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 returned as a genius violinist RAW novel - Chapter 117
117화
“그러게요. 다 해금의 선율이 기가 막힌 덕분이지요.”
서진이 겸손히 그녀에게 공을 돌렸다.
빈말이라도 기분 나쁠 리는 없는 법. 윤희는 곱게 눈을 흘기며 미소지었다.
“흐응, 천재 작곡가님께서 이 누님을 놀리는 거지?”
“그럴 리가요.”
자칭 ‘누님’이라 하기엔 나이 차가 제법 나는 그녀는 30대 중후반의 나이였다. 하지만 서진이 내심으로는 ‘누님’ 정도가 아니라 동년배 느낌으로 그녀를 여기고 있다는 걸 알면 무척이나 황당할 터.
서른이 넘은 늦은 나이에, 잘 다니던 국립국악원에 사표를 내고 선택한 유학.
서울대 음대에서 박사학위까지 전부 마친 엘리트인 그녀는 현대음악과 해금을 접목해 보겠다는 부푼 꿈을 안고 전통 국악에만 매진하던 기존의 전공을 과감히 바꾸었다.
그렇게 미국까지 넘어왔지만 여전히 스스로의 선택에 대해 긴가민가 의문이 있었는데, 이 소년을 만난 순간 그러한 고민은 깨끗이 날아가 버렸다.
올림픽 개막식 방송을 보게 되며 우연히 접하게 된 ‘달토끼’ 라는 곡.
그저 감탄만 나올 뿐이었다. 국악과 서양음악의 조화를 어쩜 저렇게 자연스럽게 이루어냈는지, 너무 신기해서 작곡가에 대한 정보를 미친 듯 찾아봤더랬다.
그런데 그 작곡가의 나이가 너무 어려 깜짝 놀랐다. ‘세상에, 이런 게 바로 재능이구나…’ 하는 생각에 허탈해질 만큼. 그러는 자신 역시 평생 천재 소리를 듣고 자랐는데 말이다.
아무튼 그렇게 우연히 들은 곡으로부터 얻은 영감을 해금의 연주에도 어떻게 활용해 볼까… 하던 중, 건너건너 인맥을 통해 놀라운 제의가 온 것이 아닌가!
바로 ‘달토끼’의 숨은 주역, K 콰르텟 팀이 카네기 홀에서 함께할 연주자를 찾고 있다고!
당연히 뒤도 안 돌아보고 응했다.
그렇게 협연이 결정되고는, 처음으로 만남을 갖기까지 어찌나 두근거리던지….
며칠 전 드디어 이루어진 첫 만남.
직접 만나 본 이들의 실력은 기대했던 것과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진짜배기였다. 아니 기대보다 훨씬, 그 이상이었다. 실제 들어본 연주는, 개막식 영상에서 보던 것과 차원이 달랐던 것이다.
그녀는 이 만남이, 머잖아 함께 하게 될 K 콰르텟과의 공연이, 자신을 인생을 완전히 뒤바꿀 계기가 될 거라 예감했다.
“나는 정말, 와… 이게 정말 가능할 줄 몰랐거든.”
아직까지도 엄청 신기한 기분이랄까. 사실 그녀도 작곡을 공부하고 있는 만큼 더욱 그런 마음이 들었다.
“분명 현대음악인데 전통 음악으로 들리는 신비라니…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뜬 기분이야.”
“과찬이세요. 국악의 문법을 일부 차용했을 뿐인걸요.”
“오, 나도 궁금하군. 자세히 좀 말해줄 수 있는가? 동양의 신비로운 음색은 처음이라 완전히 홀려버렸다네.”
한 차레 진행된 리허설 사이, 잠시간의 쉬는 시간에 시작한 대화는 지휘자인 츠벤이 가세하면서 예정보다 길어지게 되었다.
“음… 별 건 아니고요. 현악기에 국악 음계를 할당한 게 컸던 것 같아요. 그리고…,”
“장단. 그치? 후반부에 이거, 엇모리장단 맞지?”
역시 국악 전공자답게 한눈에 알아보는 그녀였다.
“네. 맞아요. 리듬꼴에 국악 장단을 적극 활용했지요. 악장마다 진양조, 자진모리 등등 살짝 변화를 주어서요.”
“아하. 악장의 구분으로서도 의미 있고, 여러모로 색다르고 좋았어.”
사실 서진의 시도나 착안한 아이디어 자체는 그리 특별한 게 아니었지만, 그 결과물은 결코 그렇지 않았다.
“아, 마에스트로 츠벤. 여기서 말하는 장단이란 말이죠…,”
용어를 잘 모를 메트 쪽 사람들을 위해 서진은 음계를 비롯해 장단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곁들여 말해주었다.
“호오….”
한국인이 아닌 츠벤은 전문적인 용어를 완벽하게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어쨌든 대충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동양의 음악은 확실히 분위기가 다르군. 하지만 내가 진심으로 놀란 점은 단순히 그런 게 아니네. 동양의 선율을 동양의 악기가 아닌, 서양음악의 악기로, 그것도 현대음악으로 풀어낸 것, 그것이 놀랍지. 이 곡은 분명 현대음악 애호가들도, 정확히는 서양음악에만 익숙한 관객들도 즐겁게 들을 수 있을 것일세. 안 그런가, 제임스?”
그렇게 호언장담을 한 츠벤은, 악장인 제임스를 보며 동의를 구했다.
그에 제임스 역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는 긴가민가 확신이 없었는데….’
그 역시 K 콰르텟의 개막식 영상을 감명 깊게 봤기에 그들 자체는 믿었지만, 해금이라는 생소한 악기와의 협연이 걱정이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처음에는 K 콰르텟을 일반적인 협연자 정도로 생각했기에, 저쪽에서 프로그램 구성에 대해 적극적으로 의견을 낸다는 것 자체가 떨떠름했던 것이다.
혹여 관객들로부터 혹평을 받아 망하기라도 하면 오랜 세월 유지해온 메트 오케스트라의 명성에 금이 가게 될 테니까.
하지만 그건 완전한 기우였다.
“네. 저도 정말로 마음에 듭니다. 공연에 대한 관객들의 반응이 벌써부터 기다려질 만큼요.”
“하하하, 나 역시 그렇네! 더 많은 사람들에게 들려주지 못하는 게 안타까울 정도로 말이지. 아, 언젠가 나중에 이걸 꼭 한국에서가 아닌, 서구권의 축제 자리에서 연주하는 것도 상당히 반응이 좋을 것 같네!”
그의 말에 서진은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한국의 축제나 행사에서 서양음악이 연주되는 건 당연한 일인데, 왜 그 반대의 경우는 전무하다시피 할까.
안타깝게도 일단 서진부터가 잘 상상이 가지 않는 게 현실이었다.
하지만 언젠가 그런 날이 온다면 정말로 좋겠다. 우리의 선율로 만든 음악이 당연하다는 듯 다른 문화권에서도 즐겨 연주되는 날이.
‘내가 노력하면 언젠가 그런 날이 올 수 있을까…?’
그의 말대로 어쩌면 이게 그 시발점이 될 수도 있겠다. 꼭 한국의 전통 음악을 그대로 선보여야 하는 건 아니니, 동서양 음악과 악기의 콜라보레이션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시도일 터.
한국에서야 국악 전통악기로 서양음악 연주하는 일이 흔하다지만, 반대로 외국에서 서양악기로 우리의 선율을 연주하는 일은 몹시 드무니까.
“상상만으로도 뿌듯한 일이군요. 언젠가 꼭 그렇게 되면 좋겠습니다.”
아직은 먼 미래. 그걸 위해서는 일단, 당장의 무대를 성황리에 마치는 것이 중요했다.
“그럼… ‘달토끼’의 리허설은 이 정도면 되겠지요?”
그러는 사이, K 콰르텟의 나머지 멤버들과 자잘한 논의를 마저 나눈 그녀가 악기를 정리하며 물었다.
“네. 공연 날 뵙지요. 모쪼록 컨디션 잘 유지하시기를요.”
“고마워요. 그럼 서진 군, 나머지 곡들도 기대할게요.”
한 곡을 끝으로 윤희는 자리를 떠났다.
그녀와 함께하는 곡은 ‘달토끼’ 한 곡으로, 나머지 프로그램은 K 콰르텟을 중심으로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었다.
‘달토끼’가 아닌 새로운 곡으로 콰르텟과 오케스트라의 협주곡 1곡, 서진이 바이올린 솔로로 메트 오케와 협주곡 1곡, 마지막으로 온전히 K 콰르텟만이 연주하는 곡, 이렇게였다.
즉 아직 리허설을 위해 갈 길이 멀다는 것.
짧은 쉬는 시간이 끝나자, 다시 집중해야 할 시간이 되었다.
* * *
드디어 공연 당일.
리허설에서 호평 일색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서진은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전문가의 귀와, 일반 대중들의 귀는 또 다른 법이니까.
한국의 선율을 섞었다고는 하지만 어쨌든 음악의 장르로 따지면 현대음악의 범주에 드는 곡이다.
원래도 현대음악은 듣는 사람만 듣는, 웬만큼 음악을 했다는 사람이 아니면 듣기 쉽지 않은 법인데, 뉴욕의 시민들로서는 익숙지 않을 색채까지 가미되어있다 보니 과연 반응이 괜찮을지 걱정이 되는 것이다.
음악사에 한 획을 긋는 천재 작곡가들도 초연 당시 끔찍한 혹평을 받는 일이 비일비재했는데….
개막식에서의 반응이 좋았다고는 하지만, 해금을 메인으로 편곡한 만큼 그때의 공연과는 또 달랐다. 개막식에서의 공연은 판소리가 메인이라 나름대로 볼거리도 있었고, AR을 활용한 무대효과도 상당했으니까.
과연 반응이 어떨지….
관객들의 차가운 평가에 딱히 상처를 받지는 않겠지만, 팀의 리더로서 공연의 결과가 좋지 않을 경우 무척이나 마음이 무거워질 터였다.
게다가 친구들이야 연주자이니 설령 관객들 반응이 좋지 않다 해도 연주만 잘했다면 아무래도 상관없겠지만, 작곡가인 서진은 달랐다.
“걱정 마. 잘 될 거야.”
그런 마음을 귀신같이 읽어낸 지연이 한 마디 건넸다.
“그래. 걱정 말고 우리 파이팅하자!”
“맞아. 우리가 언제 한 번이라도 망한 적 있었어?”
“서진이 네 곡들은 하나같이 다 마스터피스라고.”
웬일로 약한 모습을 보이는 서진을 북돋아 준 건 늘 든든히 의지가 되는 친구들이었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함께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뎌주는 소중하고 고마운 친구들.
“좋아, 그럼… 자, 뉴요커들 귀 호강시켜주러 가자고!”
* * *
첫 곡은 예의 ‘달토끼’였다.
객석은 예상외로, 아니 예상대로 꽉 차 있었다. 생소한 프로그램임에도, 메트 오케스트라의 이름만으로도 발걸음을 한 게 아닐까 싶었다.
해금 특유의 쨍한 소리가 고요한 공간을 갈랐다.
찰현악기에 속하는 해금은 바이올린 못지않게 소리를 예쁘게 내기 쉽지 않은 악기였다. 잉낑낑거리는 거친 소리가 아닌, 섬세하고 부드러운 선율을 자아내기 위해서는 상당히 세심한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게다가 서진이 작곡한 곡의 특성상 음의 굴곡이 큰지라 음정에도 세심한 주의가 필요했다.
그런 면에서 윤희는 대단한 실력자였다.
구슬프면서도 아름다운 선율이 장내를 가득 메운 인파의 귀를 파고들었다.
난생처음 들어보는 악기의 소리.
하지만 거북함이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아주 독특한 편성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잘 어울렸으니까.
해금 솔로를 메인으로, K 콰르텟이 국악기를 대신해 잔잔한 반주를 채웠다. 아직 오케스트라는 얌전히 자신의 등장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
서진을 비롯한 콰르텟 멤버들은 제 역할에 충실히, 최선을 다해 해금의 선율을 보조했다.
동서양의 전혀 다른, 서로 이질적인 악기들이 만들어내는 하모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찌나 그 조화가 신묘한지 사람들은 전율했다.
이건 정말… 연주도 연주지만, 특히 작곡 능력이 신의 경지에 이른 수준이었다.
‘저기 저 소년이 직접 작곡한 곡이라고…?’
앳돼 보이는 얼굴이 잘해야 십대 중반 정도 될 듯한데…?
일견 미스테리한 수준의 일이었지만, 딴생각에 빠져있을 틈은 길지 않았다. 이 경이로운 음악을 잠깐이라도 놓치고 싶지 않았으니까.
가냘프게 시작한 해금의 선율은 어느덧 경쾌한 울림을 자랑하기 시작했다.
점점 휘몰아치는 가락.
제목 그대로, 달에서 떡방아를 찧으며 뛰어노는 토끼가 연상되는 그런 음색이었다.
어떨 땐 한없이 여리다가도, 때론 강렬한 울음을 토해내는 해금의 신비로운 음색.
국악기의 소리라는 것을 난생처음 들어보는 관객들은 동양의 마법에 홀딱 빠져버렸다.
얼핏 보기에는 두꺼운 실이 대충 뭉쳐져 있는 것이 줄이라고는 한두 개밖에 없는 듯한데, 어떻게 이런 독보적인 음색을 내며 선율을 리드할 수 있는지 신기했다.
애달프고 구슬픈 듯하면서도 선명한 감정을 토해내는 선율에 관객들은 홀린 듯 빠져들었다.
천재 바이올리니스트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