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 returned as a genius violinist RAW novel - Chapter 164
164화
“에이, 발표만 오늘이고 이미 다 결정은 나 있겠지. 어차피 난 아닐 테고. 보통 피아노나 바이올린에서 주잖아.”
하지만 하윤은 금세 마음을 비우며 손을 내저었다. 서진 역시 정확히는 ‘혹시 찬윤이 형?’ 하는 생각에 가까웠다.
지연도 이왕이면 다른 부문 우승자보다는 이 중에서 나오기를 바라는 눈치로, 스스로에 대한 기대는 별로 없어 보였고.
“에이, 여태 그랬다고 꼭 그런 법은 없지.”
“아무튼 여기서 그랑프리도 나오면 좋겠다.”
“그러게. 참, 하윤아. 너 기사 봤어? 너 인기 대박이다?”
“근데 그랑프리 뽑히면 뭐 줘?”
“기사? 무슨?”
“이거 봐봐.”“그건 나도 모르겠는데.”
여러 명이 모이니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 와중에 지연이 준 핸드폰을 확인한 하윤은 귀 끝이 빨개졌다.
“이, 인기는 무슨…. 난 그런 거 몰라. 그런 거라면 서진이랑, 오히려 찬윤이 형이…,”
하윤은 이번 콩쿨 우승으로 갑자기 확 떠서, 현재 한국 음악 팬들 사이에서 엄청난 인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결선 영상의 조회수가 벌써부터 장난 아닌 것이, 머잖아 과묵한 훈남 스타로 자리 잡을 미래가 보였다.
서진은 친구들이 다들 제 길을 찾아 우뚝 걸어 나아가는 모습에 기쁜 마음이었다. 그동안은 함께 콰르텟 활동을 하면서도 제 이름만 언급되어 친구들이 가려지는 모습에 마음이 안 좋았는데, 이렇게 콩쿨에서 좋은 성적을 거뒀으니 이제는 모두가 그 이름을 알게 된 것이다.
“그나저나 이제 슬슬 시작할 시간이네. 하윤이 너 진심 아슬아슬했다.”
“자, 영예의 그랑프리 수상의 주인공은 과연 누가 될지… 가보자고!”
* * *
2019년 제16회 차이코프스키 콩쿨은 갈라 공연을 끝으로 긴긴 대장정을 끝냈다.
엉망진창이었던 본 경연과 달리, 갈라는 한바탕 축제 같은 분위기였다. 수상자들을 위한 갈라 콘서트인 만큼, 경연 때처럼 긴장하거나 경쟁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서진 역시 홀가분한 마음으로 공연을 마칠 수 있었다.
물론 아직도 남은 게 있긴 했다. 수상자들의 연주회로, 올가을 카네기 홀에서 콩쿨 위원장이 직접 수상자들을 소개하는 자리가 예정되어 있었다.
그 후 수상자들은 또 각기 자국으로 돌아가 기념 연주회를 열 터. 아직 뜨거운 열기가 다 식지 않은 것이다.
언론 역시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듯 마구 기사를 쏟아대고 있었다. 그중 특히 주목받는 건 셋 중에서도 찬윤이었다.
“형, 축하해요!”
바로 찬윤이 전 부문을 통틀어 최고 연주자에게 주는 상인 그랑프리의 주인공이었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서진과 지연은 공동우승이기에, 딱 한 명만 뽑는 그랑프리 수상은 어려울 거라 생각했다. 그렇다면 남는 건 총 6개 부문 중 나머지 5개인데, 그중 피아노가 유력할 거라 짐작했다. 원래도 차이코프스키 콩쿨은 피아노가 가장 강세인 콩쿨이었으니.
“어, 그게. 어쩌다 보니 내가 되어버렸네. 네 앞에서 왠지 부끄러운데…?”
“그게 무슨 말이에요. 저는 당연히 형이라고 생각했는데.”
찬윤은 진심으로 쑥스럽다는 듯 더벅머리를 긁적였다.
“…하하.”
“다들 난리더라고요. 인터뷰도 지긋지긋할 정도로 했겠어요.”
“뭐, 인터뷰라 해봤자 할 말 뻔한 내용이니까. 그보다는 서진이 네가 조금 골치 아파 보이던데…”
세르겐의 기권에 관련해서 기자들은 서진까지 귀찮게 들볶았다. 세르겐의 기권 선언으로 인한 파장이 상당한 것이다.
원래 같았으면 ‘총 6개 부문이 동시에 치러지는 만큼 사소한 사건사고가 제법 있었다’ 정도로 언급되고 말았을 일이, 심사 직전 기권이라는 이슈로 유난히 눈에 띄게 된 것이다.
결선에서 재연주 기회라니… 지금이 칠팔십 년대도 아니고 그야말로 쌍욕을 먹을 일이었다. 그래도 퀸엘에 비하면 양반인 수준이었지만.
“뭐 저는 그럭저럭 괜찮아요. 근데 저한테 이 정도면 세르겐 본인은 얼마나 시달리고 있을지….”
퀸엘 때와는 또 다른 상황이었다. 그때의 서진은 한 점 오점 없이 그저 항의의 표시로 기권을 했던 것이지만, 세르겐은 재연주라는 수혜를 받은 적이 있는 만큼 더욱 복잡한 상황일 것이다.
“이번 일을 계기로 대대적으로 변화가 있으면 좋겠네. 부디 자체적으로 자정하려는 노력이 있기를.”
“그러게요.”
“아무튼 난 올해 이래저래 너무 실망이 커서 이제 콩쿨은 안 나오려고. 사실 올해도 원래는 나올 생각이 없었거든.”
“저도요. 이걸로 충분하니까요.”
“그나저나 벌써 공연 줄줄이 잡혔다며? 쉴 새도 없겠어.”
콩쿨이 끝나기 무섭게 서진에게 온갖 전화가 쏟아져 들어왔다. 개인적인 축하 인사야 그렇다 치고, 온갖 홀에서 러브콜이 쏟아져 들어온 것이다.
당일날 바로 카네기 홀에서 바로 전화가 오더니, 이어 위그모어 홀, 링컨 센터 등등 유명한 홀에서 줄줄이 연락이 왔다. 오케스트라로부터의 연락 역시 마찬가지였다. 원래 주기적으로 호흡을 맞춰오던 빈필은 물론이거니와, 뉴욕필이니, 베를린필이니 다 세지도 못할 정도였다.
사실 이들이 기다렸다는 듯 서진에게 연락을 해온 것은, 콩쿨에서 우승함으로 인해 이제야 그럴 만한 자격이 생겼다거나 하는 그런 이유가 아니었다.
원래도 늘 러브콜을 보냈었는데, 자신이 좀 더 솔로로 설 만큼 준비된 후 함께하고 싶다며 서진이 번번이 사양했었기 때문. 그러니 이제는 거절하지 않겠지 싶어 재빨리 연락을 해온 것이었다.
서진은 곧바로 수락했다. 거기에 더해 무슨 이유인지, 콩쿨 우승 기념 공연 외의 국내 공연은 다 후순위로 한 채 해외 일정을 전부 앞쪽으로 잡았다.
그 소식을 들은 국내 팬들의 불만이 상당한 듯 심심찮게 댓글이 보였지만, 서진으로서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이번에도 코로나가 터질지도 모르니까.’
“네. 그래도 일단은 귀국해서 푹 쉬려고요. 그 전에 다 같이 관광도 좀 하고요.”
실은 조금 걱정이 되었다. 그때 느꼈던 손의 감각도 그렇고… 지병이 있다 보니 아무래도 괜찮은 것인지 늘 신경 쓰이는 것이다.
귀국해서 푹 쉬는 것도 중요하지만, 일단 정밀검사부터 바로 받아봐야지.
“나도 껴 줄 거지?”
“물론이죠! 하윤이랑 지연이도 다 같이 놀기로 했으니 얼른 가요. 근데… 우리 이렇게 몰려다니면 다들 알아보고 막 그런 건 아니겠죠…?”
“…에이, 설마.”
* * *
설마가 사람을 잡…
지는 않았다.
모스크바의 길거리.
놀랍게도 아무도 일행을 알아보지 못했다. 나름 지금 음악계에서 가장 핫한 네 명인데…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러시아인들의 눈에는 그냥 동양인 네 명일 뿐인 모양이었다.
“편하긴 한데….”
오히려 인종차별을 당했으면 당했지, 인기인이랍시고 몰려들어 사인을 해 달라거나 하는 일은 전혀 없었다. 간혹 현지의 한국인들이 알아보고 사인을 요청하는 정도가 전부.
하지만 문제는 바로 그 인종차별 부분이었다.
“…난 앞으로 아무리 언어가 늘어도 외국에서는 못 살 것 같아.”
레스토랑에 가니 안내도 하는 둥 마는 둥 사람을 뻘쭘히 세워놓질 않나, 한참을 기다려 눈이 마주친 끝에 받은 자리는 가장 외진 구석이었다.
주문도 안 받아 주린 배를 참으며 기다렸고, 심지어 주문한 음식조차 잘못 나왔지만 어떻게 할 방법도 없었다.
“나도. 한국이 최고다.”
한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 만약 이런 서비스를 받았다면 항의하고 난리도 났겠지.
근데 여기서는 음… 러시아는 왠지 무섭다. 괜히 항의하다 시비라도 걸리면 곤란했다. 주치의도 없는 이역만리 외국 땅에서, 잘못하다 손이라도 다치면 정말 큰일일 테니까.
“근데 뭐 한국 사람들도 인종차별 만만치 않잖아. 백인들한테만 친절하고 다른 인종들을 차별하는 건 똑같으니까.”
“국력을 그 사람의 계급이라 생각하는 탓이지. 여기서 겪은 것과는 약간 결이 다른 이야기지만…, 선진국의, 특히 하류층 사람들일수록 인종차별 경향이 강하니까. 자기들이 후진국 사람들보다 무조건 우위에 있다고 생각한달까. 마치 한국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못 사는 나라에 가서 자기는 한국 출신이니 다들 대우해 줄 거라 생각하며 함부로 행동하듯 말이야. 아무리 못 사는 나라라도 그 나라 상류층들은 정작 평범한 외국인들 거들떠도 안 보는데.”
어쩐지 많은 것을 겪어본 듯한 지연의 말이었다. 하긴, 한국에서는 내로라하는 글로벌 기업의 금지옥엽인데, 그런 지연조차 이성이라는 배경 없이 해외를 나올 때면 찢어진 눈이라고 놀림 받는 동양인에 불과할 테니.
뭐랄까. 나름대로 위로가 되는 것 같기도, 한편으로는 반성하는 마음도 들게 하는 이야기였다.
“이런 마당에 드는 생각이지만, 세르겐은 진짜 신사였구나….”
퀸엘과 차이코프스키 일로 느낀 바가 많은 서진은 새삼스러우면서도 다소 생뚱맞은 결심을 했다.
단순한 결심이라기보다는 포부랄까.
더는 국제무대에서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아니, 단순히 그 정도를 넘어, 클래식 중심지가 저 서구권이 아닌 우리 대한민국이 되었으면 좋겠다. 모두가 한국의 음악 수준을 동경해 안달을 낼 만큼.
현재 한국 음악가들이 세계 3대 콩쿨 어쩌고 기를 쓰고 나가 상을 받고자 하듯이, 줄리어드니 버클리니, 유럽 각지의 음대에 유학 가고자 하듯이, 또 빈필 뉴욕필, 베를린필 등등 유명 악단을 한국에 초빙하고자 하듯이, 역으로 한국이 그 위상을 가졌으면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건 연주자 한 명 특출난 것으로는 턱도 없는 일이었다.
한 개인의 성공으로 꼽자면, 조수민, 장명훈, 장경화, 조상진 등등 이미 상당히 많은 인물들이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전체의 판도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자신 역시 마찬가지겠지. 아무리 유명해진다 한들 한계가 있는 것이다.
작정하고 보다 적극적으로 노력하지 않는 한.
‘길게 보고 가야 하는, 아주 힘든 일이 되겠지.’
그래도 언젠가는 반드시 그 꿈을 이뤄내고야 말겠다.
반드시, 제 손으로.
* * *
근 몇 달 만에 귀국한 서진은 일단 푹 쉬었다.
쉬고 또 쉬었다.
엄마가 해주는 집밥을 먹으며 하루종일 뒹굴거리기만 했다.
그 와중에 유일한 일정이라면 병원에 다녀오는 것이었다.
“일단 정밀검사 결과로는 큰 문제는 없군요. 하지만 아시다시피…, 이 병 자체는 완치가 없이 평생 안고 가야 하는 것이라는 걸 알고 계시죠?”
“네.”
“그러니 관리 잘하셔야 합니다.”
앞으로는 이렇게 무리하지 말라는 의사의 따끔한 충고에 서진은 얌전히 고개만 끄덕였다.
아니 진짜 일부러 그러려 했던 건 아닌데….
“이번처럼 약이 내성이 생겨 안 듣게 되면, 약의 힘을 빌리지 못하는 동안 악화할 가능성이 높고, 그렇게 한 번 악화한 상태는 되돌리기 어려우니까요.”
“네. 그래서 중요한 시기임에도 무조건 쉬는 것을 택했어요.”
“그건 정말 잘하셨어요.”
그런데도 1위라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이런 비하인드 스토리는 외부에 알려지지 않아 아무도 몰랐지만, 만약 알았다면 더욱 놀랄 노 자일 터.
천재 바이올리니스트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