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 returned as a genius violinist RAW novel - Chapter 122
122화
한두 푼짜리 공연도 아닌데 덜컥 걱정이 들 수밖에. 뉴욕필도 뉴욕필이지만, 이자크 펄의 연주를 얼마나 기대했는가.
그것 때문에 베이비시터를 불러 애까지 맡겨놓고 어렵사리 보러 온 공연인데, 실망만 가득하면 어쩌지….
표를 취소하려면 취소할 수도 있었지만, 나름대로 검색해 보니 얼마 전 카네기 홀에서의 공연 평이 상당히 좋았기에 그냥 발걸음해 보았다.
하지만 평소 워낙 이자크 펄의 연주를 좋아했기에, 아무래도 그에 비할 수는 없을 거라는 생각이었다.
그래도 이왕 온 거, 너무 실망스럽지만 않으면 좋겠는데….
이윽고 장내가 깜깜해졌다.
마침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이 첫 곡이었다.
기대 반, 우려 반 속에 뉴욕 필의 연주가 시작되었다.
뉴욕필의 연주는 훌륭했다. 언제나 그렇듯이, 아니 평상시보다 유독 좋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언뜻 보이는 악장의 표정에는 어떠한 결의랄까 비장감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사람들은 몰랐지만, 그건 리허설에서 서진의 연주를 듣고는 큰 충격을 받은 탓이었다. 서진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아, 그에 뒤지지 않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연주하는 중인 것.
뉴욕필의 연주가 오늘따라 기대 이상이라서인지, 사람들은 곧이어 나올 솔리스트의 소리도 은근히 기대하기 시작했다.
과연 저 소년은 어떤 음악을 들려줄까.
그렇게, 드디어 서진의 활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
“…!?”
서진은 자신을 조금도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정말로 특별하다 못해 말도 안 되는 음색을 지닌 게 맞았다.
나름 뉴욕필의 악장인데, 저 소년의 바이올린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기가 죽을 정도로.
그 정도 되는 내로라하는 연주자도 그럴진대, 윤수가 서진의 존재에 의기소침해지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아마 비올라가 아니라 계속 바이올린을 했다면 더욱 여실히 느꼈겠지.
악기가 다른데도 이렇게 자격지심이 드니까.
그리고 그건 지연 역시 마찬가지였다. 비올리스트인 윤수마저 그런 감정을 느낀다는 말은 즉, 내색하지는 않지만 지연 역시 상당한 고뇌에 휩싸여 있다는 뜻이었다.
관객석에 앉아 빛나는 무대를 바라보는 지연의 눈에 복잡한 감정이 스쳤다.
이렇게, 관객으로서 앉아 서진이 연주하는 모습을 바라보니, 더욱 반짝반짝 눈이 부신 기분이었다. 괜히 ‘바이올린 귀공자’라는 별명이 붙은 게 아니구나, 생각될 만큼.
남들은 서진을 보고 그저 천재라 생각하고 말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그가 이 자리에 서기까지 들인 엄청난 노력과 열정을 알고 있었다.
이 곡 역시, 급히 잡힌 공연을 앞두고 짧은 시간 동안이나마 혼신의 힘을 다해 준비했었으니까.
현재 서진이 서 있는 경지는, 그 모든 피땀 어린 노력이 뒷받침되어 이루어진 결과물이었다.
그에 비해 저만큼 노력하지 못하는 자신에게 자괴감도 들었다.
하지만 같은 노력을 쏟아붓는다 해도 같은 결과물이 나오지 않는다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기에, 그게 그렇게 마음대로 되지가 않았다.
그렇다면 그 이상, 배의 노력을 쏟아부으면 그만이라 누군가는 말하겠지만,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부족한 가운데 밑도 끝도 없이 최선을 다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나는….’
서진에게 어느 순간부터 적극적으로 다가가지 못하는 것도 이러한 복잡한 감정 탓이었다. 그의 곁에 나란히 서기엔 자신이 너무 초라해지는 것 같아.
그럼에도, 서진과 비교되는 제 재능에 괴로운 마음이 드는 한편으로도, 이렇게 바라만 보고 있는 것으로도 너무 황홀해 ‘한서진’이라는 마약 같은 존재를 도저히 포기할 수 없었다.
그녀에게 있어 서진은 평생의 목표이자, 자신이 도달하고자 하는 이상향 같은 존재였으니까.
이렇게 표정 하나하나가 생생히 전달될 거리에서 그의 음악을 듣고 있자니, 마치 함께 연주하고 있는 기분마저 들었다.
내가 저만큼 할 수 있다면, 정말로 얼마나 좋을까.
* * *
약 40분가량의 연주 시간을 자랑하는 이 곡은, 그 악명높은 난이도만큼이나 엄청난 체력을 요구했다.
새삼 예술은 체력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구나 싶을 정도로.
체력 소모가 어마어마할 거라는 것은, 굳이 저 자리에 직접 서 보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저 호리호리한 몸에서 폭발하듯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라니… 거의 존경스러울 정도였다.
반듯한 이마에 흐르는 땀방울은 비단 강렬한 조명 탓만은 아닐 터. 온 영혼을 전부 갈아 넣어 연주하고 있다는 것이 듣는 이들에게도 여실히 전해져 왔으니까.
정말이지 대단한 집중력이었다. 연주자도 그렇고, 관객들 역시 마찬가지로.
연주하는 입장에서 엄청난 체력이 필요한 건 당연한 일이었고, 함께 호흡하는 관객 역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에너지가 소모되는 긴 시간인 것이다.
하지만 그 긴긴 시간을, 관객들은 숨도 제대로 쉬지 않은 채 집중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영혼의 전율이 온몸을 옭아맸기에.
아아…
절정의 순간 터져 나오는 음의 향연이 심장을 달구었다.
강렬하면서도 섬세한 음색.
눈앞에서 불꽃이 펑펑 터져 나오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어떻게 이 조그마한 악기 하나로, 이토록 광대한 세계를 표현해 낼 수 있는지… 고작 한 대의 바이올린이, 나머지 수십 대의 현악기들이 내는 소리를 압도한다.
사정없이 쏟아져 내리는 음의 파도.
영혼이 공명하는 소리에 몸이 부르르 떨렸다. 바이올린이라는 악기에 다시 한 번 깊이 매혹되는 순간이랄까.
그와 동시에 문득, 누군가는 이런 생각을 떠올렸다.
바이올린을 깊이 사랑하게 되는 순간임과 동시에, 깊이 실망하게 되는 순간이 될 것만 같다고.
왜냐하면, 이제 다른 어디에서도 이와 같은 감동을 느끼지 못할 테니까. 눈앞의 이 소년의 연주가 아니면, 앞으로는 바이올린의 소리에 대한 실망만을 느낄 테니까.
“아아….”
역동적인 감동의 소용돌이 속에, 어떤 이들은 끝내 입 밖으로 탄성을 내뱉고야 말았다.
하지만 그런 작은 소음 따위, 조금의 방해도 될 수 없었다.
격렬한 전투를 치르듯 치열한 연주를 선보이고 있는 손과 달리, 연주자의 표정은 그저 음악을 깊이 즐기고 있을 뿐이었으니까.
함께 울고 웃고 있던 관객들 역시 자연히 비슷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이토록 즐거운 축제와도 같은 순간에, 작은 소음 따위 귀에 들어올 리가.
오직 음악으로만 두 귀가 꽉 찬 행복한 경험.
연주자가 전해오는 생생한 감정에 가슴이 조여들 듯 뻐근했다. 그 벅찬 감동을 마음에 담아내기가 너무나도 벅찰 정도로.
여운에서 헤어나올 새도 없이 이어지는 카덴차.
이 곡의 카덴차는 작곡가인 차이코프스키가 직접 만든 것이었는데, 모든 분야의 정교한 테크닉을 필요로 할 만큼 기교적으로 어렵지만, 제대로 해내기만 한다면 굉장히 아름다운 선율을 자랑했다.
무아지경에 몰입해 있는 연주자는 끔찍할 정도로 높은 고음도 완벽하게 처리해 냈다.
가느다란 선율임에도 남다른 파워가 느껴지는 음색.
이토록 어려운 난곡을, 이렇게 손쉽게 다루다니…. 심지어 소년의 입가에는 자그마한 미소마저 피어 있었다.
진심으로, 미쳤다는 소리밖에 안 나올 정도의 신들린 연주였다.
사실 이 곡이 이토록 어려운 이유는, 슈베르트의 바이올린 곡이 그러한 것과 비슷한 이유에서였다. 차이코프스키가 바이올린을 제대로 배우지 않은 탓에, 바이올린 연주법에 대해 무지하여 나온 결과.
그런데 지금 연주하고 있는 서진의 모습에서는, 전혀 그러한 점을 짐작조차 해볼 수 없었다.
그저 가뿐하게 모든 소리를 제 것으로 만들고 있었으니까.
오늘의 무대를 위해 미리 오랜 시간 준비해 왔다 해도 믿을 정도로 완성된 소리였다. 마치 처음부터 그가 협연자였던 것처럼.
별다른 정보 없이, 솔리스트가 교체된 것을 모른 채 왔더라면, ‘아, 역시 거장이라더니 정말 대단하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였을 터.
활 쓰는 것이 얼마나 자유자재인지, 음 하나하나가 조금의 군더더기도 없이 깨끗했다. 딱 단정한 생김새답게, 깔끔하면서도 우아한 연주. 어떻게 저런 폭풍과도 같은 열정 가운데서 이토록 차분하고 정돈된 소리를 보여줄 수 있는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반면 사람들은 어찌나 흥분해 있었는지, 악장과 악장 사이에, 매너가 아닌 걸 알면서도 박수를 치기도 했다. 1악장이 끝난 순간 저절로 박수가 튀어나오는 것이었다.
…솔직히 이건 못 참지. 누군들 이해할 만한 일이었다.
그렇게 벌써 30여 분의 시간이 흐르고, 연주는 이제 거의 막바지에 이르러 있었다.
벌써 마지막 3악장이라니 너무나도 아쉬웠다.
그러니 더더욱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귀에 담아야지. 오래도록 귓가에 맴돌 아름다운 선율을, 깊이깊이 기억해 두어야지.
그러한 바람을 연주자 역시 이루어주고 싶은 모양인지, 소년은 마지막까지 깊은 열정을 쏟아냈다.
너무나도 격렬한 연주 탓에 순간적으로 줄이 팅 끊어져 나갈 정도로.
“…!”
사태를 눈치챈 몇몇 사람들의 얼굴에 안타까움이 스쳤다.
이토록 충만한 순간에 이런 예기치 못한 사고라니….
정확히는 줄이 끊어진 건 아니고, 무슨 이유에서인지 줄감개(페그) 부분이 헐거워지면서 텅 하고 줄이 풀려버린 것.
인간적으로 악기를 너무 혹사시켰으니 그럴 만하긴 했다. 워낙 고악기인 만큼 온습도에 예민하게 영향을 받는 것도 있었고. 무대의 조명이 좀 강한가.
‘그래도 하필 이런 타이밍에….’
겨우 1분 남짓 남은 연주를 도중에 끊고 싶지는 않았다. 서진은 일단 연주 중이던 프레이즈는 적당히 포지션을 바꿔가며 마무리하고, 비는 틈을 타 얼른 악장을 바라보았다.
짧은 틈을 타 다시 줄을 조여 조율을 하는 것보다는, 다른 악기를 빌리는 게 빠르다. 원래 이런 경우, 악장이 곧바로 협연자에게 악기를 건네는 것이 기본이기에.
그 모습을 본 지휘자는 서진의 눈짓에 일단 계속 곡을 진행했다. 그나마 다행히도, 독주 파트가 없는 부분에 들어선 덕분이었다.
한데 악장은 어쩐 일인지 서진이 손을 내미는 것을 뻔히 보았음에도 재빨리 제 악기를 건네기는커녕 머뭇대고만 있었다.
“…??”
그러는 사이에도 곡은 흐르고 있었고, 서진은 살짝 당황했다.
이런 경우는 난생 처음이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인 것이다.
무슨 일이지…?
이다음의 솔로 파트는 빠른 속도의 더블스탑으로 도배되어 있어 도저히 남은 세 줄로는 무리인데…. 이제라도 얼른 제 악기를 조율하는 게 나으려나?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악기를 손보자니 그새 시간이 흘러 빠듯했다.
‘대체 왜….’
초조한 와중에도 악장은 여전히 악기를 건네주지 않은 채, 객석 어딘가를 보며 난색을 표하고만 있었다.
아무리 마음이 급해도 남의 악기를 억지로 빼앗을 수야 없는 일. 서진의 시선 역시 자연히 그쪽으로 향했다.
천재 바이올리니스트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