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 returned as a genius violinist RAW novel - Chapter 110
110화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연구진의 말로는 진행을 더디게 만들뿐더러 – 거의 멈추는 것에 가깝게 – 현재의 증상도 누그러지게 해 준다고.
직접 임상 시험에 참여해 본 결과 정말이었다. 분명 이미 발병한 후인데, 더 이상 진행되거나 하는 느낌이 전혀 없는 것이다.
손가락도 훨씬 편안한 느낌이었다. 전에는 꼭 저릿한 느낌이나 통증이 아니더라도 가끔 뻣뻣해지곤 했었으니까. 이건 손을 혹사시키는 음악가라면 자신과 같은 병이 없어도 얼마든지 겪는 증상인지라 신경 쓰지 않았던 것이지만, 약을 복용하니 관절에 윤활유라도 바른 것처럼 훨씬 움직임이 쉬워진 것이었다.
덕분에 서진은 처음과 달리 한결 편안한 마음으로 연주할 수 있었다. 그제야 관객들의 반응도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서진의 입가에 슬쩍 피어오르는 미소.
‘나 진짜 많이 컸구나…’
이 소나타는 여기서 처음 선보이는 곡이었다.
한 마디로 초연.
그 사실이 유독 감개무량한 것이다.
자신이 만든 곡을 이렇게 수월하게 초연할 기회를 가질 수 있는 작곡가가 몇이나 될까. 새삼스레 작곡가로서 자신의 이름값을 느낄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새삼스레 윤수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콰르텟 연주 활동을 통해 그동안 자연스레 많은 곡을 선보일 수 있었고, 그 덕분에 대중들에게 보다 수월하게 다가갈 수 있었으니까.
한 가지 특이한 문제라면, 서진의 곡은 반드시 서진 본인이 연주해야만 원곡의 분위기를 완벽히 표현해낼 수 있다는 것.
물론 ‘원작자’라는 단어가 괜히 있는 게 아닌 만큼, 원래 그러한 경향이 있는 건 당연한 일이었지만, 서진의 곡의 경우에는 그 정도가 조금 심하달까?
비유하자면 마치… 친구에게 애써 곡을 헌정했는데, 정작 그 친구는 손이 짧아 그 곡을 칠 수 없었다는 라흐마니노프의 웃픈 일화와 비슷하면서도 또 다른 상황.
-오우…! 나는 도저히 서진 너처럼 소리를 낼 수 없더라고.
-무슨 소리예요!? 너무 멋진 연주였는걸요!
1부에서 먼저 공연을 마친 다비트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한 말이었다. 서진은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누가 봐도 훌륭한 연주였다.
하지만 다비트는, 원작자가 연주했을 결과물과는 뭔가 다르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다. 아직 서진이 이 곡을 연주한 걸 들어본 적은 없지만, 분명 완전히 다른 신세계를 보여줬을 테지.
‘…아마도 심상 능력 때문이겠지.’
가끔은 사기 같은 느낌이 들어서 찔릴 때가 있지만, 이미 벌어진 일 어쩌겠는가.
음악으로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준다는 것, 그것만이 중요할 뿐이었다.
바이올린의 활이 마지막 음을 깊게 내리긋자, 객석에서 기다렸다는 듯 박수가 터져 나왔다.
* * *
서진이 맡게 된 영 마스터 클래스는 학생들로 인산인해였다.
그 유명한 ‘한서진’이 온다는 소문 때문인지, 준비된 좌석이 꽉 차다 못해 통로에까지 사람이 넘쳤다.
살짝 열린 문틈 너머를 본 서진은 조금 당황했다. 자신이 이렇게 인기인지 전혀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었다.
“어… 사람이 조금 많네요?”
서진을 친히 안내해준 송여름에게 서진이 떨떠름히 물었다.
“당연하지. 누가 하는 건데. 다들 미래의 한서진을 꿈꾸는 아이들이야.”
“…아, 흠흠.”
자신이 존재감이 이 정도일 줄은, 누군가에게 이렇게나 큰 영향을 끼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초롱초롱한 아이들의 눈빛이 별처럼 박혀 들었다.
“다들 전공하는 아이들인가요?”
“대부분 그렇겠지만, 취미 정도로 시작한 아이들도 많을 거야. 알다시피 기존의 마스터 클래스랑은 조금 다른 가벼운 자리니까, 입문자들도 부담 없이 신청했나 보더라고.”
서진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속으로 갸웃했다.
취미로 하는 정도인데, 이 먼 평창까지 와서 클래스에 참여한다고? 다들 인근 주민일 리는 없을 텐데….
“아마도 그 드라마의 영향이 컸던 것 같아. 요즘 엄청 유행이라던데.”
“드라마요?”
뭐였더라 그게….
‘아.’
그러고 보니 그런 게 있었다. 자신이 작곡한 곡 중 몇 개가 무슨 드라마 음악에 쓰였다고.
해외에 머무는 동안 그런 요청이 있었다고 어머니를 통해 전해 들었던 기억. 뭐 따로 작업이 필요한 것도 아니니 흔쾌히 수락했었다.
한데 저작권자로서 사용을 허락해줬을 뿐, 그 후로 딱히 신경 쓰지 않아서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근데 그게 그렇게 유행이라고?
“응. 요즘 카페나 바 같은 데서 네 음악이 심상치 않게 들려오더라고?”
그건 알고 있었다. 어머니한테 들은 것도 있고 저작권 수입이 쏠쏠한 걸 보고 대충 예상하고 있었으니까.
-세상에, 서진아! 엄마가 저번에 엄마 친구랑 카페에 갔는데, 세상에! 우리 아들 노래가 나오고 있는 거 있지!
서진이 세상에 내보인 수많은 곡들, 개중 대중적인 곡들 몇 개가 특히 인기인 모양이었다.
한데 원래도 그러던 마당에, 드라마가 뜨면서 더욱 대중적으로 알려진 것.
길거리에서, 거리의 매장에서, 카페에서, 바에서,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우연히 듣게 된 수많은 사람들.
클래식 음악 따위, 그것도 요상한 현대 클래식 곡 따위 뭐 그리 대단하다고 유명세냐며 까던 사람들도, 우연히라도 한 번 듣고 나면 모두가 인정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렇군요.”
갑자기 어깨가 무거워진다.
자신에게 기대를 잔뜩 품고 먼 길을 온 이들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서진은 더욱 열심히 알찬 시간을 보내겠다고 다짐했다.
짝짝짝짝!
안으로 들어서니 시작부터 박수가 격하게 터져 나왔다.
서진은 담담히 웃으며 모두에게 인사를 건넸다.
빽빽할 정도로 많은 인원을 보아하니, 보통의 마스터 클래스와는 확실히 다르게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한 명 한 명 소리를 봐주기에는 도저히 감당이 안 되는 인원이었으니까.
그중, 맨 앞줄에 앉은 몇몇의 얼굴이 들어왔다.
‘저 애는….’
오늘, 마스터 클래스가 열리기 전부터 꾸준히 눈여겨보던 아이.
서진은 한국 클래식 음악의 미래를 이어 나갈 꿈나무 아이들에게 상당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는데, 그 아이들이 자신의 꿈을 펼쳐 올바른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가능한 한 최선을 다해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저 소년은 ‘제2의 한서진’이라는 별명을 가진 아이였다.
기분이 묘했다. 세월의 무상함이라는 게 이런 걸까. 갓 회귀해 다시 바이올린을 잡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한때 자신 역시 ‘제2의 XXX’라는 수식어로 불린 적이 있었다.
‘그때 내가 뭐라 그랬더라….’
그 별명을 어떻게 생각하냐는 인터뷰에서…
그래, 그랬지.
제2의 누구보다는, 자신의 이름 자체로 기억되었으면 한다고. 혹여라도 그 틀에 자신을 맞추려 들게 될까 저어된다고.
똑같은 말을 아이에게 해주고 싶다.
제 입으로 말하기 그렇지만, 제2의 어쩌고라는 찬사를 받고 있는 만큼 재능 역시 상당하겠으나….
‘그만큼 부담도 엄청나겠지.’
무슨 말로 클래스를 시작해야 할지 잠시 고르던 서진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클래식 음악을 한다는 것은… 정말로 이 짓을 지독히도 좋아해야만 걸을 수 있는 길입니다.”
그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음악을 즐기는 것.
물론 그 과정에서 중간중간 고난이 있는 건 당연했다. 세상에 그저 즐겁기만 한 일은 결코 없으니까.
그럼에도 기본적으로 즐거운 마음이 있어야 했다. 만약 조금도 그럴 수 없다면, 조심스러운 말이지만 더 이상 이 길을 권하고 싶지 않다고.
그렇게 시작한 강의는 서진이 그간 경험해온 음악에 대한 소소한 이야기로 이어졌다.
꿈나무 아이들은 열심히 눈을 빛내며 집중했다.
서진은 돈벌이나 그런 현실적인 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했다.
그런 말을 하기엔 저 역시 고작 19살이기에, 꼬꼬마 어린이들에게 꺼내기에 우스워 보일 것 같았다.
“…그런데요, 애정과 열정은 있는데, 재능이 모자라는 경우엔 어떻게 해야 하나요?”
도중 누군가가 손을 번쩍 들고 질문했다.
충분히 나올 법한 질문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서진이 답했다.
“일단… 연습이 즐겁다는 것만으로도 최소한의 재능은 보장된 셈입니다. 잔인한 말이지만…,”
음악적 재능이 정말로 전무하다면 – 예를 들면 음치 수준으로 음감이 전혀 없다거나, 처참할 정도로 박치라거나 – 애초에 즐거운 마음으로 연습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테니, 즐겁게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의 재능은 있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러니 중요한 건, 남들보다 얼마나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느냐보다는 자신을 얼마나 잘 파악하고 있느냐라고 말하고 싶군요.”
어차피 완벽한 사람은 없으니까.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강점과 약점, 그것을 정확히 알고는 강점은 보다 계발하고, 약점은 커버하는 식으로 나아가라고.
어찌 보면 그저 입에 발린 말이라 할 수도 있는 이야기였다. 음악만큼 재능이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는 분야가 또 없으니까.
서진 역시 회귀 전, 아니 회귀 직후까지만 해도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꾸준히 음악을 해 오면서, 친구들과 함께 즐겁게 연주하는 시간을 가져오면서, 또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에게 행복한 감정을 전해주는 과정에서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중요한 건 완벽한 기교의 연주가 아니라, 마음을 전하는 것이라고.
재능이 조금 부족해도, 진정으로 음악을 사랑한다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라고.
그러는 본인은 정작 말도 안 되는 재능 – 특히 그 기이한 심상 능력 – 을 가졌기에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음악에 진심을 담지 않았다면 애초에 그 능력이 있어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을 터였다.
“그렇기에 제가 모두에게 하고 싶은 말은… 자신이 남들보다 뛰어난 영재라고 결코 자만하지 말고, 반대로 재능이 조금 모자라다고 좌절하지 말길 바란다는 것입니다.”
솔직히 말해, 영재니 뭐니 그런 건 별 의미 없었다. 어차피 이 바닥은 영재가 아닌 천재만 알아주는 세계니까.
진짜로 극소수의, 음악사를 다시 쓸만한 천재가 아닌 이상 재능의 수준은 거기서 거기였다.
“아무리 이 바닥이 재능에 가장 크게 좌우되는 곳이라곤 하지만, 그게 언제 꽃필지, 어떤 식으로 재능이 발휘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니까요. 대기만성이라는 말이, 이곳 음악계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답니다. 여러분은 그저 부디 자신을 믿고 최선을 다하면 됩니다. 그 안에서 행복을 발견할 수 있다면 말이지요.”
기대감과 함께 이유 모를 긴장감, 그리고 미래에 대한 걱정과 부담감으로 가득하던 어린 학생들의 얼굴이 한결 편안해졌다.
* * *
길고도 짧았던 평창·대관령 음악제의 막이 내렸다.
일정을 마무리한 서진 역시 아는 이들에게 인사를 한 후 떠나려는데, 송여름이 다가와 조용히 말을 걸었다.
“서진아, 잠깐 시간 괜찮아?”
“네, 왜요?”
“누가 좀 만나보길 원하셔서….”
“저를요?”
이어지는 그녀의 말에 서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천재 바이올리니스트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