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 returned as a genius violinist RAW novel - Chapter 135
135화
1악장, Allegro con spirit.
누군가에게는 낯선, 누군가에게는 들어본 적 있음 직한 우아한 선율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6대의 악기가 동시에 노래하기 시작했다.
강렬한 더블스탑으로 시작되는 1 바이올린의 선율, 그리고 가볍게 튀어 오르는 듯한 반주. 경쾌하면서도 비장한 분위기가 특징이었다.
시작할 때까지만 해도 여전히 불안정한 기색이었던 둘은, 귓가에 파고들 듯 틀어박히는 서진의 선율에 순간적으로 움찔 몸을 떨더니, 신기하게도 금세 평정을 되찾았다. 서진의 소리가 이유 모르게 자신의 음색까지 북돋아 주는 기분인 것이다.
6대나 되는 현악기가 가져다주는 가장 큰 장점은 누가 뭐래도 풍부한 음의 향연이었다. 특히 같은 악기가 두 대씩 편성이 되어있는 덕분에, 아르코와 피지카토의 활용이 보다 자유로웠다. 차이코프스키도 이를 적극 활용하여 작곡하였는지, 그 덕분에 유난히 음색이 다채로웠다.
귓가에 흐르는 선율을 들으며 클레어는 생각했다. 이제 정말 가르칠 게 없는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내가 사사해야겠는데…?
제자는 아니지만 가까이 지내던 선후배 사이로서 서진에게 꽤 많은 조언을 주었던 그녀였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딱 ‘청출어람이청어람’ 라는 말 외에는 할 말이 없었다.
그것은 무현 역시 비슷한 생각이었다.
나는 이제 그만 은퇴해도 여한이 없겠구나… 저 아이를 발견해내고 키운 것으로, 자신의 음악 인생을 통틀어 가장 보람 있는 일을 해냈으니까.
‘플로렌스라….’
음악에 몸을 맡긴 채 눈을 감고 있자니, 한때 한동안 머문 적 있었던 그곳의 거리가 눈앞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새삼스레 벅차오르는 추억. 두오모 성당의 둥그런 계단을 연인과 함께 천천이 걸어 오르던 오래된 장면이 오래된 영화 필름처럼 눈앞을 스쳤다.
서진의 연주는 언제나 그러했다. 마음속 감상을 마치 실제처럼 풀어내게 해 주는 마법 같은 능력.
떠오르는 것은 비단 피렌체에서의 추억만은 아니었다.
사실 이 곡은 ‘플로렌스의 추억’이라는 제목과 달리, 은근히 러시아의 애수가 느껴지기도 하는 곡이었다.
아마도 차이코프스키가 플로렌스에 머물던 시기, 그때 느꼈을 고국에 대한 그리움 역시 함께 추억으로 남았던 게 아닐까. 단순히 여행을 다녀온 게 아닌 이상, 외국에서의 기억이란 으레 고국에 대한 향수가 기저에 깔릴 수밖에 없으니까.
그래서인지 경쾌한 멜로디에도 불구하고 어딘지 쓸쓸함이 전해져 왔다.
그러한 느낌은 2악장에 들어서자 더욱 진해졌다.
2악장, Adagio cantabile e con moto.
총 4악장의 구성 중 두 번째. 선율은 더욱 깊고 서정적으로 흘렀다.
원래 이 곡은 구소련의 전설적인 실내악단, 보로딘 콰르텟의 연주로 가장 유명했던 곡이었는데, 그들의 연주가 어찌나 독보적이었는지 그 후로 이 곡을 연주했던 다른 악단들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조차 되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어쩌면 이번에 그 기록을 갈아치울지도 모르겠다.
기록으로 남아 있는 그들의 레코딩이 예스러운 질감의 고풍스러운 사운드라면, 오늘의 연주는 촉촉한 향수에 젖어 들며, 한편으로는 고국을 향한 애수가 느껴지는 그런 연주였다.
‘나도 더 분발해야겠다….’
오랜만에 스케쥴이 맞아 서진의 공연을 보러올 수 있었던 찬윤은 빙그레 미소지었다.
진심으로 음악을 즐기고 사랑하는 것이 느껴지는 연주. 자신 역시 이러한 감동을 위해 더욱 노력해야겠다는 생각.
…내 공연을 보는 사람도 이런 기분을 느끼면 좋겠다.
오직 피아노 외길인 그였지만, 모든 길의 끝은 통한다고 느껴지는 바가 있었다. 비록 바이올린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나, 이 감동만큼은 모를 수 없었다.
서진과 찬윤은 비록 전공하는 분야는 다르지만, 서로 자극이 되는 존재였다.
맨 처음은 서진이 그의 등을 보며 동경했던 것이 먼저였다면, 지금은 서로가 서로의 발전을 보며 동기를 부여받는 그런 관계.
왠지, 오늘의 공연을 본 덕에 새삼스레 눈을 뜬 기분.
자신 역시 음악을 진정으로 즐기는 건 마찬가지였지만, 연주하는 내내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떠올라 있는 서진만큼은 아니었다.
어떻게 저렇게 행복한 얼굴로 연주할 수 있을까. 그렇기에 다른 사람에게 이토록 진한 감동을 전해주는 것이겠지.
한눈에 둘러봐도, 자리에 앉아있는 모두가 기분 좋은 선율에 깊이 물들어 있는 걸 알 수 있었다. 저마다 느끼고 있는 감상은 조금씩 다르겠지만, 서진의 연주가 전해주는 환상적인 감동은 누구라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일 터.
너무 아름다운 소리에 시간은 순식간에 흘렀다. 이어 3악장 Allegro moderato와 4악장 Allegro vivace까지.
아마도 오늘의 공연은 이 곡의 원조인 보로딘 악단을 능가하는 연주로 길이길이 기억될 것이었다.
* * *
2부는 한예종 학생들로 구성된 오케스트라 연주였다. 국제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일부 졸업생 선배들까지 객원, 혹은 협연자로 포함된 구성에 사람들은 더욱 기대감을 가졌다.
막간을 틈타 오케스트라를 위한 자리가 준비되고, 이어 2부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음악이 시작될 차례가 되었건만 지휘자가 없었다.
“지휘자가 없어?”
“왜 아무도 안 나오지?”
사람들이 웅성대는 가운데, 그대로 음악이 연주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깜짝 놀라 무대 위를 바라보았다.
지휘자 없이… 이대로?
지휘자를 대신해 악장인 서진의 사인에 오케스트라가 일사불란한 연주를 시작했다.
사실 원래 수백 년 전 옛날에는 딱히 지휘자라는 존재 없이, 피아노 주자나 악장 등의 리더가 지휘의 역할을 겸했으니 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지휘자의 존재에 익숙해져 있던 대부분의 관객들에게는 무척이나 이례적인 상황이었다. 다들 깜짝 놀라 무대 위를 두리번거렸다.
한데, 처음엔 굉장히 이상해 보였는데… 막상 듣다 보니 오히려 연주에 훨씬 더 집중이 잘 되었다. 늘 한가운데에 존재하던 지휘자의 존재가 없어지니, 오케스트라 전체의 모습이 훨씬 눈에 잘 들어오고, 연주하는 모습 하나하나가 더 잘 보여 흥미로웠다.
그건 연주하고 있는 단원들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희한하게도 더 집중력이 높아지는 것 같았다. 그 결과 소리까지 확 달라지는 기분.
그저 지휘자만 의식한 채 무의식적으로 자기 파트를 연주하던 것에 비해, 중앙의 지휘자가 없으니 어쩔 수 없이 다른 파트의 소리에 유심히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달까.
그로 인해 자연히 집중도가 높아지며, 소리의 하모니 역시 훨씬 자연스레 이루어졌다.
게다가 이 곡은 서진이 작곡한 곡이었다. 즉 이번 공연의 가장 하이라이트 곡인 셈.
본인이 작곡한 곡을, 지휘자를 대신해 리드하며, 심지어 솔리스트로서 소리를 이끌어나가기까지 하니 그 효과가 오죽하겠는가.
“어? 저기 저 학생만 솔로로 연주하나 봐.”
“그러게? 협연자도 아닌데 신기하네?”
원래 오케스트라가 연주해야 하는 바이올린 솔로 부분이 있을 때, 따로 협연자 없이 악장이 이 솔로 파트를 담당했다. 이 곡도 그런 경우였는데, 서진이 악장 겸 지휘자로서 중심을 잡아가는 가운데, 솔리스트로 메인 선율까지 맡고 있는 것이었다.
그 때문일까, 악곡은 정말로 오케스트라 모두가 한 몸처럼, 마치 거대한 거인의 몸통에 달린 수십 개의 손발이 함께 움직이듯 완벽한 호흡으로 연주되었다.
일사불란, 질서정연. 이러한 단어들이 절로 떠오르는 완벽함인데, 어디까지나 그 조화로움이 끝내준다는 것이지 결코 다 똑같은 단조로움을 보이고 있다는 건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연주자 각각은 이 이상 풍성할 수 없는 다채로움을 뽐냈다.
잘게 떨리는 바이올린 선율과, 폭발하듯 휘몰아치는 첼로의 묵직한 저음. 그 외 현악기 파트가 멜로디를 깔아주는 가운데, 관악기가 일제히 천상의 나팔소리를 토해내며 하이라이트를 뽐냈다.
순간, 가슴이 뻥 터졌다.
꽉꽉 막혀 있던 무언가가 뚫리는 듯한 시원함. 동시에 차오르는 쾌감.
스트레스가 한 방에 날아가는 통쾌함이었다.
나 천국에 왔나 봐….
머릿속에서 팡파레가 울린다며, 누군가의 중얼거림이 작게 스쳤다.
서정적이고 감미로운 멜로디도 좋지만, 때로는 이렇게 꽝꽝 울리는 화려함도 즐거운 법. 특히 소규모 편성의 실내악과 달리, 많은 악기가 등장하는 오케스트라 공연에는 유독 그러한 묘미가 있었다.
“나도….”
곁에 있던 남자가 답했다.
조금 전의 실내악 공연과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였다. 그건 그거대로 좋았지만, 이건 완전히 차원이 달랐다.
악장으로 연주하고 있는 저 학생이 작곡가로 유명하다는 건 익히 알았지만, 그동안 접해본 그의 곡들은 이런 스타일이 아니었기에 전혀 예상치 못한 감상이 터져 나왔다.
사실 그는 한서진이 작곡했다는 곡을 처음 들었을 때만 해도, ‘무슨 이런 해괴한 음악이 다 있대?’라는 게 주된 감상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현대 클래식 음악이라는 게 그리 친숙하지만은 않은 장르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런저런 이유로 듣다 보니 어느새 익숙해져 버린 것인지, 어느 순간부터 하나도 이상하게 느껴지지가 않았다.
그냥 너무나 당연하달까…?
한창 비발디를 듣던 중 드뷔시의 음악이 나온다고 해서, ‘으악! 바로크스럽지 않은 웬 괴상한 게 나와!’ 하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 것처럼, 바로크는 바로크대로, 낭만은 낭만대로 좋듯이 이것 역시 좋은 것이다.
게다가 그가 해괴하다는 첫 평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그의 음악을 듣게 된 이유는, 희한하게도 그 음악을 듣던 순간의 벅찬 감정이 떠올라서였다. 마치 중독자처럼 그의 음악을 찾게 된 것이었다.
그런 마당에 이제는 더 이상 낯설게 느껴지지 않기까지 하니, 그 감동은 배가 되었다.
서진은 전혀 짐작조차 하지 못한 일이었지만, 현대음악 시대에 들어선 지도 벌써 한참. 드디어 현대음악이라는 것이 대중들에게 자연스레 받아들여지기 시작한 것이다. 바로 서진으로 인해.
‘…근데 진짜 어떻게 이렇게 지휘자도 없이 완벽한 연주가 가능한 걸까?’
텔레파시라도 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쟤 뭐 초능력이라도 있는 것 아냐?
그럴 리는 없겠지만, 그런 생각마저 들 수밖에 없었다.
무대 위에 앉아있는 단원들의 얼굴에는 악장인 서진을 향한 강한 신뢰감과 유대감이 가득했다. 관객으로서 그들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을 바라본 남자는, 왜인지 모르게 가슴이 두근대는 기분이었다.
저토록 단단히 지지를 받는 기분은 어떤 걸까. 궁금하고 신기한 마음에 남자는 무대 위에 앉아있는 서진의 모습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이마에 땀방울이 맺힌 젊은 연주자는 제 연주에 깊이 몰입한 가운데에도 단원 하나하나의 호흡까지 감지하고 있는 듯 날카로운 눈빛이었다.
참으로 대단하구나….
저런 천재들은 생각하는 것조차 남다르겠지? 이런 순간, 무슨 생각을 떠올리며 연주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마침 눈이 마주친 듯한 기분에 남자는 앳된 얼굴의 천재를 유심히 살폈다.
청년의 입꼬리에는 자그마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이거 재밌네.’
지금 순간 서진의 머릿속에 떠올라 있는 생각은 딱 이것뿐이었다.
사실 ‘지휘자가 없는 오케스트라’라는 시도는, 이미 누군가 먼저 도전해 본 일로, 그렇게 파격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건 또 이야기가 달랐다.
천재 바이올리니스트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