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 returned as a genius violinist RAW novel - Chapter 175
175화
“….”
직접 실황공연을 듣기는커녕 음질조차 후진 동영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달랐다.
뭔지 모를 것이 마음을 훅 채워오는데….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 난생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묘한 감각과 경험.
남자는 홀린 듯 빠져들어 끝까지 영상을 다 듣고 말았다. 그걸로도 모자라, 기사에 삽입된 짧은 영상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아 너튜브를 켜 검색까지 하고 있었다.
그렇게 막상 들어보니 저 호들갑 가득한 기사 제목들이 절로 이해가 갔다. 단순히 조회수를 끌어올리기 위해 기레기들이 아무렇게나 써 갈긴 내용이 결코 아닌 것이다.
클래식 공연 따위 뭐 볼 게 있다고… 하던 평소의 지론과도 정반대로, 정신을 차려보니 남자는 예매 사이트에 들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부랴부랴 티케팅에 뛰어든 결과는 참담한 패배.
티케팅 전쟁 정도가 아니라 이미 매진이었다.
다급한 마음에 여기저기 커뮤니티를 뒤져보니, 심지어 암표마저 도는 상황이 아닌가.
대체 인기가 어느 정도면….
하긴, 클알못이었던 자신마저 저 조악한 영상 하나에 빠져 순식간에 팬이 되어버리고 말았는데, 일찌감치 팬이었던 이들이 가만히 있었을 리가.
남자는 아쉬운 마음에 한서진이라는 이름으로 검색해 나온 온갖 너튜브 영상들을 뒤져보기 시작했다.
한 시간, 두 시간, 세 시간…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한서진 삼매경은 끝날 줄을 몰랐다.
그렇게 한서진으로부터 시작된 관심은 어느덧 나아가 한국이라는 나라 자체에 대한 호기심으로 발전해 버렸고, 남자는 점차 헤어나올 수 없을 정도로 한류에 빠져버렸다.
* * *
독주회 준비로 바쁜 와중에도 서진은 틈틈이 다른 일들에도 시간을 할애했다.
“서진, 바쁜데 정말 괜찮은가? 공연 끝나고 천천히 둘러봐도 되는데….”
얼마 전 이자크가 언급한 적 있었던 줄리어드 예비학교에 다니고 있다는 한국인 유학생들.
서진은 짬을 내 그들을 보러 발걸음을 옮겼다.
이자크는 못내 미안해했지만 서진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궁금한 마음에 원래는 보다 빨리 일정을 잡으려 했는데, 이런저런 일로 너무 바빠 지금도 이미 충분히 늦어진 바였다.
물론 딱히 만나기로 날을 잡거나 한 건 아니니, 서진이 아무리 늦장을 부려도 아무 상관 없긴 하지만.
“괜찮아요. 마스터 클래스를 여는 것도 아니고, 그냥 잠시 둘러보고 가는 게 전부인걸요.”
틈틈이 오케스트라 지도도 하랴, 공연을 코앞에 두고 찬윤과 리허설도 하랴, 숨 돌릴 틈도 없는 서진이었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짬을 내지 않으면 이대로 학기가 시작해버릴 마당이다. 독주회가 끝나고 곧바로 예술제, 그러고 나면 바로 개강인데, 그때가 되면 더욱 바빠질 터. 그 전에 미리 짬을 내서 가볍게 만나는 자리라도 만들고 싶은 것이다.
‘근데 설마, 정말로 제2의 한서진이니, 한서진 키즈니. 그런 타이틀을 달았던 소년이 등장하는 건 아니겠지…?’
정말로 마주친다면 퍽 민망할 것 같다. 언론에라도 알려진다면 떠들기 좋아하는 기자들이 입방아를 찧느라 바쁠 텐데, 괜히 자라나는 꿈나무 아이에게 부담이나 되는 건 아닌지.
한동안 눈여겨본 적 있는 존재이긴 하지만, 몇 년 전쯤 한 번 만난 이후 딱히 교류가 없어 다시 봐도 얼굴을 기억 못 할 것 같긴 하지만….
“자, 다 왔네. 그럼 심호흡하고.”
“…?”
웬 심호흡?
의문이 들었지만, ‘달칵’하고 문이 열리는 순간, 바로 알았다.
보라. 저 초롱초롱한 눈빛들을.
웬만한 각오 아니고서야 받아내지 못할 만큼 부담스러운 시선들이다.
안에는 옹기종기 많은 아이들이 모여 있었다.
다양한 국적의 소년소녀들. 그들은 하나같이 모차르트라도 영접한 듯한 표정으로 눈을 빛내고 있었다.
“아, 흠흠.”
목을 가다듬은 서진은 일단 인사부터 했다.
자그마치 줄리어드 예비학교에 와 있는 아이들이다. 전생의 자신에 비하면 차원이 다른 실력자들.
이런 아이들에게 제가 무슨 도움이 될까 싶지만…,
“안녕하세요. 한서진입니다.”
와아아아!!!
콘서트장도 아니건만 함성이 거셌다.
“우와, 한서진이야, 한서진!”
“진짜다, 진짜 미스터 한이야!”
“마에스트로 한을 실제로 보게 되다니…!”
각국의 언어로 웅성거림이 터져 나왔다.
서진은 멋쩍은 미소를 숨기며 최대한 자연스럽게 프로다운 미소를 지으려 노력했다. 이런 건 역시 체질이 아닌지 영 어색했지만, 다행히 아이들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오늘은 따로 마스터 클래스를 여는 건 아니지만, 연주자로서의 삶에 대해 궁금한 점이나, 여러분의 연주 인생에 있어 혹여 조언이 필요한 점 등이 있으면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주고받는 시간을 가지고자 합니다.”
짝짝짝!!!
무슨 말만 하면 난리다. 이러다 말끝마다 박수와 함성이 뒤따를 기세였다.
다행히, 빠르게 이성을 되찾은 아이들은 질세라 손을 번쩍 들었다. 딱 봐도 모든 이에게 질문 기회가 돌아갈 만큼의 시간이 안 된다. 그러니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라도 재빨라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십여 명의 손이 번쩍 들린 가운데, 서진은 가장 먼저 들어 올린 누군가를 지목했다.
“아, 흠흠.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자리에서 일어난 소년은 마에스트로와 같은 ‘한국 출신’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가볍게 자신을 소개했다.
‘…음?’
어쩐지 눈에 익는데?
어? 그러고 보니 오케스트라에서도 본 친구였다.
서진이 지도하고 있는 줄리어드 학생들로 구성된 오케스트라는, 딱 학부생만 존재하는 게 아니었다. 예술제 참가를 위해 따로 만든 오케스트라인 만큼, 예비학교, 여름 캠프 등에 다니는 학생들도 포함해 다양한 이들이 소속되어 있는 것이었다.
“제, 제가 여쭤보고 싶은 것은…,”
“잠시만요, 제가 이름을 잘 못 들어서. 다시 한 번 말해 주시겠어요?”
작은 목소리로 웅얼웅얼 밝히긴 했는데, 거리가 멀어서 제대로 못 들었다.
“아, 죄송합니다. 저, 저는 민이준이라고 합니다.”
…아.
진짜로 그 아이였다.
남자들은 특히 성장기를 겪고 나면 얼굴이 확 변하는 탓인지 오케스트라에서는 알아보지 못했는데, 이름을 들으니 확실했다.
한때 ‘제2의 한서진’이라 불리던 아이.
그렇게 불린 건 이 아이 한 명뿐이었지만, 그 후로 소위 ‘한서진 키즈’라고 이름 붙여진, 한서진처럼 되기를 꿈꾸는 수많은 영재들이 줄줄이 나왔던 걸로 기억한다.
그런 아이들이 워낙 많았던 만큼 한 명쯤은 마주칠 수도 있다 생각했는데….
묘한 감회에 서진이 다시 한 번 소년을 바라보았다. 다행히 여기까지의 외길을 꿋꿋이 걸어온 모양이었다.
‘제2의 누군가라는 부담감에 자칫 방황했을까 걱정했는데….’
“그래요, 이준 군. 무엇이 궁금한가요?”
서진이 다정히 미소지으며 답했다.
“아, 예. 그러니까. 혹시 앞으로의 행보에 대해 여쭤봐도 될지…. 그, 호, 혹시 지휘자로 전향할 생각도 있으신 건지….”
아….
서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모습을 봐서 그런지, 서진이 아예 지휘 쪽으로 넘어가 버리는 건 아닌지 궁금한 모양이었다. 유명 지휘자들 중 제법 많은 이들이 프로 연주자 출신인 만큼 충분히 그럴 만한 일이니까.
“아뇨. 지휘에도 관심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분야를 바꿀 생각은 없습니다. 앞으로도 전 바이올리니스트로서의 이 모습을 언제나 가장 우선시할 예정입니다.”
그 대답에 이준의 표정에 화색이 돌았다. 뭐가 그리 좋은지 헤어진 여자친구가 돌아오기라도 한 듯한 낯이었다.
“하지만 지휘 자체는 계속할 생각입니다. 정확히는 지휘자로서 활동이라기보다는…. 지금 오케스트라와 하고 있는 것과 비슷한 일이겠죠. 이번 예술제에 참가하는 학생들이라면 이미 알겠지만….”
다시 생각해도 하면 할수록 매력 있는 오케스트라 활동이다. 그 안에서 함께 연주하는 것도, 지금처럼 오케스트라를 이끄는 것도.
특히 단원으로서도, 지휘자로서도 아닌, 지휘 역할을 겸한 악장으로서의 활동은 그 무엇보다 매력적이었다.
비록 그 시작은 지휘에 대한 관심이었지만, 막상 해 보니 단상에서 지휘봉만 휘두르는 것보다는 함께 소리를 내며 호흡을 맞추는 게 훨씬 즐거운 것이다.
그래서 서진은 요즘 들어 작곡에서도 ‘지휘를 없앤 오케스트라’라는 포인트를 적극 반영하고 있었다.
“혹시 더 궁금하신 건…?”
서진의 자세한 부연 설명에 이준은 무척이나 만족한 듯한 표정이면서도, 더 질문하고 싶어 안절부절못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옆에서 단짝으로 보이는 여자애가 적당히 좀 하라며 옆구리를 찌르는 게 보였다. 한국어라 입 모양이 뻔히 보였다.
여자애 역시 낯이 익은 게, 한국인 출신으로 같이 오케스트라에 들어온 모양이었다.
‘저 애들이 나란히 늘 평가에서 1위를 놓치지 않는다네. 둘 다 한예종 영재원 출신이지. 자네 후배야.’
이자크가 작게 속삭이는 말에 서진은 흐뭇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자신과 지연을 보는 듯한 기분도 들어 입가에 미소가 절로 걸렸다.
그러고 보니 문득 생각나는 게 있었다. 언젠가 꼭 장학재단을 만들고 싶었는데….
아직 혼자의 힘으로 재단을 만드는 정도까진 무리인지라 장학 기금에 꾸준히 기부하는 정도만 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돈도 인지도도 제법 있으니 드디어 실천에 옮길 수 있을 것 같다.
‘부디 자라나는 꿈나무 아이들에게 보탬이 되었으면.’
* * *
“우와, 여기가 우리 아들 새집이구나!”
드디어 뉴욕에 도착한 선희는 아들이 구했다는 집을 보고는 싱글벙글했다.
한국에서의 살림을 다 정리하고 오기까지 상당히 준비해야 할 일이 많았기에 이제야 넘어오게 되었는데, 덕분에 서진이 먼저 기반을 다잡아 두어 바로 편히 지낼 수 있게 되었다.
미국으로 오게 된 탓에 간호사 자격증은 따놓기만 하고 실습 외에는 한 번도 일해본 적이 없어 아쉽게 되었지만, 그녀에게는 아들의 뒷바라지가 더 중요했다. 애초에 간호 쪽 공부를 하려 했던 것도 서진을 챙겨주기 위해서였으니까.
“마음에 드세요?”
“당연하지. 집이 정말 예쁘다…!”
“꾸미느라 고생 좀 했어요.”
“흐음…? 근데 아무리 봐도 아들 솜씨가 아닌데?”
“…하핫. 실은 지연이가 많이 도와줬어요.”
정확히는 지연이 직접 해 준 건 아니고, 도착하기 전에 비서를 시켜 미리 준비해 놓도록 해 준 것이었지만. 아마 저 혼자 했다면… 아이키아(IKEA)나 가서 아무 걸로나 채우지 않았을까 싶다.
“그래도 집은 제가 얻은 거예요. 하하.”
“그래그래. 우리 아들 대단하지. 아무튼 지연이도 잘 지내고?”
“그렇…겠죠? 요즘 너무 바빠서 한동안 연락을 못 해봤네요. 지연이도 바쁜 모양이던데….”
“그렇구나. 근데 지연이는 무슨 일정으로 온 거래니?”
…뭐였더라. 물어본다는 게, 깜빡했다.
이제라도 물어보려고 핸드폰을 꺼내는데, 마침 카톡이 와 있었다.
-나 담주에 솔리스트로 무대 서는데 안 바쁘면 보러오든가. 링컨 센터야.
…응? 다음 주? 링컨 센터?
왜 어디서 많이 들어본 스케쥴 같지? 다음 주의 링컨 센터면 예술제랑 딱 겹치는데?
설마 지연의 일정이라는 게 이거였나?
천재 바이올리니스트로 돌아왔다