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 returned as a genius violinist RAW novel - Chapter 172
172화
그 자리에 대신 앉은 서진은 단원들에게 시작하라는 사인을 보냈다. 손에는 어느새 자신의 바이올린을 꺼내든 채였다.
한때 서진이 악장으로서 맡은 적 있었던, 지휘자 없는 지휘.
서진은 그 자리에서 바로 오케와 합을 맞추어 연주해 나갔다.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
단원들은 조금 당황한 눈치였지만, 지휘자가 악장 자리에 앉아있으니 단장 대신 서진 쪽에 신경을 기울이며 최선을 다해 서로의 소리를 들으려 노력했다.
신기하게도 아까 못지않게, 아니 그 이상으로 조화로웠다.
일단 그가 연주하는 바이올린이 내는 소리의 깊이 자체도 말도 안 되는 수준이었지만, 아까 요시모토가 했을 때에 비해 단원들을 리드하는 정도가 차원이 달랐다.
악보는 전혀 다르지만 어쨌든 같은 악기인 2 바이올린뿐 아니라, 다른 모든 파트의 악기들을 표정, 눈빛, 고갯짓 등 작은 사인만으로도 장악해 이끌어간다.
이제는 완전히 체화된 특유의 능력으로, 서진은 단원들의 소리를 적극 이끌어내며 조율했다.
모두가 서진에게 빨려 들어가듯 호흡을 맞춘다. 더없이 완벽한 조화를 이룬 소리들이 어우러지며 천상의 하모니를 노래한다.
곡이 끝나자 모두 악기를 멈춘 채 그대로 굳어 있었다.
지휘자가 없었음에도, 마지막 끝맺음까지 완벽했다.
그 적막 속에서 서진이 입을 열어 요시모토에게 물었다.
“악장으로서, 지금 제가 해 보인 만큼 오케스트라를 이끌 수 있겠습니까?”
“….”
대답이 나올 리 없었다.
“지휘자로서 단원들을 관리하지 않을 수 없겠군요. 내일부터는 나오지 않아도 좋습니다.”
권유의 형식이었지만, 명백한 축객령이었다.
아마 프로 악단이었으면 이 말 대신 ‘당신은 해고입니다.’라는 더 맞았을 터.
“….”
고개를 떨군 요시모토는 정적 속에서 조용히 뒤돌아 나갔다.
누구도 그를 붙잡지 않았다.
* * *
정식으로 학기가 시작되기 전까지 나름의 바쁜 여름을 보내고 있는 서진은, 한편으로는 이자크가 소개해주는 이들도 여럿 만나고 다녔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펄 부인.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어머, 이이가 제 이야기를 했나요?”
“물론이죠. 언제나 아낌없이 지지해 주신다고요.”
인사치레를 겸한 대답에, 어딘지 이자크를 닮은 얼굴이 부인은 인자하게 웃었다.
그녀가 이자크의 음악에 한눈에 반해 열렬히 구혼해 결혼에 골인했다는 사실은 음악계 사람들이라면 웬만하면 다 아는 유명한 이야기였다.
“호호호. 그이도 참… 자자, 어서 들어와요.”
이자크의 집은 생각보다 아담했다. 공연 및 음반 등으로 벌어들이는 그의 수입을 생각해 보면 센트럴 파크가 내려다보이는 맨해튼의 펜트하우스에 살고 있을 줄 알았는데.
“오, 써진!”
“어서 오게나, 서진.”
“오호… 이 청년이 바로?”
이자크의 집에서 열린 홈 파티에는 다비트를 비롯한 이자크와 연이 닿아있는 거장들이 한가득이었다.
서진은 마치 별세계에 떨어진 듯한 느낌에 어디에 먼저 인사를 해야 할지 몰라 당황스러울 지경이었다.
본인 역시 그 거장 중 하나에 속하긴 하지만, 정작 본인은 그에 대한 인식이 별로 없을뿐더러, 설령 스스로 객관화가 된다 한들 연륜이나 경험 면에서 급이 다르니 이런 반응이 나올 수밖에 없긴 했다.
저 다비트조차 여기 있는 이들의 면면에 비하면 아직 라이징 스타급이라 할 수 있으니까.
클래식계의 원로급 거물들.
일단 이자크부터가 거장 중의 거장이라 할 수 있는 존재이니, 그와 인맥으로 연결된 이들 역시 하나같이 내로라하는 음악가들이었다.
“어머, 반가워요! 혹시 절 기억하려나요?”
“…음, 죄송합니다.”
청아하니 맑으면서도 약간 독특한 여성의 목소리.
…누군지 모르겠다. 아는 사람이라면 기억하지 못할 리 없을 텐데, 안타깝게도 얼굴을 봐도 전혀 생각이 안 난다.
“아, 이쪽은 미스 샴. 안 그래도 소개해주려 했는데, 벌써 만났군!”
마침 다비트를 향해 다가오던 이자크가 그녀를 발견하고는 말해주었다.
샴?
…아! 혹시 콩쿨에서….
“기억 못 할 만하죠. 심사위원의 얼굴을 일일이 기억하기엔 다들 정신이 하나도 없을 상황이었으니까요.”
그러고 보니 생각난다. 차이코프스키 콩쿨에서 봤던 얼굴이다.
“올리라고 불러줘요.”
올리는 한서진 군을 소개해준다는 말에 냉큼 달려온 참이었다. 그때 콩쿨에서의 연주가 워낙 인상 깊었기에 개인적으로 꼭 한번 만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콩쿨에 관한 이야기는 거기까지. 그녀는 제가 열심히 민 덕에 한국인 둘이 공동 1등을 할 수 있었느니 등의 주접은 떨지 않기로 했다.
“서진 군도 길버트 샴의 이름을 들어보았지? 둘은 남매지간이라네. 그녀 역시 바이올리니스트지.”
이어진 이자크의 소개에 서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길버트 샴이라 하면 유대계 바이올리니스트로 굉장히 유명한 연주자가 아닌가.
그 역시 줄리어드 출신으로, 이자크와는 자신과 비슷하게 연을 맺게 된 사이였다.
‘이자크의 대타 연주로 단숨에 인지도를 얻었지.’
그때의 나이도 비슷하다. 이자크가 건강 문제로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을 취소하게 된 것을, 당시 18세였던 길버트 샴이 우연히 런던을 여행하던 중 대타 제안을 받고 무대에 서게 된 것이다.
그 무대가 바로 그를 일약 스타로 만들어준 무대였다.
‘그때 연주했던 곡이 아마도 브루흐의 협주곡과 시벨리우스 협주곡이었지.’
“아이참, 이자크. 오라버니 이야기는 하지 말라니까요.”
여기도 현실 남매인지, 아니면 비교되는 게 싫은 건지 그녀가 정색했다.
하지만 바이올리니스트로의 명성은 몰라도, 그녀는 피아노 역시 수준급으로 쳤기에 전체적인 음악 능력은 결코 뒤지지 않았다. 역시 유전자는 어디 가지 않는 법.
“하하, 올리. 미안하네만 나와 샴이 보통 인연인가? 심지어 같은 스승을 사사했는데 어떻게 쏙 빼놓고 이야기하겠는가.”
“흐음, 그건 반만 맞는 이야기 같은데요? 오라버니는 마에스트로 강에게 더 깊은 영향을 받았으니까요.”
무슨 이야기인지 몰라 눈만 껌뻑이는 서진에게 이자크가 설명해 주었다.
길버트 샴과 자신은 도로시 딜런이라는 위대한 바이올리니스트를 같은 스승으로 둔 사이라고.
‘도로시 딜런!’
지금은 고인이 된 그녀는 현존하는 대부분의 거장급 바이올리니스트들을 길러낸 미국 음악계의 대스승이었다. 오랜 세월 예술에 바친 공로로 국가 예술 훈장까지 받을 만큼.
“그리고 나와 달리 샴은 서진 자네와 같은 국적인 한국인 바이올리니스트에게 크게 영감을 받았다고 하네. 미스터 강이라고…,”
도로시보다는 한참 후대의 인물이지만 역시나 미국 사회에서 상당히 유명한 한국인 바이올리니스트가 있으니, 길버트 샴, 사라 정 등 명망 있는 제자들을 길러낸 강훈이라는 존재였다.
“희한하게도 한국에서보다 여기서 더 잘 알려져 있는 듯한데, 한국 이름으로는… 그래 강훈이었지.”
그 역시 미국 클래식계에서 상당히 유명세를 떨친 이였다. 길버트 샴의 두 스승 중 한 명이 바로 그였으니.
“아…!”
서진도 아는 이름이었다.
어린 시절 한국전쟁을 겪은 세대로 서진과는 까마득한 나이 차가 나기에 직접 만나본 적은 한 번도 없지만, 클래식계에 몸담고 있는 이상 모를 수가 없는 존재였으니까.
게다가 그는 얼마 전 서진이 제안을 받았던 평창·대관령 음악제의 초대 예술감독이었다. 송여름의 전전 대에 해당하는.
또한 세종 솔로이츠라는 유명한 악단을 창설한 주역이기도 했다. 클래식 불모지였던 90년대 중반의 한국에서, 한국음악재단의 부탁을 받아 줄리어드의 실력자들을 초대해 야심 차게 만든 악단.
현재도 줄리어드 교수직과 함께 그곳의 예술감독을 맡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고 보니 모두 줄리어드로 이어지는 인맥이네.’
다비트부터 시작해서 하나같이 줄리어드에서 공부했거나, 줄리어드에서 교수직을 맡고 있거나, 전부 ‘줄리어드’라는 단어가 빠지지 않는다.
“…정말이지 거듭 겹쳐있는 관계네요.”
클래식 음악계가 원체 좁은지라, 한 다리 건너면 다 인맥으로 연결되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것도 그 핵심 라인에 속하는 이들에게나 해당하는 이야기였지만, 서진은 당연하게도 거기에 포함되는 존재였다.
“하하, 그렇지. 그럴 수밖에. 서진 자네도 이제 단단히 발목 잡혔으니, 어디 도망가기 글렀네. 알겠나?”
“저야 영광이지요.”
단단히 못 박는 다비트의 말에 서진은 즐겁게 웃었다.
참고로 다비트는 이자크가 줄리어드에서 받은 최초의 제자였다. 수석 입학생이 자격으로 그에게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던 것.
도중에 크로스오버로 빠지는 바람에 음악계에서 욕을 한 바가지로 먹고 있는 그였지만, 그래도 이자크와의 사이는 틀어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흐흠? 어디서 우리 스승님의 성함이 들리는데?”
“츠벤! 오, 왔는가.”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삼삼오오 떠들던 이들이 뒤를 돌았다.
“자네가 부르는데 왔지, 왔어. 에이 참, 대체 누구를 소개하려 하기에…, 어엇!”
서진을 발견한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 어어! 천재 소년, 아니 청년! 미스터 한!”
갑자기 나타나 호들갑을 떠는 남자.
서진은 그를 곧바로 알아보았다.
J. 츠벤. 예전에 메트 오케스트라와 협연할 때 지휘자였던 인물이 아닌가.
“오랜만에 뵙네요, 마에스트로.”
“오오, 드디어 다시 보다니…! 오오!”
평창 올림픽에서 서진이 연주한 달토끼에 충격을 받고, 이어 그와 협연을 경험하며 더더욱 믿지 못할 경험을 한 그는, 그 후로 내내 서진을 다시 보고 싶어 몸이 달아 있었다.
그걸 알고 있던 이자크가 특별히 그를 초대한 것.
츠벤은 현재 장명훈의 뒤를 이어 서울지향을 지휘하고 있었는데, 그 역시 줄리어드에서 강훈을 사사했다. 아까 말한 스승 어쩌고 하는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었다.
점점 복잡해지는 관계에 서진은 머리가 어질어질할 정도였다. 게다가 등장하는 이들 면면은 또 좀 화려한가.
하지만 쟁쟁한 인물들 사이에서도 서진은 기죽지 않았다. 비록 저들에 비해 아직 한참 경험이 부족한 어린 나이라고 하지만, 그거야 앞으로 차차 쌓아가면 될 일이니까.
서진은 새삼스레 이자크에게 무한한 감사의 마음이 들었다.
이 정도의 거장들이면 일 년 내내 일정이 꽉 차 있는 게 기본이다. 어떨 때는 거의 3년 어치 스케줄이 꽉 차 있는 경우도 많았다.
그런 마당에, 아무리 이자크의 파티라도 이렇게 한날한시에 모인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상황인 것이다.
자신에게 소개해주기 위해 이런 엄청난 자리를 마련해 주다니….
하지만 서진이 한 가지 착각하는 게 있었다.
여기 모인 이들은 이자크가 애써 억지로 그러모은 게 아니라, 그가 ‘한서진’이라는 이름을 꺼내기 무섭게 자발적으로 앞다투어 달려왔다는 사실을.
“참, 서진 군이 이끄는 악단이 있다고 들었는데…,”
잠시 생각에 빠진 서진을 향해 츠벤이 입을 열었다.
“…아. 이끈다고 하기엔 무리가 있는 말이지만, 친구들과 함께 키워온 악단이 있긴 합니다.”
“오오. 나 역시 한국의 실내악 악단과 같이 작업한 앨범이 있네! 세종 솔로이츠라고….”
역시, 인맥은 영원하구나. 아까 이름이 나왔던 그의 스승, 강훈이 창립한 악단이 아닌가.
너무 유명한 이름에 서진은 K 오케가 한없이 작아지는 기분이었지만, 그의 관심을 거절하진 않았다. 자신과 친구들의 음악적 발전을 위해서라면 마다할 일이라곤 없었다.
“마침 이렇게 만난 김에 내가 조금 도움을 주어도 될까?”
천재 바이올리니스트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