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 returned as a genius violinist RAW novel - Chapter 159
159화
“알아. 그래도 응원할게.”
서진의 말을 뒤로하며 세르겐이 당당히 발걸음을 옮겼다.
…조금 전에 들었던 그의 차이코프스키가 마음을 어지럽히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리라. 같은 곡을 하는 게 아니라 그나마 어찌나 다행인지.
새로운 주인공이 무대 위에 섰다.
심드렁하니 조금 쉬어가려던 관객들은, 다음으로 나타난 유망주의 모습에 다시금 자세를 고쳐 앉았다.
하지만 이미 진이 다 빠진 기분이랄까. 고작 누군가 혼을 다 바쳐 연주하는 곡을 가만히 앉아 감상한 것에 불과함에도, 이상하게도 심력 소모가 엄청났다.
세르겐 역시 그 분위기를 모르지 않았다.
차이코프스키가 아니라 다행이긴 한데… 시벨리우스 역시 그를 심란케 하긴 마찬가지였다.
초견이었다는, 그날 들었던 연주가 자꾸만 머릿속에 떠오른다. 눈을 감아도, 귀를 막아도 사라지지 않는 선율.
그러나 세르겐은 역시나 베테랑이었다.
그는 주변에 비해 다소 많은 편은 자신의 나이에 오늘만큼은 새삼스레 감사한 마음이었다. 오랜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관록이랄까, 일단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시작되자 곧바로 모든 걸 잊고 집중할 수 있었다.
시벨리우스의 바이올린 협주곡 D minor Op. 47. 2악장.
핀란드의 국민 작곡가로 유명한 시벨리우스의 곡이지만, 어딘지 러시아의 애수와도 통하는 면이 있는 곡이었다.
시벨리우스의 개성이 무척이나 잘 드러난 명작. 그것을 세르겐은 차분한 태도로 연주해 나갔다.
확실히 그는 실력파였다. 스스로의 장점과 단점을 정확히 알고, 강점을 극대화할 줄 아는.
세르겐의 가장 큰 장점은 우직하리만치 묵직한 울림이었다.
차분하고 무게 있는 연주. 심신을 편안히 해주는, 어딘지 모르게 침잠하는 기분마저 드는 그런 선율이랄까.
특히나 그는 활을 아주 진하게 썼다. 무척이나 강인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섬세한 보잉이었다.
소리 자체는 전체적으로 일관적이고 두터운 안정감을 보이면서도, 활을 쓰는 것은 매우 다채로워 각각의 소리에 각각의 언어를 충분히 부여해 주었다.
게다가 특유의 덩치에서 나오는 파워는, 때로는 오케스트라에 정면으로 맞서기도, 때로는 혼자 뚝 떨어져 외로이 노래하기도, 또한 깊이 하나가 되어 녹아들기도 하는 다양한 면모를 보여주었다.
일견 느긋해 보이기까지 하는 태도.
그는 이제 완전히 제 페이스를 찾은 듯했다. 오케스트라와의 궁합 역시 좋았다.
그는 오케스트라가 때로는 전면에 나와 곡을 이끌어가도록, 때로는 뒤로 물러나 보조를 맞추도록 쥐락펴락하는 서진과 같은 능력은 없었지만, 운 좋게도 반주를 하고 있는 것이 이미 몇 번 호흡을 맞춰본 적 있는 관현악단이었다.
그런 만큼 절로 호흡이 잘 맞았다.
사실 서진의 경우에는, 색다른 해석에 당황한 것인지 오케스트라가 약간 아쉬운 기량을 보인 것을 서진이 거의 머리채 잡아 끌고 가듯이 조율한 것이었다.
자칫하면 산만한 연주가 될 뻔했던 것을, 단순히 호흡을 맞춘 것을 넘어 자신과의 합으로 인해 시너지 효과마저 이끌어낼 수 있을 만큼 알게 모르게 제 능력으로 메꾸었다. 그것이 대외적으로 전혀 티가 나지 않았을 뿐, 결코 절로 이뤄진 게 아니었던 것이다.
아무튼, 덕분에 세르겐은 무척이나 편안한 연주를 할 수 있었다. 때론 일상의 이야기를 나누듯 자연스럽게, 때론 바짝 오른 긴장감을 주고받는 듯 입체적인 면모를 자랑하는 그런 대화를 주고받았다.
‘이대로만 가면….’
…1위도 결코 꿈만은 아닐지도.
그렇게 모든 것이 더없이 순조로웠다.
하지만 문제는 3악장에 이르러서였다.
요 며칠 그에게 트라우마에 가까운 충격을 안겨주었던 3악장. 서진이 초견으로 연주해 보였던 바로 그 부분.
문득 그는 심사위원석의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자신을 더없이 진지한 눈으로 흐뭇하니 바라보고 있는 심사위원.
결코 어떻게든 흠을 잡아내려는 날카로운 시선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 부담이었다.
왜냐하면 공교롭게도 상대는, 나름의 라인으로 연결되어 있는 인맥 쪽 사람이었으니까.
기대에 따른 부담감이 갑자기 와락 몰려왔다.
그리고 순간, 갑자기 서진의 연주가 의식되었다.
그 애는 이 부분을 어떻게 처리했더라…. 어떤 울림이었더라.
그리고 저 심사위원들.
아까 서진이 연주했을 때는 과연 어떤 표정이었을까. 지금의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과 얼마나 어떻게 달랐을까.
한번 머릿속에 잡음이 끼자, 걷잡을 수 없이 많은 상념이 몰려들어 왔다.
흔들린 마음 탓일까. 순간, 삑사리가 크게 났다.
도저히 커버할 수 없을 만큼의, 엄청난 실수였다.
‘…이런.’
완전히 낭패였다. 세르겐의 표정에 당혹감이 스쳤다.
어떻게든 만회해야 하는데. 한서진이 보여주었던 그것보다 훨씬 깊고 풍성한, 그 이상의 울림을 자아내야 하는데.
세르겐은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실수 한 번쯤이야 괜찮다. 그때의 그 연주를 능가할 수만 있다면…,
한데 그게 패착이었나보다.
자신만의 소리가 아닌, 다른 누군가를 넘어서기 위한 집착.
그것은 그의 색채를 순식간에 잃게 했다.
갑자기 오케스트라와도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편안한 마음으로 연주할 때와 달리, 한 번 무언가를 의식하고 나니 더없이 소리가 뻣뻣해진 탓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걸을 땐 멀쩡하기만 하던 손과 발의 협응이, 괜히 그걸 의식하고 나면 같은 쪽 손과 발이 동시에 나가는 것처럼.
‘이대로 패배자가 될 수는 없는데…!’
세르겐의 얼굴에 절박감이 어렸다.
* * *
심사위원들은 난감했다.
세르겐 외에는 이렇다 할 우승 후보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 만큼 큰 이변 없이 세르겐의 우승을 점쳤었는데…,
예상치 못한 존재가 등장해 버렸다.
한서진이라는 괴물 같은 실력의 젊은 청년.
신청서를 넣은 것이야 익히 알고 있었지만, 앞서 퀸엘에 먼저 나갔던 만큼 실제로 참가하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오산이었다.
가뜩이나 엄청난 실력을 보여주는 상황에, 세르겐이 중요한 결선 무대에서 결정적인 실수까지 했다. 이대로라면 웬만큼 몰아준다 해도 우승까지 밀어붙이기는 힘든 상황.
잠시 휴식을 선언한 심사위원단은 긴급회의에 들어갔다.
“아무래도 다시 기회를 주는 게 좋겠소.”
세르겐은 러시아의 자랑이었다.
요하임 국제 콩쿨, 싱가폴 국제 콩쿨 등 굵직한 국제 콩쿨에서 1위를 휩쓴 러시아의 천재가, 정작 자국에서 열린 콩쿨에서 1위를 하지 못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반드시 그를 우승시켜야 했다.
“…뭐? 그게 무슨 소리요?”
심사위원단이라고 해서 전부 친러시아 성향의 사람들로만 구성되어 있는 건 아니었다. 국제 콩쿨인 만큼 심사위원으로 위촉된 이들의 국적도 다양했는데, 세계 각국의 내로라하는 거장들인 만큼 각기 이해관계가 달랐다.
그중, 러시아의 명예와는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는 한 심사위원이 대놓고 황당함을 표한 것이었다.
“조금 전 심사위원들로 인해 연주가 방해받지 않았소. 공정을 기하기 위해서는 다시 기회를 주는 것이 맞소.”
“아니, 그러니까 대체 무슨 방해를 말하는 거요?”
“재채기 소리가 너무 컸지 않소. 누구라도 신경이 흐트러질 수밖에.”
세상에 무슨 이런 어이없는 소리가 다 있는가.
재채기?
심사위원의 재채기 소리가 너무 커서 방해가 됐으니, 결선 무대에서 다시 한 번 연주 기회를 주자고?
이보다 말도 안 되는 소리가 또 있을까.
국제 콩쿨의 파이널 무대에 두 번의 기회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어떻게든 러시아 출신을 밀어주려는 수작일 터.
하지만 말도 안 되는 일을 되게 만드는 게 바로 권력이었다.
실제로 전례가 있는 일이었으니까.
1967년, 카네기 홀에서 열린 레벤트리트 콩쿨.
결선에서 실수를 저지른 주크먼을 어떻게든 우승시키고자, 밑도 끝도 없이 다시 연주할 기회를 주었던 말도 안 되는 사건.
당시 심사위원장이었던 아이작 스턴이 주크먼의 후원자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그 억지 덕분에 주크먼은 결국 장경화와 함께 공동 1위를 차지하게 되었는데, 그 역대급 사건은 지금까지도 유명한 일로 회자되었다.
그러니까, 지금 그 짓을 또 하자는 소리였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나마 그건 40년도 더 전에나 있었던 일이지, 2020년을 향해가는 지금 그게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란 말인가.
파워 게임의 끝판왕이라는 전쟁에 있어서도, 명분 없이는 함부로 다른 나라를 침략하지 못하는 게 요즘 세상인데! 아무리 러시아가 막 나간다 해도 이건 아니었다.
이건 어디까지나 ‘국제’ 콩쿨이지, 일방적으로 러시아의 위상을 세워주기 위한 쇼가 아니지 않은가!
“어째서 말이 안 된다는 거요?”
하지만 심사위원장, 소클로프는 물러서지 않았다.
“말이 안 되지. 안 될 수밖에. 하면 지난 세미 파이널에서, 이보다 더 큰 방해가 있었는데도 왜 다시 기회를 주지 않았소? 관객이 고함을 치며 난동을 부린 게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다면, 굳이 영상을 편집하며 쉬쉬할 필요도 없었겠지.”
“그것과 이건 다르지. 고작해야 세미 파이널 무대가 결선과 같소? 준결선이야 어차피 파이널리스트 안에만 들면 그만인 무대이고, 그 등수가 최종에 합산되는 것도 아니지 않소. 어쨌든 그 참가자도 파이널리스트에 들었으니 그거면 된 것 아니오?”
“허, 참. 그걸 말이라고!”
몇몇의 반대로 갑론을박이 한참 이어졌다. 서진이 들었다면 퀸엘은 양반이라고 했을 개판이었다.
* * *
바이올린이나 피아노 부문과 달리, 다행히 첼로 쪽은 별 탈 없이 잘 진행되는 중이었다.
핸드폰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하윤은 이내 고개를 저으며 화면을 껐다. 저 역시 친구들에게 답신을 보내고 싶긴 하지만, 자꾸만 망설여졌다.
‘서진이에게 축하한다고 아직 인사도 못 했는데….’
원래는 좋은 소식이 들리면 바로 연락해 축하의 말을 건네려 했는데, 기권 이야기에 고민에 빠져 버렸다. 직접 만나서 말하는 거라면 모를까, 막상 뭐라 전화를 해야 할지….
그래도 1등이었던 걸 축하한다 하기에 실질적으로는 기권으로 받은 상이 없고, 그렇다고 안타깝다고 말하기엔 서진의 판단에 아쉬움을 표하는 것 같고…
‘그래서 직접 만나서 말하려 했던 건데….’
애썼다고, 그리고 정말 멋지다고, 그렇게 말해주려 했는데, 막상 콩쿨이 시작되니 극도로 긴장되며 동굴 속으로 숨어버리고 싶어졌다. 외부로부터의 연락이나 소식을 완전히 차단하고는, 오직 콩쿨에만 전념하고 싶었다.
애초에 그는 서진이나 윤수처럼 다른 사람들과 쉽게 무난히 어울리는 성격은 아니었다. 하윤은 대외적인 활동보다는 자신의 내면을 향해, 오직 음악에만 파고드는 게 좋았다.
첼로의 부드러운 저음은 언제나 자신을 편안하게 해주었고, 말로는 못 할 여러 가지 감정을 쉽게 전달할 수 있게 해주었다. 다른 악기들도 그렇겠지만, 첼로는 특히나 그런 매력이 있었다.
…그래서 이토록 첼로를 좋아하나 보다.
만약 자신이 윤수처럼 적극적인 성격이었다면 이곳에서도 다양한 친구들과 교류하며 친분을 쌓았을 텐데…, 그나마 콰르텟 멤버들과는 촉새 윤수가 다리를 놔준 덕에, 그리고 워낙 어릴 때부터 친해져 편한 사이가 되었지만, 타고난 성격상 사교 행위를 그리 좋아하는 편이 아닌지라 그 점이 조금 아쉬웠다.
‘그런 만큼 좋은 결과라도 내어 가야지.’
천재 바이올리니스트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