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 returned as a genius violinist RAW novel - Chapter 143
143화
최초로 우승 기록을 세운 한국인이라면 이미 존재했다.
직전 콩쿨인 15년도 바이올린 부문에서 우승한 바이올리니스트 이지영씨.
그녀는 한국인으로서 퀸엘리자베스 바이올린 부문의 최초 우승자이자, 만 20세로 현재까지 최연소였다.
회귀 전 서진으로서는 꿈조차 꾸지 못했던 그런 존재였는데…, 이제는 그 등을 바짝 쫓아가고 있다니, 기분이 무척이나 낯설었다.
“아무래도 나이 차가 있다 보니, 아는 사람이 많진 않거든.”
아무튼, 그녀의 경우가 조금 특이한 것이었고, 이곳에 와 있는 이들은 대부분 만 20대 초중반 나이대의 사람들.
한국 나이 21세, 아직도 만으로는 19세인 서진으로서는 잘 알고 지내던 이들이 별로 없을 수밖에 없었다.
“아하, 한국인들은 같은 나이끼리만 친구 한다더니, 그런 건가?”“꼭 그렇진 않은데, 아무래도 접점이 적지.”
“흐음… 그렇구나. 우리는 우연히 나이가 비슷해서 다행인 건가?”
마리아의 말에 서진은 대답 대신 가벼이 미소만 지었다.
사실 이러한 상황을 감안하면, 서진을 비롯한 이 3인방은 모두 말도 안 되게 어린 나이의 출전자임 셈이었다.
가뜩이나 센세이션을 몰고 온 ‘한서진’이라는 존재에 더해 나머지 두 명까지.
모두의 관심이 쏠리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 * *
‘서진이는 잘하고 있을까….’
한편 지연은 여전히 고민 중이었다.
일정상 퀸엘리자베스 콩쿨이 먼저이기에, 차이코프스키 콩쿨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은 상황. 예선용 비디오는 예전에 미리 찍어 놓았기에, 일단 보내놓긴 했는데….
‘그냥 나가고 싶기도 하고….’
다행히 그사이 건초염은 거의 나았다. 문제는 치료하는 동안 연습을 전혀 하지 못해 이대로 콩쿨에 나간다 한들 유의미한 성적을 거두기엔 무리일 거라는 것.
한데 또 막상 포기하자니 아까웠다.
이미 우승은 물 건너간 셈이나…, 참가에 의의를 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분명 그 과정에서 배우는 것들이 많겠지.
‘서진과 겨뤄보지 못하는 건 아쉽지만, 어차피 등수가 꼭 절대적인 건 아니니까.’
콩쿨 성적이라는 게 꼭 실력과 비례하는 건 아니었다. 특히 편파 판정이 판치는 국제 콩쿨에서, 러시아 특유의 인종차별적 요소까지 고려한다면 더더욱.
심사위원에 자신의 라인이 있느냐의 여부가 성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이미 암암리에 알려진 사실.
차이코프스키 콩쿨의 일은 아니지만, 한때 이런 일도 있었다.
어느 피아노 콩쿨에서 1, 2위를 차지했던 독일인과 중국인.
그들의 전, 현직 스승이 바로 심사위원으로 있었는데, 1위인 독일 국적의 연주자는 몰라도 터무니없는 연주를 선보인 중국인 연주자가 그런 성적을 받을 수 있었던 건 결국 정치력이 작용한 결과가 아니냐는 의혹이었다. 해외의 일부 언론 역시 3위였던 한국인 피아니스트가 오히려 완벽한 연주를 선보였다며 극찬했고, 2위인 중국인에 대해서는 아직 가다듬을 게 많다는 혹평을 내렸을 정도로.
그렇기에 콩쿨 성적에 과하게 연연하는 건 좋은 태도가 아니었다. 때론 저런 억울한 입장에 처할 수도, 또 때로는 억울함을 토로했던 게 언제였냐는 듯 반대로 누군가를 억울하게 만드는 입장이 될 수도 있는 세계니까.
…그러니까 일단 나가 보자. 최선을 다해.
당장 무리한 연습은 할 수 없겠지만, 지연은 지금 할 수 있는 거라도 해 보기로 했다.
문득 떠오르는 인터뷰가 있었기 때문이다. 서진과 친분이 있는 덕에 자신과도 제법 알고 지내는 사이가 된 클레어의 이야기였는데, 그녀가 한때 부상을 겪은 후 복귀하면서 한 인터뷰 내용이었다.
거의 몇 년간 아예 연주를 하지 못할 정도로 손가락에 큰 부상을 입었던 적이 있었다고. 그때 아무것도 안 하고 쉬는 대신, 머릿속 이미지로나마 연습을 대신했는데, 그게 오히려 그동안 보지 못했던 곡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을 가져다준 적이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미지 트레이닝과 마인드 트레이닝. 심상 세계에서 하는 훈련 역시 지금의 자신에게 분명 큰 도움이 될 터였다.
‘언제까지나 서진의 곁에서 액세서리 취급당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사실 지연도 윤수도 무척 억울한 캐릭터였다. 서진이 아니었다면 나름대로 이름을 날렸을 이들인데, 마치 모차르트 옆의 살리에리처럼 비교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오죽하면 윤수는 악기를 아예 바꿔버렸을까.
하지만 지연은 서진과의 듀엣이 주는 매력 역시 포기할 수 없기에, 바이올린 자체를 그만둘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더욱 노력할 수밖에.
믿기지 않지만 서진 스스로의 말에 따르면, 그 역시 결코 모차르트 과는 아니라고 한다.
모차르트 같은 진짜 천재는 떠오른 악상을 그대로 악보에 옮기면 더는 손볼 것 없이 완벽한 곡이 나왔다는데, 자신은 끝없이 고치고 확인하고 하는 과정을 거친다 하니.
그저 조금 남다르게 매혹적인 연주능력이 있을 뿐, 다른 사람들과 특별히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사람이라는 게 서진의 주장.
물론 지연은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어쨌든 중요한 건 서진 같은 천재도 결국 노력으로 이루어진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짜로 평범하기 그지없는 자신은 말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더 열심히 해야지.
* * *
퀸엘리자베스 콩쿠르는 약 한 달 동안 1차, 세미파이널, 파이널 세 차례의 경연이 이어진다.
1차야 당연히 통과한 서진은 세미 파이널의 경연을 앞두고 있었다.
세미 파이널은 총 6일간에 걸쳐 이루어졌는데, 그중 필수로 지정된 이자이의 곡을 포함해 총 두 가지의 과제가 주어졌다.
정확히는 6일간의 일정 간 이틀 동안 참여하게 되는데, 그중 하루는 오케스트라와 함께 모차르트의 협주곡을, 나머지 하루는 피아노 반주로 자유 선택곡과 이자이의 곡 중 지정받은 것을 하나 연주해야 했다.
연주할 날짜는 랜덤 뽑기로 정해졌기에, 서진은 그 중 월요일과 목요일에 당첨되었다.
‘보자… 월요일의 모차르트 협주곡이 먼저네.’
K. 207 (No. 1 in B flat major), K. 218 (No. 4 in D major), and K. 219 (No. 5 in A major) 중 하나.
사전에 지정된 곡이니만큼 다들 미리미리 연습을 해왔겠지만, 그럼에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듯 참가자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연습에 매진했다.
서진 역시 비슷했다. 조금 다른 점이라면, 당장 눈앞에 닥친 월요일의 지정곡보다는, 목요일의 자유 선택곡 쪽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는 것뿐.
콩쿨 참가자들을 위해 주어진 연습실에서, 서진이 선택한 그리그의 소나타 3번 C minor. op. 45의 선율이 저무는 석양을 배경으로 느릿하니 흘러나왔다.
‘…그리그?’
주변을 지나가던 이들이 귀를 쫑긋 기울였다. 2악장의 유려한 선율이 절로 발걸음을 잡아끈다.
이 치열한 콩쿨의 와중에, 그런 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듯 여유롭고 아름다운 분위기였다. 마치, 갑자기 다른 세계로 뚝 떨어진 듯한 기분이랄까.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귀가 트이며, 왠지 한 걸음 나아간 다른 경지를 엿보고 있는 듯한 느낌에 너나 할 것 없이 연습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좋다….’
누군가는 문득, 무엇을 위해 이 자리에 왔는지를 돌아보게 되었다.
무조건, 어떻게든 남을 밟고 올라가 1위를 쟁취하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지 않은가.
이 자리의 모두는 결국 음악적 성장을 위해 이 자리에 와 있는 것이었다. 그것이 대외적으로 좋은 성적을 내 입지를 굳히는 것이든, 내면의 성장을 이루는 것이든 간에.
이상하게도, 복잡하고 긴말 따위 없이도 저 선율을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새삼스레 그러한 목적이 환기되었다.
이것이 음악이 주는 힘일까.
자신 역시 남들에게 이런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그런 음악을 하고 싶다… 그러한 바람을 담아 멍하니 연주를 듣는 사람들.
짧은 연주가 끝나자 잔잔한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서진은 잔잔한 미소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후, 참가자들의 연습은 조금 다른 의미로 더욱 불타올랐다.
* * *
5월이라 날씨가 참 좋았다.
가볍게 산책을 나온 서진은 어느덧 따라붙은 마리아와 페르디난트와 함께 천천히 걸었다.
“날씨 좋다아.”
“이 좋은 날 콩쿨 연습이라니….”
뭐랄까, 축제를 앞두고 떠들썩한 캠퍼스에서, 자기들만 연습실에 콕 처박혀 있는 기분이랄까.
“그래도 이렇게 산책 나와 있잖아.”
“뭐, 이것도 연습의 일환이긴 하지만… 그래도 역시 초록초록하니 좋네.”
콕 처박혀 기교를 연습하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은, 이 자리의 누구도 모르는 일이 아니었다.
“다들 이자이 곡은 잘 되고 있어?”
“그냥 뭐. 그렇지. 이자이가 이자이지.”
“맞아. 너무 어려워.”
이자이는 바이올린 소나타 곡을 여럿 남겼는데, 각각 여섯 명의 음악가들에게 헌정된 독주용이 여섯 곡,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가 하나였다.
그리고 그 난이도는 하나같이 무척 높았다. 난해한 기교를 많이 요구하기에, 혹자는 파가니니보다도 더 악랄하다고 평할 정도로.
“가뜩이나 그런데, 무슨 곡을 지정받을지 모르니 다 준비해야 하잖아. 아… 빡세다.”
페르디난트가 엄살을 부렸다.
누가 보면 진짜인 줄 알겠다. 녀석의 천재성을 뻔히 아는 서진은 어이가 없어서 웃을 뿐이었다.
“호오, 우리 찐천재님은 여유가 넘치시는 듯?”
서진의 미소에 마리아가 슬쩍 떠보듯 물었다.
“그럴 리가. 나름의 고민이 많다고.”
서진은 조금 다른 의미로 콩쿨에 대한 고민이 깊었다.
어느덧 거의 디폴트로 자리 잡게 된 심상 능력.
이미 그런 상황이었지만, 서진은 이번 콩쿨을 계기로 좀 더 다각도로 파고들어 보고자 했다.
집중해 연구해본 결과, 이미 반쯤 몸에 자동으로 체화된 경지라 할지라도 그 가운데서도 나름의 조절을 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으니. 지금처럼 넓게 넓게 모든 소리를 아우르는 것도 좋지만, 보다 깊게 깊게 파고드는 느낌으로 발달시켜 보려는 것이었다.
능력에 관한 이야기는 자세히 할 수 없었지만, 그 외 전반적인 음악적 고민에 대해 서진은 주거니 받거니 속내를 터놓았다. 이자이의 곡에 대한 심도 있는 토론을 비롯해, 기교와 표현력 사이의 밸런스, 작곡가의 유산에 대한 연주자로서의 해석 범위, 나아가 프로 연주자로서 나아갈 삶의 방향 등등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가 오갔다.
콩쿨의 진정한 가치는 바로 이런 것에 있는 게 아닐까. 같은 길을 걷는 이들과 진지한 경쟁을 통해 교류하며 성장해 나가는 것.
함께 걷는 동료들이야 원래도 있었지만, 이러한 교류의 장을 마련해준 게 바로 콩쿨이라는 무대 덕분이었으니까.
“요, 서진!”
“안녕하세요, 선배. 오늘 연습은 잘 되어가세요?”
“우리 천재 3인방은 오늘도 역시 뭉쳐있군. 나야 뭐 그냥 뭐 열심히 하는 거지.”
처음의 날 선 분위기가 많이 가신 탓에 서진은 다른 참가자들과 친분을 많이 텄다. 자연스레 한국 출신의 선배(?)들과도 친해진 상황. 저쪽에서 먼저 다가오는 걸 굳이 쳐낼 이유는 없었다.
“서진아, 나 이따 여기 좀 봐줄 수 있어?”
“아, 누나. 네 이따 잠깐 봐요.”
그렇다고 모두 함께 우루루 뭉쳐 다니는 건 아니었고, 오며 가며 가볍게 대화를 나누는 정도였지만.
“아이고, 줄 또 끊어먹었네. 여분 줄이 어딨더라…,”
“페그를 거꾸로 감으면 어떡해요, 어휴.”
여기저기서 오가는 말소리. 참으로 이상적인 광경이었다.
서진은 즐거운 표정으로 거닐며 시선을 천천히 옮겼다.
그러던 중, 유독 눈에 들어오는 누군가가 있었다.
천재 바이올리니스트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