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 returned as a genius violinist RAW novel - Chapter 171
171화
이자크는 스트라디바리 중에서도 가장 최고의 악기가 만들어졌던, 소위 ‘황금시대’에 제작된 1714년산 스왈 스트라디바리우스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 바이올린은 과거 예후디 메뉴힌이 소유했던 것으로도 유명했다.
이 악기는 몇 마디 수식어로만 들으면 완벽한 자태를 자랑할 것 같지만, 의외로 그리 완벽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제작 당시 생긴 도구 자국도 많이 남아있었고, 약간 불균형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래서 더욱 자연스러운 소리를 내어 주었다.
좌우로 완벽히 대칭인 사람이 없듯이, 마치 생명체의 그것처럼 자연스러운 울림.
그 점이 묘하게 이자크와 어울리는 악기였다.
악기 대출금을 아직도 갚고 있다며 농담으로 앓는 소리를 하는 모습조차 서진은 참으로 그답다 생각했다.
“어떤가요. 할 수 있겠지요?”
학생들을 향해 씨익 웃는 이 순간만큼은 전형적인 악랄한 교수님의 모습 그 자체였지만.
* * *
서진은 어디까지나 참관을 하러 온 것이었고 마스터 클래스를 직접 수강한 건 아니었지만, 이자크의 강의는 서진에게도 큰 도움이 되었다.
다른 것도 그렇지만 그가 자신의 악기를 대하는 자세. 그것이 상당히 인상 깊었던 것이다. 마치 자아를 가진 생명체와 대화하듯 바이올린과 교감하는 느낌.
“어땠나, 서진 군?”
“훌륭한 강의였습니다. 저 역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특히 소리에 대한 고찰, 그 부분이…,”
“음? 잠깐잠깐. 아니, 난 그런 의미로 한 말이 아니라….”
이자크가 굳이 다른 강의에까지 서진을 데려와 참관시킨 건, 그를 가르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자신의 수업을 보여주며 그에게 자연스레 노하우를 알려주기 위함이었으니. 배우는 자로서가 아니라, 가르치는 자로서 필요한 것들을.
즉, 이자크는 서진을 줄리어드에 자리 잡게 하고자 적극적으로 도와주고 있는 것이었다. 자신의 제자로서가 아닌 동료, 그러니까 교수진으로서 말이다.
“…예? 저를요?”
그의 설명에 서진은 아연실색했다.
“그렇네. 설마하니 순수하게 석사과정을 밟는 것만을 위해 내가 서진 군씩이나 되는 인재를 이 멀리까지 불렀으리라 생각한 겐가?”
“….”
“하하! 서진 군을 담기에 고작 이 줄리어드는 턱도 없지. 반대로 서진 군이 줄리어드에 가르침을 주는 입장이 되어준다면 모를까.”
서진은 뭐라 할 말을 잃었다. 저를 너무 과대평가하신 것 같다고 하기엔 그의 안목을 부정하는 꼴이 되고, 그렇다고 좋아라 맞장구를 칠 수도 없었다.
서진 역시 그가 단순히 자신을 제자로 두려는 것만이 전부는 아닐 거라 짐작했지만, 그와 별개로 진심으로 배움을 청하고픈 생각이었다.
음악이란, 소리의 깊이란 아무리 끝없이 배우고 탐구해도 모자란 법이니까.
“…해서, 저는 아직은 그럴만한 자격이 못 되는 것 같아서요.”
그런 서진의 대답에 이자크는 더욱 호탕하게 웃었다.
“서진 군. 꼭 배우는 입장에서만 무언가를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지 않은가. 누군가를 가르쳐 보는 것으로도 스스로의 발전을 꾀할 수 있네. 나 역시 자네와 서로 교류하며 얻는 깨달음이 있듯이 말이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더욱 까마득 어리고 미숙하던 시절에도 서진은 제 발로 나서 지연의 소리를 봐 주며 조언을 주었다. 물론 그때는 회귀로 인해 지연과 실질적인 경험 차이가 제법 났기에 그럴 수 있었던 것이지만, 아무튼 중요한 건 그것이 제게도 꽤 도움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마침 여기 줄리어드 예비학교에 다니고 있는 한국인 유학생들이 제법 있다네. 우선 그 아이들을 지도해 보는 게 어떻겠는가? 아니면 여름 캠프의 학생들도 좋고.”
“예비학교라면…, 나름대로 한국에서 난다긴다하는 영재들이겠군요.”
그래도 줄리어드에 정식으로 다니고 있는 재학생은 아니니 그나마 덜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어린 학생들을 위한 꿈나무 마스터 클래스 정도야 예전에도 해본 적 있으니까.
“그렇지. 참, 자네와 같은 한예종 영재원 출신도 있다는데, 혹시 아는 아이일지도 모르겠군.”
“오, 그런가요?”
서진이 후배 쪽으로는 별로 인맥이 없기에 아는 아이일 확률은 거의 없지만, 같은 한예종 영재원 출신이라는 것만으로도 괜히 반가웠다.
‘그러고 보니 한때 떠들썩했었는데….’
한서진 키즈니, 제2의 한서진이니, 음악계에서 서진의 이름을 붙여가며 영재들을 적극 발굴했던 일.
설마 정말로 그런 타이틀을 달고 나온 아이는 아니겠지?
“정말로 아는 얼굴이면 대단한 인연이겠군요. 아무튼 좋은 기회에 감사드려요.”
“무슨 소릴. 오히려 내가 고맙지. 자, 그럼 이제 자네가 지휘할 오케스트라를 만나러 가보세!”
오늘은 일단 인사만 해 두어도 좋지만, 시간이 빠듯하니 바로 맞춰보는 걸 추천한다며 그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 * *
오케스트라 연습실로 쓰는 대강당에 도착한 서진은, 문가에 서서는 들어가지 않고 잠시 지켜보기로 했다.
안에서는 저들끼리 나름대로 연습 중이었다. 제각각의 파트 연습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 함께 맞춰보는 중으로, 지휘자는 없었지만 악장이 그럭저럭 잘 이끌고 있는 듯했다.
확실히 한예종 오케스트라와는 차원이 다르다. 아무리 한예종이 글로벌 명문 음악학교를 꿈꾼다지만, 아직 줄리어드에 비할 바는 못 되니까.
“무슨 곡을 공연할 예정인가요?”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 아마도 그렇게 알고 있네.”
“그렇군요.”
그럼 지금 하고 있는 건 아마도 앵콜 곡이겠지. 저들끼리 연습하는 정도로도 이 정도는 부담 없을 테니까.
“이자크, 제가 조금 색다른 시도를 해보아도 될까요? 사실 이젠 그리 새로울 것도 없는 일이긴 하지만…,”
“혹시 지휘 없는 공연을 해보고 싶다거나, 그런 게가?”
“정확해요. 어떻게 아셨어요?”
“내 자네에 관해서라면 무척이나 관심이 많다네. 한국에서의 공연 소식이야 이미 들었지.”
“하하. 그렇군요. 이번에도 그렇게 가보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그야 자네 마음이지. 사실 나도 이왕이면 자네가 지휘봉만 잡는 것보다는, 저 안에서 함께 소리를 내며 이끌 때가 가장 완성된 무대를 만들 수 있을 거라 보네.”
그래. 그래야 한서진이지.
“한데 조금 걱정이군요. 저들이 순순히 따라줄지.”
“모쪼록 잘 해보게. 다 좋은 경험이 될 게야.”
* * *
오케스트라를 맡은 지 벌써 며칠. 단원들은 그럭저럭 잘 따라왔다.
서진은 지휘자로서 별다른 자격이 없는 자신을 따르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한서진이라는 이름값이 워낙 큰 덕분인지 학생들은 제법 협조적이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학부생인 저들과 별 다를 바 없는 서진이었다. 잘 봐줘야 석사과정 시작을 앞두고 있다는 정도?
하지만 본디 음악계에서, 특히 연주 분야에서 학위는 그렇게까지 중요하지 않았다.
미국 기준, 음악학이나 음악 이론으로 학위를 따면 보통 ph. D를 받지만, 연주 쪽 박사학위 과정으로는 음악 박사(D.M.A : Doctor of music art (ph. D))학위를 받는다.
그리고 유럽에서는 박사학위 과정이 아닌 ‘최고연주자 과정(AD: artist diploma)’으로, 이것이 박사학위에 준하긴 하나 결국 중요한 건 학위 타이틀이 아니라 실력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실력이 모자란 건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 그런 만큼 다들 수긍하는 눈치였다. 여러 루트로 들은바, 서진의 실력이야 인정할 수밖에 없으니까.
하지만 그조차 부정하려 드는 이들도 있었다.
“도저히 더는 견딜 수 없군!”
악장인 한 일본인 학생이 벌떡 일어났다.
한국 못지않게 출신 대학을 따지는 일본인만큼, 그는 도저히 저보다도 어린 눈앞의 존재를 인정할 수 없었다.
학부생인 자신과 달리 그나마 졸업생이라고는 하지만, 그래 봤자다.
듣자 하니 한국의 뭐시기 국립 예술학교 출신이라는데, 줄리어드에 재학 중인 자신에 비하면 한참 뒤떨어지지 않겠는가.
일본으로 비유하자면 별 볼 일 없는 비 본토 대학 출신이 도쿄대 출신을 가르치는 꼴이랄까. 누가 들어도 웃을 일이었다.
“무슨 일입니까?”
“당신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얘기요.”
서진은 이런 상황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나름대로 악장의 자리를 꿰차고 있는 그를 향해 물었다.
“왜죠?”
“그야…, 자격이 되지 않으니까!”
“그 자격이라는 게 정확히 뭐죠?”
“그, 그걸 굳이 내 입으로 말해야만 압니까? 꼭 타이틀이 아니더라도…, 실력! 적어도 실력은 갖춰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실력으로 증명하라, 이 말인가요?”
대놓고 반기를 들었음에도 생각보다 태연한 서진의 모습에 일본인 청년, 요시모토는 저도 모르게 주춤거리고 말았다.
“그, 말하자면 그, 그렇소. 솔직히 말해 실력이라도 충분하다 보기엔 제대로 지휘를 하고 있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연주 실력은 어떨지 몰라도, 아니 설령 연주 실력은 대단하다 하더라도 지휘는 또 다른 문제니까…,”
서진은 이곳에서도 한국에서처럼 지휘 없는 무대를 만들어 보고자 계획했다.
물론 처음부터 다짜고짜 그렇게 할 생각은 아니었다. 일단 서로 익숙해지는 시간이 필요하니까.
처음엔 일단 지휘봉을 잡고 이들을 이끌다가, 점차 지휘 없이 소리를 조화롭게 이끌어내고자 하는 것. 이왕이면 자신이 악장으로서 함께 무대에 서는 것도 좋고.
그래서 단원들을 일방적으로 자신에게 맞추어 단번에 휘어잡아 이끌기보다는, 천천히 탐색 중이었다. 단원 각자의 소리, 장단점 및 특성, 습관이나 연주 버릇 등을 면밀히 살피며 각자의 역량을 최대한 끌어내면서도 조화를 이끌어낼 수 있도록.
비록 예술제까지 시간은 넉넉지 않다면, 그렇다고 가장 기초가 되는 일을 소홀히 할 수 없으니까.
그런데 요시모토인지 뭔지는 그게 퍽 마음에 안 들었나 보다.
“그렇군요. 한데… 지휘자로서 자질을 운운하려면, 그 맥락으로 내가 악장인 그대의 능력을 파악하는 게 먼저겠군요. 그렇겠지요?”
지휘자로서의 역할 중 가장 큰 것 중 하나는, 각각의 단원들의 기량을 최고 수준으로 이끌어내는 것도 있었다. 그것에는 당연히 악장의 역량 역시 포함되었다.
한 마디로 지휘자의 입장에서는 악장 역시 오케스트라의 발전을 위해 연마시켜야 할 대상인 것이다.
“그, 그게….”
“악장의 역할은, 무대 입장 시 제일 늦게 들어와 맨 앞줄에 앉아서 잘난 체하는 게 전부가 아니지요.”
본디 악장은 지휘자를 대신할 수 있을 정도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자리였다.
단순히 보잉을 결정하는 것뿐 아니라, 오케스트라의 연주 스타일 전반에 영향을 미치며 단원들의 호흡을 조율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간혹 솔로 파트나 협연자와의 듀엣 연주가 필요할 시 솔리스트로서의 역할도 수행하는 등 거의 부지휘자라고 봐도 좋을 자리인 것이다.
심지어 빈필 같은 경우에는 원체 지휘자보다 악장의 사인을 중시하는 관습이 배어있어, 지휘자 없이도 리허설이 잘 굴러갈 만큼 악장의 역할이 중대했다.
“잠시 자리 좀 비켜주시지요.”
성큼 다가온 서진의 기세에 요시모토는 얼떨결에 악기를 들고 일어났다.
천재 바이올리니스트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