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 returned as a genius violinist RAW novel - Chapter 129
129화
“피아노?”
“아, 저쪽에 맨날 피아노 한 대 덩그러니 놓여 있던데. 누가 치고 있나 봐.”
“길거리 연주라….”
한국에서는 흔치 않은 일이지만, 유럽을 자주 오갔던 서진은 종종 경험이 있었다.
안 그래도 이런 날엔 길거리 연주가 딱이다 싶었는데, 사람 생각이 다 비슷한 모양인지 이미 무대가 벌어져 있는 것이다.
“어? 근데 이거…,”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니, 보다 선명히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서진의 얼굴에 조금 쑥스러운 듯한 미소가 떠올랐다.
“서진이 네 곡이네?”
“…그러게.”
기분이 묘하달까. 길거리에서 자신의 곡이 틀어져 있는 걸 들은 경험은 종종 있었지만, 누군가 이렇게 직접 연주하고 있는 건 처음이었다.
자연히 더욱 관심이 갔다. 귀를 쫑긋하며 듣고 있던 서진의 얼굴에 이내 놀라움이 스쳤다.
상당한 실력이었다.
거기에 때마침 바이올린 선율도 들려오기 시작했다. 누군가 합세한 모양이었다.
“…우리도 해볼까? 끼어도 되려나?”
서진 역시 문득 마음이 동했다.
“나는 어차피 악기 없어서.”
“아….”
서진은 지연과 달리 연습용 악기를 매고 있었다. 평소 스트라디나 과르네리는 잘 안 들고 다녔는데, 공연 때뿐 아니라 연습 때도 사용하긴 하지만, 따로 마련해둔 연습실이나 집에서 주로 하지 학교에는 잘 안 들고 다니는 것이었다.
하지만 기사 딸린 차량을 주로 이용하는 지연은, 만만치 않게 비싼 악기를 사용함에도 늘 소지하고 다니는 편이었다. 지금은 하필 없다는 게 문제였지만.
“나는 신경 쓰지 말고. 구경하면 되니까. 어? 근데 저 사람… 피아니스트 임효정 씨 아냐?”
“알아?”
“그냥 얼굴만.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는 아니고.”
서진이 피아니스트 쪽을 바라보며 고민하고 있는데, 눈을 마주친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서진이 메고 있는 바이올린 케이스를 보고는 함께 하자는 사인을 보내온 것이었다.
씨익 미소지은 서진이 얼른 악기를 꺼내 들었다. 찬윤이 형은 아쉽게도 이런 거 할 성격이 아니라 아쉬웠는데, 이런 기회를 놓칠 수야…!
이미 연주하고 있던 바이올린 선율에 방해되지 않게 적당히 끼어든 서진은, 더할 나위 없이 자연스레 연주에 녹아들었다.
먼저 연주하고 있던 바이올린이 보컬의 메인 선율을 연주하는 가운데, 서진은 적당히 그를 보조했다.
자기가 작곡한 곡인 만큼 곡의 구석구석을 훤히 알았다. 어울리는 선율과 화음을 추가해 넣는 것쯤이야 얼마든지 즉석에서 할 수 있었다. 덕분에 소리는 더욱 풍성해졌다.
점차 불어나던 관중들은 서진이 가세하고 나자 갑자기 폭발적으로 늘었다.
근처를 지나던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저 멀리서 희미한 선율을 들은 사람들마저 전부 발걸음을 우뚝 세우더니 행선지를 바꾸는 것이다.
마치 자석에 이끌리는 바늘처럼, 사탕에 모여드는 개미처럼,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끌려 들어왔다. 몸이 저절로 향하는데, 정말로 신기한 일이었다.
수백 명이 훌쩍 넘는 관중들은 물결치는 봄의 파도에 흠뻑 젖어 들었다.
이상한 일이지… 그저 음악을 듣고 있을 뿐인데, 한없이 행복해지는 이 기분은 뭘까.
인생의 가장 좋은 시절, 아름다운 계절 속을 꿈결처럼 뛰노는 기분.
넘실거리는 음의 향연에 봄이 가득 차오른다.
정규 공연장에서 듣는 것과는 또 다른 감상. 좀 더 자연스러운, 일상에 녹아드는 마법 같은 힘이 있었다.
서진의 음악이 미치는 영향은, 특유의 심상 능력으로 인한 결과는 실로 대단했다.
저 많은 사람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더없이 강렬한 감정의 홍수를 겪고 있는 것이다. 너무 달콤해서 영원히 허우적거리고 싶을 만큼 진하고 깊은.
고작해야 음악이 주는 감동이, 어떻게 이토록 엄청날 수 있을까. 마치 하나의 거대한 세계를 겪는 기분이었다.
정말로 누가 마법이라도 건 걸까.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영문일까….
사실 그건, 서진의 능력이 이제 완전히 체화된 경지에 다다라 있는 덕분이었다.
바꿔 말하면, 언제 어디서건 능력의 발현이 기본값이 되어버렸다는 뜻.
비유하자면, 이미 득음의 경지에 이른 이가 그 깨달음을 의도적으로 배제한 채 소리를 낼 수 없는 것처럼, 서진 역시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동안 서진은 자신의 능력이 점점 발달하는 단계를 본능적으로 느껴왔었다. 회귀 직전과 그 직후 즈음에는 의지대로 통제가 안 되는 수준이었다면, 그 후 음악적 경지가 발전함과 함께 능력 또한 점점 발달하여 점차 자유자재로 조절 가능한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
그런데 지금은 완전히 몸에 녹아들어, 다시 반대로 억지로 없애거나 할 수가 없어진 것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스스로의 소리에 대한 능력일 뿐, 자신의 연주 외에 전체의 소리를 어우러지게 하는 등, 합주에 대해선 아직 그 경지까지 오지 못했지만….
‘좋은 건지 안 좋은 건지 모르겠네.’
좋게 보자면 이제 이 사기적인 능력이 디폴트로 발현된다는 뜻이었고, 반대로 생각하면 이제 더 이상 순수하게 음악만으로 공정히 승부할 수는 없게 되어버린 상황.
이 역시 자신의 음악의 일부라면 일부라 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조금은 아쉬운 마음이 드는 서진이었다. 가끔은 순수하게 ‘음악’ 자체만을 발전시키고 싶을 때가 있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며 서진은 나머지 두 연주자들에게 시선을 주었다.
살짝 몽롱한 얼굴의 바이올리니스트는 어쩐지 꿈결 속을 거닐고 있는 듯 보였고, 피아니스트는 휘몰아치는 격정 탓인지 숨을 몰아쉬느라 바빠 보였다.
어느덧 연주는 클라이막스를 찍고 있었다.
피아노의 선율이 더욱 거세졌다.
아아…
이토록 몰입한 가운데, 이토록 기쁨과 생기 넘치는 연주를 한 적이 또 있을까. 미친듯한 집중력으로 건반을 두드리는 그녀의 손길이 신들린 듯 움직였다.
그녀는 관중들이 느끼고 있는 것과 비슷한 감상에 정말로 벅찬 기분이었다. 감동과 경악, 끝 모를 고양감과 충격, 좌절감 등이 고루 뒤섞인 상태.
당장은 연주에 집중하느라 다른 복잡한 생각을 할 겨를 따위 없지만, 분명 이런 휘몰아치는 감정이 남기는 여파가 있을 터. 그걸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건 어쩌면 새로운 깨달음일 수도 있고, 어쩌면 천재를 조우한 결과로 겪게 되는 좌절감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후회하지 않았다. 너무도 즐거웠으니까.
쾅!
건반을 내리치는 거센 터치와 함께 마지막 곡이 끝났다.
딱히 마지막이니 어쩌니 정한 건 아니었지만, 장내의 모두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
“….”
“와아아!!”
“브라보!”
사람들의 환호가 거셌다.
일부러 공연장에 오기 위해 발걸음한 사람들이 아닌, 우연히 모인 관객들임을 생각하면 엄청난 호응이었다.
짧지만 강렬한 무대였다.
아마도 오래도록 기억에 남겠지.
그런 흐뭇한 마음으로 서진은 함께 연주한 이들에게 짧은 인사와 함께 자리를 정리하려 했다. 생각보다 지연을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한 것이다. 중간중간 흘긋 보아하니 그녀 역시 충분히 분위기를 즐기고 있긴 했지만, 운전기사도 없이 귀가 중이었으니 늦어지면 집에서 걱정할라.
그런데 막 발걸음을 떼려는 찰나,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조금 전의 그, 함께 연주했던 바이올리니스트였다.
“…?”
“자, 잠시만… 미스터 한, 잠시만 시간… 가능한가요?”
모르는 사람이 자신의 이름을 알고 부르는 상황에도 서진은 개의치 않았다. 보아하니 같은 음악의 길을 걷고 있는 사람인 듯했으니까.
‘아마도 바이올리니스트…겠지?’
저쪽을 흘긋 보니 피아니스트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사인을 해주느라 바빴는데, 서진 역시 곧 그렇게 될 위기일 터였다.
고개를 끄덕인 서진은 남자를 향해 눈짓했다.
* * *
서진과 피터슨이 한가해진 벤치에 나란히 앉게 되는 데에는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걸렸다.
결국 사람들에게 둘러싸이는 걸 피하지 못한 서진은 쏟아져 오는 사인 요청에 한참을 시달렸고, 그 많은 사인을 다 해주고 나서야 간신히 시간을 낼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지연은 먼저 보냈다.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이 한 번씩 지연 쪽도 흘긋대는 상황에 미안해진 서진이 얼른 자리를 피하게 한 것이었다.
“피터슨… 씨라고 했죠?”
“안녕, 하세요.”
남자가 서툰 한국어로 인사를 했다. 다행히 서진이 유창한 영어로 받아치자 이후로는 대화가 편해졌다.
“초면에 갑자기 실례를 해 죄송합니다. 꼭 좀 대화를 나누고 싶어 이렇게 염치 불고 붙잡았습니다….”
“아닙니다. 함께 연주도 한 사이인데, 대화를 나누는 것쯤이야 얼마든지요.”
가벼운 통성명을 끝으로 잠시 대화가 끊어졌다. 일단 다급히 붙잡긴 했는데 막상 입이 떨어지지 않는 것이다.
처음 만나는 사이에, 게다가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던 어린 학생에게 푸념하듯 고민을 털어놓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으니까.
“그게, 실은 별 특별한 용건이 있는 건 아니고…, 그냥 너무 궁금해서, 이런 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은 대체 어떤 사람인지, 꼭 한번 만나보고 싶어서 그랬습니다. 실은 제가… 얼마 전 링컨 센터에서 미스터 한의 연주를 들은 후 큰 충격을 받아서….”
횡설수설에 가까운 피터슨의 말을 서진은 용케 알아들었다.
한데 서진은 오히려 조금 전 그의 연주를 무척이나 감명 깊게 들었기에 조금 의아했다.
생생히 살아 숨 쉬는 소리랄까. 오랜 어둠 속을 헤맨 끝에 빛을 발견한 이가 느낄 법한 그런 감격스러움이 전해져오는 선율이었던 것이다.
그런 멋진 연주를 한 이가 설마 자신으로 인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을 거라는 건 꿈에도 생각 못 했던 일.
“…그렇게 완전히 자신감을 잃어 방황하던 끝에, 무작정 한국에 왔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이렇게 우연히 그 대상을 마주치게 될 줄이야…. 하하. 신이 있긴 있나 봅니다.”
푸념에 가까운 혼잣말이었다. 사실 피터슨은 이 어린 학생이 자신을 위해 상담을 해주길 바라는 건 아니었다. 함께 길거리 공연을 한 유대감 탓인지, 그냥 저도 모르게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게 된 것뿐.
“…그런 일이 있으셨군요.”
사실 전혀 짐작하지 못하던 일은 아니었다. 콕 집어 눈앞의 그가 그런 일을 겪고 있을 줄이야 몰랐지만, 자신으로 인해 누군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될 수도 있다는 건 어렴풋이 예상했으니까.
‘회귀 전의 내가 그랬듯이.’
자신 역시 과거, 재능의 차이로 인한 절망감을 뼈저리게 겪어보았기에. 그 번뇌를 어찌 모를까.
그런데 이건 심지어 순수한 음악적 능력도 아니고, 정체불명의 치트키 능력으로 인한 것이었다.
관객들에게는 상상 이상의 엄청난 감동을 줄 수 있는 그런 능력이지만, 같이 음악을 하는 이들의 입장에서는 단순히 그런 것과는 또 다른 기분을 느낄 수도 있는 일이었다.
친구들은 자신의 음악에 이미 익숙할 대로 익숙해서 그러려니 하는 눈치지만, 다른 사람들은 과연….
서진은 괜히 저로 인해, 다른 이들이 좌절감이나 부족함을 느끼게 하고 싶진 않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지만, 그래도 이 사기적인 능력으로 인해 누군가를 절망시키는 존재가 되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제가 피터슨 씨께 죄송하다는 말씀은 드릴 수 없겠지만, 이 말만은 꼭 해드리고 싶네요.”
천재 바이올리니스트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