즐겨준 이에 대한 예의는 예의였다.
‘이 정도로 사랑받을 줄은 몰랐는데….’
뿌듯하고 보람찬 기분.
가슴이 꽉 차올랐다.
천재 바이올리니스트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